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영화 +21


내가 수줍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샘 쉐퍼드Sam Shepard가 73세의 나이로, 수다스러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했던 이 세상과 헤어졌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재능이며, 그의 언어가, 그의 표정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며 혼자 숨겨두었던 존재들이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연결고리는 없겠지만, 모나드 바깥에선 단절된 모나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 때 생각했지만, 태어남-죽음은 하나의, 일체의 모나드임을.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궤도를 돌아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궤도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주자. 샘 쉐퍼드를 떠올리면서, 천천히 그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아. 젊었던 그가 나왔던 테렌스 멜릭의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은!! 혹은 줄리 델피와 함께 나왔던 <<Voyage>>는 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모차르트: 차이데; 아리아, Ruhe Sanft - 펠리시티 롯/ 모차르트: 레퀴엠, K626 - 아카데미 합창단/ 라즐로 헬타이 


집에 있는 아마데우스 OST LP를 듣지 않은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예전, 2장의 레코드판으로 된 이 앨범을 꺼내 D면 첫 번째로 나오는 이 아리아를 즐겨 들었다. 모차르트는 그냥 천재다. 이 영화는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질투이 주 테마다. 그 위로 수놓아지는 음악들.


이 영화의 힘은 대단해서,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살리에르가 독살했다거나, 혹은 살리에르의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와 증오가 하늘을 찌를듯했다고 믿을 지도 모르겠다. 이 스토리는 애초에 소문으로만 떠돌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나) 독살설을 푸쉬킨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라는 짧은 극시로 시작해 피터 쉐퍼(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자)의 희곡으로, 그리고 영화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살리에르는 의외로 괜찮은 작곡가였다. 가난했던 많은 작곡가들을 도와주었으며 베토벤, 체르니, 슈베르트, 리스트의 스승이었고 모차르트의 아들도 살리에르가 가르쳤다.


어쩌면 모차르트의 음악에 비한다면(비교라는 단어가 그렇긴 하지만),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2001년, 혹은 2002년.. 어느 날 적은 글이란다. 이젠 가물가물한 영화이야기. 무슨 열정이 있었던 건지, 그 때 영화를 참 많이 봤다. 타란티노 처럼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도 했고, 미장센이 어떠니 하며 술자리에서 떠들곤 했는데, 지금은 영화? 1년에 한 편 볼까 말까다. 극장 갈 일도 없고 영화볼 시간도 없다. 하긴 그런 시간 있으면 책을 읽고 말지. 아놀드 하우저는 영화에 대한 대단한 기대를 했지만, 영화는 그냥 산업일 뿐이다. 문화산업. 아도르노가 그토록 비난했던.  나이가 들수록 벤야민보다 아도르노가 궁금해지는 건, 나도 아도르노같은 꼰대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이은주를 보면, 여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홍상수 감독과 사랑에 빠진 김민희도 그렇고. 





*  * 

 

 

 

번지 점프를 하다

김대승 감독. 이병헌, 이은주 주연

 



1.

난 남자를 사랑해. 나도 남자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남자야. 하지만 눈부시게 어우러진 우리 사랑을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저주하고 미워하지. 그래서, 그래서, 변명이 필요했어. 우리 사랑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그래, 그건 변명이었어. 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야. 난 내 사랑이 공격받는 것이 너무 싫었어. 날, 날, 이해해줄 수 있겠니. 넌.

 



2.

사랑을 미화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슬픈 독백, 그리고 공모. 그 독백과 공모 틈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여울. 끔찍한 일반화의 오류. 거짓말임이 뻔한 스토리. 어느덧 세상이 그 빛을 잃어버리고, 우리 영혼이 어떤 불순한 욕망 덩어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사랑은 이미 죽어 흔적 없고, 그 흔적 하나 하나마다 깊은 호수 바닥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들 중 몇몇은 구름 꼭대기까지 올라가 곧은 직선이 되어 떨어져 내리지. 아주 오랫동안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그 사랑의 흔적을 되살리기 위해서



3.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에게 지치고, 사랑이 흔해지고, 사랑에게 미움을 당하고, 사랑의 눈물 속에 비친, 쓸쓸한 뒤돌아섬과 만나고, 그렇게 우리 곁에 사랑이 사라지고, 참혹하게 우리 젊음 곁을 지나가고, ... 하지만 영화 속 두 사람, 믿거나말거나, 이 두 사람, 사랑과 다시 만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영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낙원추방 Rakuen Tsuiho: Expelled from Paradise, 2014

감독 : 미즈시마 세이지 Seiji Mizushima 水島精二




애니메이션 보는 중년은 좀 이상한가? 아니면 오타쿠스럽나? ... 실은 매주 빠뜨리지 않고 <원피스>를 보고 있으니...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무척 탄탄하다. 특히 다양한 서사, 극 장르에서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서로 뒤섞여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그것이 그냥 개념적인 차원에서 머물던,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처럼 끝없이 의문에 의문을 물고 나아가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가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2014년 하반기 일본 영화 시장을 평정한 <기생수>라는 작품도 만화가 그 원작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시장은 크고 탄탄하다. 







최근 본 <낙원추방>은 애니메이션 자체의 극화나 연출도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스토리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육체를 버리고 비트화된 정신만을 가지고 메모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나, 이들과 대비되어 환경 오염과 전쟁 등으로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인간들의 모습은, 이 설정부터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비트화된 정신의 인간들이 모여사는 '디바'에 해킹하여 들어온 '프론티어 세터'라는 존재가 주는 충격은 과연 '인간이란 뭐지'하는 생각까지. 


그렇다고 이 애니메이션이 이런 심각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심각하지 않다. 빠른 전개와 현란한 전투씬은 무척 재미있으니까.  






자세한 스토리를 밝히는 건 이 작품을 보게 될 이들을 위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림체도 좋고 화면 전환이나 연출도 좋다. 메카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꽤 좋은 선택이 될 듯 싶다. 이런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보면 더 재미있을 테지만, 워낙 애니메이션 시장이 작고 불법다운로드가 횡행하는 터라, 국내에는 개봉하지 못할 듯 싶고, DVD나 온라인에서 다운로드 받아 보아야만 할 듯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다이버전트 Divergent 

닐 버거 Neil Burger 감독 

쉐일린 우들리 Shailene Woodly, 테오 제임스 Theo James 주연 




1년에 영화 1편도 보지 않았던 듯 싶다. 그것도 10년 넘게. 20대 초반 월간 키노의 모니터 기자를 했고, 비디오 테잎을 수집했으며,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리뷰를 광적으로 올리며,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비디오 가게 점원 생활을 하던 내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한가? 


