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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가끔 내 나이에 놀란다. 때론 내 나이를 두 세살 어리게 말하곤 한다. 내 마음과 달리, 상대방의 나이를 듣곤 새삼스레 나이를 되묻는다. 내 나이에 맞추어 그 수만큼의 단어를 뽑아 지금 이 순간의 느낌 그대로 적어볼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게. 아직도 나는 내 글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않는다. 


나이만 앞으로, 앞으로,  내 글은 뒤로, 내 마음은 뒤로, 내 사랑도 뒤로, 술버릇도 뒤로, 뒤로, 내 몸도, 열정도, 돈벌이도, ... 모든 게 뒤로, 뒤로 밀려나간다. 


한때 꿈이, 이번 생의 끝에서 이 생을 저주하고, 다음 생에선 바다에 갇혀 그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채, 깊은 바다로 내려가 사냥을 하다 홀로 죽는 향유고래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적고, 읊조렸다. 그 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십 여년 전이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도 않았고, 기억하지 않았고, 가을에 떨어져 겨울을 뒹굴다 다음 해 봄날 따뜻한 햇빛 속에서 때론 축축하게, 때론 건조하게 썩어들어갈 이파리를 그 꿈은 닮았다. 


다행히, 그런 이파리를 닮은 바다표범이 수조를 헤엄치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이 놓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수조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말을 잃었고 얼굴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그러자 물 속 자유를 얻었다,고 상상했지만,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순 없다, 없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가족과 함께 한강대교까지 걸어가 칼국수를 먹었다. 거리는 고요했고 마음은 황폐했다. 대기는 건조했고 높은 하늘은 나에게, 우리에게 무관심했다. 



하지만 무관심할수록 매력적인 하늘은, 때론 우리를 기분좋게 한다. 그게 참 짧은 순간일지라도. 그렇게 오후가 가고, 또 오후가 가고. 어린 아이는 흑석동과 본동 사이의 숲에서 이루어질 숲 체험 교실을 기대하고 있었다. 도시에서의 유년기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나에겐 없는 풍경이다.


나에겐 있고 당신에 없는 걸 내가 줄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알고 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거의 없었다,는 걸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어느 날 새삼 깨닫게 되었다. 4월, 5월, 내내 제안서만 쓰고 프리젠테이션만 하다 시간을 보냈다. 어떤 회사로의 이직은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 물거품이 되었고, 그 일 여년 사이 두 세 군데의 입사 제의를 거절한 것을 후회하게 될 줄 몰랐다. 


많은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했고, 진행 중이고,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어느 중년의 봄날들 사이, 방통대 영문과 졸업 논문은 스케치만 하다 결국 작성하지 못했고, 어떻게든 마무리해보겠다는 생각만으로 <<Shakespeare and The Mannerist Tradition>>을 주문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제안서 쓰는 법'을 사무실 멤버들에게 강의할 예정이고, 그리고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향유고래는 이미 죽었고 내 마음은 식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나지 않고 그 때를 수놓았던 무수한 단어들은 공기 속에 묻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해졌다.  


방통대 졸업 논문 스케치 속, 멕베스는, 그 가련한 멕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에 자신을 놓아버렸다. 마녀들의 예언은 실현되지만, 그건 그리스 비극의 신탁이 아니다. 신탁 앞에서 비극의 영웅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장엄하게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지만, 멕베스는 마녀들의 예언 위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지 못한다. 고대의 운명과 근대의 운명이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멕베스를 마주 하면서 드는 그 아련한 불쾌감은, 외부의 힘에, 유혹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와 닮아있어서 그런 걸까. 


 


늦은 5월의 수요일, 아침부터 덥다. 그대 목덜미도, 내 손도, 당신의 구두도, 내 마음도 쓸쓸한 땀으로 가득 찬다. 두 손을 모아, 행복한 일들이 연거푸 일어나길 기도한다, 마음 속으로, 이 비정한 도시가 떠나갈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친다, 외치고, 외치지만, 아무도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그리고 흔적이 남지 않을 그 소리만 가득 안고 오늘 하루을 산다. 그렇게, 당신과 똑같이, 그렇게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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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 가운데 호텔 입구의 새벽 3시는 고요하기만 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호텔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이 연상되는 것은, 호텔이라고 하면, 놀러오는 곳이라는 인상이 깔려있어서다. 


떠.나.고.싶.다.

모.든.것.을.버.리.고.

저.끝.없.는.우.주.여.행.을. 


호텔은 해마다 한 두 번씩 돌아오는 낯선 우주다. 호텔의 하룻밤은 아늑하고 감미로우며 여유롭지만, 그와 비례해 시간은 쉽게 사라진다. 



