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20

O Do Not Love Too Long 오 너무 오래 사랑하지 마라, W.B. 예이츠

태풍이 지나가자 더위가 이어졌다. 화요일, 공휴일, 광복절, 출근을 했다. 후문이 잠겨 있었다, 정문이 잠겨 있었다, 쉬는 날엔 지하 주차장만 열린다는 걸 잊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업무로 신경이 곧두선 상태라 집에서 일을 하기 참, 어려웠다. 사무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를 둘러보다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우연히 본다, 읽는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한 언어는 다른 지역의 언어와 겹치면서 퍼져나간다. 각 나라말은 절대 일대일로 옮겨지는 법이 없다. 하나의 시가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질 땐 여러 개의 시들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시를 읽을 땐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꾸러미로 연결된다.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지음), 이승수(옮김), 마음산책 극히 일부의 작가들만 여러 개의 언어로 글을 썼다. 또한 어떤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다른 언어로 글을 썼다. 사무엘 베케트는 영어와 불어로 글을 썼다. 대표작인 는 불어로 먼저 썼고 후에 스스로 영어로 번역했다. 조지프 콘래드는 모국어인 폴란드어 대신 영어로 글을 썼으며, 러시아 태생의 나보코프도 영어로 글을 썼다. 나보코프는 어렸을 때부터 러시아어 뿐만 아니라 영어, 프랑스어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의 영어 문장은 압도적이다. 루마니아 태생의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로 글을 쓰다가 아예 파리에 정착해 불어로만 글을 썼다. 그의 불어 문장은 20세기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다. 줌파 라히리도 모국어는 뱅골어지만, 어렸..

독재라고 불리는 이 나라

우연히 받아보기 시작해 이젠 끊을까 생각하고 있는 신문, 중앙일보에 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단국대 영문과 오민석 교수의 칼럼이다. 종종 뛰어난 산문으로 가끔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이번 칼럼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더라. "독재타도"라는 말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이 말이 진정성을 가질려면 이 말을 하는 주체가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체포, 구금, 고문, 죽음 등의 공포를 경험할 수도 있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 말엔 그런 처절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이 말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고난의 삶들을 횐기한다. 그러나 지금의 누구가 이런 말을 해도 잡혀갈 일이 없다.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울려퍼지는 이 말이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바로 ..

언어 공부, 롬브 커토

언어 공부 How I Learn Languages 롬브 커토(지음), 신견식(옮김), 바다출판사, 2017 아무도 내 말을 못 알아들으니 내가 여기서 야만인이다(Barbaus hic ego sum, quia non intellegor ulli). - 오비디우스 설마 이 책을 통해 외국어를 잘하게 되는 숨겨진 비결, 혹은 공부하는 방식이나 자료를 얻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도리어 저자는 정공법을 이야기한다. 가령 '반복은 공부의 어머니다Repetitio est mater studiorum'같은 라틴 격언을 인용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언어 공부에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이들에겐 이 책은 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열정적 권유가 될 수도 있다. 왜냐면 언어에는 천재가 없다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Chateaubriand의 책들

"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헤맸다. 그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城)을 알아볼 수 있으..

잔혹연극론, 앙토넹 아르토

잔혹연극론 앙토넹 아르토 Antonin Artaud 지음, 박형섭 옮김, 현대미학사 이젠 1년에 연극 한 편 보기 어려워졌다. 연극이 아직 살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한 때 연극 밖에 없었던 시대가 있었다. 소설이 등장하기 수십 세기 전, 영화는 상상하지 못했던 시대, 오직 서사시만이 구전으로 떠돌아 다닐 때, 그 때에도 연극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연극은 우리의 일상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아니면 우리 모두가 배우가 된 것일까? 나를 속이고 가족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가면을 쓴 배우가 된 것일까? 그래서 연극,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연극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닐까?). 앙토넹 아르토(1896 - 1948).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 연출가, 연극이론가였다. 하..

두 개의 문장, 혹은 시뮬라크르로서의 세계

새벽에 잠을 깼다. 메일을 확인하고 앞날에 대한 걱정을 잠시 했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만 늘어난다. 이 시대 탓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면 원래 그런 건가, 내가 유독 그런 건가, 이런 잡념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잡은 책이 조중걸의 다. 나에겐 일종의 복습이고 반복이 되겠지만, 돌이켜보니, 서양미술의 역사에 빠져 공부하던 시절이 행복했음을 깨닫는다.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사전문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를 '불구'라고 조롱하면서 전인적 인간을 이상으로 삼고,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다윈Charles Robert Darwin과 헉슬리Thomas Henry Huxle..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

리더들의 언어

예를 들어, 리더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존 F. 케네디는 "함께 별을 탐험하고, 사막을 정복하며, 질병을 뿌리 봅고, 해저 깊이 탐색하고, 예술과 상업을 장려합시다"와 같이 탐사, 별, 사막, 해저 등과 같은 이미지 중심의 단어를 사용한다. 반면 낮은 리더십 평가를 받은 지미 카터는 "최근 우리의 실수를 기회로 국가의 기초 원칙으로 되돌아가 헌신하는 기회로 삼도록 합시다. 우리가 정부를 경멸하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와 같이 거의 개념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연구팀은위대한 리더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리더의 비전을 자신의 마음에 그릴 수 있도록 소통하며, 따라서 이미지 중심의 단어를 더 많은 사용한다고 결론지었다. - 김호(더랩에이치 대표), '개념중심의 단어 Vs. 이미지 중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