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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역사 +23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

Dana Arnold, Oxford, 2004 




그러고 보니, 원서를 통독한 것은 참 오랜만이다. 그만큼 읽기 쉬운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있기도 하고 책 제목 그대로 introduction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와 예술 비평에 대한 비교나 예술작품감정(Connoisseurship)에 대한 언급도 있으며, 신미술사(New art history)나 철학사의 영역에서 바라보는 예술작품, 또는 예술사도 포함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설명들이 명확하고 단순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데리다의 <<The Truth of Painting>>를 설명하기도 하고 도상해석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약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Dana Arnold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What is art history? 

Writing art history 

Presenting about art history

Reading art

Looking art 


이 책의 목적은 명확하다. 


This book is intended as an introduction to the issues and debates that make up the discipline of art history and that arise from art history's central concerns - identifying, categorizing, interpreting, describing, and thinking about works of art. (이 책은 미술사라는 학문을 구성하는 동시에, 미술사의 중점 관심사들 - 예술작품들에 대해 정의하고, 분류하며, 해석하고 묘사하고 사유하는 것 - 로부터 생겨난  쟁점들과 논쟁들을 소개하기 위해 씌여졌다)


하지만 예술작품만 보자면, 어쩌면 이 책은 필요없을 지도 모르겠다. 


This kind of visual material can have an autonomous existence - we can enjoy looking at it for its own sake, independent of any knowledge of its context, although of course viewers from different time periods or cultures may see the same object in contrasting ways. (이러한 종류의 시각적 소재들은 자율적인 존재를 가질 수 있다 - 우리는 그것들의 콘텍스트(배경)에 대한 어떤 지식들에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시대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람자가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반대의 방향의 보게 될 지라도, 작품 그 자체로 보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뒤따르게 되는 질문들, 누가 만들었지? 이 작품의 주제는? 언제 만들어진 걸까? 등에 대한 일련의 활동이 모여 예술사라는 학문이 된 것일지도.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다수의 도판이 나오며 미술사의, 최신 논쟁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번역된 여타 책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신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아래 글은 꽤 의미심장해 옮겨본다. 


The Dinner Party

Judy Chicago

1979, 브룩클린 미술관 소장 

https://www.brooklynmuseum.org/eascfa/dinner_party/home (The Dinner Party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자료를 읽을 수 있다) 


My idea for The Dinner Party grew out of research into women's history that I had begun at the end of the 1960s ... the prevailing attitude towards women's history can be best summed up by the following story. While an undergraduate at UCLA, I took a course titled the Intellectual History of Europe. The professor, a respected historian, promised that a the last class he would discuss women's contributions to Western thought. I waited eagerly all semester, and at the final meeting, the instructor strode in and announced: 'Women's contributions to European intellectual history: They made none.'

I was devastated by his judgement, and when later my studies demonstrated that my professor's assessment did not stand up to intellectual scrutiny, I became convinced that the idea that women had no history - and the companion belief that there had never been any great women artists - was simply a prejudice elevated to intellectual dogma. I suspected that many people accepted these notions primarily because they had never been exposed to a different perspective.

As I began to uncover what turned out to be a treasure trove of information about women's history. I became both empowered and inspired. My intense interest in sharing these discoveries through my art led me to wonder whether visual images might play a role in changing the prevailing views regarding women and women's history. 

- Judy Chicago, The Dinner Party (1996) pp.3-4 (25쪽 - 26쪽) 




* Art History를 미술사로 옮기고 art work를 예술작품으로 옮겼는데, 이는 미술작품이라고 하면 painting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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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김석철(지음), 창작과비평사, 1997년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책이라니,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건축물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이야기들도 변하지 않았으니, 좀 오래된 책이라고 그 재미와 감동은 그대로일 것이다. 또한 건축가인 저자의 글솜씨도 나쁘지 않고 내용은 어렵지 않으며 짧은 분량으로 상당히 많은 건축물들과 건축 공간을 이야기하고 있어 여행을 좋아하거나 건축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상당히 실용적이기도 하다. 


나름 건축물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는 나 또한 이 책을 통해 간과했던 몇 개의 건축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세신궁이나 자금성 같은. 


이세 지역의 신궁은 일본의 신성함과 국가의 단일성을 과시하기 위해 기원전 1세기경에 계획되었다. (... ...) 그 옛날의 목조건물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식년천궁(式年遷宮)의 전통 덕분인데, 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건물을 다시 짓고 신을 옮기는 의식을 말한다. 이세 신궁의 경우 20년마다 천궁을 했는데 천궁을 할 때는 이전 건물을 해체하고 그 터를 남겨둔다. (98쪽) 


2000여년전 지어진 목조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이 건물을 짓기 위해 해마다 나무를 심고 있으며, 그렇게 심어진 나무는 200년, 300년 후 새로 지어질 이세신궁을 위해 씌여질 것이라고 한다(아마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두 번쯤은 이세 신궁을 애니메이션 안에서 보았을 것이다). 가끔 일본이 놀라운 것은 이런 면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새로 지은 건물(아래쪽)과 곧 헐릴 낡은 건물(위쪽) -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D%B4%EC%84%B8%EC%8B%A0%EA%B6%81)


베이징의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머물던 곳이다. 현재의 자금성은 그 규모나 크기 면에서 여느 나라와 궁궐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경복궁을 떠올리면 다소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자금성은 그대로 보존된 반면 경복궁은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고 다른 궁궐과도 떨어져 조선 시대의 모습 그대로라 보기 어려운 면도 있어 문화재나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자금성은 명대의 성조가 20~30만 명의 민간인과 군대를 동원해 140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년에 걸쳐 건설한 황궁이다. 청조에는 부분적인 중건과 재건이 있었을 뿐 전체적인 배치는 변동이 없었다. '천하의 모든 노력을 다하여 황제 한 사람을 받든다'라고 할 만큼 500여 년간 부단히 고쳐 지어졌고 인력과 물력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요되었다. (232쪽) 



자금성  (출처: https://en.wikivoyage.org/wiki/Beijing/Forbidden_City


자금성과 경복궁은 비슷해 보이나, 그것이 놓인 위치나 그것의 구조나 철학은 서로 다르다.  어쩌면 서로 붙어있었으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국과 한국 상당히 다른 나라였음을 이 두 궁궐을 비교해봄으로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의 정도(定都) 당시의 기록을 보면 도시 설계과정의 기록이 모호해서 답답할 때가 많다. 한양의 도시 모델은 뻬이징이 아니라 <<주례>>의 <고공기>였다. 서울과 경복궁이 많은 부분에서 베이징과 자금성을 원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정도전 등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고공기>의 논리와 도가의 원리에 의해 한양을 설계하였으므로 실제의 도시와 건축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베이징과 서울은 다른 도시이고 자금성과 경복궁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건축형식에서도 공법은 같으나 건축미학에서는 독자의 모습을 갖고 있다. 자금성에는 인간이 만든 기하학과 빈 하늘만이 있는 반면 경복궁에는 북한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형국이 궁성과 하나가 되어있다. 자금성은 자연을 가지려 하고 경복궁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자금은 스스로가 원점의 공간으로 주변의 자연에 상관하지 않는 독존의 질서를 가진 데 비해 경복궁은 주변의 토지형국과 자연의 흐름이 하나가 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자금성은 <<주례>>의 <고공기> 원리가 대공간군을 이룬 기하학적 질서의 공간이며 경복궁은 유교의 공간형식과 도가의 철학이 함께 한 유기적 질서의 공간이다. (238쪽 - 240쪽)

경복궁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A%B2%BD%EB%B3%B5%EA%B6%81_%EC%A0%84%EA%B2%BD.jpg)


그 다음으로 르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도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의 주거를 지배하는 아파트의 초기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은 다 사라지고 공장스러움만 남아 흉물스럽기까지 한 한국의 아파트 건물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 - 1965)의 중후반기 대표 작품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s d'habitation)은 165m의 블록에 높이 56m의 단일 건물로 337개의 주거단위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거단위는 복층형태이며, 총 1800여 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고층 집합주거이다. 특히 이 건물은 다음과 같은 그의 다섯 가지 건축원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첫째 개방된 지층 공간(필로티), 둘째 옥상정원, 셋째 자유로운 평면, 넷째 가로의 긴 창, 다섯째 자유로운 건물 정면 

이를 통해 벽이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존의 조직적 구조물에서 탈피하여,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이용해 건물의 고층화와 구조적인 독립을 가능하게 했다. (280쪽) 


1997년과 달리 지금은 워낙 좋은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해외 여행이 일반화되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많은 건축물들을 실제로 본 이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다만 여행을 가기 전에 이런 책을 한 두 권 읽는 것이 좋을 듯하며, 이 책은 여러모로 상당히 유용한 책이다. 


오랜만에 르 꼬르뷔지에의 건물 사진을 보면서, 필로티 - 경주/포항 지진으로 널리 알려진 - 형식이 르 꼬르뷔지에의 창안임을 잊고 있었음을 알았다. 하긴 르 꼬르뷔지에의 필로티는 지층 공간의 자유를 위해 기획되었는데, 한국에서의 적용은 주차장이거나 통유리창으로 이루어진 커피숍이나 상점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르 꼬르뷔지가 지금 한국에 와서 저 무수한 빌라와 아파트 건물들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 8점
김석철 지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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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전 2세기 제작 추정





책을 읽는다고 당신의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 나아지지도 않는다. 쓸데없이 고민만 많아진다. 할 수 있는 건 빨간 신호등일 때 건널목을 건너지 않는 정도이지만, 고민하는 것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한 것들이다.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로 인해 병들어가는 지구나 갑작스럽게 성장하고 있는 AI(인공지능)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라든가 북핵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끼인 한반도의 운명 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도, 말할 사람도 없다. 주제 넘은 염려다.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어린 아이 교육이나 적자를 벗어나지 못한 채 빚만 쌓이는 집안 경제, 또는 직장 문제나 나이가 들수록 위태로워지는 돈벌이. 그러나 이 또한 고민으로만 머물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하는, 종이 위의 글자로만 존재하는 책만 읽는다. 도리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마저 저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데, 왜 나는 책을 읽는 것인가.  




Saint Jerome

Caravaggio (1571-1610) 

Oil on canvas, 112 cm × 157 cm, 1605-1606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 강유원, <<책과 세계>> 중에서




어쩌면 나는 병에 든 것이다. 기원전 안지오의 저 소녀도 병 들고 기원후 4-5세기의 성 히에로니무스도 병든 채 라틴어 성경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소녀가, 성 히에로니무스는 병에 걸렸음을 사람들이 알면 안 되었다. 어쩌면 이 병은 전염병일 지도 모른다. 우리 영혼의 파국을 부를 수도 있고 현실적 자각을 방해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르게 하고 구별짓게 하는 이 병은, 걸린 사람들만 서로 알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병들었기에 어떻게든 그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해야만 한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그들은, 우리들은 병든 것을 숨기기 위해, 도리어 병 든 것이 아니라 당신들과 다른, 훨씬 우월하며 고귀하다고 여기게 하려고 고대로부터 책 읽기를 포장해 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플라톤은 책을 읽는 우리들와 다른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 사람들은, 지혜와 선의의 경험이 전혀 없이, 잔치와 또한 그와 유사한 즐거움에만 항상 익숙하고, 낮은 수준의 교양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일생을 그런 식으로 방황하며 살았다. 그들은 진리를 찾아 하늘을 바라본 적이 없고, 더 높은 진리를 향하여 비상한 적도 없으며, 어떤 순수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맛본 젓도 없다. 가축의 무리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항상 허리를 굽혀 눈을 땅 바닥과 먹을 곳에 고정하고, 먹고 살찌고 성 관계를 맺어 새끼를 낳으며, 이들 즐거움에 대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보였다. 그들으 무쇠와 같은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받았고, 그들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서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 플라톤, <<국가>>, 9장 중에서 




2. 위태로운 프란체스카의 독서 



Francesca da Rimini

William Dyce  (1806-1864) 

Oil on canvas, 218 cm  × 182.8cm, 1837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프란체스카는 자신들의 운명을 예고하는 시구를 읽다가 만다. 책을 읽는 프란체스카의 얼굴 위로 파올로의 얼굴이 겹쳐지고, 이 둘은 불륜의 사랑을 나눈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의 형과 결혼을 약속했으나, 사랑에 빠지는 건 파올로였다. 파올로도 마찬가지여서, 이 둘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죽어서도 끝없는 세속의 비난을 견뎌야만 한다. 


