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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소설을 읽는 내내, 루시디가 추천하는 몇 권의 책 안에 들 정도는 아닌데 하는 생각하지만, 다 읽고 난 다음 그가 왜 이 소설을 왜 추천했는지 알게 된다. 


몇몇 이들은 이 소설을 영국의 아동법 등의 여러 법률에 근거한 법과 종교의 문제로 해석하지만, 그건 잘못된 해석이다. 판사가 나오고 소설의 많은 장면들이 법정이거나 법과 관계된 사람들로, 혹은 종교와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이를 법과 종교의 문제, 그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모든 이들이 탁월한 소설 비평가가 될 것이다. 


결국 읽는 이에 따라 소설에 대한 해석은 달리 되어,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되거나 비상식적으로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나에게 이 소설은 그간 읽어왔던 소설들 중 최고는 아니었지만, 살만 루시디에게 이 책은 최고의 소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살만 루시디에게는.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피오나와 잭과의 관계. 피오나와 애덤의 관계. 이 두 관계는 서로 만나지 않지만, 이 소설의 큰 두 축이다. 하나는 성관계가 없는 중년의 판사와 교수 부부 이야기이며, 하나는 신앙으로 인해 수혈을 거부하는 한 소년과 수혈 집행 명령을 내리는 판사 이야기다. 두 이야기는 관계 없는 듯 하지만, 하나의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그 환경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영향을 받고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궁극적으로 어떤 자유를 가지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소설은 우아한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속에는 의외로 심각한 주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살만 루시디는 이걸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가에 대해 이미 경험했다. 집을 나간 잭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피오나가 다시 잭을 받아들이게 되듯, 애덤은 수혈을 받게 한 피오나의 결정에 대해 찬사를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로 수혈을 거부한다. 이는 수혈 거부에 대한 법적인 기준에 질문이 아니다. 결국 '이것 아니면 저것'(키아케고르)이며, 우리가 종국에는 어떤 행동과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내외적으로 무수한 갈등과 고민, 방황을 하지만,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아마 살먼 루시디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수한 이슬람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이며, 자신의 무모한 신앙으로 지하드를 감행하는 이슬람의 젊은이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서방에서 태어났건 동방에서 태어났건 상관없이, 결국에는 그들의 조상이 믿었고 그들 가족이 지키고 있는 그 신앙을 따라, 그 자신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과 자유의지로 다시 이슬람 근본주의를 향하는, 일부는 지하드를 벌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이었던 셈이다. 아마 루시디는 이 소설 속에서 피오나가 애덤에게 수혈을 명령하는 판결문을 읽으면서 울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판결문은 동시에 애덤이 결국 수혈을 거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법은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고 결국 우리가 기대게 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일 뿐이다. 그것이 이해가능한 것이든 이해불가능한 것이든. 소설은 결국 우리의 무수한 시도들은 애초에 예정되었던 어떤 행동에 대한 변명만 만들어줄 뿐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꽤 비극적이며 소설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온다. 피오나와 잭은 같은 집에 사는 부부이고, 애덤은 예정된 대로 수혈을 거부한 채 죽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은 독자들은 소설을 덮고 무수한 상념에 빠질 것이지만, 그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고 해서 우리가 탁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이며, 우리의 자유 의지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고민하기 전에, 조언을 듣기 전에 우리는 이미 이것, 아니면 저것을 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이번 처음이었다. 매큐언의 <속죄>를 영어로 읽다가 잠시 쉬고 있는 터라(아직도 영어 소설을 읽어내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칠드런 액트>가 처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번역이라서 그런가. 번역된 영어권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 다들 비슷해보이니 말이다(그러니 영어로 읽어야 된다). 


끝으로 조금 길긴 하지만, 피오나가 애덤의 강제 수혈 집행을 명하는 판결문 일부를 옮긴다.