그 사이는 영화는 더욱 산업화되었고 헐리우드 영화 직배 반대를 외치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국내 영화계도 대기업 자본들이 들어와 산업화, 전문화되었다. 그런데 영화가 예술이라고? 내가 영화를 멀리 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측면이 더 강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영화를 한 두 편 극장이 아닌 TV나 다른 모니터로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업무 비스무리한 이유로. 실은 디지털 콘텐츠를 유통하는 회사로 옮긴 탓에 접근성이 매우 좋아졌다. 왠만한 영화들은 다 디지털파일로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가끔 영화를 보는 일이 생겼다. 그 결과 책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다(이를 어쩌나). 


* *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유명하다. 즉 탄탄한 스토리가 이미 있는 셈. 이번 영화는 원작 소설의 일부 이야기만 가지고 왔기 때문에, 벌써 2부를 기다리는 팬들이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시작을 보여주었다. 


SF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현실스럽지 않지만,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가상의 세계(관)이 될 것이다. 이는 게임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쉽게 사용하는 걸 보고 거부감이 들기도 했으나, 세계관이라는 단어 말고 딱히 다른 단어도 없었다. 


이 영화는 세계 종말 이후의 인류가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해 5개의 인위적인 종족 - 이타적인 애브니게이션, 용맹한 돈트리스, 정직하고 법을 수호하는 캔더, 평화와 농업 생산을 하는 애머티로 나누어 살아가는 데에서 시작한다. 각각의 종족은 서로 평등하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가령 애브니게이션을 정치를 담당하며, 돈트리스는 경찰/군대, 캔더는 사법, 애머티는 생산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각 종족에서 알아서 키우다가 성인일 될 때 각자 스스로 종족을 선택하도록 한다. 이 때 어느 종족에 어울리는가를 테스트를 하며, 테스트 결과(혹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종족을 정하고 그 곳에서 살아간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 제도인가.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 폭력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도리어 모든 이들이 종족을 선택하고 이를 따라가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하니까. 


그런데 이 종족에 속하지 않거나 이 다섯 종족 모두에 들어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이를 다이버전트라고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트리스(쉐일린 우들리)가 바로 다이버전트이며, 너무나도 이타적인 애브니게이션에 대한 다른 종족들의 불평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애브니게이션 종족을 도와주면서 자신이 그 전에 속한 종족에서 나와 새로운 독립을 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의 재미는 반감시키기 때문에 생략. 


이렇게 '종족 나누기'는 지극히 고대 역사나 서사물에서나 등장할 만한 이야기다. 대부분의 SF 장르들은 이렇듯 고대 서사에서 많은 부분을 빌려온다. 


* * 


나는 쉐일린 우들리라는 여배우가 흥미로웠다. 대단한 미인도 아니면서 뭔가 매력적인 구석이 있었다. 한국 영화들은 여배우가 두드러지는 경우가 드물고, 대중들도 여배우의 미모나 몸매만 보는 천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터라, 쉐일린 우들리 같은 배우가 성장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개성 있는 외모와 연기를 하는 여배우들의 성형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는 한국이니... ㅡ_ㅡ;; 


그런데 이 친구, 현재 상영 중인 <안녕 헤이즐>에서도 주연이네. 영화 소개 동영상을 보면서 <다이버전트>의 트리스를 떠올리지 못했는데 말이다. 


* * 


<다이버전트>, 시간 때우기 용으로는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다. 재미있다. 아마 2탄이 나오면, SF 특유의 재미가 나올 것같긴 하지만, 이번 1부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러브 스토리로 인해 SF 장르스러움이 반감되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잠과 깨어남 사이의 장소, 의식과 무의식의 접경 지대, 정상적인 구별과 확실한 경계가 와해되어 현실과 상상의 경계선과 대상과 연상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곳" - 빌 비올라, 1994년 




백남준의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비디오 아트의 새로운 장을 열어보인 빌 비올라Bill Viola. 그의 작품은 의외로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실은 체력까지도 요하는지도... 갤러리에서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선 꽤 많은 시간 서 있어야 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비디오라는 매체가 가지는 물질성에 주목한다면(동양적 시선에서 서구적 확대로 나아갔다면), 빌 비올라는 비디오라는 영상이 가지는 추상성에 주목한다(서구적 시선에서 동양적 탐구로 나아간다).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묻고 시간과 사건(혹은 찰라/순간)의 지속성에 대해 탐구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대부분은 형이상학적이며 압축적이며 반복적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 번 비디오아트와 영화의 상관관계를 묻고 싶어진다. 실은 빌 비올라의 작업들은 단순하지만 집중적인 서사, 혹은 사건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1-2시간 넘어가는 장편 영화 이상의 감동을 빌 비올라의 작품을 통해 얻는다. 최근 들어 나는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과도한 스펙터클과 흥미 위주의 영화들을 보면서 '과연 영화란 예술인가'라고 묻을 수 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반대의 경향을 추구하는 영화들은 극장에서 보기 드물고, 도리어 갤러리에서 상영되는 예술가들의 비디오/영화 작업들에서 보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평자들이 아직도 영화를 예술이라고 강조할 테고, 이미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명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마지막을 '영화'로 끝맺었고, 최근에 읽은 데이비드 호크니는 더 나아가 서사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사진 이미지의 연속으로서의 영화로,  그 매체를 서양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내 편견을 더한다면, 예술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극장에서 개봉하는 장편 극영화가 아니라,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비디오 아트, 혹은 필름 아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주 갤러리에서 만나는 영화Film에서 예술로서의 영화가 가지는 가능성과 만난다.


빌 비올라의 작업은 평면 작업이 가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가지는 추상성 위에 이미지의 연속이라는, 일종의 시간-이미지를 덧씌운다. 그의 작업은 정지된 평면과 흐르는 필름의 운동성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김홍기는 '슬로모션'에 주목한다.