중간에 멈춘 프란체스카의 독서 위로 비극적인 사랑이 놓이고, 고통스러운 사랑의 밤은 지나고, 죽음의 아침만이 남았을 뿐이지만, 그녀의 책 읽기는 끝나지 않는다. 



나는 행복을 찾아 모든 곳을 헤맸지만, 결국 어느 한 구석에서 책을 읽다 행복을 발견했다.

-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 ~ 1471) 



그러나 이제 그 행복한 구석은 없다. 사랑하는 연인도 없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하기 전에 이제 네트워크의 부름을 받을 것이다. 아니면 책을 읽다가 네트워크로 들어가 검색하게 될 지도 모른다. 


진정한 행복은 관계 속에서가 아니라 고독 속에 존재한다.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세계는 반복적으로 책으로 돌아가고 자주 책 밖으로 나온다. 이야기가 되거나 문장 되거나 단어가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는 끝없이 변주되어 나오는 최초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네트워크로 수렴되고 디지털화된 기호가 되고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에서 사라진다. 



3. 책벌레는 되지 말자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읽지만, 나는 읽기 위해서 산다. 

- 로건 피어설 스미스(Logan Pearsall Smith, 1865 - 1946)



나도 읽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이에 우리의 친구이자 눈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은, 그래도 책벌레가 되지 말자고 말한다. (어쩌면 그도, 나도 이미 책벌레일지도 모르는데) 



책벌레라는 개념은 좀목(Thysanura)에 속하는 곤충에서 유래하는데, 이 곤충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책을 실제로 먹어치우는 벌레로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시대부터 "도서관의 청소부"로 악명을 떨쳤다. 책벌레란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지 못하고, 마치 좀벌레가 책을 먹어 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독자들은 생쥐나 시궁쥐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책과 인생은 영혼을 살찍우는 자양분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채우는 사료(飼料)에 불과하다. 

- 알베로트 망구엘, <<은유가 된 독자>> 중에서 



책벌레에 관한 한 올해 읽은 최고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중에서 




그리고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으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결국 죽는다. 책 한 줄 읽지 않은 듯한 여인 만차의 운명과 대비되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비극적인 고독 속에서 시뮬라크르가 된 위안으로 끝난다. 그러니 책은 책일 뿐이고 세상은 언제나 거기 있을 뿐이다. 니체가 그토록 싫어했던 플라톤이 최초로 제안한 개념, 바로 저 세상(이데아계)이 있다는 것, 그것만이 책벌레의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4. 2017년, 기억할 만한 독서의 흔적


4.1.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


2017년이 지나고 2018년이 시작되었다. 작년 한 해 약 50권 여 권의 책을 읽거나 읽는 중이다. 많은 책을 사기도 했으나, 그만큼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했다. 사기 애매하거나 미처 몰랐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들 중 일부는 결국 구입하기도 하는데,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은 두고 두고 읽을 만한 책이다. 서평집으로 머물기엔 아쉬운, 책에 대한 사랑 고백과도 같다. 클리프턴 패디먼/존 S.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연암서가)에서 소개되지 않은 고전들을 소개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글로 소개되지 않은, 소개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점은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혼자 비밀스럽게 몇 명의 작가들을 알고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가령 조지 매러디스(George Meredith, 1828 - 1909)나 C.P.카바피(C. P. Cavafy, 1863 - 1933)은 절대 한글로 번역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클리프턴 패디먼/존 S.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The Lifetime Reading Plan>>은 우리가 평생 동안 읽었으면 하는 고전들에 대한 소개서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소설까지 이어지는 이 책은 우리가 뭔가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할 때 추천할 만한 가장 좋은 책들 중의 한 권이다. 마이클 더다도 이 책에 대한 찬사로부터 시작하여 책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은 세상 일과 무관하다. 도리어 뭔가 물질적 기여를 할 시간에 나는, 우리는 마이클 더다의 책을 읽는다. 그렇게 2017년 오십여 권의 책을 읽었다. 


4.2. 쉼보르스카와 다니카와 슌타로 


2017년 최고의 저자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와 다니카와 슌타로였다. 이 두 명의 시인은 왜 아직도 시인이 있어야 하고, 시가 읽히며, 시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가는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위대한 시인들은 옮겨진 언어의 종류에 상관없이 성공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4.3. 하우저와 조중걸


예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은 해이기도 하다. 아놀드 하우저(아르놀트 하우저, Anold Hauser, 1892 - 1978)의 <<예술과 소외>>(김진욱 옮김, 종로서적)는 마니에리슴(매너리즘) 연구 서적으로, 1981년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책이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에도 책으로는 그 도판을 구하기 어려운 16세기 후반기 마니에리슴 예술가이며, 지금도 서양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들 상당수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의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조중걸의 <<근대 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권, 2권(지혜정원)은 서양 예술사가 이렇게 씌여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한글로! 활자가 크다고 만만하게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사유와 해석의 흔적을 따라가기만으로도 벅차다. 특히 매너리즘 미술에 대한 소개나 19세기 후반 미술에 대한 설명은 압도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곰브리치나 잰슨의 서양미술사와 조중걸의 책을 비교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전자는 '양식사로서의 서양미술사'로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읽은 베스트셀러라면, 조중걸의 이 책들은 왜 예술이 존재하며,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래서 왜 끝내 감동받게 되는가를 알게 한다. 그래서 조중걸의 책을 읽고 난 다음, 독자들은 다른 서양 예술 관련 책들이 한없이 시시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 조중걸의 서양예술사는 전 5권으로, 나는 아직 <<고대 예술>>과 <<중세 예술>>을 읽지 않은 상태이다. 모두 '지혜정원'이라는 출판사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작년 그는 놀라운 책 한 권을 출간했는데, <<비트겐슈타인 논고 해제>>(북핀)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Tractatus>>를 읽고 소개한 책인데, 일부 인터넷서점들의 독자 평만 봐도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아마 한국에서 비트겐슈타인 연구로 대학에서 겉멋 부리는 이들 대부분이 움찔했을 것이며, 아마 일부는 이 책을 읽어내지도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사두었을 뿐,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4.4. 세상을 이해하는 세 가지 방법 


군터 뒤크의 <<호황 VS 불황>>(원더박스)은 읽는 내내 경제시스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팀 하포드의 <<메시>>(위즈덤하우스)는 우리의 통념을 산산히 깨고 어지럽고 지저분하며 혼란스러운 환경이 어떻게 창의성을 폭발시키며 문제를 해결하는가에 대한 놀라운 사례들을 알려주었다. 마이클 셔머의 <<믿음의 탄생>>은 종교, 혹은 신앙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는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약간 불편할 수도 있으나, 결국 종교나 신앙도 우리 인간 문명 속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 생명, 삶, 역사와 함께 흘러왔음을 인정할 때 이 책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과격하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다. 



4.5. 시몬 베유와 강유원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이제이북스)는 놀라운 책이다. 카톨릭 신자로서 시몬 베유는 하느님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 책이 씌여진 시기가 세계 대전 중의 유럽이라는 점에서, 가끔 일요일 성당 안의 고요한 평화-그러나 무수한 심적 갈등과 고난, 회개와 반성으로 뒤범벅된 신자들이 몰려든-를 떠올리게 한다. 강유원의 <<숨은 신을 찾아서>>(라티오)도 신앙 고백서이다. 시몬 베유는 이미 있는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는가에 방점이 찍힌다면, 강유원의 이 책은 그야말로 진짜 신앙 고백서이다. 그는 그리스-로마의 체계 안에서 사도 바울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왔으며, 이후 신앙 고백자들이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이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딱딱한 방식이지만, 정직하고 곧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다. 몇몇 카톨릭 신부들이 이 책을 추천하였으며, 너무나도 이성적인 철학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나 또한 성당을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터라, 강유원의 이 책은 한 편으로는 너무 슬프게 읽힌 책이기도 하다. 



4.6.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그리고 단테


기시 마사히코의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아파하는가를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는 너무 낯익지만, 낯 뜨겁기도 하다. 일종의 관찰이면서 해석이며, 이러한 기록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기초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문학 이론서는 이렇게 씌여져야함을 보여준다. 이미 <<미메시스>>(민음사)를 통해 국내에는 오래 전부터 그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아우어바흐는, 정작 나에겐 낯선 이였다. <<미메시스>> 상권을 읽다 말았으니. 2018년에는 아우어바흐의, 읽다만 책들을 읽기로 한다. 



4.7. 예술이 되는 순간, 그리고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의 <<예술이 되는 순간>>은 우리가 왜 예술을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책이다. 서점에서는 이 책을 열어볼 수 없도록 비닐포장되어 책 내용을 엿볼 수 없지만, 그냥 구입하면 된다. 그리고 책벌레가 아닌 예술에 미친 이들이 어떻게 그 속에서 살아가는가를 알게 해준다.  



Fragment of a Queen's Face

New Kingdom, Amarna Period, 1353-1336 B.C.

Yellow jasper

h. 13 cm (5 1/8 in); w. 12.5 cm (4 15/16 in); d. 12.5 cm (4 15/16 in)

Metropolitan Museum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544514) 



"당신이 두상의 윗부분을 발견한다고 해서" 필립은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감격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 남아 있는 조각의 완벽성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미술사에서 말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눈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한 경탄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이것은 강렬한 즐거움입니다. 마치 당신이 좋아해서 영화로는 보고 싶지 않은 책과 같습니다. 당신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남자나 여자 주인공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이 노란색 벽옥 입술의 경우, 나는 사실 사라진 부분을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습니다." 

-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중에서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떤 이론적 배경이나 지식으로 무장하여 예술 작품을 감상해야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굳이 현대 미술 이론이나 미술사에 대한 지식 없이도 작품은 감상이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 다만 이론/지식이 늘어날 수록 작품 감상의 이해와 폭이 넓어지며, 그 감동도 달라질 것인데, 이는 그 사람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좋은 작품들을 감상하였는가와도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는다. 이 점에서 Dana Arnold의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2004)는 짧지만, 꽤 유용하고 적절한 지점을 잘 알려준다. 



This kind of visual material can have an autonomous existence - we can enjoy looking at it for its own sake, independent of any knowledge of its context, although of course viewers from different time periods or cultures may see the same object in contrasting ways. 

- Dana Arnold, <<Art History>> 중에서 



4.8. 읽은 책들의 목록 


아래 2017년 한 해 읽은 책들의 목록을 올린다. 일부는 2016년부터 읽어온 책들도 있고, 일부는 아직 끝내지 못한 책들도 있다. 어느 책들은 블로그에서 서평을 올렸으나, 어느 책들은 서평을 올리지 못했으며, 서평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책들도 있다. 책 제목 앞에서 * 표시를 한 것은 동작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다. 2018년 올해에는 서재에서 먼지를 먹고 있는 책들 위주로 읽기로 해본다. 2017년에는 과학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 올해 많이 읽는 것으로. 


일년에 읽는 책의 수보다 사는 수가 더 많다. 내 인생에 기적이 생겨, 진정한 책벌레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길, 터무니 없게 꿈꾸어 본다. 




