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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게으른 달력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이제 우울한 벚꽃은 하얗게 썩어버렸다

마차는 덜컹덜컹 먼 곳을 달리고

바다도 시골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쩌면 이다지도 게으른 날일까

운명은 연달아 어두워져 가고

쓸쓸한 우울증은 버드나무 잎 그늘에 흐려져 있다

이제 달력도 없다 기억도 없다

나는 제비처럼 홀로서기를 해, 그리하여 신기한 풍경 끝을 날아가겠다

옛날의 사랑이여 사랑하는 고양이여

나는 하나의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하여 먼 해초를 태우는 하늘에서 짓무르는 것 같은 키스를 던지겠다

아마 이 슬픈 정열 이외는 그 어떤 단어도 알지 못한다



- 하기와라 사쿠타로(지음), 서재곤(옮김), <우울한 고양이>, 지만지 

*   *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 朔太郎, 1886 ~ 1942)의 시를 읽는다. 사쿠타로도 오랜만이구나. '쓸쓸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읽곤 아, 우울증은 쓸쓸했구나 라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젊은 시절의 사쿠타로도 꽤 쓸쓸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잠시, 그의 말년은 일본주의자로 점철되어 있다. '일본 근대시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으나, 한국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1923년 시집, <우울한 고양이>



1924년의 하기와라 사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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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도 없다. 쓰거나 생각할 수도 없다. 여기에는 클라이맥스도 없다. 안락은 있다. 그러나 커피는 생각했던 것만큼 맛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뇌는 소멸하고 말았다. – 1933 5 30, 버지니아 울프

 

며칠 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샀다. 그리고 책 표지, 위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국어판 출판 편집자의 의도겠지만, 마치 내가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향 집에는 아마 내가 고등학교 때 읽던 세월이 있을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들 말하지만, 의식의 흐름이 아닌 소설이 어디 있었던가. 버지니아 울프,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소설가들 중의 한 명이다. 그리고 니체

음악이 없다면, 삶은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 니체



니체와 버지니아 울프 사이 어딘가의 은하계. 내 쓸쓸한 우울함을 숨겨 두고 싶은 어떤 우주. 그녀의 우주와도 같은 가슴. 혹은 부재의 단어.

 

 

 

 

몇 주() 간의 심각한 우울증이 이제 그만 날 괴롭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이번은 유독 너무 심해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 회사 워크샵이다. 7시에 사무실에 나와 워크샵 문서를 만들었다. 워크샵 토론 주제를 만들고 여러 공지 사항들을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출근하기 전의 대표이사실에 놔두고 나왔다. 퇴직연금을 직원의 동의를 구해 계약을 할 예정이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질투로 가득한 내 우울함은 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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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음표들이 아래로 떨어지면 거리는 순백의 빛깔로 빛나고 내 초라한 청춘의 섹스는 그녀의 신음소리로 옷을 갈아입는다. 투명한 유리창은 몰락의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 가브리엘 같았고 말없이 내리는 저 흰 눈은 그대 슬픈 눈동자를 닮아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내 정액도, 그대 신음소리도, 우리 살갗 위를 흐르고 있는 땀방울 하나하나 대기 속으로 녹아 사라질 때, 보드라운 입술로 내 혀를 감싸며 내 별 두 개 가슴에 달고 있는 그대, 내 온 몸을 받아준 그대, 젖은 목소리로 그대 사랑을 노래했지. 로코코를 닮은 그대 사랑을.

              *                      *  

  언제 적었는지도 모를만큼 가물가물한 소설 한 모퉁이 구절이다. 적다 말고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그 때부터 멈춘 이 소설은 꽤나 나이를 먹었다.

  며칠 전, 잔뜩 쌓인 종이들을 뒤지다 이 소설 뭉텅이를 발견했고 이 구절을 읽으면서 슬퍼했다. 며칠째 우울증이 가시지 않는다.

  피곤하다. 내 생이. 내 영혼이. 내 언어가. 그리고 날 둘러싼 이 세계가 너무 소란스럽다. 천천히 배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구토를 해야겠다. 내 영혼의 찌꺼기를 게워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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