슬로모션은 운동과 정지 사이의 모호한 상태를 형상화해 새로운 지각의 대상으로 만든다. 비올라는 슬로모션 기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삶과 죽음, 실재와 가상, 의식의 무의식 등 여러 대립쌍들이 긴장감 있게 공존하는 모호한 공간을 시각해낸다. 이 '사이 공간(space between)'이 강렬한 파토스와 함께 등장할 때, 관객은 세계의 자리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 

- 김홍기, '사이의 존재론 - 빌 비올라' (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 중에서


다행히 유튜브에서 몇 개의 작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놀랍기만 하다. 클래식 실황 연주 목록도 탁월해졌고, 빌 비올라 작품까지 볼 수 있다니!) 



"비올라는 작품 속에서 관객을 향해 거울을 들어보이고는 완전히 충만한 숭고함의 힘을 보여준다." 

- 리나 아리야 














"튀니지의 사하라 사막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빛과 열이 합작해 낸 초상, 즉 신기루를 보여준다. 사막의 열기는 태양광선을 왜곡시켜 우리로 하여금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을 보게 만든다. 나무와 사구는 지면 위에서 부유하고, 산등성이와 건물들은 일렁거리고, 색채와 형태는 아롱거리는 춤사위로 서로 뒤섞인다. 특수한 망원렌즈를 장착한 비디오카메라는 이 비범한 풍경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실재와 가상 사이 공간 속에서 물리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은 거리낌 없이 서로 뒤섞이고, 결국 우리는 현실에 대한 지각의 확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 김홍기, '사이의 존재론 - 빌 비올라' (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 중에서 







* 이 포스팅은 김홍기의 '사이의 존재론'에 기대어 빌 비올라의 작품들을 기억하고 스크랩하기 위한 것이다. 김홍기의 글에 감사한다. 그의 글을 통해 다시 한 번 나는 빌 비올라를 떠올릴 수 있었고 유튜브에서 빌 비올라를 검색하고 그의 작업들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오전 회의를 끝내고 내 스타일, 즉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다음 판단하려는 이들은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5월의, 낯선 여름 같은 대기 속에 느꼈다, 강남 차병원 사거리에서 교보생명 사거리로 걸어가면서.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했고 읍소를 했다. 상대방이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일은 급하게 처리되어야만 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니, 읍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외주사를 끼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내가.


5시 반, 외주 업체 담당자, '내가 IT 개발자 출신인가'하고 묻는다. 차라리 '작업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여기는 터인데. (* 여기에서 '작업'이란 '예술 창작'을 의미함)


그리고 오늘 '멘탈붕괴'라는 책이 번역되어, 인터넷서점 메인에 걸린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갑상선암'으로 내일 수술을 하시고, 아이는 걸렸던 감기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것같다고 한다. 현재 몸담고 있는 프로젝트는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새로운 이슈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될 과제들을 찾아내는 프로젝트가 되고  있다. (변명 같긴 하지만, 다른 이들을 중간에 그만둔 것을 수습하러 들어간 프로젝트이니, 상황이 나쁜 건 애초에 짐작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적은 메모를 읽는다. 이런 날, 혼자 앉아 아비정전을 보며 여러 병의 맥주를 마시면 참 좋을 것이다. 젊음은 지지 않는 태양이며, 우리 마음 한 켠의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태양은 너무 뜨거워 우리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고 쓸쓸함은 끝내 떨쳐낼 수 없으니, ... 어찌해야 되는 것일까. 











2004년 5월 7일 - 낡은, 낡은, 너무나도 낡은 



날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더워지면 누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늘에서 비가 떨어졌다. 24살 여름, 견디기 힘든 무료함을 오래된 비디오로 견디고 있었다. 새벽 세시, 네시가 되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비디오샵에서 나오지 않고 영화를 봤다. 그 때 날 매혹시켰던 이름들, 아비정전, 레올로, 비포더레인, 희생, 아이다호, 천국보다낯선, 현기증... ... 그 때만 해도 내겐 꿈이 있었다.

 

그 시절, 그 꿈은 너무 견고해서 깨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 때 날 아프게 하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눈(雪)에 취해, 술에 취해, 내게 마지막 목소리를 들려주고는 떠나갔다. 그녀들이 떠나가고 난 다음 난 아프지 않았다. 그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가끔 생각나면 서글픈 생각이 앞을 가린다.

 

사연 많은 여자들이었고 그 사연에 못 이겨 사연과 함께 거리 속에 묻혀가는 여자들이었다. 내겐 그녀들에게 내밀 손이 없었고 내 얼굴은 착하게 생긴(실제로는 음흉하고 어두운) 가면으로 씌어져 있었다.

 

그 때 아비정전을 봤다.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유덕화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장국영도. 비가 많이 오는 영화였고 무더운 영화였고 이미 지쳐버린 젊음들이 나오는 영화였다. 내가 젊었을 때, 나에겐 이미 젊음이 없었다.

 







"I finally arrived at my mother's house, but she didn't want to see me. The maids told me she no longer lived there.

As I was leaving, I could feel a pair of eyes watching me from behind,

but I was determined not to turn around. I just wanted to find out what she? looked like. Since she wouldn't give me that chance, I wouldn't give it to her either."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지 걸어온(혹은 걸어간) 것일까? 기억은 길을 잃었고 의식은 희미해진다. 아주 길게.

커피숍에서 커피를 가지고 난 순간, 빌딩 지하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나오는 젊은 여자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남자와 만났다. 그러자 테이크아웃 종이컵 위로 갈색 커피 향이 밀려들었다. 기억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게, 추억은 고통스럽게 한다. 어느새 2011년도 채 네 달이 남지 않았고, 그렇게 내 삼 십대도 지나고 있다.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밤에 마시는 커피가.. 참.. 향이 좋아요..ㅎㅎ 이상하게 낮에 먹는 커피보다도..

    • 저도 밤에 커피를 내려마셨는데, ... 요즘은 거의 마시질 않아요. 다음 날 출근이 힘들더라고요. ㅎㅎ.. 조용한 밤의 커피 향기 참 좋죠~. ^^


 




지금도 이럴까? 하긴 지금은 수도권-비수도권, 그리고 지역마다 지역 이기주의로 변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는 한때 슬프고 비극적이었으나, 이젠 떠올릴 수 있는 추억으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 갈등을 해석하는 걸까.