소설 

<<황산>>, 아멜리 노통브(지음), 문학세계사  

<<백설공주>>, 도널드 바셀미(지음), 책세상 

<<위대한 개츠비>>, 스코트 피츠제럴드(지음), 정현종(옮김), 문예출판사 

<<얼음의 책>>, 한유주(지음), 문학과지성사, 2009년

<<맥베스>>, 셰익스피어(지음),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지음), 다산책방 

<<햄릿>>, 셰익스피어(지음), 펭귄클래식코리아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지음), 이창실(옮김), 문학동네, 2016년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폴 뒤부아(지음), 김민정(옮김), 밝은세상



시집

<<강의 백일몽>>, 가르시아 로르카(지음), 민음사 

*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지음), 문학동네 

*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지음), 요시카와 나기(옮김), 비채 



에세이 / 비평 / 역사

*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지음), 책읽는고양이, 2016년

<<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2016년

*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르 졸리앙(지음), 책읽는수요일, 2013년 

*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지음), 난다, 2013년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 지성사

* <<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지음), 양병찬(옮김), 행성비, 2017년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이마, 2016년 

<<숨은 신을 찾아서>>, 강유원(지음), 라티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 마이클 더다(지음), 이종인(옮김), 을유문화사, 2009년

*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지음), 강주헌(옮김), 아르테 

* <<파울 첼란/유대화된 독일인 사이에서>>, 장 볼락(지음), 윤정민(옮김), 에디투스 

<<셰익스피어의 시대>>, 프랭크 커모드(지음), 을유문화사, 2005년 

<<유혹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지음), 배영달(옮김), 백의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지음), 윤진(옮김), 이제이북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그린비, 1999년

<<단테>>, 에리히 아우어바흐(지음), 연암서가, 2014년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지음), 푸른역사

*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지음), 이상희(옮김), 추수밭, 2017년 



경제 / 경영 / 정치 / 과학

<<미래의 소비자들>>, 마틴 레이먼드(지음), 에코비즈, 2006년 

* <<선대인의 빅픽처>>, 선대인(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5년

<<소비의 미래>>, 다비트 보스하르트(지음), 생각의 나무, 2001년 

* <<2017 한국이 열광할 세계트렌드>>, KOTRA(지음), 알키, 2016년 

* <<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박종훈(지음), 21세기북스, 2015년 

<<준비된 자가 성공한다>>, 데이비드 알렌(지음), 청림출판, 2005년 

* <<좋은 제품이란 무엇인가>>, 제임스 L. 애덤스(지음), 김고명(옮김), 파이카, 2012년 

<<호황 VS 불황>>, 군터 뒤크(지음), 안성철(옮김), 원더박스, 2017년 

* <<메시>>, 팀 하포드(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년

* <<왕따의 정치학>>, 조기숙(지음), 위즈덤하우스, 2016년 

<<믿음의 탄생>>, 마이클 셔머(지음), 김소희(옮김), 지식갤러리, 2012년 



철학 / 예술 

<<서양철학사>>, 윌리엄 사하키안(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미학입문>>, H.오스본(지음), 박우사, 1994년 

<<비정형 : 사용자안내서>>, 이브-알랭 부아, 로잘린드 E. 크라우스, 미진사, 2013년 

<<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1권>>,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2014년 

<<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2권>>,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2014년 

<<예술과 소외>>, 아놀드 하우저(지음), 종로서적, 1981년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 Dana Arnold(지음), Oxford University Press, 2004년  

<<예술 사회>>, 조지 디키(지음), 김혜련(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년

*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지음), 마음산책, 2011년 

<<회화 - 한 눈에 보는 흥미로운 미술의 역사>>, 폴커 게하르트(지음), 이수영(옮김), 예경, 2005년 

<<예술이 되는 순간>>, 필립 드 몬테벨로, 마틴 케이퍼드(지음), 디자인하우스, 2015년 

* <<세계의 박물관 미술관 예술기행 - 유럽편>>, 차문성(지음), 책문, 2015년 

* <<래디컬 뮤지엄>>, 클레어 비숍(지음), 현실문화 




5.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일견 단순해보이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책 읽기를 권하지만, 정작 책 읽는 사람은 드물어지는 시대다. 한없이 가벼워지며, 깊이가 사라지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책을 들고 읽는 건 낯설다.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그저 습관일 뿐'이라고 말한다. 한 때 통찰력 있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착각을 가지고 했으나, 막상 중년이 되고 보니, 부질 없더라. 다만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조용히 책 읽는 습관 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권할 만 하다. 책을 두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아주 가끔 실천적인 지침을 가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과 세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책을 많이 읽으면 뭔가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자. 그저 사소하지만 조용하고 깊은 독서만이 거칠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작은 위안이 될 수 있음을,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며칠 전에 올렸다가 다시 다듬어서 올린다. 가독성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 다들 2018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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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지음), 이상희(옮김), 추수밭 





기대했던 것만큼 깊은 통찰력을 주진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저널리스트가 썼다는 걸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즉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한 책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인물들과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인용들을 재미있게 엮은 책에 가깝다. 그래서 책은 쉽게 읽히고 무척 재미있다. 나같은 독자에게 이 책은 너무 쉽게 읽혔다고 할까. 가볍기도 했고. 


하지만 일반 독자들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며,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8점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추수밭(청림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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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History of Philosophy

윌리엄 사하키안William Sahakian(지음), 권순홍(옮김), 문예출판사 





1.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불변하는 진리를 찾고 이를 지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의 분투가 필사적으로 이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저기 완전한 세계가 존재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관계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것의 역사를. 


철학의 입장이 아닌 예술사의 입장에서 이 곳과 저 곳의 대비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인식의 시작이며, 어떤 절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이 이 세계 전반에 물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톤적 신비주의가 밀려들 것임을 예감케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는 중세의 신으로 변화하고 칸트에게 있어서는 다시 ‘물자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인식은 '물자체'에 가 닿지 못한다. 중세의 유명론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듯,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들은 경험 너머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였고 칸트에 이르러, 저 영원불변하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닫아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옳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그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 세계는 아주 조금 그 쓸쓸한 베일을 벗는다. 그것이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포기, 쓸쓸함과 자조, 방관의 자세를 불러올지라도. 



2. 

서양철학사를 읽었다. 십 수 년 전 한창 공부할 때 이후 처음인 듯하다. 그 사이 몇 권의 지성사 책을 읽긴 했으나, 철학사와 지성사는 그 진행 방식이나 언급되는 내용이 매우 상이하다. 철학사는 개별 철학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성사는 지적 세계의 변천에 그 관심을 기울이며 당대의 지적 흐름을 설명한다. 그래서 전자는 철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이들이 읽기 유리하거나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이 인내를 가지고 읽는 책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전자보다 더 폭넓은 주제와 인물을 다루며 좀 더 방대하지만 읽기는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겠다. 내가 이렇게 적고 있긴 하지만, 두 부류의 책을 일반 독자가 소화하긴 어렵긴 매 한가지일 게다. 


윌리엄 사하키안의 <서양철학사>는 다른 철학사와 비교해 다소 평이한 서술로 이루어진다. 딱딱하지 않고 짧은 분량에 철학사의 중요한 쟁점들은 다 거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은 19세기 이후의 철학자들에 대한 서술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미 철학에 대한 비중은 너무 높아서 베르그송에 대한 언급보다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1859-1938)에 대한 설명이 더 길 정도다. 심지어 나는 사무엘 알렉산더라는 철학자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것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 될 것이다. 근현대 철학에 대한 여러 시각을 한 눈에 조망해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그것이 영미철학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편협성을 띄기 때문이다. 



3.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을 단 책들 중 그 분량이 적은 편에 속하며 단숨에 고대철학에서 중세철학으로, 다시 근대철학으로 넘어가는, 다소 빠른 전개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요한 철학자에 대해선 적절한 분량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서, 현대 가까이 오기 전까지 저자의 시각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에 대한 설명은 매우 좋아, 이전에 읽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개론서보다 더 압축적이면서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된 지 오래되긴 했으나, 재출간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그 때 구입해서 꼭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존에는 딱 2개의 리뷰가 있는데, 둘다 평점이 다섯개. 그리고 중고 가격은 2.5달러. 그러나 1968년에 출간된 이후 다시 나오지 않은 듯싶다. 하퍼콜린스의 대학교재 시리즈인듯한데, 새로운 책이 나왔고 그 책은 평점이 그다지... )



서양철학사 - 8점
윌리엄 사하키안/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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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지음), 푸른역사 



나라가 시끄럽다. 하긴 시끄럽지 않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어쩌면 이 나라는 그 태생부터 시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시아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 다행스럽게도 중국 문화권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언어와 삶의 풍속을 가진 나라. 이 정도만으로도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이 식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무분별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한국사 연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당연한 지적을 했는데도). 


하지만 이 내용은 책 후반부에 짧게 언급될 뿐, 나머지 대부분은 심재훈 교수가 어떻게 공부했고 유학 생활은 어떠했으며, 고대 중국사 연구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산문들 위주다. 그리고 미국 대학사회와 한국 대학 사회를 이야기하며 비주류 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소개는 대체로 전문적인 역사서로 오해하게 만들지만, 실은 저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이런저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연재글을 모아낸, 일종의 수필집 비슷하다고 할까. 


글을 대체로 평이하고 쉽고 재미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출퇴근을 하며 이 책을 읽었다) 책 후반부의 자신의 연구에 대한 소개나 최근 한국의 고대 상고사 연구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이 부분도 일반적인 인문학 서적에 비한다면 평이하다. 하지만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든가, 식민지 시대에 대한 해석이나, 기자조선이나 낙랑군 위치 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선 관련 서평이나 기사를 아래 붙여두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때 나도 학자이고 싶은 꿈을 꾸었지만, 가질 않길 잘했다는 위안과 함께, 학자가 되는 것에도 일종의 운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심재훈 교수의 유학시절이 부럽기도 했으나, 그만큼 고생스러웠을 걸 생각하니, 마냥 부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요즘은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수상을 하고 강의 경력이 있어도 국내 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인문학자를 직업으로 한다는 건 무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해외 대학에서 한국인 여교수가 많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한국 대학 사회의 정치적 폐쇄성 탓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인문학 분야에 좋은 학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연구성과들에 대한 활발한 출판과 함께 대중들과의 호흡이 많아져야 된다고 여기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역사에 대해선 대중의 관심이 높지만, 대부분 대중 추수주의일 뿐이다. 이는 역사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료는 그대로이나, 이를 둘러싼 해석과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역사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익히기 보다는 어떤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인문학 본연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쉽게 꺼내기도 어렵다. 


앞서 말했지만, 이 책은 저자가 페이스북에 연재한 글들을 모은 책이며, 역사학에 대한 과감한 주장을 하기 보다는 역사 연구란 어떤 것이며 고대사 연구의 어려움, 그리고 한국사 연구가 가지는 위험한 지점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일종의 산문집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관심있는 모든 이들에게 권할 만 하다. 특히 한국사에 관심많은 이들에겐 심재훈 교수의 시각에서 많은 점들을 깨우칠 수 있을 듯 싶다. 

 


‘국뽕’ 역사야 물럿거라 - [리뷰] 심재훈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단국대 교수, “과장된 상고사서 한민족 자부심? 이젠 달라져야”


‘사이비 역사학’의 현황과 한국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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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이란 무엇인가

한스 위르겐 괴르츠(Hans-Jurgen Goertz) 지음, 최대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3 



사실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며,
사실이란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미술과 예술의 역사를 공부하긴 했지만, 제대로 배웠다고 여기고 있었다. 미술사든, 예술사든, 그것은 역사학의 한 분과 학문이라는 건 알았지만,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과 역사학 자체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역사학, 또는 역사이론에 지식이 없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감동적인가'라고 묻곤 한다. 왜냐면 그 작품의 명성과 감동, 혹은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공감한다는 건 전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런 다음 반 고흐의 <해바라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은 어떤가라고 묻는다. 감동적인가,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는 어떤가 하고. 실은 반 고흐의 아무 작품이나 상관없다. 어떻게 하든 확실하게 다 빈치의 <모나리자>보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아니 그의 다른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훨씬 감동적일 테니 말이다. 