A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에 근접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는 사실은 그 믿음이 얼마나 심오한지 증명합니다. 또한 그의 부모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을 신앙을 위해 희생시킬 각오를 한다는 사실은 여호와의 증인이 고수하는 교리의 힘을 보여줍니다. (...) 

바로 이 힘때문에 저는 멈춰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A는 17세가 되도록 종교적, 철학적 사고라는 격변하는 영역에서 다른 표본을 접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독교 종파는 신자들 간의 열린 논쟁이나 반대의견을 장려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회중의 신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양'이라 부른다는데요. 적절한 명칭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저는 A의 정신, 견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는 아동기 내내 강력한 하나의 세계관에 단색으로, 중단없이 노출된 채 살아왔고, 그런 배경이 삶의 조건을 좌우하지 않았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스럽고 불필요한 죽음을 감수하는 것. 그리하여 신앙을 위해 순교자가 되는 것이 A의 복지를 도모하는 길은 아닐 것입니다. (... ...) A는 그의 종교로부터, 그리고 자기자신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합니다. 

- 167쪽에 169쪽 



Iwan McEwan(1948 ~ )



칠드런 액트 - 8점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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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La Pesanteur et La Grace 

시몬 베유 Simone Weil(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신은 오직 부재不在의 형태로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 

- 183쪽 




나이에 따라 읽는 책, 읽히는 책은 달라진다. 새삼스럽게 지루하던 고전이 재미있어질 수 있고 웃고 열광하던 대중 소설이 식상해질 수도 있다. 이건 책의 탓이 아니다. 나이의 신비일 뿐이다. 


성당을 다닌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렇다고 미사에 쓰이는 모든 기도를 외우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시몬느 베유(1909-1943)의 마음을 알 것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세계2차대전, 그야말로 전쟁통에 쓰여진 짧은 아포리즘 모음집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중력’ 앞에서 신을 향해 상승하려는 신앙의 은총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종, 자주 기독교적 테마가 극적인 불행,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속에서의 믿음, 신앙의 확인, 은총과 기적, 마치 그리스 고전비극의 한 장면들처럼 극적인 비애감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렇기 때문일 테고, 최선을 다해 보이지 않는 가치를 지켜 살아가는 선량한 우리-신앙을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종교나 신앙을 거부하거나 싫어하는-들이 살아가게 되는 삶의 서사구조일 탓이다.


책은 기독교적 테마로 가득하지만, 비극적인 상황,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또는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신, 보이지 않는 질서, 저 영원한 침묵을 지키는 우주 그 자체에 의지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본성을 비애조로 노래한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며 영원하다. 매순간 우리의 존재는 곧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다. 그러나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뿐이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곧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는 신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겠다고 동의할 때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의 존재는 오로지 이와 같은 신의 기다림과 그리고 존재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동의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존재를 부여한 신은 우리들 곁에서 영원히 그 존재를 얻으려 애걸한다. 우리에게 주고 나서 바로 얻으려고 애걸하는 것이다. 

- 58쪽 



 



13살 때의 시몬느 베유




* 책에서 몇 개의 문장을 더 인용한다. 



인간에게 애원하기,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 체계를 타인의 정신에 억지로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반대로 신에게 애원하는 것은 신의 가치를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가치들을 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며, 내 안의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47쪽) 



두통, 때로 통증을 우주를 향해 던져 버리면 조금 줄어든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주가 변질된다. 통증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면 두통은 더욱 심해지지만, 나의 내부에는 고통 받지 않는 어떤 것이 있어서 변질되지 않은 우주와의 접촉을 잃지 않는다. 정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할 것. 무엇보다도 모든 고통들을 이와 같이 다룰 것. 고통이 사물에 다가가지 못하게 할 것. (18쪽)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빈 자리를 견뎌 내는 것.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과 같은 곳에 있다. (26쪽) 