영화는 유쾌하다. 작고 사소한 소재들은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한다. 마치 즐거운 순정 만화 같다고 할까.또한 젊은 사람부터 나이든 이까지 함께 볼 수 있는 가족영화로 포지셔닝되었고, 성공한 듯 보인다.

그 뿐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를 연결시키기 위한 장치들로만 모든 것들은 이용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재미있지만, 그렇기에 씁쓸하기도 한 영화다. 그 두 지역의 갈등을 경험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블랙스완 Black Swan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나탈리 포트만, 벵상 카셀, 밀라 쿠니스
2011년, 미국



한 편의 잔인한 심리극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닮았다기 보다는 차이코프스키를 닮았다. 비밀스러운 동성애자이면서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차이코프스키를 닮아 있었다.

이 영화는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 역할을 한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아름답지 않고 도리어 처절하고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의도적인 악취미를 보는 것 같아 편하지 못했다.

내 속에 있는 나와 너, 밝음과 어둠, 흰 색과 검정 색, 태양과 달, …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이분법은 우리 영혼 속에서부터 이미 각인되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외부의 이분법으로 우리의 마음마저도 갈등하는 나와 너로 조각난 것일까.

극(drama)는 원래 제1배우와 제2배우와의 갈등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블랙 스완에서는 니나와 니나의 싸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를 여러 명의 다른 인물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현실과 환상은 서로 뒤섞이고 결국에는 어느 것도 현실이 아닌 영화 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흘러간다.

결국 나의 이야기가 아닌 영화 속이므로, 관객은 영화에 빠지고 격찬을 아끼지 않으며 나탈리 포트만을 추켜세운다.

그래서 나는 ‘감독의 의도적인 악취미’라고 한 것이다. 이 기분 나쁜 영화는 예술 창작의 과정을 과장된 심리적 갈등의 드라마로 각색하고, 우아함을 이기적인 욕망으로, 사랑에의 각성을 자위와 섹스로 몰아가며, 역할에의 몰입을 자신을 버리고 다른 자아를 쟁취하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결국 니나는 스스로를 찌르며 영화 전체를, ‘백조의 호수’를 부정한다.



(* 베스가 위노나 라이더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그녀가 주연을 한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Pierrot Le Fou 미치광이 삐에로

(France-Italy 1965)

 

감독: Jean-Luc Godard

주연: Jean-Paul Belmondo, Anna Karina




영화가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벨라스케즈Velazquez 대한 엘리 포레Elie Faure 해석으로 시작해서 이브 클랭Yves Klein으로 끝나는 영화는 고다르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영화가 글쓰기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1965년도의 영화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다양한 장르적 실험으로 채워져 있으며 랭보와 셀린느를 오가며 글과 영화,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감독의 자의식 과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의 자의식이 용납되지 않는 작금의 영화들 속에서 누벨 바그의 놀라움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영화가 예술이라면, 고다르의 영화는 모더니즘 예술의 극점을 떠올리게 한다. 스토리는 부서진 대사들 밑에서 징검다리처럼 관객의 시선에 의해 붙여져야만 온전해지고, 배우는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고 이미지와 소리, 분절화된 단어들 속에서 숨쉬며, 마치 시대를 너무 앞서가, 오래된 혼성모방처럼 영화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다른 매체를 꿈꾼다.

고다르는 이는 마치 조절되고 관리된 일종의 해프닝happening이며, 그와 동시에 완전히 무의식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Velazquez, past the age of fifty, no longer painted specific objects. He drifted around things like the air, like twilight, catching unawares in the shimmering shadows the nuances of color that he transformed into the invisible core of his silent symphony. (벨라스케즈는 50 이후로, 이상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반짝이는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변화시켰던 색의 미묘한 차이를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잡아내면서, 공기, 황혼이나 여명 같은 것들의 주위를 떠돌아다녔다.)



영화는 일종의 Meta-Essay. 고다르는 페르디낭( 벨몽도) 대사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Not to write about people’s lives anymore, but only about life-life itself. What lies in between people: space, sound, and color. I’d like to accomplish that. Joyce gave it a try, but it should be possible to do better.

범죄 영화의 형식에 기대어 있지만, 장르적 특성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영화의 글쓰기를 보여주며, 그것이 얼마나 현대적 방식인가를 증명한다. 결국 그것이 모던 예술이 가지게 되는 자의식 과잉의 막다른 골목을 향하게 지라도.



참고: Pierrot le fou: Self-Portrait in a Shattered Lens by Richard Brody (www.criterion.com)
(불어 대사의 영어 번역은 아티클에서 인용하였음)



Pierrot le fou Trailer (Jean-Luc Godard, 1965) - Subtitled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2

  • 아 누벨바그는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기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영화라는 것은 어때야 한다는 전형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일까요..
    좀더 많이 보고 느껴야 겠단 생각이 드네요

    • 누벨 바그 영화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은 언제나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요즘 영화들이 대규모 물량 투자로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것들을 말이죠. ~. 댓글 감사합니다. ^^

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10점
정성일 외 지음/바다출판사

왜 영화를 보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글쎄. 그냥 보지 않을 뿐이다. 아직까지 장 뤽 고다르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사랑하며, 영화라는 이름을 우정을 믿고 싶어하지만, 이 거친 자본주의 앞에서 우정은 늘 그렇듯 믿을 수 없는 이정표와도 같다. 1년 동안 수 백 편의 영화를 기억했고 틈나는 대로 영화를 보던 시절이 있기도 했다. 유명하다는 영화를 어떻게든 챙겨서 보았고 습작 삼아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며 영화 평을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땐 영화에 대한 신기루만 보았을 뿐, 진짜 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며칠 전 정성일의 영화 평론집이 나왔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책이었던가! 서점에서 바로 구입했다. 편집자의 기준에 의해 선정된 글들로 한 권의 책이 되었지만, 내가 좋아했던 그의 글 몇 편은 실리지 않았다.
 