그리곤 옛날 작품을 보고 감상하기 위해선 '공감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반 고흐는 이런 측면에서 아직 현대적이며, 우리 시대는 반 고흐의 시대에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감적 이해'란 무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것이 슐라이어마허가 말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역사를 공부하긴 했으나, 역사를 공부하는 방식, 사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 등등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랐던 것이다. 


Sunflowers, repetition of the 4th version (yellow background), August 1889.

Van Gogh Museum, Amsterdam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우리는 문법적 방법과 심리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이해에 도달한다. (...) 심리적 방법이란 이해하는 사람이 이해의 대상인 사고나 산물을 창출해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고,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 대한 파악, 다시 말하면 타인이 그 자신의 사고, 행동, 그 자신에 대해 부여한 의미를 직관, 예감, 추측을 기반으로 파악하는 것이 이해하는 행위의 본래적 의미를 구성한다. 이를 의미에 대한 공감적(sympathetisch) 이해하고 일컫는다. 

- 203쪽 


내가 한창 공부하던 시설, 예술사 선생님께서 '공감적 이해'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셨는데, 굳이 해석학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으셨거나 슐라이어마허에 대해선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역사학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 건 사실이니. 


이 책은 역사(책)을 이해하고 이를 글로 풀어내며 당대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이론들을 소개하고 정리한다. 그러면서 역사란 '대상없는 과학'이며 그래서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야기식 서술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이야기식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책의 한계를 드러낸다. 


"역사가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싱 대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문제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만이 역사가의 연구 작업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며 현실과 완성을 제공한다. "

- 포슬러 Otto Vossler, <<의미로서의 역사>> (170쪽에서 재인용) 


이야기식 서술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책들 대부분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을 따른다(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아무런 내용도 없고 쓸모도 없는 개념인 '원인'은 성공적인 서술을 망쳐놓는다"라는 글을 인용하면서 역사학에서의 인과율이 가지는 위험성을 말하기도 한다. 왜냐면 하나의 사건은 원인이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역사는 일종의 예술이며 문학작품이라는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역사 서술은 객관성이 아니라 당파성을 가져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고. 아마 역사학이 어떤 것인가 알기 위해 이 책만큼 좋은 책도 없을 듯 싶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역사적 사고의 기원

역사 속의 이성 - 계몽주의

이성 속의 역사 - 역사주의 

역사의 '형태변화' 

계몽주의와 역사주의를 넘어서

대상 없는 과학

사실과 허구 

역사적 해석학

원인과 결과 

객관성과 당파성 

언어, 이야기식 서술, 메타포, 개념

역사적 시간의 문제 


내가 역사에 대해 공부한 것이 뤼시엥 페브르나 페르낭 브로델의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 진 것인지 몰라도, 역사에 대한 이해나 고찰에 대해선 페르낭 브로델의 <<필리프 2세 시대의 지중해 연안세계>>(1946)의 인용문이 가장 와 닿았다. 적어도 우리들의 일상은 조각나고 파편화되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지만, 길게 보면 하나의 흐름으로 묶을 수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격심한 열정으로 가득 찬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같은 모든 생동하는 세계처럼 확신에 차 있으며 맹목적이며 역사적 심연에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가 타고 있는 보트 저 깊숙한 아래에서 도도히 흐르는 물결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우리가 거대한 아무 소리없이 흐르는 물결의 깊이를 알 수 있게 된 이래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결의 방향을 가늠하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대를 고찰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시끌벅적한 사건들도 흔히 순간적인 것, 거대한 운명의 밖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며, 결국 이러한 운명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 

- 페르낭 브로델, <<필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325쪽에서 재인용) 


한동안 나는 왜 사람들이 형편없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지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봐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가 씌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했는지, 황당하지만, 그것은 서구 학계에서 말하는 바 정치의 서비스화, 고객중심주의, 탈물질주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이를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런데 이 때 아날학파의 시각을 받아들이면 흥미롭게도 어느 정도 설명된다. 아직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의식, 태도는 후기 조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자, 너무 많은 것들이 이해되고 공감되었다. 장기지속이란 이런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따로 공부해서 한 번 적어볼까 하는데, 잘 될 진 모르겠다. 주말마다 촛불 들고 나가야 되고, 돈벌이도 팍팍하고 힘든 요즘에, 여유롭게 글 쓸 생각이라니 말이다. 


이 책, <<역사학이란 무엇인가>>는 역사책 읽기를 즐기거나 역사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하게 추천한다. 그만큼 좋은 책이다. 

다시 출간되기를 희망해본다. 




독일 원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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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지음), 조행복(옮김), 열린책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터무니없이 바빠졌다. 지금도 바쁘니, 이 책에 대한 제대로 된 서평은 기대할 수 없겠지. 나는 아마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이고, 다시 흥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일종의 행운이었다. 점심 시간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책을 사지도, 읽지도,  토니 주트라는 역사학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 주위에 책을 읽던 사람들이 많았을 때,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 책들을 나에게 소개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주위에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추천해주는 사람도 ...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특히 인문학 책은 제대로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긴 내가 이상한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향해 가던 토니 주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티머시 스나이더. 그가 모아 정리한 이 책은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아온, 거의 전공자가 없는 동유럽역사 전공자이면 유태인이며 활발한 기고로 세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어느 지식인의 지적 여정이면서 동시에 20세기를 개괄하는 탁월한 지성사이다. 



1. 유대인와 아우슈비츠, 이스라엘과 미국 


앞서 언급했듯이 토니 주트는 유대인이다. 그는 유대인 사회의 문화를 자세히 알고 있으며, 젊은 시절 이스라엘에 가서 공동체 생활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대주의와는 거리를 둔  세계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왜 유대인들이 20세기 초 비난, 공격, 학살의 대상이 되었는지 언급한다. 19세기말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독일어를 구사하던 유대인 지식인들이 왜 희생양이 되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유대인 사회의 폐쇄성을 지적한다. 아우슈비치의 비극에 대해, 그리고 이 비극을 현대 이스라엘은 어떻게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아랍 사회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며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가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과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다. 유대인이면서 유대주의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분석한 탓에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2. 역사학자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분석들을 읽다보면, 문학비평가의 글보다 역사학자들의 글이 더 정확하고 깊이 있으며 탁월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마 컨텍스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의 차이 탓일 게다. 토니 주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파트릭 모디아노는 노벨문학상은 받는데, 아직도 밀란 쿤데라는 받지 못할까 늘 의문스웠다. 이 점에 대해 토니 주트가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밀란 쿤데라에 대해 언급하며 쿤데라를 싫어하는 체코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간 쿤데라의 탁월한 작품성에 대해서만 이해했지, 그가 점하고 있는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의 독특한 위치에 대해선 간과해왔던 것이다. 


토니 주트가 이야기하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작가는 아서 케스틀러일 것이다. <<한낮의 어둠>>이 번역되어 있으나, 나는 아직 읽지 못한 탓에 깊은 공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토니 주트는 작품과 작가의 태도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내놓는다. 특히 조지 오웰에 대한 분석은 읽어볼 만하다. 


작가들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케인즈, 하이에크, 에릭 홈스봄, 알튀세르 등에 대한 언급은 재미있었다. 에릭 홉스봄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면서 보수적인 학계에서 머무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하고 알튀세르에 대해선 형편없다고 비난한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문화연구라는 흐름은 더 이상 호소력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간단하게 몇 문장을 옮긴다면,  '하이에크의 정치적 자폐성으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정책들 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명백하게 나타난'다고 욕하며, '루이 알튀세르 같은 당 이데올로그들은 몽둥이를 들어 이를 공격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인식론상의 단절이 있다는 주장, 마르크스가 1845년 이전에 쓴 글은 무엇이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는 그 주장은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공격한다. 


이런 토니 주트의 가감없는 지적들을 읽으며,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지적 경향을 무분별하게 수입하고 읽어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3. 현실 정치 


'진실을 말하자면,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참사로 끝난 뒤에 정치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치 현상(여론의 개인화)이 매우 현저해졌다.' 


이 문장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마치 한국 사회도 광우병과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시위 이후, 그리고 세월호 이후, ... 탈정치 현상이 이어지고 여론이 개인화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치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 사회가 비판적 활력을 잃어간 것처럼 말이다. 


토니 주트가 유럽 사회의 정치적 지형 변화에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끊임없이 한국 사회의 20세기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민족자결주의와 파시즘 간의 연결고리를 읽으며, 한국 민족주의도 이런 영향권 안에서 생겨났음을,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진보적 지식인들의 희안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책 후반부의 내용들은 한국 자본주의와 정치 상황의 암울한 전망을 하게 만들었다. 


'카지노의 논리란 결국 금융 차원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최종적 형태이다.' '돈이 돈을 낳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 정치는 경제를 이기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필수 요소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정부라면 바로 다음 선거에서 그들을 쫓아내려는 정당에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4. 좌파 


이 책 속에서 토니 주트는 자유주의자로 읽힌다.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도리어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종종 현실에 비판적이면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한다. 진보적이라고 하면 마르크스에 대해 우호적일 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동시에 보수주의자라고 하면 정부에 우호적일 것이라 믿는다. 이 얼마나 편협하고 무식한 태도인가. 


<<평평한 세계>>를 쓴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저널리스트들의 무능력과 무책임함을 지적하며 토니 주트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 그러면서 경제 대신 정치에 무게 중심을 둔다. 그렇다고 해서는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도리어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좌파의 어리석음을 개탄한다. 가령 사르트르같은 이들. 


어쩌면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스스로 진보라고 규정하는 데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진보라고 하면 좌파여야 하고 사회주의자이거나 마르크스주의자여야 한다고 믿는 건 아닐까. 자유주의자이면서 진보적일 수 있으며 보수주의자이면서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이 점에서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을 돌이켜 보았다. 대부분 현실 비판적인 책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스스로 진보 좌파라고 하는 이들의 책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 책들 대부분은 너무나 반-자본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너무 이상적이어서 너무 공허했다고 할까. 문득 지금 한국 진보주의자들의 위기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만 매몰된 채 달려가기만 한 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여기에까지 미쳤다. 



책은 꽤 두껍고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20세기 지적 흐름이나 그 흐름이 가지는 함의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나의 경우, 너무 바쁜 시절 이 책을 읽었던 탓에, 다시 여유로워지면 다시 읽을 계획이다. 그 때 같이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제법 긴 서평을 적어보기로 하자. 












20세기를 생각한다 - 10점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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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거친 호소력으로 정치적, 역사적 메시지를 던지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그는 195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타이트(Apartheid)에 반대한 백인 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백인 사회에도 섞이지 못하고, 흑인 사회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경계에서 시작한 셈이다. 


그는 경계의 자유(혹은 고독, 혼란) 속에서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짓누르는 근대 유럽의 세계관에 대해 본격적인 저항을 한다. 


"자신을 하나의 완성되고 균일한 한 구성체, 자아로 인정하는 서양적 논리는 만들어진 환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563)


작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소개된 윌리엄 캔트리지의 <Felix in Exile>이라는 애니메이션이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추방된 펠릭스Felix in Exile>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거칠고 어색하며 둔탁한 느낌을 주는 켄트리지의 애니메이션. 이 낯선 느낌은 제작 방식의 특수함에서 기인한다. 그는 수십 장의 소묘만을 가지고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여 애니메이션을 완성한다. 즉 지울 수 없는 어떤 흔적에 집중하고 이를 역사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질문을 던진다. 이런 그의 거친 스타일을 두고 어떤 이들은 케테 콜비츠와 비교하기도 한다. 


