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촘스키는 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아마 그의 언어학 이론은 영문학과나 언어학과 학부나 대학원 과정에서나 다루어질 것이니, 일반 독자가 노엄 촘스키의 학문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정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책을 읽게 된 외부의 계기가 있었으나, 나 또한 노엄 촘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이 대단한 언어학자라고 추켜 세웠지만, 정작 그들도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추켜세우는 것인가! MIT 종신교수라서?) 


막상 이 책을 읽으며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알아보니, 그의 언어학 이론은 한 번도 주류 학문이 되지 않았고 무수한 반대학자들과 비판가들만 있을 뿐이었다. 특히 현대의 학문 방향과도 동떨어져서 <<데카르트언어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데카르트주의가 휩쓰는 20세기에 데카르트를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엄 촘스키에 대한 국내 명성은 너무 높아서 함부로 까면 안 되는 사람이 된 듯 싶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노엄 촘스키를 한 번 심하게 깠다가 인신공격까지 나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가지는 기본 가정이 반-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데카르트가 '송과선'이라는 단어로 육체와 영혼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촘스키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언어생득설'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언어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 뿐 아니라 정치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적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초기 저서들과 데카르트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적 관점의 연원을 계몽운동과 낭만주의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면서, 창조성에 관한 담론을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강조한다. 

촘스키는 궁극적으로 훔볼트의 학문에 도달한다. 훔볼트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구성에 관한 가정들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맥락으로 작용한다. 훔볼드는 인간 언어의 창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인간의 언어를 단지 기능적인 의사 소통의 한 형태가 아니라 생각의 표명이자 자기 표현의 방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데카르트적 관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173쪽 ~ 174쪽 



이런 학문적 견지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학자들은 아직도 그의 이론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여기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만 하는 입 진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인 미국 환경 속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우리도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루 다루며, 노엄 촘스키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만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읽기 쉽고 언어학에 대한 연구활동, 언어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절반은 읽히고 절반은 버려질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대부분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으나, 노골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하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지, 언어철학자가 아니다. 더구나 노엄 촘스키는 반-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 있는 언어학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학은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지만, 언급되는 이유는 그의 언어학이 왜 틀렸는가에 집중될 뿐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블로그'에 올라온 스티븐 핑커의 언급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비판이 지난 50년 간 있었지요. 우선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학계에서 정론이며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이라는 식의 표현은 시작부터 맞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정론이 된 적이 없습니다. 매 시대 복수의 언어학자들이 촘스키의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 예를 들어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 관계문법(Relational Grammar), 어휘기능문법(Lexical Functional Grammar), 일반화구구조문법(Generalized Phrase Structure Grammar) 등의 대립 이론들이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보지 않았던 점도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촘스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가 대다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 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더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퍼트냄, 굿맨, 설,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그랬고, 70년대 제롬 브루너와 피아제 학파의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랬습니다. 70년대 인공지능 중흥기의 테리 위노그라드, 로저 섕크, 마빈 민스키도 촘스키를 공격했습니다. 1980년대 연결주의 심리학자와 신경망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있고, 린다 스미스와 같은 “동적 시스템 이론가”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의 아동 언어 습득 연구자들은 촘스키에 반대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는 오해가 생긴 이유는,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접근을 취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유명세와 인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촘스키만을 알았을 뿐,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요. 즉, 명성과 학문적 위치를 혼동한 것입니다.


‘촘스키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주장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이 사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문(syntax)에 대한 몇 가지 기술적인 이론을 발표했고, 동시에 언어가 본능이라는 내용의, 논문의 형태가 아닌 비공식적인 주장을 수십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확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엄밀한 형태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 또는 본능적인 “언어 구조(language faculty)”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특정 언어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예를 들어 일본어나 영어를 우리가 실제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요. 즉 50년 동안 언어의 특정한 측면이 학습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이들이 (실제로 매우 많았지요)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물단지 역할을 촘스키가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보다 정밀한 언어 습득 과정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델은, 여러 문장들을 입력하면, 문법 구조가 출력되는 그런 모델 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실제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모델이 어떤 모양이건,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 본능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나는 1984년 나의 첫 저서인 “언어 학습과 언어 발달(Language Learnability and Language Development)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시도 없이,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어떤 본능적 구조나 가정,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 언어를 신경망으로 구현하려 했던 이들이 썼던 트릭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보다, 그저 본능적인 구조를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델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스티븐 핑커