한때 영화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컬트 영화를 찾아보고 너도 나도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배웠듯이 나도 비디오 가게에서 반 년 가까이 일을 했고 비디오 데크를 두 개를 붙여놓고 구하기 힘든 영화를 카피하느라 한 계절을 보내기도 했다. 문학을 하던 친구들마저도 영화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소설과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탐구하느라 바보같은 문학평론가들이 얼마 되지 않던 지면을 낭비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형편없는 문학성을 변호하기 위해 뻔뻔하게도 '소설은 영화와 경쟁한다'라고 떠들던 소설가들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 문학평론가나 소설가는 한국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결국은 영화도 예술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만드는 구조물이 아니었고 협업의 과정과 부단한 협상과 금전적 거래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러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는 웃고 우는 기계가 되어갔으며, 감독은 영화 제작자 앞에서 목소리가 줄어 들어갔다. 가끔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소수의 몫이었고 대중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국의 소설은 그 위대한 산문의 전통 속에서 형편없는 대중문화와 경쟁하느라 자신의 위대함을 잊고 말았다)

결국 어느 세계에나 있는 구분이 영화를 뒤덮었고, 영화를 그렇게 사라졌다. 젊은 날의 묘비처럼 정성일의 낡은 책이 세상에 나왔고 미래에는 없고 과거에 있었던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다.



오랜만에 정성일의 오래된 글을 찾아 읽는다. 벌써 20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Highway Revisited
http://php.chol.com/~dorati/web/roadshow/road9209.ht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 8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민승남 옮김/민음사



대단한 찬사 속에서 읽을 만한 소설책은 아니다. 하지만 대단한 찬사 속에서 이 소설을 읽었을 독자들에게 아마 그 찬사는 그대로 전달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관심과 자기 보호로 뒤범벅이 된 폭력성'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주제의식이라면,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단편은 매우 잘 씌여진 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녀의 작가적 재능은 폭력적인 이 세계나 이 세계 속의 개인들에 대한 집요한 탐구 의식, 또는 진지한 성찰에 있기 보다는 번뜩이는 재치가 묻어나는 짧고 강렬한 스토리라인에 있는 듯하다(그래서 그녀의 많은 단편들이 영화로, TV 드라마로 재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곳에서 멈춘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들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과는 달리,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은 잘 만들어진 TV 단막극을 보는 느낌을 던져준다. 어쩌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점이 그녀의 장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권 사서 읽었지만, 그녀의 나머지 책들을 사서 읽을 생각은 별로 없다. 그 시간에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도 더 나아보인다. (혹시 방송 단막극 작가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이 소설가의 작품들은 필독서다. 놓치지 말기를.)

 Patricia Highsmith (1921 - 1995)

미국의 범죄 소설가. 스릴러 작가. 2 다스(dozen) 이상의 작품이 필름으로 옮겨졌다. 혹시 오래된 스릴러 영화를 볼 때, 원작가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나올 수도 있으니 유심히 보기를.
(위키피디아 참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0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 10점
로베르 브레송 지음, 오일환 외 옮김/동문선




너의 관객은 책의 독자도, 공연극의 관객도, 전시회의 관람객도, 콘서트의 청중도 아니다. 너는 그들의 문학적 안목과, 연극적 취향과 회화적 기호와, 음악적 센스의 욕구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120쪽) 


책은 얇고 문장들은 짧다. 로베르 브레송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긴 호흡 대신 짧은 입맞춤, 달콤한 향기보다는 스산한 조명빛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책은 권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데이비드 린치의 (상대적으로 형편없는) '빨간 방'이 낫다. 적어도 '빨간 방'을 읽는다는 것은 트렌디한 어떤 삶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며(서점에 깔린 '빨간 방'들을 본다면 린치가 이토록 인기가 많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트윈픽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요즘 유행타는 '미드'의 원조격이지 않은가) 창의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잊혀져가는 로베르 브레송의)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아직까지 영화는 상업주의, 자본주의, 장르 시스템에 빨려들어가지 않았으며, 예술가, 혹은 예술가 집단의 영화로운 창조물이며, 현대의 마지막 예술 장르임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의 죽음과 세 번의 탄생에 대하여.
내 영화 작품은 처음에는 내 머릿속에서 태어나고, 시나리오 위에서 죽는다; 그리고 내가 사용하는 생생한 모델들과 실재 사물들에 의해서 부활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은 촬영된 필름 위에서 죽는다. 그러나 편집이라는 어떤 순서 속에 자리잡아 배열되어 스크린 위에서 투사되면 물속의 꽃들처럼 다시 소생한다. (28쪽)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영화는 창조되어진다.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실들을 변형하거나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실들 사이에, 그리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새로운 관계들을 엮는 것'이다.(29쪽) 


드뷔시는 뚜껑이 닫혀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62쪽)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닫혀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던 드뷔시를 잊어버렸다. 심지어 영화 감독들마저도!

영화는 돈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가, 창조되기도 전에 펀딩(funding) 문제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예술의 위대한 전통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으며, 당당하게 자신은 상품이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스타-시스템. 이것은 새로움과 예측 불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드넓은 매혹의 힘을 무시하는 시스템이다. 이 작품이건 저 작품이건, 이 주제건 저 주제건 똑같은 얼굴들을 대면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126쪽)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시대착오을 향한 모험이자 도전이 될 것이다. '움직이는 이미지들과 소리들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시네마토그래프)를 향한, 현대의 마지막 예술 장르인 영화를 향한 사랑 고백이 될 것이다.






*  *   *


로베르 브레송: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person_info.php?id=9412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Comment +4

  • 너무 어려운 듯... 책을 오랫동안 읽지 않았나 봅니다.

    • 요즘 사람들이 너무 쉬운 책들만 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리어 최근에는 제가 너무 유별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니깐요. 이 책, 무척 좋습니다. 저의 편파적인 평가이긴 하지만요. ^^

  • 페킨파 2010.04.22 15:45 신고

    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5.asp?lessonidx=off_snHong03 여기서 평론가 홍성남 선생님이 브레송 강의를 하시네요

    • 설마 광고는 아니시겠죠? ^^.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 강의 세부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나오면 좋을 것같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약간 읽기 불편한 번역이긴 하지만, 꾹 참을 수 있는, 국내 저널에서는 읽기 힘든 생소한 칼럼들의 모음. 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를 읽는다. 나에게 익숙한 이름들: 노암 촘스키, 장 브리크몽, 레지 드브레, 존 버거.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건 기 스카르페타의 ‘장 뤽 고다르’.