"침식과 무성함, 그리고 붕귀 등의 자연 현상으로 인해서 자연풍경이 변형되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변형된 모습들은 점점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과정은 지난 날의 일을 잊어버리는 망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날에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록, 교육, 미술관, 노래, 그 외의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 윌리엄 켄트리지 (출처: blog.daum.net/iw_sunny/3721689



실은 내가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해 이렇게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는 아래 작품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미술 잡지에 실린 이 작품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에 대한 리뷰만으로는 이 작품이 어떤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고, 이 작품을 찾아보았는데, 아!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시간의 거부(The Refusal of Time) 



2012년 카셀도큐멘타에서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실제 전시장의 느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이 영상만으로도 켄트리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기운이 전해오는 듯했다. (2012년 카셀도큐멘타 당시 최고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올해 초에는 일본 쿄토에서 전시되었다. 아, 한국에는 전시될 수 있을까.)


각자의 하늘에 있는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위치할 때가 바로 우리가 정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우리는 하늘의 별들로부터 시간 관념을 빌려 왔으며, 그것을 개개인의 신체 속에 있는 기관의 리듬에 맞추어 인지했다. 심장과 폐와 맥박은 인간을 일종의 숨 쉬는 시계(몸-시간)로 만든다. 

- 윌리엄 켄트리지, <시간의 거부> 도록 중에서. 

(이정연, '시간의 블랙홀 - 윌리엄 켄트리지' 중에서 재인용, 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 



거창하게 시작된 글이 아닌지라, 간단한 노트 수준에서 끝낼 예정이지만, 윌리엄 켄트리지에 대한 관심을 앞으로도 지속될 것같다. 거의 모든 장르 - 페인팅, 드로잉, 오페라 무대, 조각, 설치, 애니메이션까지 그의 작업 범위 속에 넣은 윌리엄 켄트리지는 현대 예술이란 장르를 뛰어넘어 모든 장르를 한 곳에 몰아놓은 일종의 용광로 같은 것임을,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시각으로, 어떤 메시지를, 어떤 형식으로 담아낼 것인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William Kentridge - Shadow Procession

Shanghai Biennale 2000



* 윌리엄 켄트리지 : http://en.wikipedia.org/wiki/William_Kentridge 



2010년 MoMA에서 윌리엄 켄트리지 전시가 열렸는데, 이에 대한 안내 동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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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명 Civilisation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지음, 최석태 옮김, 문예출판사, 1989년 

(현재 절판) 




책을 읽어나가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 이미 20세기의 저명한 미술사학자였지만, 그는 미술의 역사 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건축, 음악을 아우르면서 서양 문명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었다. 


가령 그는 장 안트완 와또와 존 키츠, 그리고 모차르트를 함께 비교하며 설명한다. 아래 그가 인용한 존 키츠의 시 구절을 옮긴다. 



Ay, in the very temple of Delight   

Veil'd Melancholy has her sovran shrine, 

Though seen of none save him whose strenuous tongue 

Can burst Joy's grape against his palate fine;  


아아, 환희의 신전 바로 그 안에서 

베일에 가린 우울은 그녀만의 자유로운 성지를 가진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지만, 오직 강렬한 혀로 

기쁨의 포도를 예민한 입 안에 넣고 터뜨릴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 키츠Keats, <우울에 부치는 송가 Ode on Melancholy> 중에서 

(이 책의 215쪽에서 옮기나, 문학 인용문에 대한 번역은 신뢰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수준이다. 이에 직접 번역했다. 뭐, 나도 신뢰할 수준이 안 되겠지만. 이에 원문도 함께 찾아 옮긴다.) 



케네스 클라크는 '와토보다 더 '예민한 입(palate fine)'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번역서에서는 '민감한 입'으로 옮기고 있다). 대강 이해할 순 있으나, palate가 미각이나 감식력 등을 뜻하기 때문에, '탁월한 심미안' 정도로 받아들으면 된다(이럴 때 원문을 찾아 읽는 것이 좋다). 



와토가 세상에 나온 것은 18세기 초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걸작 <시테르 섬에의 순례 Pilgrimage to Cythera>는 1712년, 루이 14세가 아직도 생존 중인 시대에 그려졌습니다. 이 그림에는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유한 경쾌함과 예민함이 있으며, 또 인생의 극적 요소를 파악하는 감각이 있습니다. 비너스 섬에서 한 나절을 보내고, 이제 귀로에 선 이들 남녀의 미묘한 관계는 <여자는 다 이런 것Cosi Fan Tutte> 속에서 자신에 넘친 연인들이 출발에 앞어서 전개한 무아 상태의 흥분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차르트의 그 오페라는 70년 이상이나 뒤에 작곡되었습니다. (215쪽) 




Jean-Antoine Watteau, Pilgrimage to Cythera



지금도 그러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경험한 한국의 인문학자들이나 인문학 전공 교수들 대부분이 가진 편협한 전문성 - 자신의 학위 논문 주제만 딱 알고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심지어 인문학 전공 교수이면서 서양 철학사 한 권 제대로 읽어 내지도 못하는 지적 무능함까지 갖춘) - 과 대비되는 케네스 클라크의 이 책은, 1969년 그가 쓰고 직접 출연한 영국 BBC 다큐멘터리 <문명 Civilisation>의 방송 대본을 책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방송 대본이라고 낮게 치부하기에는 책은 의외로 탄탄하고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면서 인문학과 서양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쉴새없이 자극한다. 


실제 다큐멘터리가 13부로 나누어 방송된 것처럼, 이 책도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구사 일생The Skin of Our Teeth>로 시작해 13장 <영웅적인 물질문명Heroic Materialism>으로 끝나는 이 책은 중세부터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의 서양 문명을 탐구한다.


대부분의 지성사 책들이 철학이나 사상에 기울어져 서술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압도적으로 건축과 시각 예술 작품에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다. 그래서 책에는 다수의 미술 작품 도판이 있으며, 해당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읽을 수 있다. 



(13부 전체를 볼 수 있으나, 아, 한글 자막은 없다. 짧은 듣기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다큐멘터리다.) 



서양 미술사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에게도 이 책은 중세 후기, 근세 초기 북유럽 미술에 대한 설명은 무척 유용했다. 또한, 가령 이런 문장들은 흥미로웠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건축이 현대 건축보다 훨씬 나은 이유의 하나는 그 건축가가 예술가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 본직이 아닌 모든 건축가들 중에서 미켈란젤로는 가장 모험적이며, 고전주의적 원칙이나 기능면의 여러 가지 요구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덜 제약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실제적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만이 미완성의 커다란 골치덩어리였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정돈할 만한 정신적 정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결국 그의 독자성으로 이 건물을 혼연일체의 통일체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164쪽 - 165쪽) 


 

케네스 클라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알브레히트 뒤러를 비교하며, '뒤러는 아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스니다. (...) 그에게는 우선 강렬한 자의식과 과도한 허영심이 있었습니다'(147쪽)라고 말한다. 



Raphael, Portrait of a Cardinal, oil on wood, 79cm*61cm, about 1510 


라파엘로의 어느 추기경은 '최고의 교양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균형과 자제심을 갖춘 사람'으로 느껴지지만, 


오스발트 크렐은 지금 막 히스테리를 일으킬 것같습니다. 저 노려보는 듯한 눈, 자의식이 강한 내성적인 얼굴, 얼굴의 볼륨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뒤러가 아주 잘 파악한 저 불안, 이건 얼마나 독일적일까요? 그리고 독일 이외의 나라였다면 또 얼마나 이상한 일이었을까요? (140쪽) 



Albrecht Durer, Portrait of Oswolt Krel, oil on panel, 50cm * 39cm, 1499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양상은, 의외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이 시기(15세기와 16세기)의 건축과 미술은 고딕에서 국제 고딕, 혹은 후기 고딕으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법들을 받아들여 양식 상으로는 르네상스로 향하는 듯 여겨지나, 정신적으로는 중세에서 바로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말이 종교개혁이지, 이는 성직자의 차원에서였지, 실제 일반 대중에게서는 일종의 반달리즘으로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경향까지도 보이는 바, 16세기 북유럽 미술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미술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케네스 클라크는 뒤러의 작품을 저렇게 설명한다. 


이 책의 몇 부분을 옮기며 설명하다 보니,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꽤나 까다롭게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이미 절판된 책이니, 구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고, 도서관에서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또 번역된 문장들 상당수가 비문들이어서 이 부분에 까다로운 독자들은 화를 낼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수준의 책을 한글로 접하긴 어려운지라, 독자들에게 과감하게 추천한다.


(또는 이 책의 번역서가 새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생생한 컬러 도판들과 함께.)  



Amazon Link : http://www.amazon.com/Civilisation-Personal-View-Kenneth-Clark/dp/B0016XQ7LQ/ref=sr_1_5?s=books&ie=UTF8&qid=1410690328&sr=1-5 




예술과문명

케네드클라크저 | 최석태역 | 문예출판사 | ..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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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보엠 2015.07.24 19:51 신고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행보는 정말 복잡해서 공부할 부분이 많아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이탈리아에 회화적 영향을 주는 게 보이니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겐 기쁜 일일까요? 저는 반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는 카톨릭 종교개혁 시대의 북이탈리아 회화와 기억술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인데, 추천해주신 클락크의 다큐는 꼭 볼게요. 시작페이지에 저장해두었어요. 매일 한 편씩 보려고 합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 16세기는 정말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절정기였으나, 북유럽은 이탈리아와 비교해보면 너무 경직되어 있지요. 그리곤 곧바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마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건너뛰고 곧바로 근대로 뛰쳐나가는 듯합니다. 제대로만 공부한다면 현대, 그리고 앞으로 오게 될 어떤 시대에 대한 무수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 (아마 제가 계속 공부를 했더라면 그 시대를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말이죠. ㅎㅎ )


영화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요즘 어떤 영화가 재미있는지 전해 듣기 마련이다. 그만큼 대중적이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미술은? 아직까진 찾아서 움직일 수 밖에 없음을...

몇 달 째 전시장 근처도 가지 못했다.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고 주말이면 집 밖으로 나오는 건 대단한 각오를 해야 될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미술여행'이라는 어플을 만들어놓고도 개점 휴업 상태가 되었다. 역시 콘텐츠 관리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회사 일과는 무관할 때 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이제 외출하기 좋은 봄날이 오고, 몇 개의 전시를 챙겨보았다.


데비 한 1985 - 2011, 성곡미술관



데비 한의 작품은 미국과 한국, 서양과 동양, 너와 나를 묻는다. 인용과 조작, 해체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작품은 현대 한국 미술의 최전선이 어떤 질문들로 형성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곡미술관에서 3월 18일까지 그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마크 퀸, MC갤러리



마크 퀸이 한국에 다시 왔다. 이번엔 눈동자다. 생경스러우면서도 가끔 만나게 되는 소재이다. 아직 전시를 보지 않은 상태라, 뭐라 말하기 어렵다. 마크 퀸Marc Quinn 자체가 워낙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인 탓에, 실제 작품을 봐야만 이번 눈동자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영국 작가의 전시, 추천할 만하다.

2008/11/28 - [예술의 우주/예술가] - 마크 퀸 Marc Quinn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명동 이야기, 서울역사박물관



이런 전시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 전시 준비 자체가 매우 긴 시간과 노력,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 준비가 완료되고 전시가 열리고 전시가 끝났을 때, 우리는 2012년의 시선으로 정리된 하나의 역사를 가질 수 있다. 전시란 그런 하나의 역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시는 반-자본적이고 반-상업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오랜만에 전시 관련 포스팅을 하니, 부끄럽기 그지 없다. 분발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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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현 교육감의 재판 후기가 온라인에 올라왔다. '알만한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되지'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왔었지'로 변했다. 오늘 아침 읽은 어느 기사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9세말 이후의 역사학자들이 대서사에서 미시사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법도 어찌못할 3명 바보들” 곽노현 재판 ‘화제’
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4263 



 

후기 원문: http://cafe.daum.net/pres.kwak/XjJN/1401
(아래 후기 일부를 인용함.)