중력과 은총 - 10점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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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 - 10점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폴 장 툴레가 좋아하던 저녁 시간이다. 이맘때면 지평선이 흐릿해진다.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 액체성의 침묵으로 가득 찬 지평선 … … 시인이 마음 속에서 삶을 증류하여 은밀한 비밀, 향기롭지만 독을 간직한 비밀을 추출해내던 시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팔과 입을 가진 사람들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고 있다. 큰 길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기저기 불빛이 비친다. 시인은 대리석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이 밤이, 마치 한 송이 백합처럼,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 11쪽




솔직히 이 소설을 추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라면, 베르나노스는 한 번쯤 읽어야 할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은 깊고 우아하며, 그러면서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도 그 고통 속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서사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의 굴레, 신의 존재, 자신의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그로 인한 환각과 맹목, 죽어가는 시간과 자신의 영혼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지평선이 흐릿해진 저녁 시간에서 시작해 아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난다(어쩌면 아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이야기는 내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마치 우리들의 현대적 삶처럼).


“아! 아! … …” 울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때처럼, 매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리 짧은 밤이라 해도,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셀러멘은 어느새 입술 연지를 발랐고, 주정뱅이들은 술에서 깨어났다. 밤의 향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아직 식지 않은 채 하얀 시트 속으로 숨어든다. … …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 …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곳에 유일한 정의(正義)가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 셀러멘: 몰리에르의 극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다. 남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여자를 말한다: 옮긴이)
- 274쪽




프랑스와 모리악은 베르나노스에 비하면 너무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단순한 표면 밑의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며, 그 고뇌하는 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어떤 죽임일지라도 말이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 혹은 믿음.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신앙마저도 인스턴트 음식이거나 자신의 건강을 지속시켜주는 영양제처럼 변해버린 요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이 소설은 너무 낯설고 정신적이다. 마치 중세의 어느 시대를 거쳐가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하며 고통스러운 종교적 환각과 환청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베르나노스의 인물들은 그 속을 꼿꼿하게 선 채 지나가며 울부짖는다. 휴즈의 말대로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고통스럽고 중세적이며 기사도적이었다.’(H.S.휴즈, 현대프랑스지성사, 문학과지성사, 135쪽)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이 주로 신부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소설은 종교 소설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가치있는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인간의 영혼이 현대의 물신주의 속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으며, 심지어 분열되어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할 때, 분명한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나는 살아있고 고통받지만 앞으로 나갈 것이고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내 삶, 내 신념, 내 확신, 내 믿음의 존재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묻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다. 마치 현대라는 강물이 바다를 향해 시류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갈 때, 그의 인물들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한다. 심지어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귀한 신마저도 그의 옆에 없음을 직감했을 때조차도.




모리스 삐알라 감독이 연출한 '사탄의 태양 아래'(1987) 트레일러. (* 한국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나, 오래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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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신성과 세속

2009. 12. 15 ~ 2010.3. 28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3F 



 

비가 내릴 듯한 색채의 대기 - 흐린 날씨. 북쪽 대륙으로부터 밀려든 짙은 구름들. 거친 아스팔트 도로 옆의 커피숍. 일요일 오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전시를 보는 것이 이젠 특별하게 변해버린 어느 직장인의 일요일 오전. 조르주 루오를 그 때 만났다.

전시장 입구는 인파로 빽빽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조르주 루오를 만나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다니! 하지만 아니었다. 1층에 인상주의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미술관 앞 길게 늘어선 줄은 서울이 마치 대단한 예술의 도시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 열기가 다른 전시들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조르주 루오는 우리에게 야수파로 알려진 화가다.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이번 서울 전시는 그의 신앙을, 근현대 예술이 신앙을 이야기할 때,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를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였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매혹적이었다. (앙리 마티스도 말년에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에 매달렸다)

 

이는 언제나 순례자를 기르는 주제가 아니며, 또한 주제가 강조하는 톤, , 은총, 감동적인 언행이다. 이것이 신성적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예술이 세속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고, 미천한 작품을 만든다. (1944, 루오)



종교가 성행하지만, 종교 시설이 늘어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만나기 드물어진 요즘, 루오의 작품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노력한 듯한 전시에 찬사를 보낸다.