영화에 대한 내 생각 - 그것은 시작하자마자 자본주의 앞에서 몰락해버린 예술, 혹은 예술가에 대한 저주다. 스크린 앞에서 이제 누구도 예술을, 영혼을,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시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돈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예술 영화의 정신은 스크린에서 사라지자마자, 그 영상 이미지는 시간 위에 수놓아지는 서사를 시적인 감수성으로 육체를 바꾼 채, 미술관의 작은 브라운관이나 흰 벽면, 또는 여기저기 뿌려지는 이미지들로 이어진다. 이제 예술을 사유하는 영화감독은 없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인디 영화 감독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장 뤽 고다르는 다시 예술을 이야기한다.


장 뤽 고다르를 우리 앞에 불러세운 이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시트인 기 스카르페타(Guy Scarpetta). 그는 이렇게 적는다.



- 고다르에 관한 이상한 풍경: 모든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그의 새 영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인터뷰나 기자 회견을 하면 “영화는 기억을 만들고 티브이는 망각을 만든다”, “그것은 당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당연히 이미지일 뿐이다”, “문화가 규칙이라면 예술은 예외이다”와 같은 길이 남을 만한 번득이는 발언들을 기대하게 하는 영화계의 소크라테스, 그것이 대중들에게 심어진 그의 이미지이다.


- 세르쥬 다네가 말한 대로, ‘이미지들이 완전히 판매 촉진과 광고, 즉 권력의 편으로 돌아서버린’ 세상에서 튕겨져 나와, 침몰하는 난파선에서 구출 된 듯한 창조물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열정>, <프레농 카르멘>과 같이 결연하게 주류에 반하는 독창적인 영화들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저항이란, 그에 따르면, 영화의 예술적 요구들을 축출하려는 세상의 기획에 맞서 그것들을 지탱하는 것 - 스토리의 몫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겪어보지 못한 속도를 발명해내며, ‘위대한 형식’의 모범에 따라 영화를 구성하는 것(시각적 모티프의 구조물로서 먼 메아리의 울림과 리듬의 대회, 불협화음이 만들어 내는 건축적 구성), 그리고 그레코와 들라크루아로부터 베토벤에 이르는 소위 주류예술에 영화를 맞서게 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하는 예술’로 영화를 인식하는 것들이다.


- 고다르 자신의 영화를 포함하여 영화사 전체에서 추출한 장면들과 다큐멘터리 사진들, (그가 영화의 주된 경쟁 상대라고 평했던) 회화에서 온 이미지들이 겹쳐지고 미끄러지며 서로 대화하고 뒤얽혀 달려가다가는 분할되고 재구성된다: 영화가 어떻게 역사를 굴절 시켰는가, 어떻게 역사에 개입했으며 지금은 잃어버리고 만 하나의 존엄한 예술로서의 지위를 어떻게 획득하였는가 하는 것을 한꺼번에 좀 더 관찰하기 위함이다.



서울, 가을, 10월, 수요일, 어느, 오후, 무료함을 뚫고 지나가는 찬란한 빛처럼, 색처럼, 흔들리는 운동처럼,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를 보고 싶다.


신고

Comment +0


‘영화 스크린 쿼터제’로 영화인들이 데모할 때쯤이었다. 나도 한 때 영화광이었고 비디오 가게 점원이었으며 시나리오를 쓰던 때가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친구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나와 논쟁이 붙었던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8mm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녔으며 대학 때는 단편 영화를 찍고 다녔다. 그러나 나는 직장인이었고 그는 번역가였다. 영화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나는 영화인들이 아예 보기도 싫다는 입장이었고 그는 이해해 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직도 나는 스크린 쿼터를 주장하는 영화인들이 보기 싫다. 한국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상품 중의 하나인 ‘영화’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보호하기 위한 ‘스크린 쿼터제’를 주장하면서 ‘문화’니, ‘예술’이니 해대는 모습이 역겨웠다. 차라리 솔직하게 ‘돈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했으면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돈 벌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종종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들이 나와서 떠드는 건 ‘문화 보호’요, ‘예술’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한국 문화와 예술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그럴까. 내가 보기에 한국 문화와 예술에 기여하는 이들은 아르바이트 해가며 제작비 모아 영화를 찍는 독립 영화 감독들과 그 배우들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쓰는 젊은 작가들이며, 일 년에 몇 백 만원도 되지 않는 돈을 받으며 한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제작 스텝들이지, 나와서 데모하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 영화계가 요즘은 ‘디 워’ 때문에 시끄럽다. 내가 보기엔 전혀 시끄럽지 않아도 될 문제인데. 여러 웹사이트 게시판은 난장판이다. 한국 여론 형성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어지는, 아니, 도대체 냉철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점잖게 이야기하는 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드문 포털 사이트의 리플들과 여러 매체 사이트들의 게시물 작성자들이 한국 여론의 핵심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요즘, 드디어 우리들의 네티즌 선생들이 드디어 물을 만난 것이다. 너도 나도 떠들 수 있는 어떤 이슈가 생겼고 이제 너도 나도 온라인 논객이 된 것이다.

영화는 ‘예술 작품’이기 이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 판매되는 ‘상품’이다. 심형래 감독과 배급사의 마케팅 부서(또는 대행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심형래 감독은 이미 ‘우뢰매’를 통해 한국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그들은 ‘디 워’가 시장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또한 영화 평론가들과 관련 매체 기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혹평’을 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들은 ‘노이즈’를 바탕으로 해 ‘심형래’라는 개인을 포장하고 ‘디 워’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온라인을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볼 생각도 없는 사람들도 봐야 될 형국이다. 이제는 안 보면, ‘왕따’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어린 것이나 나이든 것이나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왕따’다. 흥행이 안 될 수가 없다. 이제 공중파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까지 등장했으니, 아이들 손이라도 잡고 가야 될 판이다. 이는 마케팅의 승리다.

