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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창작과비평사 



책 뒷 장을 펼쳐보니, 1997년 5쇄라고 적혀있다. 지금 읽어도 쉽지 않은 이 책을 나는 1997년이나 98년 쯤 구입했을 것이다. 아마 인적이 뜸했던 그 대학 도서관 서가에서 꺼내 읽은 아래 문장으로. 


이처럼 벤야민(Walter Benjamin)의 평론들의 한 장마다에서 풍겨나오는 우울 - 사사로운 의기소침, 직업상의 낙담, 국외자의 실의, 정치적 역사적 악몽 앞에서 느끼는 비감 등 - 은 적합한 대상, 즉 종교적 명상에서처럼 거기에서 정신이 자신을 끝까지 응시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심미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순간적인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표상이나 이미지를 찾아 과거를 더듬는다. 그리고 발견해낸다 - 30년 전쟁의 독일에서, '19세기의 수도' 빠리에서. 왜냐면 바로끄와 근대의 이 둘 모두가 그 본질상 우의적(allegorical)이어서 우의이론가의 사고과정에 걸맞기 때문인데, 자신을 형상화해줄 외부의 대상을 찾는 비구상화된 의도인 이 사고과정을 그 자체가 이미 '언어 이전'의 우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 73쪽 ~ 74쪽 


그 때, 1990년 후반 문학전공자들의 일부는 발터 벤야민에 빠져 있었다. 아마도 이십 대 후반 이 책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챕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십년 가까이 지난 후인 올 8월부터 읽기 시작해 겨우 다 읽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벤야민은 죽은 채로 우리 옆에 앉아 속삭이고, 나에게 이제 독서란 1시간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일상이 되었고, 회사에서의 시간 이외에 나머지 시간들은 다 조각나 있었다. 길고 조용하게 이어지는 양질의 시간이 나에게 구하기 어려운 일이 되었고, 이 책의 독서 경험은, 최근 내가 읽는 다른 책처럼 조각나 있고 형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뒤늦은 독서는, 나에게 깊은 후회와 함께 이제서야 읽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하였다. 종종 어떤 책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마치 프루스트의 소설들처럼.  이 책은 나에게 헤겔-마르크스의 이론이 어떻게 문학 이론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다소 얕게 알고 있었던 에른스트 블로흐와 루카치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주의적 해석학의 몇 가지 형태라는 2장에선 발터 벤야민, 마르쿠제와 쉴러, 에른스트 블로흐를 다룬 후, 게오르그 루카치, 사르트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전반기 중요하게 여기지는 문예이론가들의 대표적인 저서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서술을 전개한 후, 마지막 챕터에서 '변증법적 비평'에 대해 논의하며 책을 끝낸다. 종종 프레드릭 제임슨을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헤겔-마르크스의 영향 아래서에서  현대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비판을 전개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제임슨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책들 중의 한 권이며, 앞으로 그가 나아가게 될 어떤 이론적 지향점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 현대문화를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중요했지만, 아마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챕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시각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래 문장처럼. (프레드릭 제임슨을 읽다 보면, 종종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연구한 싸르트르가 아니라... )


이제 우리는 상품사회에서 예술작품이 지니는 심원한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은 상품이 되지 않는 것이며 소비되지 않는 것이며 상품적 의미에서 불쾌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충분히 전개하여 적용한 아도르노의 음악 분석으로 되돌아가도 무방할 터인데, 이 분석은 실제로 그의 여타의 비교적 헤겔적인 실천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진실로 마르크스주의적인 부분을 이룬다. - 383쪽 


이 책 <<변증법적 문학 이론의 전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책으로 일찍 번역되어 국내 소개되었지만, 제대로 읽히지 못한 책들 중의 한 권이다. 문학이론 서적들이 드물던 시절,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를 읽지도, 듣지도 못했으니. 더구나 1장 아도르노에 대해 읽기 위해선 현대 음악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근현대의 여러 학설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하니, 제대로 읽히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아도르노의 저서들 중 <<신음악의 철학>>을 선택하여 아도로노의 고급문화주의자적 면모를 드러내면서 동시에서 문화산업에 대한 부정과 함께 그 속에서 작품이 상품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제 열정의 모방이 아니라 음악적 매체를 통하여 무의식에서 나온 신체적 충동들을 위장되지 않은 상태로 기록하는 것이며, 형식의 금기들이란 그러한 충동들을 검열하려 하고 그것들을 합리화하여 이미지로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므로, 이런 형식의 금기들에 공격을 가하는 충격들 및 정신적 외상(trauma)들을 위장 없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처럼 쇤베르크의 형식적인 혁신들은 표현된 사물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후자의 새로운 리얼리티가 의식으로 뚫고 나오도록 도와주었다. 최초의 무조 작품들은 정신분석학의 꿈의 기록(transcript)이라는 의미에서 기록이다. ...... 그러나 이러한 표현상 혁명의 상처들은 그림과 음악 모두에서 원본능(id)의 밀사로서 예술가의 의식적인 의지에 저항하는 얼룩과 반점이며, 이들은 표면을 훼손시키고 옛날 이야기의 핏자욱처럼 추후의 의식적인 수정으로 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수난은 그것이 더 이상 예술작품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이것들을 작품 속에 남겨놓았다. 

