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6

짧은 생각,들

강렬한 더위가 이어졌다. 검은 도로는 불타고, 그 열기 앞에서 나는, 너는, 우리는 끝없이 움츠려 들었다. 그 거칠었던 폭염 전에는 긴 장마, 비의 계절이 있었다. 이러한 급격한 기후 변화의 원인은, 어쩌면 사유하는 나의 세계관, 근대 기계론, 혹은 도구적 이성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젠 그것도 철지난 유행이랄까. 그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냥 내 생각엔 예상치 못한 평화가, 큰 전쟁 없이 이어진 사오십년 동안 인간은 다시 오만해진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평화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고통받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 없지만. 어느 책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이 서로를 얼마나 죽였는가를 보았더니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가 나왔다고 한다. 그냥 걸핏하면..

요리하는 나에 대한 반성

냉장고에서 길을 잃어버린 무우 하나가 몇 달째 냉기를 먹으며, 한때 딴딴하고 신선했던 탄력을 상실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숙취와 스트레스의 바다 속에서 겨우 살아나와, 푸르딩딩한 겉이 살짝 물렁해진 무우를 꺼내 껍질을 도려내고 네모나게 잘랐다. 하나, 하나, 하나 그릇에 담고는 꽃소금 몇 스푼을 뿌려 같이 놀게 해주었다. 소금 알갱이들이 네모난 무우 사이에서 낄낄거리며 노는 소리가 작은 집 부엌 한 구석에 쌓여갔다. 그러나 봄햇살은 놀러오지 않았고 내가 사랑하는 아이는 그 노는 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십대란 부모가 관심 가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며,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와 정의를 만들어 간다고 여겨졌다. 고향 집에서 가져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심하게 짜 바다 향이 그 소금기에 짓눌려 응축된..

주부 모드, 그리고 짧은 생각,들.

매주 제안서에, 제안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수면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고 매주 긴장의 연속이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오는 길. 동네 야채가게에서 부추, 상추, 대파를 사서 왔다. 주부 모드다. 하긴 요즘 집 식사 준비는 거의 내가 하고 있으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통영에서 올라온 멍게가 와 있었다. 아이에게 멍게 비빔밥을 해주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 보이는 아이에게 일찍 자라고 하곤, 혼자 멍게를 회로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밤 늦게 들어온 아내에게도 멍게를 꺼내 회로 만들어 주었다. 다들 잠이 들고 난 뒤, 나는 계속 혼자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재에 잠시 누었는데, 전등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 자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나도 모르게 잠에 든 경우가 좋다. 요즘은 자려고 노력해서 ..

어느 저녁

조금 빨리 사무실을 나왔지만, 그래도 집에 오면 늦었다, 늘. 연휴 때 미사에 가지 못했고 음력으로 다시 시작하는 새해라, 나름 반성한다는 뜻으로, 평일 저녁 미사엘 갔다. 본당 보좌 신부님 헤어 스타일이 변해 다른 신부님이 오셨나 생각했다. 퍼머를 한 단발이었다가 이젠 단정한 스타일이다. 나이 든 신자들은 좋아하시겠다고 적었다가, 나도 나이 들었음을 떠올린다. 평일 저녁 미사를 금방 끝난다. 그래도 미사를 보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제 서둘러 집에 갈 시간이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집에 도착하니, 아들은 학원에서 오지 않았고 아내도 퇴근을 하지 않았다. 살짝 냉기가 도는 어두운 집에 전등을 켰다. 조금 늦게 들어오는 불빛, 인공의 환함. 나는 다시 집을 나왔다. 면세, 침묵, ..

요리와 일상

요리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 작은 소망 리스트들 중 하나는 일요일 오전 가족보다 먼저 일어나 주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고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든든한 일요일 아침 식사로, 행복한 일요일을 보낼 수 있는 육체의 준비. 그러나 21세기 초 서울, 나는 그 무수한 나 홀로 집안들 중의 하나로, 이젠 혼자 밥 지어 먹는 것마저도 힘들어 굶거나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먹기 일쑤다. 나를 위해서 요리하는 것만큼 궁상맞은 짓도 없다. 요리란 참 근사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행위인데, 나를 위해 뭔가 만들고 있노라면 참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나에게 그런 요리의 기회가 자주 찾아오길 기대할 뿐이다.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테터앤미디어에서 명함을 보내주었다. 근사한 명함..

볶음국수

(출처: http://onokinegrindz.typepad.com/ono_kine_grindz/ ) 종종 혼자 밥을 먹어야할 때가 있다. 아니면 나처럼 매일 혼자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매일 혼자 시켜서 먹는 사람도 있다. 아주 드물게 베란다에 밭을 만들어놓고 혼자 상추에 밥 싸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끔은 혼자 밥을 먹는다는 행위가 꽤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다는 것을 일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때가 바로 혼자 밥을 먹을 때이다. 그것도 혼자 생활하기 시작한 지 7년 정도 지난 후,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막 두터운 외투를 벗으려고 하는 느즈막한 일요일 오후, 창틈으로 뿌연 햇살이 밀려들어오지만, 누구에게도 연락할 곳이, 솔직히 연락할 자신이 없을 때, 그 때 혼자 오래된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