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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KAWARA JUL.23, 2008 - AUG.24, 2008    doART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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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의문이지만,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문장이 있다. 특히 반데카르트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에서 그 문장은 종종 한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온 카와라(On Kawara)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시간과 인간 존재에 대해 천착한다는 점에서 로만 오팔카(Roman Opalka)와 비교하였지만, 실은 로만 오팔카보다 더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로만 오팔카는 회화적 형태에 대한 탐구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로만 오팔카의 페인팅 작품들은 숫자들의 끝없는 나열들이 극도로 절제된 색채와 형태로, 현대 미니멀리즘 회화의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 카와라는 이러한 회화적 전통과는 무관하거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다. 이 점에서 온 카와라는 현대 개념미술에 있어서 특별한 작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면서 자신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범위를 넘어,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그 존재들의 증명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시간 앞에 유한한 우리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시간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온 카와라에게 있어서 그 싸움의 방식은 우리가 있었던 한 순간의 시간을 그대로 옮겨놓는 방식이 된다.

사간동 두아트서울(doART Seoul)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 온 카와라가 처음 소개되는 전시이면서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 개념미술이 어떤 것이며, 그 난해함 너머로 우리 현대인들의 존재 본질을 탐구하는 현대 예술의 한 극점과 만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두아트서울의 전시 안내문에서 인용한 것으로, 현재 두아트서울에서 전시되는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I WENT
1968년 6월 1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이동한 경로를 지도 위에 상세히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MET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이름을 매일 매일 기록한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
1968년 5월 10일부터 1979년 9월 17일까지 작가가 매일 아침 일어난 시각을 기입한 엽서를 두 명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를 모은 작품. 1년이 한 권의 책을 이루어, 총 12권으로 구성된다.
I GOT UP은 엽서에 본인의 메시지를 직접 쓰지 않고 고인으로 찍어 보내는 데 의의가 있는데, 이는 최대한 개인적인 궤적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보여진다. 이것은 작가가 다른 작품들의 모든 글을 타이핑으로 입력하며, 또한 일본을 떠난 이후, 세계 공통어라 일컬어지는 ‘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ONE MILLION YEARS
1969년에 제작되어 이전 백만년(998031 BC)을 타이핑한 작품과 1993년 이후 백만년(1001980 AD)의 날을 타이핑한 작품. 1969년에 제작된 백만년의 과거편은 “그동안 살다가 죽은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되며, 1981년 제작된 백만년의 미래편은 “마지막 생존자를 위하여”라는 헌사로 시작된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 설정된 12년이 무엇을 뜻하거나 지시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PURE CONSCIOUSNESS
1998년 이후 계속 진행되어오는 프로젝트로, 1997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 7개의 날짜그림을 세계 각지의 유치원에 설치한 후 어린이들의 일상을 작품과 함께 촬영하는 조그마한 책자로 만들어낸다. 현재까지 총 17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으며 그 도시들은 Sydney, Reykjavik, Abidjan, Shanghai, Leticia, Sisli-Istanbul, Avignon, Lund, Madagascar, Bad Blankenburg, London, Thimphu, Bequia, Toronto, Yusuhara Cho, Inari, New York이다.


