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5

97년, 날 사랑한 두 명의 여자

나도 말랑말랑하던 감수성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선배는 나에게 '10년 전 나는 참 4차원이면서 똘똘했다'고 평했는데, ... 내 스스로 그랬나 싶어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을 알지 못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우물 안에 있으면 내가 있는 곳이 우물인지 모르고, 우물 밖에 나와야만 내가 우물 안에 있었다는 걸 안다. 즉 자신 스스로 돌이켜보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물어서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2004년 6월에 쓴 메모를 다시 읽으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게 휴식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 2004년 6월 6일 05:04 전화를 하지만, 전화는 되지 않고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돌다가어디 ..

화요일을 견디기

명동의 어느 까페 2층에서 바라보는 외부 세계 속 남자들은 한결같이 봄과 어울리지 않는 딱딱하고 어둡고 건조한 색상의 자켓을 입고 있었고, 드물게 지나는 여자들은 지나온 과거처럼, 그렇게 다가올 내일도 힘들고 희망없을 지도 모른다는 어떤 두려움에 윗니로 아래 입술을 살짝 깨물며 지나가고 있었다. 이 날, 나는 하루 종일 회의를 했고 하루 종일 뭔가에 대해 떠들었다. 그 언어들은 낯설었지만, 아직 나는 낯선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 아직. 아직.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읽고 있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준까진 아닌 듯하다. 이런 식으로 쓰는 뛰어난 소설가들은 그녀 말고도 여럿 되기 때문이다.

남자가 철든다는 것에 대해

철든 남자만큼 안타깝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종종 우리들은 성직자들에게서 ‘철 들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철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이니, 성직자들에게는 종교적 관점에서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힘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종교적 관점’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신앙을 향한 ‘철없는 열정’을 숨기고 있다. (즉, 모든 열정은 철없음의 소산이다!) 마음 속에서는 늘 자신들이 믿는 신을 향한 끝없는 신앙심을 숨겨져 있는 탓에, 그들은 자신의 생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철든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병상 위의 남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남자. 자신의 생명력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남자는 갑자기 철이 든다..

한 잎의 여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도 작품) 일을 하다 잠시 한 눈 판 사이, 오규원의 오래된 시가 눈을 환하..

예술사를 통해서본 여자

1. 오래 전에 번역되어 많이 읽히지도 못하고 사라진 소설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은 있을 것이다. 빠스깔 레네의 .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하층 계급의 여자와 상류층의 남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에 드러난 것이고 그 이면에는 하층 계급의 여자, 뽐므라는 이름을 가졌고 투명한 영혼을 지닌, 그녀가 거리를 걸어가면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어떤 매력을 지닌 여자와 파리 고문서 학교를 다니며 미래의 파리 박물관 관장이 될, 미래에 대한 야망과 꿈을 가진, 에므리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서로 메워줄 수 없는 어떤 거리를 꼬집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에므리의 편이 아니라 뽐므의 편을 들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뽐므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