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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셰익스피어의 시대 The Age of Shakespeare 

프랭크 커모드(지음), 한은경(옮김), 을유문화사 크로노스 총서 11



책은 얇지만, 의외로 단단하고 빽빽하다. 셰익스피어(1564 ~ 1616)가 살고 활동했던 시대 전후로 셰익스피어 극작품에 영향을 주고 받은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나 연극 제작, 그리고 개별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언급하고 있으니, 당연히 쉬운 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독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랬으니. 그래서 그런지 이 번역서에 대한 일반 독자의 반응은 좋지 않다. 너무 어렵다는.  


그러나 미 컬럼비아대 비교문학과 교수인 제임스 샤피로(James Shapiro)는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 1919~2010) 교수 생전에 '현존하는 최고의 셰익스피어 안내자(reader)'라고 평가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rank_Kermode)


이 책의 대부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제작을 둘러싼 다양한 환경을 서술하고 분석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셰익스피어 극작품의 일부를 인용하여 어떻게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미쳤는지까지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시대(이 용어는 편의상 제임스 1세 초까지 망라하기도 한다)는 전문 연극이 발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최초의 대중연극은 주로 임시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심지어 여인숙의 뒷마당이 무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기에 이르러 런던에는 최고 3,000명까지 수용할 수 잇는 전용극장이 여럿 생겨났는데, 이런 극장은 주로 극단주들이 소유했다. 대개 극단은 과거 길드와 구조가 흡사했으나, 셰익스피어의 극단은 다소 달랐다. 단원들이 연극은 물론이고 극장까지 소유했기 때문이다. '주주'들은 연극을 위탁하고 소유하고 출연했으며, 셰익스피어의 경우는 직접 연극을 쓰기도 했다. 그를 위시하여 일부 동업자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리며 자산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건 나중 일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 초창기에 극장 공연자들은 여전히 곡예사나 순회 공연자, 방랑자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 10쪽 


(* 참고. 엘리자베스 1세(1533 ~ 1603), 제임스 1세(1566 ~ 1625). 엘리자베스 시대는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반으로 이해하면 된다. 예술사에서는 매너리즘 시대로 이해하는 기간이다.)


따라서 일반 독자에게 권하기는 다소 난이도가 있는 책이다. 더구나 2004년도에 런던에서 출간된 이 얇은 책을 내기 전 프랭크 커머드는 이미 10권 이상의 셰익스피어 저술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목차도 아래와 같다. 


- 종교개혁과 왕위 계승의 문제

- 엘리자베스의 영국

- 셰익스피어, 런던으로 가다

- 로드 체임 벌린스멘 극장

- 극장

- 초기의 셰익스피어 

- 글로브극장

- 글로브극장의 연극

- 블랙 프라이어스 연극 


셰익스피어 연극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보물단지에 가까워 보인다. 아마 그 정도 되려면 전문연구자일 테니, 프랭크 커모드를 모를 일 없을테지만.  영미문학에서의 프랭크 커모드는 상당한 유명한 연구자이며, 오래 전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이라는 번역서가 나오기도 했다.  나 또한 이 책을 꽤 열심히 읽었으니, 프랭크 커모드의 책은 두 권을 읽은 셈이다. 


이 책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영국 상황에 대해서도 간단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의 처녀성은 찬양과 희망을 표출한다는 은밀한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29쪽)라는 언급은 꽤 흥미로웠다. 왕이 아니라 여왕, 더구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왕은 영국 귀족 사회에서도 상당히 골치거리였다고 한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주요 극작품에 대한 간단한 언급도 등장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인용해본다. 먼저 <<햄릿>>에 대한 언급이다. 


이렇듯 다양한 스타일이 구사되는 이면으로 가족의 이중성과 그 외 여러 이중성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배어있다. 햄릿에게 클라우디우스는 삼촌이자 아버지이며, 그 자신이 조카이자 아들이다. 끔찍한 현실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계부가 몸을 합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간통이 실은 근친상간이라는 것은 혐오스러울 따름이다. 

대사는 언어학적인 이중적 의미로 가득하며, 전례가 없을 정도로 중언법이 많이 사용된다(중언법은 '하나를 통한 둘'을 뜻하며, 하나의 복잡한 개념이 형용사와 명사 대신 접속사로 연결되는 두단어로 표현된다.[옥스포드사전]). 사전에서는 중언법의 예로 <<햄릿>>이 인용된다. "의전법으로 잘 비준된 것 Well ratified by law and heraldry"(1막 1장 87).  이 때 '법과 의전 law and heraldry'은 '의전법'을 의미한다. 

- 148쪽 


아래는 <<맥베스>에 대한 서술이다. 