8월 24일까지 하는 이번 전시를 놓치지 말기를 바라며, 온 카와라의 한국 전시를 진행한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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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공지]
- 중간에 인용된 글의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 맨 위의 이미지는 두아트서울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왔으며, 저작권은 '두아트서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 두 이미지는 두아트서울에서 발간한 ‘온 카와라 한국 전시 도록’을 제가 직접 찍어 올린 것입니다.
- 온 카와라 전시 작품은 두아트서울 홈페이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doartseoul.com/en/exhibitions/introduction.asp?ExhibitionsP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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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살아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심장이 뛰고 내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이성을 만나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을 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일종의 가상이거나 허위일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 그리고 그 인생을 둘러싼 모든 사건들이 시뮬라크르일 지도, 나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누군가의 눈에 비친, 누군가의 생각과 언어에 의해 형성된 어떤 픽션일 지도 모른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내 것이 아닌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늘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긋나고 내가 한 말은 오해되고 내 글은 무시되고, 내 사랑이 번번히 막다른 골목의 시궁창에 빠지게 될 지라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존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자살하더라도 나라는 가상의 존재는 세상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의 한 문장 처럼, 내가 죽고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때야 비로소 무로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가상이든, 허위이든, 살아있는 자는 그 살아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로만 오팔카의 작업이 날 감동시키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그의 행위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서 숫자를 적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탐구는 곧바로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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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오팔카는 숫자를 캔버스에 적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의 몇몇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사간동 학고재에서 전시되기도 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숫자를 적는 행위' 자체로 주목을 받았지만, 실은 단조로운 색채와 병렬적으로 이어져 있는 숫자들의 나열이 가지는 조형적 아름다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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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일련의 사진들은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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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탐구는 현대 미술의 강박증과도 같아 보인다. 하지만 거대해진 세계 앞에서 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 지하철 속에서 이 무수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개인주의'가 유행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익명성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긴 개인일 뿐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결국 우리는 실패할 것이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현대의 비관주의는 자신의 개별적이고 독창적인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즉물적인 방식을 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그 속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주장, 일상이 드러나지 않고 객관적인 소재를 택해 '그저 (살아)있었음'을 표현하도록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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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온 카와라는 로만 오팔카와 비슷한 지점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더 극단적이고 파괴적이다. 그는 날짜를 적는다. 하나의 캔버스에 0시부터 24시까지, 꼬박 하루동안 하나의 날짜 작품을 완성시킨다. 완성시키지 못할 때는 이를 파기한다. 그리고 그 날의 신문을 아래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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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재미있는 것은 매일 엽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엽서의 내용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I GOT UP AT 11.10 A.M'

로만 오팔카가 자신의 (시간 위의) 삶을 캔버스와 사진 속으로 넣는다면, 그래서 그 순간만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면, 온 카와라는 일정 시간 동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하듯,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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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제한된 작업 스타일은 '위태위태한 현대인들의 존재 상실의 위기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은 우리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개성이나 독창성 따위는 날조된 것에 가깝다. 어쩌면 라크스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 패턴은 우리의 물적 토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실제 우리와는 무관한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그렇다면 과연 나란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혹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맞부딪혀야 할 상대는 시간(Tim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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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Million Years  
On Kawara, 1999
2 volumes, each 2.012 pgs., leatherbound  
(EDITION/SET: 500 num & 60 num. & sign.)
h: 14.5 x w: 10.5 cm / h: 5.7 x w: 4.1 in  
http://www.artnet.com/artwork/424415142/424301160/one-million-yea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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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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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 Kim: On-Air
로댕갤러리


사진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사진에 대한 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가 예술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순간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

어느 화창한 봄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예술에 대한 사랑, 또는 호기심을 데리고 찾아간 로댕갤러리 안에서 나는 (현대)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바의 어느 극점을 발견하였다. 김아타의 이전 작업들, 뮤지엄 프로젝트나 해체 시리즈, 그 외 인물 사진 시리즈를 보았지만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분명 그 때도 그의 작업들은 비평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사진 속에서 그의 카메라가 가진 즉물적이며 파괴적인 속성이 싫었다. 나는 좀더 우아한 방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들은 피사체를 즉물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아픈 사진들이었고 필름에 옮겨진 피사체나 그 피사체를 바라보는 관객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오직 사진만 존재했고 사진 속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박제된 동물처럼, 혹은 어떤 인위적 목적에 의해 조장되어진 사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카메라가 가지는 폭력적 속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로댕갤러리에서 본 그의 최근 작업들은 놀라웠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의 이전 작업들과 온-에어 시리즈와의 연관관계를 선명하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에 대한 내 반감과 온-에어 시리즈에 대한 감탄은 선명한 금을 그으며 내 안에서 서로 대비되었다.

