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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행복한 그림자의 춤 Dance of the happy shades

앨리스 먼로 Alice Munro (지음), 곽명단 (옮김), 문학에디션 뿔, 2010


앨리스 먼로. 작가로 데뷔한 직후의 사진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로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1968년에 출간된 그녀의 첫 단편집. '옮긴이의 말'에서 옮기자면, '여러 해 동안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소설집. 그러나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책. 즉 그녀가 삼사십대 쓴 단편들인 셈이다.


로이스는 치맛자락을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내 따귀를 후려쳤다. 나를, 아니 우리 둘을 건져준 따귀였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한바탕하고야 말겠다고 내내 벼르고 별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156쪽 


이 짧은 문장만으로 이 소설집, 혹은 이 단편, <태워줘서 고마워 Thanks for the Ride>를 전달하긴 어렵겠지만, 방향을 잃어버린 젊음들이 방향을 찾아나가기 위한 사소한 일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두고두고 생각날 법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1950~60년대 캐나다의 작은 도시들, 어쩌면 그보다 더 작은 마을들을 배경으로 앨리스 먼로는 누구나 겪게 되는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전에 읽었던 그녀의 단편집에선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소설집에선 성장하면서 결국 홀로 부딪히며 극복하게 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러니 더 젊은 소설인 셈이다. 그래서 더 쓸쓸하고 외롭고 거칠고 황량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나가거나, 그래서 결국 실수하게 되고 후회하고 아파한다. 적당한 착각과 위로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거짓임을 아는 까닭에 독자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거나, 알게 될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는 자신의 옛 기억을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말인데, 가끔 대도시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 살다가 대도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들의 감수성이 궁금하기도 하다. 앨리스 먼로의 감수성은 지방 중소 도시의 그것이다. 한 두 명만 건너면 다들 아는 어떤 공간.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 결국엔 포기하거나 잊거나 모른 척하거나, 그러면서 인생이 내미는 손을 잡고 살짝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석양을 행복하게 바라본다고나 할까. 결국 아프지만, 아팠지만, 지금 옆에 누군가 있긴 하니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장점이다. 그래서 다 읽고 난 다음 쓸데없이 우울해지거나 시니컬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느 소설보다 더 산뜻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하면서. 








행복한 그림자의 춤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뿔(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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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의 <<카불의 책장수>>(권민정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2005년)은 책 제목과 달리 아프카니스탄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보여준다. 그 참혹함 속에서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지만, (다들 잘 알다시피) 여성의 삶은 더 참혹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미움 같은 감정이 싹튼다. 그들(일부 이슬람 국가들과 대부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음, 종교와 경전에 대한 (무자비한) 축어적 해석과 현실적 상황을 무시한 (강압적/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통한) 적용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이슬람 여성에 대한 여러 풍문을 들은 바 있다. 야한 속옷이 잘 팔리며 부르카 밑으로 진한 화장을 하고 집 안에서는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이러한 풍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선입견을 조장하고 이슬람 여성의 시대착오적 삶의 형태에 대해선 무관심하게 만든다. 


실은 그 풍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에겐 심각할 정도로 자유가 없음을 알았다. 심지어 친어머니의 명령으로 오빠들에 의해 여동생을 죽이는 명예살인 이야기까지. 결혼은 자신의 의사가 아닌 집안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며 결혼 후의 개인 생활이란 일체 없다. 더구나 남편이 두 번째 부인을 가지겠다고 하면, 싫어도 어쩔 수 없으며(심지어 남편을 싫어할 경우엔 두 번째 부인이 오는 걸 반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여성들 간의 또다른 일상이 펼쳐진다.  