현재의 상황으로 만들어지는 미래는 다의적이다. 시간은 다의성의 대리인이다. 던컨을 살해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 순간 어느 쪽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시간이 정지된 순간에 이루어진다. 이 순간은 의도와 행위 간의 간극이며,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의적으로 하나가 된다. 정당한 것은 사악한 것과, 실패한 것과 성공한 것과, 미래와 순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 176쪽 



영문학 전공자에게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되는 을유문화사 관계자가 있다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크로노스 총서를 계속 발간하는 것을 검토해볼 것을 권한다.아마 국내에 번역된 여러 인문 시리즈들 중 이 시리즈가 단연코 최고라고 여기는데, 나오다가 중단되었다(참고로 이 시리즈의 1권으로 번역된 폴 존슨의 <<르네상스>>는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르네상스 개론서이다). 그러니 다시 나오기 시작한다면, 나라도 열심히 소개할 테니 .... )






셰익스피어의 시대 - 10점
프랭크 커모드 지음, 한은경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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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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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시대
(The Age of Ideology - Political Thought 1750 To The Present)
F.M.왓킨스(Watkins) 지음
이홍구 옮김
을유문화사, 1982년 초판

(* 요약 정리를 할 필요가 있을 만큼, 꽤나 유용한 책이었다. 그러나 현재 절반 정도만 정리해두고 난 다음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기 위해 정리된 절반이라도 웹사이트에 올린다. 요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듯한데, 이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모더니즘을 확실하게, 체계적으로 이해하듯이 탈 이데올로기를 알려면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0.
최근에 읽은 R.P.Appelbaum의 <<사회변동의 이론 Theories of Social Change>>도 그러했지만, 이 책 Watkins의 <<이데올로기의 시대>>도 매우 간결하면서 그 논지의 힘을 잃지 않고 학문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명확한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 주위에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아마 번역된 지 오래 되어 시중 서점에서 구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헌책방에서 Watkins의 책을 본 적이 있으나, Appelbaum의 번역서는 그 곳에서도 구하기 어려울 듯 하다. 영어로 된 원서를 구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닿는다면 나도 영어원서를 구해 읽어볼 작정이다. 그렇다고 번역이 엉망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최근 나오는 인문학 번역서들의 형편없는 수준에 비한다면(1) 이 책은 무척 좋다.

따라서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이라기 보다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전해준 것에 대한 요약이자 정리가 될 것이다.

1. 최근 인문학 연구에 대하여
인문학 전공자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는 하나의 텍스트가 언제나 콘텍스트 속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텍스트를 분석하기 위해서 콘텍스트까지 확장해서 연구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 텍스트 분석이란 존재하기 힘들고 고작 텍스트의 일면만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학 전공자들은 정치학만, 문학사 전공자들은 개별 문학사만, 철학 전공자들은 철학만 공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접하는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개관하지 못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양 텍스트가 가진 한 일면 만을 부각하고 이 일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분석한 텍스트의 일면(또는 그것의 결과)이 상대적이고 가치 있고 학문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선 그것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왜냐면 텍스트는 하나이지만, 그 텍스트는 언제나 콘텍스트와의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예술을 예로 든다면, 카라바지오, 벨라스케즈, 루벤스, 푸생, 렘브란트, 몬테베르디, 바흐 등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지배했던 바로크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들의 예술 작품에 대한 연구와 함께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존 스튜어트 밀, 홉스에 대한 이해도 넓혀야 한다. 동시에 이 당시 역사적 조건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바로크 예술이 서구 근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예술 양식이면서 이러한 예술 양식 속에서 어떻게 비서구적인 것이 비추어졌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국내에서 전시된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 속에서 그 당시 발군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으로 유럽을 지배했던 개신교 시민 계급의 오만할 정도의 자부심과 이 자부심 이면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으로 자율성과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예술에서도 철학과 역사,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 없이 한 시대의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한데, 다른 인문학들은 어떠하겠는가.

2. 타 전공자들의 정치학 공부에 대하여
아직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 즉 조선의 상황은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학문이라는 것이 통치 논리로 자리매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경향은 정치에 대한 속물적 이해만 늘어나고 여기에 대한 학문적 이해나 진지하고 사려 깊은 성찰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최장집 교수는 전적으로 자유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보수주의라고 알려진 그 정체가 모호한 이들에게서 그 사상적 배경을 공격 당했다는 것은 한국적인 사상적 낙후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수입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때는 한국도 사회적 격변기였다면 전세계도 격변기였다. 아마 18세기 이후부터 근대이데올로기가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그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충돌이 집중적으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제 3세계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 지속된다.