그리고 로댕갤러리의 전시는 끝났고 이 글은 어떻게든 정리해야만 하는 내 습성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지, 김아타 사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나 예리한 비평적 접근은 아니다. 도리어 찬사에 가깝다. 정말 온에어 시리즈는 대단했다. 시간과 운동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이나 조망이 카메라라는 매체를 통해 아주 탁월하고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찬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철학이 운동을 부정하고 정지만을 추구했던 것은 운동은 시간의 축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은 끝내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어떤 종말, 어떤 불안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삶도 그렇다. 플라톤이 영원한 세계를 이야기하였을 때, 그것은 우리 삶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어떤 불안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추동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리스 예술과 철학이 우울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아타의 온-에어 속에서 시간과 운동은 매력적인 소재이면서 우리의 삶,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본질적 구성에 대한 어떤 통찰을 전해주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운동을 넘어서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인 일종의 멸망이고 어떤 폐허이며, 보는 이들에게 무한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회화가 추구하는 평면성이 시간을 무시하고 공간성만을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면, 김아타의 카메라는 시간을 받아들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어떤 공간성을 추구하고 그것일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올해 상반기 보았던 여러 전시들 중에서 최고의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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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인생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롤러코스트. 무시할 수 없는 공포와 처절한 쓸쓸함과 슬픈 느낌으로 자욱한 길거리. 무수한 사람들로 빼곡하지만, 정작 손 잡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모호함 속. 결국 나 혼자 걸어가는 공포의 계곡길. (http://me2day.net/intempus)

*    *  

토요일 아침, 흐릿하게 시작한다. 흐릿하게 시간을 흘러보낸다. 며칠 너무 정신 없었다. 며칠 너무 슬펐다. 며칠. 며칠. 며칠. 하긴 세상을 결정하는 건 단 1초다. 1초에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라갈 수도, 복원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싫다. 공간만 존재하는 곳. 그 곳이 있다면 이데아의 세계일 것이다. 그리스 고전철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성을 잃어버리고 공간을 향한다. 왜냐면 그 곳엔 어떠한 감정의 흔들림도, 슬픔도, 쓸쓸함도, 고독도, 오해도, 아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아픔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 베르그송은 엘랑 비딸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가져다주는 약동하는 생의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아픔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가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멍해지거나 도리어 정신이 맑아지는 때가 있다. 결국은 내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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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TAG 공간, 시간

Lucy and Her Time
최재은 - 루시의 시간
2007. 9. 21 ~ 11. 18
로댕갤러리


국내 대부분의 미술 잡지에서 이번 전시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만 보자면, 높은 평가와 호응을 얻은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비평적 관점에서의 접근일 뿐, 일반 대중이 보고 공감하고 호응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전시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모호하고 추상적인 작품들 속에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끌어내기란 다소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Lucy라는 이름은 1974년에 발견된 화석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25세 정도의 여성에, 키는 약 107cm, 몸무게는 28kg, 약 3백 20만년 전에 살았던 원시 인류의 화석이다. 특히 루시의 무릎뼈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였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으며, 인류의 기원보다 앞당기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Lucy는 2007년 서울의 어느 갤러리에까지 방문하게 된다. Lucy에서 영감을 얻은 최재은은 생명의 시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저 우주에서, 혹은 지구에서 시작한 한 생명이 어떻게 성장(진화,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는가를 신비롭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시간’은 이번 전시 작품의 핵심적인 테마이지만, 작품은 시간을 탐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시간 속의 생명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각 작품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거대한 배경이 되면서, 작품들 속에 내재한 은유와 상징을 자극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희로애락’에서, 부토 춤의 대가 우시오 아마가추의 몸짓은 시간 속에서의 생명체가 어떤 변화를 겪어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자신self’이라는 작품은 구체적인 상태로 있는 이전, 우주 속에서 순수한 물질 형태로만 존재하고 있었던,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상태의 ‘자신Self’에 대한 표현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은 일련의 인과관계에 의해 전시되어 있었으며, 그리고 맨 마지막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Lucy’였다.