인용: http://newspeppermint.com/2016/12/08/m-chomsky/




노엄 촘스키의 정치적 활동이나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무수한 진보 지식인들이 인용하여, 다소 식상하기까지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노엄 촘스키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저서들은 제대로 읽히지도, 소개되지도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진 않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이 왜 잘 알려지지 않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현대 철학의 지평 위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반-데카르트주의 환경 속에서 노엄 촘스키는 분명한 어조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활동에까지 연결될 수 있겠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 8점
로버트 바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그린비

Comment +0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이제이북스



이제 책을 구할 수 없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도 잘 찾지 않는 책인지, 서고로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은 언어가 소리없이 죽어가는 현대 세계에 대한 경고장과도 같았다.

"한 언어의 어휘는 세상을 이해하고 지역 생태계 내에서 생존하기 위해 한 문화가 이야기하고 분류하는 사물들의 목록이다."


그리고 이 목록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실은 언어의 죽음은 근대화(혹은 계몽)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죽음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고, 이 책은 종종 가슴 아픈 풍경을 담담하게 적어 나간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고, 그 일은 비생산적이고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일이다. 소수의 사람들 - 몇 명에서 몇 천명, 몇 만명이 사용하는 언어을 보존하자고? 가령 제주 방언을 비롯한 한국의 사투리도 시간이 지날수록 희석되고 있는데 말이다. 여기에서 표준어 정책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왜 사투리로 뉴스 방송을 하면 안 되는가?

그리고 특히 전세계적으로 영어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지만, 이를 누가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식인들 조차도 영어 공용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키우자고 말하지만, 실은 현대 문명은 다양하다거나 창의적이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문명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언어라는 거울을 통해 현대 문명의 폭력성을 기록하는 보고서와도 같다.
 


[관련 글]
2011/08/17 - [예술의 우주/비평] - 사라지는 언어, 사라지는 세계



 

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8점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이제이북스

Comment +0


슬픈 열대 - 10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한길사



슬픈 열대 Tristes Tropiques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evi-Strauss
박옥줄 옮김, 한길사, 1998(원저: 1955)



여행이여, 이제 그대가 우리에게 맨 먼저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류의 면전에 내던져진 우리 자신의 오물이다. - 140쪽

1. 여행 문학으로서의 ‘슬픈 열대’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여행문학의 대표적인 저서로 손꼽히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하지만 나는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한 번도 이 책을 교수나 강사에게서 권유 받았던 적이 없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느 외국 신문의 기사에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여행기라는 평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http://intempus.tistory.com/403)이라는 다소 어수선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나열로 읽히는 산문집에 열광하는 독자에게 여행문학의 정수를 알려주고 싶었다.(1)


하지만 이 책은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것으로 밝혀졌다. 역자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설은 석사 과정 이상의 인문학 전공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번역은 마치 수 십 년 전 번역한 것을 대강 다듬어 다시 펴낸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독서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길 여행이 보편화된 요즘, 몇 달씩 걸리는 바다길 여행은 육체적 고단함과 피폐함, 지루함과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지만, 종종 아래와 같은 낭만적 표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고대의 항해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였던 적도 부근의 농무지대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양반구(兩半球)에 고유한 바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 미풍 한 점 없는 하늘에 검은 구름들만이 해면으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중력에 감응하고 있었다. 만약 이 구름들이 왕성한 활력을 지닌 것이었더라면, 그것들은 번쩍거리는 해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것을 깨끗이 청소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태양 광선을 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해양에는 공기와 물 사이의 빛의 가치에 대한 통상적인 관계를 뒤집어놓는, 단조롭고 번들거리는 반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모든 생명체가 바다로부터 소멸되어버린 것 같았다. 우리들 앞에서 하얀 파도 사이를 우아하게 헤엄쳐 나가던 돌고래들도 보이지 않았고, 수평선에는 고래들이 뿜어 올리던 물기둥도 없었으며, 적자색(赤紫色)의 앵무조개과가 이루던 장관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 192쪽



또한 레비-스트로스의 여행에 대한 성찰은 누구나 흉내 내어 쓰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보통 여행을 공간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간의 여행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 사회적 서열에서의 변화도 수반한다. - 211쪽