- 아도르노, <<신음악의 철학 Philosophie der neuen Musik>> 42~43쪽 (40쪽에서 재인용)


문학(이론) 전공자에게 추천하지만, 만만치 않는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헤겔의 <<법철학>> 서문이나 <<정신현상학>>, 또는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 정도는 읽거나 개론 수준의 이해를 가져야 할 터이고 소개된 여러 문학이론가들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긴 그래도 쉽지 않을 것인데, 끊임없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도 나오고 페르난도 페소아도 등장한다. 작가 이름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문장 - '무조성이란 말하자면 음악의 유명론(唯名論) 같은 것이다' - 이 등장할 때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책은 흥미진진하고 많은 것들을 새로 읽고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아놀드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



기억해둘 만한 인용문들을 옮긴다. 시간이 나면 다시 읽어볼만한 책인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따라서 역사가 우리로부터 시간적으로 점차 멀어지거나 우리가 사고 속에서 역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기만 하면 역사는 더이상 내면화될 수 없고 이해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 역사의 이해가능성이란 애당초 잠정적인 내면성에 부속된 단순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중에서 (265쪽 재인용) 


"역사란 내가 깨어나려 애쓰는 악몽이다."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중에서 (302쪽 재인용) 


"문체와 관계를 맺는 것은 역사보다는 생물학이나 과거의 차원이다. 문체는 작가의 '대상'이며 영광이자 감옥이며 고독이다... ... 그 비밀은 작가의 육체에 파묻힌 기억이다. 문체의 암시적인 힘은 말해지지 않은 것이 일종의 언어적 간격으로 남아 있는 회화에서처럼 속도의 현상이 아니라 밀도의 현상이다. 왜냐하면 문체의 비유 속에 거칠거나 부드럽게 조합되어 문체 밑에서 견고하고 깊이있게 지속되는 것은 언어와는 전적으로 다른 한 현실의 단편들이기 때문이다."

- 롤랑 바르트, <<Le Degre zero de l'ecriture>>, 58~59쪽(331쪽 재인용)


"유력한 개개인이 그들의 정신과 성격의 특수한 자질로 인해 사태의 개별적 양상과 일부 특정한 결과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사태의 전반적인 추세를 바꿀 수는 없고, 이 추세는 다른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 쁠레하노프,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 The Role of the Individual in History>> (352쪽 재인용)


"세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데 대해 한 마디 하자. 이 문제에 대해 철학은 항상 지각생이다. 세계에 대한 사고로서 철학은 현실이 그 전개과정을 다 마친 이후에야 나타난다. 개념이 가르치는 것은 역사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실이 성숙했을 때에야 이상은 현실적인 것과 대치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때 이상은 이 세계의 본질을 포괄하는 지적 영역의 형태 속에서 이 세계를 스스로 재구성한다. 철학이 그 백발을 은빛으로 칠할 때 삶의 형식은 이미 노쇠했으며 이 은빛으로 칠한 백발은 삶을 회춘시킬 수 없으며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기 시작한다."

- 헤겔, <<법철학>> 서문에서. (356쪽 재인용) 


"변증법이 헤겔의 손에서 신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변증법의 일반적 작용형태를 포괄적, 의식적으로 제시한 최초의 사람임에 변함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화의 껍질 내부에서 합리적 핵을 찾아내려면 이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 2판 서문에서 (361쪽 재인용)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19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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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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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원제 Le Photographique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지음), 위베르 다미슈 Hubert Damisch(불어 옮김), 최봉림(불어를 한글로 옮김), 궁리 (대림이미지총서05) 





Jackson Pollock (1912-1956)

Gelatin silver print, 1950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Gift of the Estate of Hans Namuth

Image copyright Estate of Hans Namuth



그러나 분명 나무스는 사진가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가적 역량으로 촬영 각도, 프레이밍, 흑백 콘트라스트,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진 대상의 모든 구성 요소를 고려했다. (...) 