이 타이밍에 이보훈 씨의 도 닦는 면모가 여실히 보이는 질문,

“저도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양재원 씨, 이번 선거에 제일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양재원 답,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말하면 싸웁니다.”

이보훈 문, “아니 싸우려는 거 아니예요. 대답해 보세요. 이번 선거에 제일 고생하고 애쓴 사람이 누구라고 보십니까?”

양재원 답, “저는 있는 것만 이야기하고 가치 판단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이보훈 왈, “저는 이번 선거에 제일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양재원 씨라고 봅니다. 양재원 씨가 아니면 후보 단일화가 안되었겠지요? 후보 단일화가 안되었으면 누가 당선 되었겠어요? 분명 이원희 씨가 되었겠지요. 이원희 씨가 되었으면 무상급식도 안했겠지요? 무상급식을 안했으면 오세훈 시장이 사퇴도 안했겠지요? 오세훈이 사퇴 안했으면 박원순 시장도 없었겠지요? 박원순이 없었으면 안철수도 없었겠지요? 안 그래요? 저는 그래서 양재원 씨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역사가 기록할 거예요. 그리고 그 애쓴 것은 역사가 알아줄 겁니다.”

이런 재판도 다 있나? 역사의 평가까지 거론하는 재판, 증인 이보훈이 증인 양재원에게 묻고 충고하는 재판... 헐... 그러나 양재원 씨의 관심은 역사가 아니고 현실이고 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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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꿈 - 1600 ~ 1750년 사이의 건축
프레데릭 다사스(지음), 시공디스커버리총서



“형태(형식)는 그것이 재료 속에 살아 숨쉬지 않는다면, 정신의 관점(추상)에 불과하거나 이해하기 쉽게 기하학으로 표현된 영역에 대한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처럼, 예술은 결코 환상적인 기하학이나 그보다 더 복잡한 위상지리학이 아니다. 예술은 무게와 밀도와 빛과 색채와 연결된 그 무엇이다.”
- 앙리 포시옹, ‘형태들의 삶’, 1939년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으로 학고재에서 번역 출판되었음)





이 책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시리즈들 중에서 제법 어려운, 하지만 바로크에 대해서 그 어느 책보다 충실한 내용을 가진 책이다. 프레데릭 다사스의 ‘바로크의 꿈’은 건축을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이 가지는 특성과 지향했던 세계를 풍부한 도판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종종 책의 서술은 딱딱하지만 흥미롭고, 전문적이면서 아름답고 운동감으로 넘쳐 흐르는 바로크 건축에 대해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전문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으로 여겨지는 바로크 양식에 대한 이해가 실은 대부분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음을 안다면, 이 작은 책은 매우 귀중한 역서가 될 것이다.

바로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오해와 짧은 식견으로 인해, 바로크 양식이 가지는 역동성, 충돌과 열정, 극적인 자연주의가 근대성(modernity)를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현대인)과는 너무 멀리 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아래 인용된 설명처럼 바로크 양식은 먼저 고대와 중세의 본격적인 단절과 극복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가 그 시작이라면.


고대의 유산인 건축의 오더는 무엇보다도 비례 체계라 할 수 있다. (중략) 오더의 비율은 인간 신체의 비율을 반영한다. 오더의 인간 형체는 오더의 미가 지닌 신성하고 절대적인 성격과 특히 오더가 구성하고 있는 건물의 조화를 보증한다. 또한 오더는 장식 체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한하고 미묘한 변화가 가능하며, 건축가에 따라 그 질이 좌우되는 조각 부분 - 쇠시리 장식 - 에 큰 중요성이 부여되기도 한다. 오더는 운율론에서 보면 12음절 시행의 구조에, 그리고 고전음악의 협화음에서 나타나는 음계법의 체계와 비교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는 조화와 표현의 체계인 것이다.
- 46쪽 ~ 47쪽



 

17세기 후반부터 오더는 비틀림, 중단된 회전, 늘임, 병렬 등 지나친 변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오더에 대한 조작 범위가 체계적으로 연구되면서 오더의 완전성 자체가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 48쪽




고대 건축의 오더 양식
출처 http://blog.naver.com/archmys/30106190006



출처
http://www.romasegreta.it/scarlo_alle_quattro_fontane.html 
보로미니의 산카를로알레콰트로폰타네 파사드.

[작품설명] 고대 건축에서 오더는 기하학적이며 규범적이었지만, 바로크에서의 오더는 건축의 일부로 들어가며, 도리어 건축 외형에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 되었다. 보로미니의 위 건축물은 바로크 건축의 시작을 알린 건축물들 중의 하나로, 건축물 외벽에 운동성을 표현한 최초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예술 양식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 매너리즘 - 바로크로 이어지지만,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은 것은 바로크이다 (마치 르네상스 미술의 철학적 반영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듯이).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매너리즘은 반-르네상스 운동이며, 후기 중세(고딕)적이며, 종종 반-근대적으로, 후기 근대적(postmodern)으로 해석된다. 이를 다시 이야기하자면, 고대와 중세를 벗어나기 위한 근대인의 운동은 비로소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와서야 그 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확하기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뉴턴의 시대와 일치한다.

바로크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은 고대의 영향 속에서도 고대와 다른 이상을 열망하였으며, 신의 세계(중세)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건축을 하나의 감각적인 체험으로 만들고자 열망했던 건축가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들인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시각적 효과에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수단들을 그에 집중시켰으며, 채색되거나 조각된 장식을 건축과 융합하는 놀랄 만한 대담성을 보여 주었다.
- 75쪽




바이에른의 비스(Wies) 교회
[작품설명] '연극성'은 바로크 전반을 물들이는 하나의 기조였다. 이는 건축 내부에서도 반영되는데, 비스 교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인간의 세계에 충실했던 그들은 감각적 체험을 우위에 둔 시각 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경험론 우위의 자연관이 시작된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 바로크 양식의 다양성을 표현한다면, 바로크 이후의 양식들은 경험론의 우위를 공공연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로코코는 바로크 후기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적 범속함을 채용하기도 하였다. 가령 성적인 표현들.) 

이 책에 담긴 바로크 양식에 대한 충실한 설명은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양식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에 관심 있는 독자 뿐만 아니라 17세기 서양 예술 전반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흥미로운 한 부분을 옮긴다. 이는 정원 양식에 대한 것이다. 요리가 예술이듯이 정원도 예술 장르 중의 하나다. 이 점에서 예술의 역사에서 정원도 한 부분을 차지해야겠지만, 시간에 종속된 정원은 오직 현재성만을 드러내는 까닭에 역사적 서술이 어렵다. 아래는 르네상스 이후 정원 양식의 변화를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Picturesque Garden이라고도 한다)의 대비은 언제나 흥미롭다.


르네상스식 정원은 테라스, 동굴, 폭포를 설치할 수 있는 경사진 땅을 선호하며 풍부한 물놀이가 구성되어 있고 녹음이 중요시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녹음의 아래로는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화단 옆에 놀라움을 선사하는 설치물과 태양을 피할 수 있도록 동굴이 있는 길이 나 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프랑스 정원은 기복이 별로 없는 토지에 적응해야 한다는 조건과, 그늘이나 시원한 동굴에 관심을 두지 않는 탁 트인 성격으로 인해, 건물을 ‘안뜰과 정원’ 사이에 영지 입구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다른 양식과 구별되었다.

풍경화식 정원을 형성하는 근원으로의 회귀는 1720년대에 영국에서 등장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식 궁전의 공간과 대립된다. 이것은 지식인의 인본주의적 성찰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자 전통적인 정원 양식을 거부하는 정원 형식 상 혁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정원의 건축가들은 전세기에 푸생, 로렌 또는 네덜란드의 풍경주의 화가들이 그린 이상적인 풍경 속에서 영감을 얻었다.
- 28쪽 ~ 29쪽







르네상스식 정원
The Villa Lante di Bagnaia

출처: http://www.gardenaesthetics.com/italian.html



프랑스식 정원
출처: http://blog.aladin.co.kr/stella09/501079 (베르사이유 궁 정원)

영국식 정원
출처: http://www.telegraph.co.uk/gardening/4389731/Britains-gardens-A-private-passion-and-a-public-disgrace.html


* 참조할만한 링크: 정원의 역사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_of_gardening 
* 시공디스커버리 시리즈들 중 예술 양식이나 예술가에 대한 책은 적극 추천할 만하다. 나머지 시리즈들도 풍부한 도판과 알찬 설명으로 명성이 있지만.
 



[그 외 바로크에 대한 글들]
화려한 바로크 양식, 멜크 베네틱트 수도원 Melk Abbey   http://intempus.tistory.com/1389
귀도 레니(Guido Reni)의 성 세바스찬(St. Sebastian) http://intempus.tistory.com/716
바로크 예술 http://intempus.tistory.com/186
(* 검색에서 '바로크'로 검색하면 그 외 많은 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크의 꿈 : 1600-1750년 사이의 건축 - 10점
프레데릭 다사스 지음/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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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한 변명 - 10점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한길사


2003년쯤 적어놓은 서평이다. 이 서평을 다시 꺼내 읽어보니, 안타깝게도 내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없어지고 있는 것같다. 그만큼 인문학 공부는 뒤로 밀리고 회사 일에 쫓겨 글쓰기나 인문학 공부에 게을러진 탓이리라. 자고로 인문학 공부는 오래 시간 책상에 앉아, 많은 것들을 되새김질해야 되는 법. 그래야만 어렴풋하게나마 뭔가 건질 수 있다.
'역사를 위한 변명'은 현대 역사학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전이다(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을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란 어떤 것인지 마르크 블로크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면, 혹은 관심에 두고 있다면 이 책은 필독서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크(지음), 한길사





1. 인문학 공부

하버마스를 읽고 있었을 때, 사회학 석사 과정에 있는 이가 날 보더니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와 비슷하게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을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전공이 졸지에 역사학도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책이나 마르크 블로크의 책을 읽는 것은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전공하면서 소설책이나 시집, 되먹지 못한 비평서만 읽는 이들을 경멸하듯이 철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책만 읽는 이들을 경멸한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어떤 통찰력을 가지려고 할 때, 손에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역사책이다. 문학과 철학을 지나 도달하게 되는 학문의 영역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이 책, '역사를 위한 변명'은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2. 아날학파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당시 사회, 또는 시대의 기반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터, 칼뱅, 로욜라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틀림없이 과거의 인간이고 16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역사가는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아가 당시의 정신적인 분위기에 젖어들어, 우리 시대와는 다른 의식의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 70쪽~71쪽



그 당시의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 역사학자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이것들의 진위여부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들까지 추론해내어야 한다.

마르크 블로크는 프랑스의 역사학파인 아날학파의 제 1세대 학자이다. 아날학파는 일상사에 집중하기 시작한 최초의 역사학파이다. 그들의 목적은 거대한 정치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영웅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역사학의 허점을 비판하고 우리들의 이름 없는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위적인 시간 구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것을 뜻한다.