이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주, 생명, 지구, 역사 이전의 시대와 역사 이후의 시대, 삶, 자신 등 그 소재와 주제가 광범하면서 이를 ‘생명’이라는 일관된 스토리 안으로 엮어내는 작가의 재능이었다.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전시였지만, 일상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나에게 최재은의 작업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느 새 평온한 일상이란 우리가 가지기 힘든 어떤 종류가 되어버렸고 태어남(탄생)이란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며 삶을 증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인 대부분은 전자에 속하기 보다는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최재은의 작품들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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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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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로댕갤러리   2007. 5. 18 - 8. 19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는 ‘시간의 배’에 승선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것은 몇 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사상의 영역에서 시간과 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진리는 시간을 떠나 영원성에 속해 있는 것이며 변하지(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플라톤은 한시도 이데아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고대를 지나 중세는 전지전능한 신을 내세웠고 이는 근대 초까지 계속 되었다.

시간과 운동은 하나의 짝이다. 이 둘은 사상의 영역에서처럼, 예술의 영역에서도 같이 등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를 담당한다. 레베카 호른의 작업들은 시간과 운동 속에서 이루어진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없다. 모두 전동 모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심지어 페인팅까지도 어떤 운동의 정지된 한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탐구가 필름에까지 옮겨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작업들은 전동모터에 기댄 깃털, 조가비, 물, 물감, 철사 등이 어떻게 시적 서정성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 예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감수성의 한 예를 증명하고 있다.

확실히 보기 힘든 전시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현대 예술이 어느 단계까지 진화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다. 또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예술이 보여주는 시적 서정성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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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술 6월호에 실린 레베카 호른 전에 대한 진휘연 교수(sadi)의 리뷰 글에서 옮긴다.

미술사적 견지에서 본다면 호른은 1970년대 초, 신체아트, 퍼포먼스, 영화라는 새로운 태도와 매체를 통합한 작가로 평가될 수 있고, 실제 시간과 실제 공간 안에서 작품 형성과 수용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개념미술의 계보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구절 하나 더.

작가는 일찍이 파이버글래스(유리섬유)와 폴리에스터를 다루면서 폐에 심각한 질환을 얻게 된다. '아무도 내게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라는 원망 섞인 회고와 함께, 그런 유독성 소배를 다루던 여성 작가들이 모두 암을 얻게 되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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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4점
이진경 지음/푸른숲


오래 전부터 관심이 가던 책이었다. 그러나 사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실망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강서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빌려서 저녁에 읽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실망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책에 언급된 미술에 대한 설명은 미술과는 관련없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틀린 단어도 있으며 틀린 설명도 있다.

가령 늑골 궁륭(ribbed vault)를 flying buttress(공중부벽)로 표기하였지만, 이 둘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고딕 성당의 수직성(verticality)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어 언급하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왜 고딕 성당이 수직성을 강조하는가에 대해선. 그런데 이 수직성과 근대적 시.공간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개념은 시계의 발명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깐 42쪽부터 설명되는 부분은 도리어 근대 과학에 대한 설명이 있는 89쪽 이후 부분을 먼저 설명하고 난 다음 그 다음에 나와야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 과학을 포함한 근대의 지식 체계가 고대 희랍이나 중세의 그것과 어떻게 틀린가를 서술하는 것이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을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에게나 저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설명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근대인들이 시간,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의미에서 새롭고 혁신적인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흐와 세잔의 세계는 반 근대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세계이며 이는 원근법의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서로 반대되는 것을 추구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잔의 입체감은 근대 회화의 입체감과는 전혀 틀린 종류의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저자는 폴 세잔과 반 고흐의 그림을 두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설명도 엉성할 뿐더러 이것이 저자가 설명하는 근대적 시.공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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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처음 부분은 정독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성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 공간에 대한 연구 방법들이라고 언급해놓은 걸 보면선 한숨이 나왔다.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한 나머지, 나는 이 정도로 공부했어요라고 자랑하고픈 마음에 채 정리되지 않은 노트를 대중에게 공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노트만이라도 확실하게 하면 좋겠는데, 이를 엉성하게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이라는 제목까지 붙여놓고 군데군데 틀린 설명과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에선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좀 야박한 서평일 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에 관심 많은 이로서 이 책은 너무 엉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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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