사이드 바호딘 마지로흐(Sayd Bahodine Majrouh, 1928 - 1988)은 작가이자 정치가로 몽펠리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몽펠리에 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 아프가니스칸 카불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인 카불로. 그리고 그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살해당한 후 나온 시집이 <<자살과 노래 Le suicide et le chant, Poesis populaire' des femmes pashtounes>>(갈리마르, 1988)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부족 여인들의 구전되거나 창작된 노래들(혹은 시들)을 모은 것으로, <<카불의 책장수>>에는 그 일부만 실렸다. 그런데 그 일부만으로 그 표현들이 의미심장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영역본 제목: Songs of Love and War: Afghan Women's Poetry) 


그래서 아래 그 일부들을 옮겨놓는다. 영역본 시집을 구하는대로 다시 한 번 옮겨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성찰을 구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 




Sayd Bahodine Majrouh 







잔인한 사람들, 당신들도 보이죠.

내 침대로 다가오는 저 늙은이가.

그러면서 내게 왜 우냐고, 왜 머리를 쥐어뜯느냐고 묻는군요.


오, 신이시여, 당신은 제게 또다시 질흑 같은 밤을 주시고

전 또다시 온몸을 부들부들 떱니다.

증오하는 저 침실로 가야만 하니까요.




* *




손을 주세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고 우리 함께 초원에 숨어요.

사랑하거나 칼 아래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


난 강으로 뛰어들죠, 하지만 강물은 날 데려가지 않아요.

내 남편은 운도 좋지요, 강물이 늘 나를 강둑으로 밀어내니.


내일 아침 난 당신 때문에 죽을 거예요.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일랑은 부디 마세요. 




* *



장미처럼 아름다웠던 나,

당신 밑에서 오렌지처럼 노랗게 시들어갔네.


난 고통이라곤 몰랐지.

그래서 곧게 자랐지, 전나무처럼. 




*  *




그대 입술로 내 입술을 덮어줘요.

사랑의 말을 속삭일 수 있도록 혀는 놔두고,


어서 날 안아줘요!

그리곤 벨벳 같은 내 허벅지에 휘감겨봐요.


내 입술은 그대의 것, 맛봐요, 겁먹지 말고!

설탕이 아니니, 녹아 없어지지 않는답니다.


그대, 내 입술을 가져요. 

그런데 자극은 왜 하나요, 난 이미 젖었는걸요.


한순간 그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난 그대를 재로 만들 수 있어요. 



    

불어 원서와 영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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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NOT A PINE TREE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YUN SUKNAM 윤석남

10.16 - 11.24, 2013, 학고재 Hakgojae 





너와 11-초록으로 물들고 싶어, 113.5x57.5cm, 2013. 제공 | 학고재갤러리

출처:  http://news.sportsseoul.com/read/life/1254774.htm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이 있다. 윤석남의 작품들이 그렇다. 몇 주 전 오랜만에 나간 주말 나들이에서 만난 윤석남의 작품은 어수선하던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했다. 


그녀의 작품은 어머니 지구(가이아)로부터 뻗어져 나와 모든 존재에 깃든 모성의 흔적, 혹은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나무'라는 소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작품은 나무의 느낌은 뒤로 밀리고 그 위에 그려진 형태가 먼저 들어온다. 


개를 그렸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렇다. 마치 나무가 사라지고 나무 위에 그려진 존재만 부각되는 느낌이랄까.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라는 전시 제목 뒤로 '그래서 저는 어디에나 있는 아무 것 아닌 모든 것입니다'라는 문장이 있는 것같기만 하다. 


 

'1025 연작' 나무위에 아크릴물감 116×91×91cm 2008 ⓒ 아르코미술관 사진제공

출처: http://blog.ohmynews.com/seulsong/255630 



요즘같이 불투명하기만 한 세상에서 지쳐가기만 우리들에게 윤석남의 전시는 따뜻한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윤석남의 전시 기사를 보게 된다면 놓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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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 

클라리사 에스테스(지음), 손영미(옮김), 이루 















이 책을 꺼내 들었을 때, 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가 떠올랐다. 그녀는 현재 늑대 보호 운동을 하고 있다. 미모의 피아니스트와 늑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 것은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라는 책을 통해 나는 여성과 늑대 사이의 공통점, 그리고 여성의 잃어버린 야성, 숨겨진 본성을 알게 되었으니, 엘렌 그리모가 늑대에게 끌렸던 것은 사소한 동정심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엘렌 그리모