3. 역사 연구 방법의 필요성

현대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이 책을 먼저 읽어둘 필요는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바대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성격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역사학의 정의, 연구 방법, 목적, 쓸모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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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파아란영혼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파아란영혼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 감사합니다. ^^ ... 그런데 읽을 책들이 밀려 있는 관계로 참가하지 못할 것같아요. 어제 서점에서 신간 코너에 놓인 책을 보니, 꽤 재미있을 것같더군요~.. ㅎ

 

 

오래 전에 어느 문화센터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이지 못한 강의였고 다소 어려운 주제를 다루었던 관계로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만, 그 때 정리해놓은 강의 노트가 있습니다. 여러 참고 문헌, 그리고 제가 배웠던 서양미술사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제 이력이 유별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인문학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양미술사는 인문학의 꽃입니다. 철학사(혹은 지성사)와 비슷하게 움직이며, 언어가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적 세계를 보여주며, 그 시대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동시의 철학 책이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 경우, 16세기 미술사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세익스피어, 에라스무스, 루터 등을 이야기하지만, 서양미술사를 배우는 학생에게나 이를 가르치는 선생에게나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시대가 게을러지고 편한 것만을 찾기 때문에 온 것이지, 인문학이 더 이상 필요 없거나 그 가치를 상실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큰 활자에 예쁜 그림으로 채워진 대중미술서들이 난무하는 요즘, 몇 백 년전의 고리타분한 작품을 앞에 두고,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 그동안 완역되지도 않았던 세르반테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거리는 다 알려져 있으나, 정작 읽어본 이는 드물고, ‘우신예찬의 에라스무스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까요? 인문학 전공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심지어 인문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마치더라도 우신예찬표지도 보지 못하고 석사 학위 논문을 내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텐데 말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기는 것입니다. 서양미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편없는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양식적 설명이나 도상학적 설명만을 주절주절대면서, 정작 그 작품이 왜 형편없는지, 혹은 왜 감동적인지에 대해서 한 마디 설명도 없습니다. 미술 작품은 감상과 감동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하고 주석을 다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술관에 가서 온전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따져 묻고 작품 속 어떤 형체를 보면서 그 의미를 궁금해 합니다. 천박한 방식입니다.

 

먼저 전체를 보고 감상하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련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이에게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듣게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나 지루하고 졸리겠습니까. 그러니 선생은 활자 크고 경박스러우면서도 재미 있는 사실들과 일화들로 채워진 다이제스트를 팔아야 학생과 대중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이러면서 천천히 하향평준화가 시작됩니다.

 

작년에 읽은 어느 서양미술사 번역서에는 ‘arete’를 번역할 수 없는 단어라고 하였습니다. 이 번역자는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한 이였습니다. ‘arete’를 번역하지 못한 이라면, 간단하게 말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한 번도 읽지 않았음을 알게 합니다. 역사학 전공자라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다. 읽었다면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virtue’으로 번역하는 arete라는 단어는 군주론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한국어로 번역된 군주론에도 이 단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원래 희랍어에서 유래한 arete의 그리스적 사용은 다소 다릅니다. 영어의 virtue처럼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되는 단어였습니다. 희랍인들에게는 무엇의 arete인가?’ 또는 누구의 arete인가?’라는 표현도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arete는 단독으로 불완전한 단어였습니다. 레슬링 선수들의 arte, 말타는 사람의 arete, 장군의 arete, 노예의 arete가 있으며, 정치적인 arete, 가정적인 arete, 군사적인 arete가 있습니다. arete는 어떤 특정의 일에 있어서의 숙달 도는 능함을 의미했고, 따라서 그와 같은 능함은 종사하는 일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지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단어가 시간이 흘러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참조: ‘희랍철학입문’, W.K.C. 거드리 지음, 박종현 옮김, 종로서적)

 

이제는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들도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차는 노릇입니다. 심지어 창의적 경영을 위해 인문학 전공자들이 중요해졌다고 해댑니다. 하향평준화도 이런 하향평준화가 없습니다. 그만큼 인문학 전공자들의 수준이 지적으로 무능하고 현실적으로 형편없으며, 인문학 선생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요? 하긴 프랑스에서 역사학까지 전공하였으며, 전문번역자라는 이가 ‘arete’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고 넘어가며, 이를 제대로 교정해줄 출판사 직원도 없는 마당에, 과연 인문학이 제대로 될까요?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젠 주위에 공부하는 이도 드물고 같이 책을 읽을 사람도 없습니다. 매월 말 영업 실적 정리하고 다음 달 마케팅 전략, 영업 계획 세우는 일상 사이로 미술 전시 기획하고 돈과는 무관한 책을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푸념이 길어졌습니다. 매우 사적인 푸념이니, 못 들은 척 하는 배려를 가져주세요.

 

 

이번에 정리할 노트는 근대 미술입니다. 아마 꽤 긴 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이 그 시작입니다. 제가 그동안 정리해놓은 미술사 강의 노트를 모두 정리해볼 생각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양의 15세기, 16세기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로 통칭됩니다. ‘콤파스가 발명되었고 동양으로부터 화약이 전파되어 왔으며, ‘종이가 보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하나가 거대한 역사적 전환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콤파스의 발명은 장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도 이 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약으로 뭐가 바뀌었을까요? ‘화약으로 인해 기사 계급이 결정적으로 와해됩니다. 이제 전투의 양상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창과 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포와 총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기사 계급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종이야 두말 할 필요 없이 인쇄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변화합니다. 결국 과거가 물러나고 미래가 다가오게 됩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종교(구교)의 시대가 물러나고 시민(신교)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막스 베버는 한참 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이야기합니다만, 실은 이 무렵 시작된 어떤 현상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해볼까 합니다.

 

진시황은 왜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을까요? 우리는 분서갱유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습니다만,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고 있습니다. 진시황은 중국 최초로 중앙집권에 성공한 이입니다. 그는 많은 부문에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사상은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나라의 모든 것들이 황제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으나, 사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혼란은 사상이 자유로운 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분서갱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무제는 분서갱유를 거울삼아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냅니다. 그것이 공자 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학을 나라 사상의 근간으로 삼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주류 사상과 비주류 사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서 만나 싸우면서, 실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대립하지만, 겉으로는 과학과 예술, 사상의 문제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화형을 당하죠.

 

Ubi materia, ibi geometria. 물질이 있는 곳에 수학도 생겨난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학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중세시대 내내 잊고 있었던 학문입니다. 그 전까지 가치(value)란 질적으로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신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처럼, 가치로 그렇게 유비적(analogical)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초기, 가치를 양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즉 계량화된 가치 체계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르네상스란 바로 이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에서 양적 가치 체계로의 변화. 르네상스의 이념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질적 가치 체계 속에서 유지되던 것들이 양적 가치 체계로 오면 맥을 추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는 편이 간단할 것입니다.

 

나에게 네 사랑을 증명해줘?’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중세인과 근대인의 태도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세인이라면,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삶에서 하나하나씩 소박하게 행위로 보여줄 것입니다. 하지만 근대인이라면 사랑한다는 사실을 계량적으로 나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몇 번 사랑한다고 말을 했으며,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으며, 몇 번 선물을 하고, 몇 번 성행위를 했는가 표현할 것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모든 가치를 수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싹튼 것입니다. 콤파스를 든 신의 모습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시인이자 화가인 베이컨의 그림을 떠올리면 쉬울 것입니다.) (기하학)으로 이루어진 신이 등장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기하학으로 풀 수 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에 신이 편재해있다는 믿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이것이 르네상스적 범신론입니다.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우리는 일정 불변의 자연법칙 또는 이 법칙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고 경건한 느낌을 통해서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수학적 법칙이 있고 그 법칙 속에서 경건해질 때 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합니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표현입니다. 마치 교회를 무시하고 성직자의 밥벌이를 빼앗기 위해 작정한 듯한 표현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화형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직 세상은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고 성실했던 수사가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교회는 필요 없는 곳이 되며, 독실한 기도와 성경이 자기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종교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르네상스적 이념과도 결탁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요즘의 한국 기독교는 과연 마르틴 루터와 칼뱅이 이야기했던 그 기독교가 맞을까요? 안타깝게도 한국의 개신교는 루터와 칼뱅을 버리고 중세적 마인드로 복귀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 탓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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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 10점
제롬 카르코피노 지음, 류재화 옮김/우물이있는집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제롬 카르코피노 지음, 류재화 옮김, 우물이 있는 집, 2003년(1939년)


현대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는 고대의 삶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무지하기 뿐만 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그래서 전등이 사라진 밤 도시의 풍경을 떠올리라고 하든지, 큰 교회나 절, 혹은 궁궐이 고대인들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상상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나는 고대 로마의 규모에 대해서 설명할 때면, 인구 백 만 명의 도시에서 하루에 나오는 쓰레기의 규모나 소비하는 물, 또는 음식의 양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정교하게 이루어진 일련의 체계로 일사 분란하게 가동되어야만 인구 백 만의 도시가 유지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확실히
이 점에서 고대 로마는 종종 나의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와 군대적 문화가 기반이 되어 형성된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서유럽에서 중앙 집권 정치체제가 등장하기까지는 무려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1939년에 출판된, 제롬 카르코피노의 이 책은 고대 로마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책들 중의 한 권이다. 우리는 편의상 고대 로마의 몰락을 북방 민족의 남하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북방 민족이라는 표현도 잘못된 표현이다.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민족이거나 이미 로마인들의 풍속에 익숙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국가의 몰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이 국가를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의 정신적, 문화적 배경과 일상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 때 서유럽 대부분과 북 아프리카 일부를 차지했던 세계 제국이 북방 민족이 남하했다고 몰락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왜 로마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막을 힘을 상실했는가, 혹은 막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전성기 로마의 일상 생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나 로마인들의 삶에 대해 궁금한 일반 독자에게도 이 책은 매우 즐겁고 유용한 독서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뛰어난 역사가들이 보여주는 통찰이 어떤 것인지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로마 시대의 문헌들과 현재 남아있는 역사적 유물들을 조합하여 제롬 카르코피노는 우리 눈 앞에 생생하게 고대 로마의 하루를 옮겨놓는다. 늘어나는 인구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진 인술라(공동주택)이 어떤 문제를 가졌으며, 초기에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이 어떻게 힘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결혼 제도, 육아,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분석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들은 전성기 로마의 일상을 통해 몰락해가는 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끄집어 내는데 있다.

아마 현대의 학자라면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을 보면서 현대의 어두운 면을 발견할 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현대와 가장 닮은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원후 로마 제국이 아니었을까. 심각할 정도로 교육 시스템이 붕괴되었으며 가족은 해체되고 있었고 강력하던 신분제는 흐물흐물해졌으며 로마인들은 도박,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검투사의 경기나 음란하고 자극적인 연극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는 모습은 현대의 여러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책은 두껍고 무거우며, 보는 것만으로도 전문 연구서라는 인상을 주지만, 몇 페이지 읽지 않고도 제롬 카르코피노의 번뜩이는 표현과 통찰력, 그리고 고대 로마의 흥미로운 일상 생활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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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함께 읽는 서양 문화의 역사 2 - 6점
로버트 램 지음, 이희재 옮김/사군자


깔끔하게 요약된 이 책은 혼자 읽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다. 나같은 독자는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많은 정보에 비해 짧은 설명이 서양 문화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빠져든 서양 문화사는 너무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현대 사회나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버트 램의 이 시리즈는 혼자 읽기 보다는 대학 교양 수업의 교재로 적당하다.

'후기 중세: 확장과 종합'라는 챕터 제목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면 일종의 발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문화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교의 위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보상으로서의 확장과 종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중세에 있어, 심리적 보상은 크게 문화예술의 측면(고딕 양식과 초기 르네상스)와 도시 자본주의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표면상으로는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며, 반대로 이 둘의 협력이 종교 권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실은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 이 두 가지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러 사실/정보들의 평면적 나열에 그치며 깊이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장점은 있다. 이 평면적 나열이 역사, 미술, 건축, 음악, 무용, 문학에 걸쳐 있으며, 매우 잘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의 교재(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강사나 이에 도전해 볼 강사가 있다면)으로는 매우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혼자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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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카(지음), 김택현(옮김), 까치


다 읽고 생각해보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보다 ‘역사학이란 무엇인가’가 더 적당한 제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학자들에게 시선이 고정된 이 책은 학문으로서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 블로크가 그의 시선을 ‘인간’에게 고정했던 것과는 다소 관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위상이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비관주의자들에게는 Carr가 너무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종종 겁을 내는 듯이 비추어지거나 억지로 낙관주의적 관점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논리적인 완결성, 또는 철저한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인류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역사는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Carr는 현대의 비관주의에 물들어가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감동적이지는 않더라도.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는, 어떠한 역사가도 자신만의 가치를 위해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지만,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가는 ‘사회 안에서의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하여 그것을 통해서 과거에 대한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인 통찰력을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 R.W.데이비스, p.237~8.