그런데 왜 이런 판에 젊은 영화인들은 말려드는 것일까. 너도 나도 나서서 ‘디워’의 마케팅을 도와주는 걸까. 배가 아픈 걸까. 300억이나 가지고 찍었는데, 여기 저기 매체에 나와선 기존 시스템에서 냉대 당한 감독의 설움을 이야기해대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대체 작품성이라는 전혀 없는, 돈만 갖다 부은 영화를 들고 나와 ‘대단한 영화’라고 해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말려드는 것도 그들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일종의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

우리는 선량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잔인하고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잡아 먹히느냐, 잡아 먹느냐’의 현장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디 워’를 볼 생각도 없고 만약 보게 보더라도 나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혹평’을 하게 될 것이다. 충무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는 상품이지, 작품이 아니다. 영화 평론가들은 영화 작품이 아니라 영화 상품이 갖추어야 될 최소한의 요건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야 했다. 영화 상품이 갖추어야 될 요소들 중에 중요한 것이 ‘스토리’이다. 하지만 엉성한 스토리라도 정신없이 부서지고 빠르게 전개된다면, 그래서 재미있다면 된다. 도대체 요즘 시대에 누가 진지한 감동을 바라는가. ‘트랜스포머’나 ‘다이하드’를 보면서 완벽한 스토리, 진지한 감동, 삶과 세상을 성찰하기를 바라는가. 혹시 심형래 감독과 그들이 주장하듯이 영화인들은 알게 모르게 어떤 편견에 휩싸여 있는 건 아닐까.


신고

Comment +0



영화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몇 명의 감독은 좋아한다. 왕가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로베르 브레송, 장 뤽 고다르.

하지만 영화는 예술이 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아니 현실적 여건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끝내 현실에 굴복하고 마는 양식이다. 예술가 1인의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작품도 아니다. 결국 감독과 주연 배우 몇 명의 작품일 뿐이다.

이런 생각이 깊어지자, 영화 보기를 그만 두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내가 영화를 좋아하던 그 무릅, 영화소년소녀들의 열렬한 우상이었다. 그를 통해 영화를 알게 되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가 지지했던 '달은 ... 해가 꾸는 꿈'의 박찬욱은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지만, 그는 이제 영화소년소녀들의 열렬한 우상도 아니고, 그 때처럼 영화소년소녀들이 많지도 않다.

영화, 20세기 초반 많은 문예이론가들이 열광했던 새로운 이 예술은 이제 영화 감독들에 의해서 예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험들에 도전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좋아했던 영화들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정성일, 1992년 9월, 로드쇼
Highway Revisited
 



신고

Comment +0

두 편의 영화를 노트북으로 보았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극장에도 거의 가지 않는 내가 영화를 보는 채널은 온라인이다. ‘에라곤’과 ‘우주전쟁’ 내가 본 두 편의 영화다. 이 두 편은 영화의 완성도에서나 극적 요소의 사용, 스토리의 박진감 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라곤’은 형편없는 영화이며, ‘우주전쟁’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아주 가끔 영화를 보면서 왜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들은 스토리를 왜 이렇게 구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구체화시키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에라곤’과 ‘우주전쟁’을 보고 난 뒤, 나는 그들을 위해 상식적이며 기본 사항에 해당되는 몇 가지 사실을 적어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1. 관객에게 대사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지 마라.
- ‘에라곤’은 대사를 통해 상황을 너무 자주 설명한다. 영화는 소설이나 희곡이 아니다. 왜 카메라로 찍어서 스크린으로 왜 보여주는가? 관객에게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사 없이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우주전쟁’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 일행이 있었던 집 위로 여객기가 추락한 장면에서. 이런 장면은 관객의 흥미를 반감시킨다. 이런 설명을 굳이 사용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음에 일어나 거대한 사건의 암시가 되어야할 것이며 관객이 다음 사건을 궁금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보여만 줘라. 관객은 바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황을 일일이 대사로 설명받기 원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도 않다.

2. 속도감
- 매 시퀀스마다 사건이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쉬면 안 된다. 1시간 반, 2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주인공이 걸어가는 장면도 최소화해야 된다. 그런 장면들은 낭비다. 걷는 영화는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트’가 유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예술적 통찰을 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걷는 장면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영화 상영 시간은 언제나 짧다.

3. 명확한 주제의식, 또는 목적의식
-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관객에게 심어줄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에라곤’은 관객에게 무엇을 심어주려고 한 것일까? 사랑? 우정? 관객은 난폭하게 생긴 서양의 용이 여성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우주전쟁’에서는 명확하다. 영화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가령 ‘반지의 제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몸집이 제일 작고 싸움도 제일 못하는 호빗족이 세계를 구한다는 것. 이는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들어나지 않은 마음가짐, 신념,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이런 이유로 이 영화는 종종 심리극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4. 주인공의 변화
- 극 초반의 주인공(또는 인물들 간의 관계)과 극 후반의 주인공과는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어떤 상황이 변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를 통해 주인공은 변해야만 한다. 그것이 성장이든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종 일관 동일한 컨셉을 유지하는 주인공도 있다. 가령 ‘다이하드’에서의 존 맥크레인같은 인물.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바뀐다. 인물이 변하든지 관계가 변하든지, 무조건 변해야만 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영화의 주제나 목적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어야 한다.
신고

Comment +0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나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바다가 참 많이 나오는 영화다.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로 총성이 두 번 울릴 때, 난 눈을 감고 코까지 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네모난 브라운관 속에 갇힌 파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으로 두 번의 총성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총성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생(生)에의 열망. 


머리가 아프고 손마디는 떨리고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어디 멀리 도망쳐야지. 도망쳐선 소문으로만 존재해야지.


신고

Comment +0


1.

"극장에 가서 영화 보기",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극장에 가는 일이 생긴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그렇다면 나는 극장을 싫어하는 것인가, 영화를 싫어하는 것인가, ... 실제로는 극장을 싫어하지도 영화를 싫어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극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끊임없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강요하고 어떤 표정 짓기를 요구하며 그 속에 난 어떤 말없는 폭력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는 무척 현대적인 표현양식이라는 것을 시간이 지날 수록 깨닫고 있다. 소설 양식에서 '소격효과'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2. 스타워즈 - 클론의 습격

이 영화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무척 좋다. 별 생각없이 볼 수 있다. 더구나 이건 모두 거짓말이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동일화를 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나의 의도가 성공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감정적인 장치들은 무척 허술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하는 것이겠지. 


3. 맨인블랙 II

윌 스미스는 언제나 봐도 좋다. 이 친구가 무명 시절에 등장했던 여러 영화들을 보면서 이 친구 조만가 뜰 것같애 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 정말로 떴다. 