시인이자 융 심리분석 전문가인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초판이 1992년이 나왔지만, 이미 여성 심리학에 있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 책은, 여성 심리에 대한 신화적 분석이면서,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고 여걸이라고 이름 붙여진 숨겨진 야성을 찾게 도와주며 전 세계의 신화, 민담, 설화 등 오래된 이야기들에서 여성 마음의 원형을 읽어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잠재력을 깨우친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의 모습을 늑대와 비교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찾기를 호소한다.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예민하고, 장난스럽고, 희생정신이 강하다. 천성적으로 남들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힘과 지구력이 있다. 또 매우 직관적이고, 자식과 배우자 등 가족이 끔찍이도 아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할 뿐 아니라, 매우 씩씩하고 용감하다. 

- 저자 서문 중에서, 10쪽 



하지만 저자는 ‘여성의 잠재의식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야성을 원하지만 우리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 욕망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긴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살아왔다. 그러나 여걸의 그림자는 밤낮으로 우리 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 우리 뒤에 걸어오는 그림자는 분명 네 발 달린 짐승이다’라고 말한다. 


여걸(wild woman)에 대한 이해는 종교가 아니라 실천이고, 진정한 의미의 심리학이다. 여걸은 영혼 자체이고, 혹은 영혼에 대한 지식이다. 여걸이 없는 여성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나 내면의 리듬을 인식할 능력이 없고, 어떤 시커먼 손이 내면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권태와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반쯤 마비된 상태로 시간만 허비하게 된다. 

- 17쪽 


원형으로서의 여걸은 인간에 대한 무수한 개념과 이미지와 특징을 말해주는,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이다. 

- 48쪽 



책은 각 챕터마다 각기 다른 설화, 민담, 전설 등의 이야기들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숨겨진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책 초반에 나오는, ‘여자를 밝히는 거인, 푸른 수염 이야기’는 순진한 여성이 자주 겪게 되는 성장의 모험을 담고 있는가 하면, 책 후반의 ‘손 없는 아가씨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여성의 인내가 가지는 가치, 한 번 하강할 때마다 상실과 희생과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경험하는 야성의 재생을 보여준다. 이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현대 여성들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며, 야성을 회복한 여성에 대한 은유이고 모자이크화인 셈이다. 그리고 독자 - 여성이라면 특히! - 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심리적 열쇠에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일과 삶 전반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런 질문을 던진 여성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늑대처럼 가장 깊고 어두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괴롭혀온 힘을 반대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성이 바로 여걸이다. 

- 88쪽





‘미운 오리 새끼’는 지역의 문화적 배경이나 이야기꾼의 입담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 세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요점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야성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다. 야성적인 여성이 지닌 최고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지구력이다.

- 189쪽



가령 ‘미운 오리 새끼’는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이야기는, 하지만 여성에 대한 풍부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차 있었다. 이렇듯 이 책을 가득채우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가진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어떤 이야기는 며칠이 지나도록 머리 속을 빙빙 맴돌며 나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은유와 교훈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요즘 사람들이 자주 읽게 되는 자기계발 서적들보다 도리어 더 현실적이며, 실천적이며, 감동적이었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이 책은 충분한 독서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는데, 여성 독자가 읽는다면 그 가치는 배가 될 것이다)



몸매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여성이 자신을 숨기고 위장된 삶을 살게 된다. 

-213쪽 



저자는 자신 속에 숨겨진 여걸을 찾으라고 이야기하며, 그것은 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어쩌면서 너무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다소 식상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걸을 되찾고 싶거든 덫을 피하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본능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 또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고, 눈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모든 걸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빨간 신을 신고 춤을 추라. 단, 그 빨간 신은 반드시 직접 만든 신발이어야 한다. 