이데올로기는 정치학의 연구 대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한 국가나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예술에서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신고전주의'양식이 유행하였으며 프랑스는 급격하게 민족주의화되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시민 계급의 혁명 이념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 박애와는 관련 없는 유럽 쟁패에 나선 이유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는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또한 예술에서의 신고전주의 양식은 곧바로 미국에 영향을 주는데,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집중적으로 고전적 풍의 건축물들이 지어진다.

한국이 세계사 속에 편입되었던 시점부터 한국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세계사적인 관점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별 인문학 연구에는 별 관련 없어 보이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를 행해야만 하고 이를 다시 개별 인문학 연구에 반영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가령 국문학 연구에 있어서는 '한국 근현대 작가들에게 끼친 서구 문학의 영향'과 같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다. 가령 신춘문예 문학 비평/평론 부문을 보면 한결같이 국내 작가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도 이상한 것이 한국 독자들은 국내 작가들에게만 노출되어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문학 비평/평론이라고 하는 부문이 순수한 학문 연구라기 보다는 다분히 시류적이며 일반 독자를 고려한 영역이라면 국내 작가에게만 한정되어있다는 것은 후대의 진지하고 성실한 평자들에게서 지금의 문학 평단이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며 보수적이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3.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이데올로기가 중요하게 부각된 시점은 18세기부터이다. 왜냐면 이데올로기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어떤 공통의 의식이라면, 일반 시민이 그 힘을 가지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18세기이기 때문이다. 즉 17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인 세력을 잡기 위해선 전통적인 관습이나 종교에 호소하거나 군대를 통한 무력을 통하는 것이 정답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양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 시점은 공교롭게도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계몽주의 철학이 나오기 시작하고 근대 시민 계급이 그 발언권을 얻기 시작하는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왓킨스는 근대 이데올로기는 산업 근대화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현대 유럽에서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약화된 반면 산업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비 서구권 국가들에게서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화된다고 분석한다. 또한 최근의 이데올로기 종말론의 경우에도 이러한 배경을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그 혁명성과 동시에 그것의 주체로서 일반 시민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데올로기의 수행자가 지적이면서 소수에 불과한 엘리트라고 하더라도 그 엘리트들이 호소하는 대상이 일반 시민이라는 점에서 18세기 이전의 그 어떤 정치사상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이데올로기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실 세계에서는 매우 모호한 형태로만 이루어져 있는 관념적 형용어을 구사한다. 왓킨스도 이 책에서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점에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나열한 이데올로기에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정치적 카톨릭주의,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이며 우리 시대가 그렇게 입에 달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없다.

4. 자유주의에 대하여
왓킨스는 자유주의에 대해서 세 부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미국 혁명에서의 자유주의, 두 번째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장으로 자신의 결점들을 보완한 자유주의이다.

1776년은 미국 독립 선언문이 발포되었다는 점에서 기억될 만한 하지만, 동시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되었다는 점에서 근대 이데올로기의 역사에서 매우 주목할 연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저서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최초의 선언'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경제 정책에서는 중상주의(重商主義)라고 하는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여 국제 무역에서 유리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당시의 부와 번영의 궁극적 기반이라고 생각되던 금과 은의 축적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으로써 이 정책이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참된 경제적 복지가 중상주의적 정책이나 다른 방법에 의해 국제 무역을 규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제한이나 통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방임주의의 배경에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특수한 필요와 능력에 대한 최선의 판단자이기 때문에 자유 경쟁의 상황에서 그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가장 합리적인 사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2)

미국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영국의 경제 정책에 있었다. 즉 중상주의 정책 속에서 미국의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나온 것이 바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상식 Common Sense>>이며 이 책에 실린 태도는 현대 미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페인은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에서 갓 도착한 이민이었다. 그는 전통적 계급으로 둘러싸인 영국 사회에서 가난하고 성공하지 못한 기업가였으며 그러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급진적 자유 민주주의자로 만들었고 모든 인간이 세습적 특권과 기득권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야 된다고 믿었다. 이런 그에게 미국은 사회적 정치적 자유가 충만한 땅이었으며 이 땅에서의 자유주의적 신념은 하나의 종교였고 이 땅은 강력한 희망을 던져주는 신세계였다. 그리하여 그는 <<상식>>에서 영국적 전통과 결별하고 미국의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자는 혁명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후 미국 혁명 이후 페인은 프랑스 혁명에도 참여하였지만, 곧 잊혀지고 만다.