굵은 터치의 누드는 루오의 타고난 형태 감각이나 조형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루오는 강렬한 색채와 굵은 터치의 질감과 조형미로 보는 이를 사로잡고 있었다.


루오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이다.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Christ a la colonne, 1939년도 작품
- 루오는 중세 시대를 좋아했다. 그는 위대한 걸작은 노동조합에 속한, 서명을 남기지 않은 성당의 노동자들에게서 나왔다고 여겼으며, 스태인드 글라스는 그의 동반자였다. '그렇게 솔직한 유리에 나는 자주 손을 베곤했다. 그리고 복원해야 할 몇몇 옛 작품 앞에서, 아직 아이였던 나는 그렇게 훌륭한 동반자와 있는 것 같이 느껴야 하는 것에 겁이 났다'(1943년)



 





* 도판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립니다. 생각보다 도판이 깨끗했고 해설도 매우 충실했습니다. 
*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득하지 않았으며, 조르주 루오가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진을 찍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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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정승우(지음), 책세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지만, 다니면 다닐수록 교회가 바람직한 신앙을 추구할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탓에 몇 번 나가다가 그만 두었다. 이러한 결정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 교회가 보여주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은 도리어 나로 하여금 무신앙으로 이끈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가끔, 매우 드문 경험이긴 하지만,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소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배타성, 편협함, 그리고 맹목적인 전투성 때문이다. 신앙이 사라진 이 시대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중함과 관용, 사려 깊음을 가진다는 얼마나 좋을까. 아래의 인용문은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지적이 될 수 있겠다.


사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예수에 관한 이해는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즉 ‘예수가 누구였는가who was Jesus’라는 역사적 물음을 생략한 채,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who is Jesus to me’라는 실존적 고백에 기초하고 있다.
- 11쪽
히틀러에 항거했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신앙적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값싼 은혜’를 비판했다. ‘십자가를 메고 나를 따르라’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을 죽을 때까지 따르고자 하는 행동이 동반되지 않은 신앙은 값싼 믿음에 불과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이는 당시 히틀러 정권에 순응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독일의 교회를 향한 간접적 비난이기도 했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개인주의적인 신앙 형태야말로, 바로 본회퍼가 가장 경계한 값싼 은혜의 전영이라고 할 수 있다.
- 12쪽



이 책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책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객관적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여러 연구자들의 성과를 모으고 있으며,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짧은 개론서에 가깝다.  이 책에 나온 어떤 해석에서는 ‘예수’는 후대의 사람들이 조작한 상상 속의 인물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신약성서의 5대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말씀들 중, 진짜로 예수가 말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은 전체 중 18%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해석들은 경건한 신앙심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는 근대의 산물이다. 18세기 말에서 시작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제기는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양한 견해들 - 종말론에 경도된 유대 예언자,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의 회복 운동을 벌인 인물 등 - 속에서, 나는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를 신적 존재로 만들어 숭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가 궁금해졌다.


그 당시의 역사적인 환경(context) 속에서 종교나 신앙 태도도 변하기 마련이다. 즉 예수가 살았던 그 시대의 가르침과 종교적 의식이나 태도는 현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볼 때 기원후 1세기의 그리스도교와 현대의 구교나 신교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종교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옛날의 예수와 현대의 예수가 전혀 다른 존재이듯이 말이다.



결국 종교란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인 셈이다. 그런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맹목적인 신념이나 배타성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기독교에서는 더 심한 듯 보이는데.



예수가 역사이든 신화이든, 이미 믿고자 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또한 역사 사료나 객관적 근거를 통해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다. 우리가 초월적 존재를 향해 끊임없는 경배를 해온 것은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계속된 일이며, 우리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어떤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심이 야기하는 문제들은 종종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그 점에서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신앙이 사려 깊고 신중해지며, 타인에 대해, 타 종교에 대한 배려심이 늘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정승우 지음/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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