새벽 3시. 여의도 콘래드 호텔 바로 옆 빌딩에서 며칠 째 새벽까지 일을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끌려다녔다. 이런 식이라면 그만 두는 게 상책이나, 관계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를 일이다. 


관계는 우리는 견디게 하고 지치게 하며 상처 입히고 미소짓게 만든다. 관계의 해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저 지금/여기에서만 유효한 어떤 정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재론자들에겐 시간은 무의미하고 운동이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고 그녀/그는 언제나 내 옆에 있다,고 말한다. 경험 상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지 않기 위해, 상처입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음 깊숙한 곳으로 사랑을 끌어당겨 마음의 문을 닫는다. 


거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일에 쫓겨 살았다. 미술 평론 하나 써서 내기로 한 약속도 깨졌고 지금 하는 일에 대한 금전적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꿈꾸는 중년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표현이다. 하지만 미성년적 자아를 가졌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중년들은 죄다 미성년이다. 꿈을 꾼다. 도망가거나 회피하거나 쫓기거나.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 사회가, 시스템이 강제하는 어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리곤 어느 순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이 여름이 가고 또 다른 가을이 오면,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들으며 술을 마셔야지. 에디뜨 피아프와 자끄 브렐까지. 술을 마시면서 떠나간 옛사랑과 우리 아이의 미래와 내 절망과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술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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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휴일.퇴근길.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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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무 바쁘고 정신 없다. 8월 내내 책은 거의 읽지 못했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회의들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예상과 달리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모호성과 변동성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일정은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고 여기에 대해 내가 대응할 수 있는 수준까지 대비해놓고 이해관계자들에게 프로젝트 위험 상황임을 알려야 한다. 


일처리라는 건 결국 모호성과 변동성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위기 순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있는 걸까. 아니면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에 있는 걸까. 실은 이 상황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게 크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협조가 필요한 파트에 강하게 어필해야 하는데, 이 어필을 약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은 협조한 필요한 파트도 자신들의 업무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상황은 쉽지 않다. 





그리고 밤이 왔고 나는 퇴근을 했다. 지루한 일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린다. 세상이 불확실해지고 우리들 인생도 불확실해진다. 마음도 불확실해지고 존재하지 않는 꿈에 모든 걸 맡기게 된다. 로코코의 세계다. 여성들의 화장술이 발달하고 사랑의 미사어구가 넘쳐난다. 그리고 화장술이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고 감미로운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세상은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떻게 될까. 


다행인 것은 나는 화장술을 모르고 감미로운 언어 구사엔 취약하다. 하지만 가끔 존재하지 않는 꿈에 모든 걸 맡기고 싶다. 그러고 보니, 편한 마음에 술 한 잔 한 것도 참 오래되었구나. 


두서 없이 블로그에 포스팅한다. 일이 어수선하니, 글도 마음도 어수선하다. 빨리 일이 마무리되고 이 시절도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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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 화창한 일요일, 사무실에 나왔다. 일요일 나가지 않으면 일정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잘못된 채 시작되었다. 하긴 대부분의 IT 프로젝트가 이런 식이다.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제대로 기획되었더라도 삐걱대기 마련이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사무실에 나와 허겁지겁 일을 했다. 오전에 출근해 오후에 나와, 여의도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긴 아까운 날씨였다. 그렇다고 밖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시를 보러 가긴 너무 늦었고 ... 결국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책이나 읽다 들어가자 마음 먹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5월 햇살은 따스함을 지나 따가웠다. 봄 무늬 사이로 뜨거운 여름 바람이 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처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녀들도 사랑을 잃은 날 밤, 쉬지 않고 울 것이고 결국엔 사랑을 믿지 못한 채 늙어갈 것이다. (이건 정말 공포스러운 일이지 


몇 개의 카페를 보내고 난 다음 빌딩들 사이에 위치한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선 밖이 잘 보였다. 카페 밖엔 사람들이 없었고 까페 안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스타벅스 특유의 소란함이 커피 향 사이로 밀려나왔다.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이 곳에서 나는 내 고요한 휴식을 취하러 왔단 말인가.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카페에서 혼자 시간 보내기를 잘 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두 세 시간 동안 혼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다고 온다고 하지만, 나는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하지만 미련스럽게도 자주 시도하지)


2.

카페의 소란스러움은 가라앉은 척 했다.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사물들의 소리와 뒤섞이며 공명했다. 소리들은 일정한 패턴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부딪혔다. 내 귀를 귀찮게 했고 얼굴을 때렸으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창 가 자리를 앉으려 했지만, 슬픈 5월의, 따가운 햇살은 커다랗고 투명한 창을 그대로 지나 내 몸을 데웠다. 결국 그늘진 안 쪽 자리로 옮겼다. 