그리고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독자들에게 딱딱한 인문학 서적에서 줄 수 없는 묘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비는 이 도시에 스며들고 있는 습기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마치 보편적인 증기가 진주색의 물방울로 변하는 것같다. 마치 유럽에서처럼 비는 일직선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빗방울은 공기 속에서 습기와 뒤섞인 다수의 매우 작은 물방울처럼 창백하게 번쩍이는 것 같다. - 230쪽


1930년대 브라질에서의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의 배경이 되었던 시절이다.
출처 - http://www.telegraph.co.uk/news/obituaries/science-obituaries/6496558/Claude-Levi-Strauss.html


2.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의 시작은 아마 레비-스트로스로 지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 한 발 물러나 부정한다. “오늘 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 … 나는 결코 어떤 지적 운동이나 주의를 주장하거나 이끌지 않았으며, 오직 민족학자의 집단에 둘러싸여 고립적 활동을 계속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그의 학문을 전개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이 서평에서 구조주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 모습이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짧게 언급해볼까 한다.

2-1. 언어에 대한 탐구

현대 인문학(철학)을 여는 인물로 우리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맨 앞에 위치시켜야만 한다(니체가 아니라!). 하지만 소쉬르는 순수한 언어학자라는 점에서, 그가 창안해 낸 개념들이 현대 인문학을 주름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읽히지 않는 학자가 되어버렸다.(2)


그의 ‘일반 언어학 강의’는 20세기 철학을 물들이게 될 허무주의와 반역사주의에 대한 이정표와도 같은 저서이다. 그는 먼저 언어를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로 나눈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라고 할 때, ‘나무’라는 단어를 기표, 실제 땅에 심어져 자라는 나무를 기의라고 한다. 이는 ‘형식과 내용(의미)’에 대한 오래된 분류법에 대한 또 다른 변주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가 필연적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때 시작된다. 즉 우리는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나무를 ‘술병’이라고 표기하여도 되고, ‘탁자’라고 표기하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자의적인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소쉬르는 사회적 언어로서의 ‘랑그’와 개인적 언어로서의 ‘파롤’을 제시한다.(3)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회적 언어로서의 ‘랑그’이며, 개인적 언어로서의 ‘파롤’은 어린 아이 시절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무의식의 차원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또한 그는 언어에 대한 연구는 공시적 차원(동일한 공간)과 통시적 차원(시간의 흐름, 또는 구분)으로 연구될 수 있으며 이를 공시태, 통시태라고 표기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자의적 관계’라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는 토마스 쿤이 과학법칙이란 당대 과학자들의 사회적 합의이지, 실제의 자연 현상과는 무관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동일한 지평에 있는 것이다.(4) 또한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과도 맞닿아 있는 해석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형식과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표기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다를 수 있다. 누군가 ‘나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나무를 떠올린다는 점이다. 또한 누군가 ‘나무’라고 말했을 때, 그 나무가 우리가 떠올리는 바 나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종국에는 랑그란 존재하지 않고 파롤만 존재하게 되는 어떤 세계가 도래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이러한 허무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리고 현대 철학은 소쉬르가 제시해놓은 언어학적 인식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2-2.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자들이 언어에 대한 연구 태도를 인문학 전반으로 확장시킨 학문 태도를 일컫는 단어이다. 인류학에서는 레비-스트로스, 문학 비평에서는 롤랑 바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자끄 라캉, 철학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미셸 푸코, 마르크스 연구에 있어서는 루이 알튀세르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각자는 연구 태도에서만 유사점을 드러낼 뿐, 각기 다른 영역에서 다른 학문 세계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이들을 구조주의자라는 한 단어로 묶는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구조주의자로 불리게 되는 이유를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찾아보기로 하자.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의 원시 부족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삶의 형태들(기표)을 서술한다. 그리고 형태의 의미(기의)를 탐구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부족들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표현된다. 심지어 그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든다. 즉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듯이, 삶의 보여지는 형태로 인해 그들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만약에 물고기가 명암에 의해서 냄새를 미학적으로 구분한다면, 또 벌들이 빛의 강도를 무게에 의해서 분류한다면 - 벌들에게 어둠은 무거운 것, 밝음은 가벼운 것이므로 - 화가, 시인 또는 음악가의 작품과 신화, 그리고 미개인들의 상징은, 우수한 형태로서는 아니더라도 가장 근본적이며 또 우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지식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 - 266쪽