이 영화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외계인과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이는 것 이면에 또 다른 어떤 세상이 있다는 게 이 영화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음모이론'으로 몰고 간다. 난 '음모이론'은 딱 질색이다. (* Articles에 가면 음모이론에 대한 글이 있다. 참고하기 바람) 


정말로 음모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음모이론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그 무엇이다. 즉 허구를 통한 패배주의, 허무주의의 강요가 바로 그것이다. 음모가 있어도 힘없는 우리는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 문제는 음모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길 조차 없는 현상을 두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패배주의에 빠진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과도한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여하튼 맨인블랙 II는 시간떼우기로 좋다. 화장실에다 TV와 비디오, 혹은 DVD Player를 갖다 놓고 보는 건 어떨까. 정말 좋을 것같은데. 


자신의 영혼을 가꿀 시간도 부족한데,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꼭 자신이 문화활동을 한 것처럼 떠벌린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극장에 가서 영화 본 것이 무슨 문화활동이람. ㅡ_ㅡ; 



4. 아앰샘


이 영화를 보고 숀 펜의 연기가 무척 좋았다.(우리의 문소리 양에 비한다면 세 발의 피이지만) 


아동 복지에 대한 영화는 영국의 어느 좌파 감독이 찍은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국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영국에 망명해 있는 어느 남자(* 피부색이 틀리며 자신의 조국이 현재 독재치하에 있는)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결혼을 했지만, 그의 부양 능력이, 그에 대한 동네 이웃의 오해로, 이런 저런 이유로, 아이를 낳기만 하면 정부 기관에서 나와 아기를 데려간다. 이 영화 보고 나면 미쳐버린다. 실제 일어났던 일을 영화로 옮긴 탓도 있지만, 영국의 복지 정책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며 무자비한가를 이 영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앰샘"도 아동 복지에 대한 영화이다. 지극히 공화당적인 테마이기도 하다. 아동 복지 예산을 줄이려는. 


이런 정치적인 해석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싫어할 테지만, 우리는 시간날 때마다 영화들, 특히 헐리웃 영화를 두고 이런 정치적인 해석을 내려야만 한다. 


이 영화, 나에겐 별로 감동적이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은 매우 현실적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작위적이었다. 조합하면 뭐든지 작품이 된다는 포스트모던적 태도가 이 영화에서도 적용가능하다. 


5. 클릭엔터테인먼트 

이건 영화 제목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어내는 제작사이름이다. 그것도 16미리 에로 영화. 이 곳에서 나오는 에로영화를 좋아한다. 쩝. 요즘에는 좀 재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봉만대 감독이 장편극영화로 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간나면 봉만대감독의 에로 영화를 빌려보기 바란다. 무척 재미있다.





영국의 좌파 감독의 이름은 '켄 로치'다. 2년 반 정도의 직장 생활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슬프다.

신고

Comment +0



나의 즐거운 일기

감독 : 난니 모레티
주연 : 난니 모레티, 제니퍼 빌즈
장르 : 코미디,
제작년도 : 1994년


1.
하얀 종이마다 누런 개미가 한 마리씩 눌려 죽어있었다. 사무실에서 프린터 해 온 난니 모레티가 프랑스 영화잡지인 Positif와 한 인터뷰 기사 위에. '개미가 눌려있는 인터뷰'

실은 집에 개미가 너무 많다. 오늘 아침엔 늦게 일어나 택시를 잡아탔는데, 가방에 개미가 붙어서 기어가고 있었다. 그냥 무심히 넘어갔지만, 객관적으로 개미가 너무 많다. (나에게도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존재했던가)

2.
우리 집에 개미가 많다고 해서 세상에 종말이 오거나 몇 년 동안 구름에 갇혀 해를 보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길 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인 개미 한 마리가 저 세상에 가서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이 많이 믿고 있는)한테 '세상을 없애줘요'라든가 '구름으로 덮어주세요'라고 한다면 … 그 때 마침 잠시 한 눈을 팔던 하느님이 은하계의 사소한 점일 뿐인 지구를 저 멀리 어두운 블랙홀로 집어넣어버린다거나 물의 별을 구름의 별로 만들어버린다거나 한다면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지하철 속에서 '주 예수를 믿으세요.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라고 떠들던 사람에게 했다. 그랬더니 뭐라고 계속 떠들었다. 들어보았는가. 의미 없는 동어반복의 연속. 아마 주 예수도 그 의미없는 동어반복을 듣는다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하물며 참을성없는 내가 들었으니.

"젠장, 당신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는군요."

라고 큰소리로 말하곤 지하철에서 내렸다.

3.
Positif에 실린 난니의 인터뷰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무척 지루하다. 이걸 번역한 사람이나 난니와 인터뷰를 한 Positif 기자가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도시나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냉소라는 것이 자기자신한테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다. 결정적인 장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한계. (이 영화에 결정적인 장면은 무척 많다. 플래시 댄스의 그 여자가 나온 장면은 가슴이 미어졌다. 나도 영화감독이 되어야지. 그럼 이미연이나 고소영을 만날 수 있겠지. 아예 감독이면서 주인공이 되면 더욱 좋을 것같아)

이 영화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는 점에서 좋긴 했지만.

4.
자, 다시 개미 이야기로 돌아가자. 난니 모레티가 우리 집에 와서 내 무릎 위를 올라가고 있는 개미를 보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아마 그는,

"저는 항상 소수의 편에 설 것입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개미의 수는, 하나씩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족히 몇 만 마리는 될 것이다. 하나의 생명과 몇 만의 생명의 공존과 대결. 이게 내가 기거하는 사각의 공간 속에서의 내 인생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고

Comment +0

늦은 봄날의 일상

가끔 내 나이에 놀란다. 때론 내 나이를 두 세살 어리게 말하곤 한다. 내 마음과 달리, 상대방의 나이를 듣곤 새삼스레 나이를 되묻는다. 내 나이에 맞추어 그 수만큼의 단어를.....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사드(Marquis de Sade)에 대해 인터뷰하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에서 한국에서 사드의 책을.....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This Craft of Verse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박거용 옮김, 르네상스 우리는 시를 향해 나아가고,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 다나카 준(지음), 김정복(옮김), 휴머니스트 일본인 저자가 쓴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평전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줄리언 반스(지음), 최세희(옮김), 다산책방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

쓸쓸한 커피숍

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충분하다, 쉼보르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