둥근 테이블에 앉아 다이어리를 꺼내 메모를 했다. 뭔가 근사한 문장을 적고 싶지만, 문장이 근사할 땐 오직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사랑을 얻어낼 때 뿐이다. 문장은 차분한 사랑의 확신 속에서 대기 속으로 흘러나와야 하고 그녀는 그 흘러나오는 문장의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이 순간, 진짜 사랑은 시작된다,고 믿었지만, 그 때 내 나이 27살이었고, 나는 거짓말을 했다.  





3.

중년의 사내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멍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릴 때, 그는 우연히 마주 치는 시선 속엔, 늘 말 못 할 비밀이 있거나 흐느적거리는 슬픔이나 터놓고 내뱉고 싶은 사연이 숨어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확고해질 때면, 황급히 책 속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다가가지 않는 용기를 발휘했다. 다행한 일이다. 


4. 

우리는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타인이라고 여기지만, 언젠가부터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건 나도 그들에게 익명이고, 그들 또한 나에게 익명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익명을 공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자아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거대한 자아는 목적 없이 대도시의 대기 속을 새벽까지 떠돌다 알코올이 가져다주는 꿈 속으로 사라지겠지. (아, 지금은 아닌가)    





5.

카페에서 혼자 오래 앉아 있는 법이 없지만, 그래도 가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 어떤 휴식들이 필요해서지만, 휴식을 취하고 나오는진 모르겠다. 다이어리를 꺼내 메모를 하기도 하고 가방에서 읽던 책을 꺼내 펼치기도 하지만, 1시간 이상 버틴 적은 없다.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집중해 공부를 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결국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지만, ... 재미없는 풍경 속으로 내 스스로 들어가는 꼴이다.


6. 

하지만 가끔 근사한 향기를 가진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가끔 삼성동에 갈 일이 있으면 에스프레사멘테 일리를 들리곤 한다. 길을 가다 무심코 들렸다는 듯 성의 없는 목소리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그러면 정말 근사한 커피가 나온다. 





7. 

쓸쓸한 일요일이다. 블로그에 글 하나 올리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 마음은 어수선하고 몸은 피곤하기만 하다. 나라는 엉망이고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저러는 걸까. 아니면 정녕 모르는 걸까.


최근 들어 자주 주말에 나가 일하게 된다. 단기 목표는 있으나,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마음은 아직도 스무살 때처럼 정처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는데, 술 마실 친구들도 드물고 술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운 노화가 시작되었다. 거참. ... 어느새 일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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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째가 아니라, 3주째다. 인후염에 걸린 지. 선천적으로 목 부위가 약해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쯤, 매해 목감기에 걸렸다. 몇 번은, 그 때마다 다른 여자친구가, 서울 변두리에 살던 나에게 약을 사다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십 수년 전이니, 나도 나이가 든 건가. 아니면 그냥 세월이 흐른 건가.  


해마다 마음이 건조해지고 아침해가 방 안 깊숙이 들어오지 못할 때, 목 안이 약간이라도 불편하면, 유자차를 마시고 목에 수건을 감고 자곤 한다. 인후염에 걸리기라도 하면, 매우 심하게 앓아눕기 때문이다. 그런데 3주 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유자차를 마시고 물을 하루에 몇 리터를 마시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직 앓아눕진 않았지만(필사적으로 앓아눕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면 간경화가 일어난다는 감기 약까지 먹었으니), 이번 인후염을 길고 느리게, 하루, 이틀, 사흘, ... 그렇게 3주 넘게 내 목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불편한 목을 따라, 마음도, 무릎도, 팔꿈치도, 발등도, 사랑도 불편해졌다. 


아직까지 인후염을 사라지지 않았고 봄은 오는 듯 하더니, 지난 겨울, 건조한 추위의 흔적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사랑하는 그대여, 바쁘고 쓸쓸한 봄이 될 것같구나. 


사무실에서 나와 집에 오면 7시 30분. 저녁을 먹고 아이와 잠시 놀다 보면 금세 9시, 10시가 된다. 그제서야 뭔가 읽고 메모해보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빈둥거리다 잠자리에 든다. 계절 사이의 잠은 으레 거칠고 딱딱한 표면을 소유하고 있다. 잠은 언어를 잃어버렸고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아 사라지고 있었다. 가끔 자다가 한 쪽 팔을 올려 머리 위, 저 너머가 갖다놓는다. 그러면 몸 속으로 사랑이 들어오는 느낌이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착각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러게, 내 삶 전체가 착각이었으면, 내 지나간 사랑이 거짓말이었으면, 그녀에게 했던 고백이 허위였으면. 