- 250쪽 



몇 주에 걸쳐 이 책을 다 읽은 결론을 말하자면, 남성 독자에게는 이 책은 여성의 심리를 알게 해주는 부분적인 안내자이며(그러나 너무 재미있는), 여성 독자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이 책은 인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그 분류가 무색할 정도로 여성 독자들에게는 매우 실천적이며 호소력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외국의 어느 여성 독자는 'Woman's Bibl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시간만 버리기 일쑤인 자기계발서들 - 특히 여성독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 을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더구나 내용마저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P. 에스테스저 | 손영미역 | 이루 | 2013.09.28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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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쓸 일이 있어 아침부터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 몇 개의 관련 기사와 책들을 이리저리 펼쳐놓고 있다, 잠시 쉬어가는 겸, 쓸 원고와는 아무 관련없는 책을 펼쳐 읽는다. 에밀 부르다레의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그리고 그 속에서의 문장들.


조선에서 소녀와 숙녀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적령기가 되면 계집 아이는 곧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총각은 결혼할 때까지, 즉 열다섯에서 서른 살까지 어른으로 보지 안고, 매사에 논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그들은 혼인할 때까지 등 뒤로 머리를 땋고 다닌다. 망사 말총 모자[갓]는 결혼하고서 상투를 틀 때나 쓰게 된다.
조선 부인의 경우 만약 그녀가 지적이고 남편이 방탕하지 않다면, 가정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리며 종종 남편보다 더 강인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부인은 습관에서든 이타주의 때문이든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고, 불행과 역경에 호락호락 체념하지 않는다. 그녀는 악착같이 일해서 비참함을 이겨낼 것이지만, 낙심하거나 게으른 남자는 싸우기보다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한다. 여자들은 대개 고생이 많다. 아이들조차 남성이 우월하다는 관념을 일찍이 배우고, 자기 어머니를 아버지보다 덜 존중하게 된다. 그래도 모성애는 조선인에게 현실의 슬픔을 잊게 해주며, 모든 고통의 무게를 덜어준다. 어머니는,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이, 이웃집 자식보다 더욱 귀엽고 잘나 보이는 자기 자식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고통을 삭인다. 집안일을 할 때도 그녀들은 큰 띠로 둘러메는 식으로 아기를 등에 업고서 일을 한다.
- 에밀 부르다레,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 140쪽, 글항아리


백 여년 전 조선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머니만 존재하는 나라, 조선. 그건 지금도 그럴까.

종일 서재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같다. 가끔 원고 청탁을 받다 보니, 원고 쓰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에밀 부르다레의 책, 그 명성에 비해 국내 독자에게는 잘 읽히지 않는 듯하다. 하긴 구한말 조선에 대한 역사책도 많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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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 10점
마지 피어시 지음, 변용란 옮김/민음사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Woman on the Edge of Time 1권, 2권
마지 피어시 Marge Piercy 지음, 변용란 옮김
민음사 모던 클래식 031, 032


1.
이 책은 민음사 홍보기획부의 정은년 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그것이 작년 여름(8월)이니, 벌써 몇 달이 지난 것인가! 책은 완독한 것은 올해 2월이었다. 책을 받고 몇 달은 밀린 책 읽기에 여념 없었고 그 이후에도 이 소설 읽기는 어수선한 일상의 삶에 의해 방해 받았다. 겨우 소설을 다 읽었지만, 그 이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렇게 서평을 올린다. 이 소설에 대한 서평은 자신 없고 깊이를 가지기엔 내가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여러 문헌을 뒤져가며 연구할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작은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2.
소설을 다 읽었지만, 이 '투박한'(*) 소설은 너무 현실적(realistic)이었고 여성적(feministic)이었으며, 혼성 장르였으며, 정신분열적이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놀라운 소설들의 부류에 속했다. 그러나 이는 소설적 재미와 무관한 것이다. 마치 마지 피어시라는 작가의 약력처럼.