프랑스 혁명은 서구 사회에서 자유주의 이념을 알린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혁명을 통해서 생긴 자유주의적 전통은 국민들 사이에 하나의 상식이 되고 그들을 동일한 국가 목적 아래 단합시키는 연결력'이 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에서는 그 상황은 틀리다. 물론 미국 내에서 흑인 노예제는 예외적인 경우로 제외한다면 말이다.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은 당시 유럽 세계를 이끄는 지적이며 문화적인 지도자였으며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의 도래를 상징하는 계몽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운동을 그 누구보다 앞장 서서 옹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란 나라는 또한 여러 방면에 있어서 유독 개혁에 대하여 저항이 강한 보수적인 국가 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은 매우 우발적인 사건처럼 일어났으며 프랑스의 혁명 세력은 평민들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한 채 독재체제로 전개되었다. 더구나 프랑스 혁명의 파괴적 성격은 프랑스 혁명 세력을 유럽 사회에서 고립시키게 되었다.

'비록 처음 혁명의 위기가 주변 국가에 감돌 때 주변 국가가 군주들이 자기들의 강력한 경쟁 대상이 약화됨에 쾌재를 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곧 혁명 운동이 근본적으로 정통적 국가를 파괴시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왕과 왕비가 살해된 것은 더욱이 큰 놀라움을 주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제거를 위한 유럽 열강을 군사 개입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대외 정세의 변화로 인해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대가 만들어지고 일반 프랑스 평면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용병들로만 이루어진 유럽 국가들의 군대들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 이후 프랑스가 전 유럽을 석권하였다는 점은 최초로 근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격앙된 시민들을 하나의 능률적인 전투 단위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그 동안 간과되어왔던 일반 시민의 힘을 확실하게 유럽 세계에게 각인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독일의 지식인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등장 이후 자유주의는 계급적 갈등을 해소해야만 한다는 당면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이 때 나오게 된 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다. 밀은 도덕과 교육에 강조점을 두면서 자유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 그를 초기 자유주의자들과 구별짓게 '자유주의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수단의 성격과 그 한계성을 밀이 좀더 명확하게 규명하여 놓았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자유주의는 이미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주목할 점을 그는 당시 서구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는 점이다. 즉 의회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시민 계급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시민 계급은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식민지 지배는 궁극적으로 식민지 국민의 자유주의 고양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결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5. 보수주의에 대하여

이데올로기로서의 보수주의 등장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바다 건너 있는 영국에서 프랑스 혁명은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이 출간되었다. 그는 '혁명 운동의 가장 과격한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판국에 있어서 그것의 파괴적인 성격을 예지하였으며 혁명의 결말은 틀림없이 억압적인 군부 독재로 끝나리라는 것을 예측하였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혁명적 이데올로기의 매력에 현혹되어 영국 헌법의 전통의 기초를 파괴하도록 유혹받고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은 실로 영국인에게, 그러한 위협에 대하여 경고하고자 하는 하나의 강력한 시도였다.' '혁명을 이끌었던 신념의 근본 핵심은 개인의 합리적 능력에 두었던 어마어마한 확신이었다. 그러한 신념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이야말로 사회 생활을 가능케 해 주는 가장 충분한 근거가 된다는 사상이었으며,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전통적 굴레에서 해방될 때 인류의 복지와 행복은 점차 필연적으로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은 바로 그러한 입장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강경한 반박이었다.' 그에게 있어 '계몽 철학자들의 약속은 허황된 약속이며, 그들의 이성은 왜곡된 이성이다. 사물의 자연 법칙상, 구체제가 허물어진 폐허 위에 그들이 바라던 새롭고 대담한 신세계를 구축하겠다는 그들의 오만한 희망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합리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도 이성주의자였으며 이성적 능력을 통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개인의 합리적 능력은 그것이 아무리 현명한 인물의 것이라 해도 매우 제한된 것이라는 점, 사회는 이성의 힘에 의해서 뭉쳐지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도의와 관습에 의해 뭉쳐진다는 점, 그리고 문명의 진보란 필연적으로 오기는커녕 매우 아슬아슬하고도 불안한 과정을 걷게 마련이며 그것도 사회적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고 하였다.'






각주.

1)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동문선현대신서' 시리즈이다. 이 경우에는 이 출판사에서 판권을 구입해 형편없는 역자를 섭외해 번역을 해 국내 독자에게 양질의 번역서로 읽게 해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는 데에 있다. 이처럼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처사가 어디에 있는가.)

2) 최근의 국제 자본주의의 경향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의 경향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내는 몇몇 학자들이 기대고 있는 이론적 배경이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극단적 회의를 표시하는 현대의 반지성주의 이론이라는 점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는 여러 모로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격을 시도해보았지만, 그의 철학이 가진 의도와는 무관하게 해석되어 통용되어 '신자유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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