해가 뜨고 달이 뜨지만, 그 해가 그 해이고, 그 달이 그 달이다. 변화란 없고 오직 정지만 있을 뿐이다. 해마다 봄이 오듯, 인생의 수레바퀴는 죽음을 향한다. 말로였던가, 야스퍼스였던가, '오직 죽어가는 나만 있을 뿐'이라고 했던 이가. 그래,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눈에 띌 새도 없는, 죽을 병에 걸렸다. 어차피 위로와 위안은 보잘 것 없는 가식보다 못하고, 사랑은 허위와 허상으로 세워진 유리성과도 같았다. 하긴 그 유리성마저도 지키지 못했지.  


퇴근길에 문득 하늘을 보니, 어두워진 푸른 빛깔 사이로 초생달이 보였다. 초.생.달. 사춘기 시절 이후 일상에선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단어다. 그렇게 초.생.달.이 떠있었다. 




오늘, 여의도공원. 아메리카노 커피 하나 들고 나와 오전 회의를 떠올렸다. 나는 금방 지쳤다. 그리고 모든 사항들이 협의 사항이 되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런 일들이 나에게로 왔다. 다시 협의를 하고 결정을 할 것이다. 원래 내 일이었고, 내 일이 아닌 것도 내 일이 되는 팔자를 타고 났다. 정말 내 일을 하고 싶어 잠시 회사와 회사 사이에 내 몸을 위치시켰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내일도 종일 바쁠 것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봄 햇살 아래에서 잠시 내 처지를 잊을 것이다. 


가끔 비즈니스 미팅이 있을 때나 나오던 여의도를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는데, 금융회사를 다니는 듯한 이들의 천편일률적인 복장은 나에게 꽤 불편스러워 보인다. 어두운 색의 깔끔한 정장, 자켓 깃엔 회사의 로고 배지를 달고 머리엔 젤을 발라 뒤로 넘긴... 금융이라는 게 실물 경제와는 관련없고 실물 경제의 원활한 유통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젠 실물 경제와 무관하게 너무 커져(거품이 잔뜩 끼어) 실물 경제마저 위축시키는 시대가 되었건만, ... ... 우리는 알면서도 그저 휩쓸려 갈 뿐이다. 아니, 대다수는 모르겠구나. 



지난 주말에 황지우와 천상병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차마 시집은 읽지 못하겠더라. 천상병 시인은 이제 없고 황지우는 노교수가 되었으니, ... ... 그나저나 나는 언제 긴 글 한 편 써보나. 하긴 글 쓸 자신마저도 이젠 사라지고 있으니... 모든 게 지나간 사랑보다도 못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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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태를 검색해서 들어와 잠시 머물다 갑니다.김영태의 산문을 아는사람이 있다니. 나는 김영태의 산문으로 사티를 크림트를 처음 알았어요. 그처럼 꿈꾸면서 아름답게 살고자했는데. 나도 한 중얼거림.
    봄 누리시길. 언급하신 김영태의 산문 찾아읽겠습니다. 김영태를아는 사람이라니. 좋은 걸요.
    티스토리는 첫화면들이 잘 안바뀌어서 다양한 검색어를 치면서 서핑합니다.종종 와서 공부하고 가야할좋은 방이로군요

    •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초기 시집들의 시인들의 초상을 김영태가 그렸습니다. 무용평론가로 활동했으며, 그림을 그렸고 시집과 산문집들을 남겼죠. 하지만 그때도 읽던 사람들만 읽었죠. 이젠 고인이 되었으니...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이가 되었네요. 그의 시 몇 편을 좋아하는데 말이죠. ~ 가끔 무용잡지를 보면 그의 얼굴이 나오기도 했는데 말이죠. ~..







출근길에 도어즈의 '모리슨호텔'을 다운받아 들었다. 들으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도어즈의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맥주를 마시면서 취하고 싶다고. 


오후 미팅이 끝나고 저녁 5시가 되었고, 내일 오전 미팅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쓸쓸해 보이는 강변을 찍었다. 낭만이 사라져 가고 있다. 슬픈 일이다. 감수성이 메말라가는 건 좋지 않지만, 건조해지는 만큼 상처도 덜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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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서울 풍경을 올린다. 삭막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저 풍경 안으로 들어가면 따뜻함이 묻어날 것이다. 때로는 슬프고 우울할테지만, 36.9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테다. 나는 저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렇게 세월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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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나이에 놀란다. 때론 내 나이를 두 세살 어리게 말하곤 한다. 내 마음과 달리, 상대방의 나이를 듣곤 새삼스레 나이를 되묻는다. 내 나이에 맞추어 그 수만큼의 단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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