 

현재의 서양과 동양 간의 오해는 우선 의미론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동양에서 우리(서양인)가 선전하는 개념의 형식은 그곳에서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의미가 다른 것이다. - 309쪽



이렇듯 기표와 기의의 문제를 인류학 전반으로 확장시키는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의 우열이나 시간에 따라 진보한다는 찰스 다윈식의 역사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식의 역사 의식에 따른다면,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은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유지되어온 의미나 지식의 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 시대와 공간적 특성에 따라, 동일한 구조가 다양하게 변모하였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는 진보의 개념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결코 지니지 않았다. 단지 그는 진보란 인간 발달의 차원에 대한 범주로서, 어떤 사회가 자기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른 차원으로 이전되어 버리는 동일한 구조 내의 불연속적 다양화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 역자 서문, 92쪽


출처- http://web.mac.com/ 


레비-스트로스는 루소를 다시 읽으며, ‘남비콰라족의 사회가 내가 그 사회에서 오직 인간만이 발견할 수 있었을 정도로 단순화된 상태’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소쉬르 언어학의 태도를 학문 연구 태도로 받아들여, 역사에 대한 부정을 기본 태도로 받아들여, 반역사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내가 지금 이를 오명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진실한 탐구가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상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존 역사주의가 가졌던 획일적 방식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가졌던 미덕을 ‘반역사주의’로 획일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슬픈 열대'를 덮으며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의 여행기이다. 그가 브라질에 가게 되었던 이유, 그가 인류학자로서 첫 발을 내딛게 된 사연, 그리고 브라질에서 만났던 원시 부족에 대한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라져가는 미지의 풍경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묻어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번역 서적이 가지는 몇 가지 고질적인 문제 탓이며, 이런 종류의 책을 자주 접해보지 않는 탓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학문 세계를 드러내려는 목적은 아니었으나, 책을 읽고 쓰는 감상문 치고는 다소 길게 적었다. 그의 다른 책들 - 가령, ‘야생적 사고’나 ‘신화학’은 레비-스트로스의 학문 세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 책들을 읽기 바란다.

 

미주)
1. 이 책은 독서모임 ‘빡센’(http://cafe.naver.com/spacewine)의 다섯 번째 도서로 읽었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하루 종일 사무실에 매여 있는 직장인이 읽기엔 적당한 강제력이 필요한 책이었다.
2. 소쉬르에 대한 무관심은 다른 학자들에 대한 열광적인 호응과 대비되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그의 주저인 ‘일반언어학 강의’는 최근에 새로 번역되어 나왔다. 내가 읽은 책은 대우학술총서로 나온 낡은 것이었으나.
3. 랑그와 파롤은 자끄 라캉에게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힌트를 제시해주었다.
4. 토마스 쿤의 주저인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Comment +2

  • 지나가는사람 2011.06.01 04:48 신고

    제가 소화하기엔 어려워서 이 글 읽으면서 헤롱거렸지만 뭔지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아요!!
    이 책 꼭 읽어보고싶네여
    만약에 물고기가 명암에 의해서 냄새를 미학적으로 구분한다면, 또 벌들이 빛의 강도를 무게에 의해서 분류한다면 - 벌들에게 어둠은 무거운 것, 밝음은 가벼운 것이므로 - 화가, 시인 또는 음악가의 작품과 신화, 그리고 미개인들의 상징은, 우수한 형태로서는 아니더라도 가장 근본적이며 또 우리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한 지식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야만 한다. - 266쪽
    ㄴ>제가 티비에서 원주민 다큐를 보았는데요 예를들면 원주민이 하늘과 잎사귀를 쳐다보는 순간이 내가 소설을 읽을때의 신비한 순간과 똑같다고 느꼈어요 엄마가 후지다ㅉ_ㅉ는 눈빛으로 미개하다는 말을 쓰는게 짜증났거든여!!후 제가 경험한 직감을 잘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요 슬프네요 암튼 이 책 완전 멋있네요...와웅.. 쩔어요 ㅠ_ㅠ ㅋ

보르헤스 씨의 정원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