이 점에서 책에서 인용된 호이징가의 문장, ‘역사적 사유란 항상 목적론적이다’은 역사가가 가져야 하는 어떤 태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듯 하다.

현대의 비관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는 나 같은 이에게 ‘절뚝거리는 희망론’처럼 읽혔다. 포퍼처럼 확신에 찬 어조를 가지지도, 후기구조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비관주의도 아닌, 역사학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전통적이며 교과서적인 관점을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상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객관적인 역사란 과연 존재할까?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를 논할 수 있을까? 결국은 제한된 영역에서의 실증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을, 역사를 믿어야 하는 것일까. Carr는 조심스럽게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이미 너무 멀리 와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까치글방
E.H. 카의 이 책과 함께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마르크 블로크의 책이 좋다. 이 책 또한 역사학 입문서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 책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한길사
(* 이런 책을 절판시키다니.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 믿을 뿐이다.)

그리고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을 비판적 시각에서 논의한 아래의 책은 기회가 닿을 때 사서 읽어볼 책으로 링크를 걸어둔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김기봉 지음/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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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 르 고프(지음), 유희수(옮김),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1995년 3쇄(1992년 초판)



사람들은 서양 중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왕과 왕비, 기사, 장원 경제, 십자군, 아더왕 이야기, 왕비와 기사 간의 로맨틱한 사랑, 높이 솟은 첨탑의 고딕 성당.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닐 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중세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 책은 서양 중세의 문명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요약하고 정리한 책이라, 독자에 따라선 설명이 인색하다고 여길 수 있고 완독하는 데에 다소 많은 시간이 걸리는 책이다. 하긴 천 년 중세 문명을 일목요연한 구성과 설명으로 다 담아내기 위한 저자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이 시간마저도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중세 개론서 한 권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제 서양 중세를 암흑시대로 가르치는 선생은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일에 하나,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면 바로 선생 자리에서 쫓아내야할 것이다(아마 내 눈으로 목격하다면, 바로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눈에 중세야말로 고대의 학문과 문화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르네상스의 입장에서도 틀린 지적이다. 왜냐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연속성은 중세 고딕 문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쟈크 르 고프는 중세를 지속적인 르네상스의 역사로 파악한다.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 문명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노력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를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이 책의 장점에 속한다.

이 책은 우리가 중세에 대해 알아야하는 대부분의 주제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서양 중세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담고 있는 교과서.

중세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우 좋은 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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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의 역사
Ideas and Men - The story of western thought
크레인 브린튼 지음, 을유문화사




살아가면서 어떤 인생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모색을 하게 된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에서부터 거대한 문제들(Big Questions)까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인류의 역사는 문제 해결의 역사이고 욕구 충족의 역사였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고 욕구가 충족되려면 먼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듯이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유리창에 금이 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인생의 방향이라는 것도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 이해의 한 방식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세계를 신이 창조한 어떤 것, 그래서 신이 다시 구원해주는 그 날을 향해가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당하여 세계는 희망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사상의 역사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폄하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에서 빠진 것은 객관적 사실과 자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 빠져 있다. 요즘 하도 반지성주의의 물결이 세차게 대중의 머리를 휘어 감아 돌리는 바람에, 이러한 사실을 종종 잊게 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의 사상 사조는 분명 '반지성주의'이다. 실존주의자들,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반지성주의의 스타들이다. 하지만 반지성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지성'이다. 이는 '지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지, 이제 지성에 대한 판단중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보다 면밀하게 지성에 대한 연구와 탐구를 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상사(지성사)를 꼼꼼하게 읽는 것은 전문 학자의 몫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나 사상은 그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채 현대로 전해져 온다.

현대 기독교와 중세 기독교는 다른 성격의 종교이다. 똑 같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신에 대한 해석이 판이하게 틀려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변화는 현실 세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즉 변해가는 현실 세계를 따라가기 위해 종교도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현대 사회가 개인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나름대로 힘든 여정이긴 하지만, 지성사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독서가 수반되었을 때, 현대의 분석 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현재 이 책은 온라인서점에서 구할 수 없음. 오프라인 영풍문고나 교보문고에서 구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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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오래된 글인데 2012년에 쓰신 글들도 있기에 댓글 달아봅니다. 혹시 이 책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학생인데 이 책을 구할 데가 없네요. 중고나라에 올라온 것도 없고요..

    • 사시는 곳이 서울이시라면, 영풍문고나 반디앤루니스 오프라인 서점에 가셔서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영풍 문고는 약 1년 전쯤 있는 것을 확인했거든요. 온라인으로는 구하기 힘듭니다. 오래된 책이라. 저는 이런 책들은 자주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해 뒤져서 사거든요. 제가 구입했을 무렵(2000년대 초반)에도 온라인 서점에서는 절판으로 나온 책입니다. ~ 책은 무척 좋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성사 책 리스트도 한 번 추려서 올려볼께요. ^^

    • 아 인터넷 상에서 못 찾아도 오프라인에 있는 경우가 있나요? 한 번 가서 찾아봐야 겠네요! 꼭 필요한 책이라..ㅠㅠ 아무튼 감사합니다! 지성사 책 리스트 올리시면 꼭 와서 볼게요!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르네상스

폴 존슨 지음, 한은경 옮김, 을유문화사



간결하면서 압축적이다. 단점이 있다면 도판이 없다는 것인데, 조금의 성의가 있다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겠다.

역사와 경제적 배경, 문학과 학문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조각의 분석, 르네상스의 건축, 르네상스 회화의 사도적인 계승, 르네상스의 확산과 쇠퇴로 구성된 이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짧은 요약서로 읽힌다. 더구나 르네상스의 확산과 쇠퇴는 최근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하지만 중세와 르네상스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13세기말은 아직 고딕 시대였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기운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딕 자연주의와 르네상스는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설명이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탁월한 요약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르네상스 - 10점
폴 존슨 지음, 한은경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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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 8점
이인호 지음/아이필드




중국, 이것이 중국이다
이인호 지음, 아이필드



“그만큼 중국인들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 530쪽



칠백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면 다들 고개를 흔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가깝지만 일본보다 더 모르는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 몇 권을 읽는 것보다 이 책 한 권 정도면 충분하다. 그만큼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실제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의 이야기나 배낭여행기 등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을 통해서 본 중국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깐 “착하게 살아서 천당 간다”의 태도가 매우 약하다. 중국의 창조 신화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우주의 창조자인 반고가 죽어 그의 육체가 동물이며 식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러니 그들이 믿었을 지도 모를 유일한 창조주는 아예 애초부터 죽고 없었다.

이러한 현실적 세계관은 매우 이기적인 중국인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미소를 머금고 접근해 그것을 이용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약삭빠르다는 표현은 여기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회 속에서 ‘의리’는 얼마나 고맙고 값진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이기적이면서도 호형호제하는 벗에게는 모든 것을 내주게 만들게 된다.

은근과 끈기였나? 우리 민족의 특색을 그렇게 설명했던 윤리 교과서가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중국과 비교한다면 게임이 안 된다. ‘愚公移山’ 이야기는 중국인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양자강의 물줄기를 황하강으로 잇는 삼협댐 건설공사가 진행 중인데, 이 공사 계획이 나온 것이 84년 전이고 중국수자원위원회가 40여 년의 연구에 거쳐 확정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완공하려면 아직도 몇 십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다 합쳐보면 100년이 넘길 이 공사 계획은 우리 나라에선 꿈도 꾸지 못할 계획일 것이다.
(* 한국의 정책 입안자와 정책 시행 담당자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불과 5년 앞을 내다보지 않는 계획을 시행한다. 최근 문제되고 있는 신용카드도 바로 이러한 정책들 중의 하나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경기부양을 위해 나중 가서 망가질 것이 뻔한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일부 학자들은 중국 붕괴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중국의 빈부격차가 심하며 사회 불안정 요소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중국의 실업률은 매우 심각하다. 인구는 많지만, 그 인구를 소화할 일자리의 수는 턱없이 모자란다. 도시와 농촌, 동부와 서부간의 격차는 심각할 수준이다. 서부에서는 끼니 걱정을 하고 옷 한 벌로 일 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동부에서는 우리 돈으로 천만원이 넘어가는 PDP를 사서 거실에 걸어두는 이들도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서구의 학자들은 중국 붕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 문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자와 노자의 나라는 계속 그 땅에서 지속될 것이며 세계 곳곳의 차이나타운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내전에 휩싸이더라도 말이다. 중국에서 내전과 내란은 심심하면 일어나는 일들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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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판되었고 중국에 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다른 책을 읽어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다시 꺼내 보는 것은 가까운 나라이지만, 어쩌면 일본보다 더 모르는 나라가 '중국'이 아닐까 싶은 듯하기 때문이다. 성공회대 김명호 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대 중국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생겼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은 지 십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그 고정관념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교육의 폐해가 얼마나 오래 동안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걱정하게 된다.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잡다한 정보들을 병렬적으로 구성한 책이다. 따라서 한 번 훅 읽기 좋다. 페이지는 많지만 어렵거나 전문적인 지식이나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기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좋을 듯 싶다.  (2012년 9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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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아롬미디어



에라스무스 -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승리와 비극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하나의 세계관이 여기 있다. 하지만 이 세계관은 사람을 유혹하지도 선동하지도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을 내뿜지도 않는다. 언제나 차갑고 건조하다. 늘 조용하고 방관자의 시선을 가진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해내어 보는 이를 찬탄케 만들지만 곧바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 그런 세계관이다. 그래서인지 이 세계관은 다른 편에 서서 보면 늘 우유부단하며 지나치게 신중하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더구나 언제나 교육의 중요함을 설파하며 교양을 강조하고 문명화된 인간을 요구한다.

“현재의 제 모습, 저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Salve itaque etiam atque etiam, pater amantissime, pater decusque patreiae, litterarum assertor, veritatis propugnator invictissime.(안부 올립니다, 다시 한번 안부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조국의 명예, 예술의 수호신이여.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실의 투사시여.)”

젊은 프랑수아 라블레는 늙어가고 지쳐가는 에라스무스를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교육과 웅변(eruditio et eloquentia)의 시대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언어인 시대, 이제 사고한다는 것은 패거리들의 망상이 돼버렸고 루터식 아니면 교황식으로 획일화되고 학자들도 품위 있는 편지나 소책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 아낙네들이 하는 식으로 거칠고 저급한 욕지거리를 서로 퍼부어대는 시대’에 젊은 라블레는 고백을 한다.

흔히 인문주의로 번역하는 Humanism의 역사는 서구 근대의 역사이지만, 늘 미완의 역사로만 그친다. 하지만 ‘실현되는 않는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고 츠바이크가 서술하고 있듯이 무릇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와 지식인들에게 인문주의의 이상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막 시작하는 히틀러의 독일 속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뒤새기면서 광신을 멀리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문주의의 이상과 염원을 갈구하고 있다.

“언제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스스로 지쳐버리는 것이 모든 광신의 운명임을. 영원한 것, 조용히 인내하는 것, 즉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과 광신의 시대 속에서 츠바이크는 사람들에게 에라스무스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브로노프스키, 매즐리슈,(<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푸른 역사, 388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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