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6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지음), 김용재(옮김), 봄날의책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몇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신한테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동물원에 가보면 짐승들은 더욱 짐승다웠어, 긴 몸통을 지닌 기린의 고독은 슬픈 걸리버의 고독과 유사했고, 동물 묘지의 묘석에서는 푸들 강아지가 괴로워서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어. 콜리제우 극장의 야외 통로 냄새가 나는 동물원은 노처녀 체육 선생 같은 타조와, 엄지발가락 건막류로 절뚝거리는 펭귄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코카투 같은 이상한 새들로 가득 찬 새장 같았지. 게으르고 비대한 하마가 수조에서 느릿느릿 움직였고, 코브라는 부드러운 나선형 똥 무더기처..

일본산고, 박경리

일본산고日本散考 박경리(지음), 마로니에북스 어수선하다.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만 한국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촛불을 들고 탄핵을 지지했다고 해서 근본이 바뀌진 않는다), 또한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져 온 진보와 퇴보의 순환 속에서 지금은 퇴보의 순간이며, 그것을 막기 위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람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그랬다. 바진의 에 아우슈비츠가 날조된 거짓이라고 믿는 서독 청년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지금 한국이 똑같은 꼴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쩌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때문일 지도 모른다. 가짜 뉴스의 난무는 진짜 정보(진실)마저 사라지게 하며 가짜 뉴스를 믿는 사..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

근대 조선과 일본 조경달(지음), 최덕수(옮김), 열린책들 은 전설이 되었다. (149쪽) 정조 이후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지 못한 듯 싶다. 이후는 세도정치 시기였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해봤자 가슴 아픈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으니(그야말로 조선 왕조가 가장 무능했던 시기, 어쩌면 임진왜란 시기보다 더 심했을 지도), 그냥 역사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수십 년 전 버전이니, 지금 역사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가끔 한국도 일본처럼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상황은 동일했을 듯 싶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유교적 민본주의, 즉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정치문화였다. (16쪽) 조선의 성과이면서 한계..

영웅

영웅 윤제균 감독, 정성화, 김고은 주연, 2022년 12월 개봉 뮤지컬을 거의 보지 않는다. 실은 좋아하지 않는다. 뮤지컬 음악이 좋다고는 하나, 따라 부르기도 쉽지 않고 일반 가요나 팝만큼 대중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고전 오페라처럼 대단한 음악성을 가진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아서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들과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요즘 내 문화 생활은 몇 달에 한 번 전시 보러가는 경우가 전부라, 뭐라 말하기 부끄럽기도 하다. 아들과 함께 을 보았다. 악극이라는 사실은 영화 첫 시작에서야 알았다. 배우들의 연기나 노래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만 영화라는 점이 다소 아쉬웠을 뿐. 뮤지컬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영화를 조금 지루했고 어딘가 다소 과잉된 듯한 느낌..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지음), 휴머니스트 에드벌룬이 착륙한 뒤의 긴자(銀座) 하늘에는 신의 사려에 의하여 별도 반짝이련만, 이미 이 '카인의 말예(末裔)'는 별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 이상, , 1936년 1. 결국 예상했던 바대로 흘러가 끝나는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볼 땐 자료집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개개인의 인물들이 가진 스토리는 비장하며 고통스럽거나 치욕스러운 것들이다. 어떤 이는 지주집 자제로, 일본 식민지의 귀족의 자제로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을 가기도 하였으나, 어떤 이는 가난한 배경을 극복하고 가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제국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반일 운동으로 옥사하기도 하였으나, 이떤 이는 총독부 관료로, 해방 후 정부 관료나 판검사로 그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마사 퀘스트, 도리스 레싱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지음, , 나영균 옮김, 민음사, 1981년 초판 마사 퀘스트 -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민음사 1981년도에 출판된 책이라, 노랗게 변한 책만 펼치면 종이가 세월 먹는 향이 코 끝에 닿는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게 책의 뒷 표지에는 레싱의 옆얼굴 사진이 크게 인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의 세 번째 권. 오래 전에 번역된 소설들이 최근 번역되는 소설들, 가령 파올로 코엘류의 작품들이나 같은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작은 꽤 흥미진진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가령 이런 문장들. 그러는 동안에도 마사는 불행한 사춘기의 고통을 맛보며 나무밑 긴 풀밭에 누워서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