1936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다. 가족 중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은 그녀는 미시건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촉망받는 대학생 작가에게 수여하는 홉우드 상을 여러 번 받았고 훗날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비서, 계산원, 강사 등 여성 임시직 노동자의 생활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 간 그녀는 계급과 여성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 뉴욕 지부장을 맡아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한편으로 ‘빠른 몰락’(1969), ‘독수리를 춤춰 잠들게 하라’(1970)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에 케이프코드로 이주한 이후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오랫동안 동료로 지낸 아이라 우드와 1982년에 결혼했다. 희곡 ‘마지막 백인 계급’(1979)을 공동 집필했던 두 사람은 소설 ‘폭풍의 물결’(1998) 역시 함께 작업했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였던 ‘입대’(1988)을 비롯하여 ‘한줄기로 땋은 삶’(1982), ‘여자의 갈망’(1994) 등 여러 작품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회상록 ‘고양이와의 동침’(2002)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 그녀, 그것’(1991)으로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하는 아서 C. 클락 상을 받기도 했다.
피어시는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치적 작가로 자신을 정의한다. 지금까지 소설 열일곱 권과 시집 열일곱 권을 발표한 그녀는 여전히 열렬한 사회운동가이자 작가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 위의 글에서 '투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소설의 극적 재미나 사건의 진행이 독자의 몰입을 위해 구성된 것이기 보다는 현실과 이상의 대비를 위해, 그 대비 사이에 여백(코니의 환상으로 여기게 하게끔)을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극적 소설에 비교한다면 소설적 재미는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투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투박함은 마지 피어시의 여성주의(페미니즘) 소설이 가지는 또다른 매력은 아닐까.




3.
19세기 후반 Elizabeth Stuart Phelps와 Mary E. Bradleydhk 같은 작가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유토피아 세계관을 가진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는 20세기 초 Charlotte Perkins Gilman에게로 이어진다. 그리고 1960년대와 70년대, 일군의 페미니즘 소설가들이 등장하는데, 마지 피어시, 르 귄 Ursula K. Le Guin, 사무엘 드레니 Samuel Delany, 조안나 루스 Joanna Russ 등이었다. (여기에서 인용된 작가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준비해볼 생각이다. 마지 피어시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니, 의외로 주목할만한 여성주의 소설가들, 특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대한 풍부한 표현들로 채워나간 작가들이 꽤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실 비판적인 경향의 소설들은 그 소설이 지닌 경향성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든지(조지 오웰의 1984), 유토피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즘 소설가들에게서는 유토피아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경향은 20세기 후반으로 올수록 디스토피아적 색채를 띠게 되는데, 마지 피어시의 작품도 여기에 속한다.

4.
여 주인공 코니는 사회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정부의 복지 정책마저도 그녀의 일상과 삶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녀에게는 그 어떤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루시엔테일 것이다. 먼 미래에서 온 루시엔테는 소설 속에서 그것이 실제 사실인지, 아니면 코니의 환상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묘사로 인해 그것의 사실성이 드러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똑같이 현실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미래의 유토피아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경향주의 소설이 자주 취하는 방식이지만, 그 방식의 상투성으로 인해 소설이 지닌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방식은 정신병이라는 교묘한 장치에 숨겨지고 먼 미래와의 교감이라는 점에서 소설은 SF적 색채를 띤다. 하지만, 루시엔테가 사는 미래에도 전쟁이란 존재하고 그 곳에서 코니는 고통을 받는다. 코니의 시선은 그녀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과 끊임없이 어긋나고, 독자는 외부의 공간에서 코니를 지켜볼 뿐이다.

소설은 환상과 현실, 현재와 미래를 오가고 페미니즘과 SF 소설을 넘나든다. 장르적 한계를 넘어 성적 한계마저도 뛰어넘는다. 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듯하지만, 마지 피어시가 취하는 전략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쓸쓸해지고 슬퍼지는 이유는 변두리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들을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5.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때때로 무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현실을 드러내는 일도 고통스럽지만, 현실로 드러난 소설을 읽는 독자도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타인의 일로 치부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읽으려 한다. 고통은 탈색된 채 TV 브라운관이나 스크린 위를 떠돌고, 고통은 언급되지 않은 채 사라지는 침묵의 바다에 속하게 되었다.

마지 피어시의 작품이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현실을 드러내고 싸우는 문학적 방식의 탁월함에 있을 것이며, 고전의 지위를 얻게 된다면 그것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소설 읽기는 고통스럽고 재미없으며 종종 지루해지기 까지 하다. 하지만 현실을 이야기하는 현대적 방식의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 소설은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2 - 10점
마지 피어시 지음, 변용란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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