나무스의 사진 속에서 폴록은 언제나 커다란 화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어떤 화폭은 벽에 세워져 있고, 어떤 화폭은 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 연속 상태 속에서 검은 선과 하얀 선은 뒤얽혀 공격적인 모티브를 형성하며, 또한 아틀리에의 바닥에 보이는 얼룩 반점들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하여 사진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공간을 재창조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체가 중력과 단단한 바닥과 맺는 관계는 아무래도 애매 모호할 뿐이다. 작업실 공간은 더 능동적이고 더 현란한 또 다른 공간에 의해 포섭되어 진다.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들의 연쇄 결합은 콜라주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초의 작업실 벽과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는 특수한 평면적 시각 효과에서 기인한다. 

- '텍스트로서의 사진 - 나무스와 폴록의 경우' 중에서, 146쪽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on Long Island, New York, 1950.

Credit: Hans Namuth



한스 나무스의 사진은 잭슨 폴록으로 가는 창과도 같다. 크라우스는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한다. 우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을 알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탁월한 시각으로 카메라로 잡아 해석해낸 한스 나무스에 대해선 소홀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실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들을 모아 불어로 번역한 위베르 다미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에 대한 글들의 가치를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에 비해 손색없다며 격찬한다. 이 격찬에 대해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하다. 잭슨 폴록 대신 한스 나무스에 대해서 설명하듯, 이 책은 온전히 사진에 대해서만, 사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씌여진 책이다. 회화적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이론적 지평을 만들고 해석하며 독립적 가치를 논한다. 


하지만 이 책 만만치 않다. 거의 한 달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 겨우 다 읽고 정리하는 지금, 이 모음집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야 할 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흥미로움으로 따지자면, 탁월한 비평집들 못지 않았지만, 책은 쉽지 않았다. 사진 이론서이지만, 인문학 서적이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쩌다가 미술 비평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직접 사진을 찍는 이들 중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러므로 발자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신체는 일련의 유령들로 구성된다. 유령들은 사방 모두 아주 얇은 막이 무한히 포개어진 잎 모양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지며, 눈은 이를 통해 신체를 인지한다. 

인간은 결코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환영처럼 만질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또는 무(無)에서 어떤 사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게레오식 사진 촬영은 사진 찍는 대상의 여러 층 가운데 하나를 급습하여 은판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술한 신체는 다게레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령, 다시 말해 신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을 잃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 나다르의 회고록 <내가 사진가였을 때> 중에서 (32쪽 재인용) 



거의 읽히지 않는 나다르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진적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은 인영, 흔적, 자국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은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퍼스의 '인덱스Index'에 의존하며 사진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Alfred Stieglitz

Equivalent

1930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등가물'에 대해 크라우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대기 상태의 각인이다. 빛의 굴절을 통해 가시화된 구름의 형상은 바람의 방향과 습도를 기록하고 가시화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을 구름이 고정시키는 한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기호들이다. <등가물>에서 스티글리츠는 이 자연의 기호들을 비자연 기호로 변환시키는 곡예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자연의 기호를 사진이라는 문화의 언어로 전환시켰다. 

- 209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파울라 또는 햇살, 베를린>, 1889년 



현재(2014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도서관에서라도 구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히 사진, 이미지,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로잘린드크라우스저 | 최봉림역 | 궁리 | 2003.07.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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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다행스러워 할 줄 그 땐 몰랐다. 막상 직장 생활을 해보니, 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정말 공포스러운 괴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능동태를 이야기한다거나 미켈란젤로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지, 심지어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옆에 서 있는 작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저 세상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바 변화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랏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농부는 곡식이라도 생산해 보탬이 되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학자들은 말만 앞 세우며, 도리어 나랏일에 참견하며 방해될 뿐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오늘 읽은 진태원 교수의 논문 관련 기사.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

그는 현재 유행하는 인문학 담론들이 미국을 통해 유통되고 있으며, 미국화된 담론을 세계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은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것이 아닐 것이다. 


진 교수는 이러한 '괴리'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 담론들,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한다. 진 교수는 "해방의 정치를 제도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는 점"과 함께 '좌파 메시아주의'를 이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들이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해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는 매우 사변적인 정치철학"이라며 "이들 중에서 누구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변성'이 바디우의 '대상 없는 주체', 지제크의 '신적 폭력', 아감벤의 '계급 없는 사회' 등의 개념에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기사 중에서 인용)



진태원 교수의 의도는 현실적인 고려나 실천적 방안의 제시 없는, 사변적 이론가들의 유행를 질타하기 위함이겠지만,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좀 뜬금없어 보인다. 진태원 교수가 보기에도 참 문제 많은 유행이겠지만... 

(몇 권 읽지 않았지만, 리뷰하자면, 지젝은 센스있게 얄팍하고 바디우는 정말(혹은 과격하게) 사변적이고 아감벤은 그래서 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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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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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쇼가 마주 했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자, 연애담, 그리고 이론적 방향에 대한 개요이다. 그래서 연구자에겐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연애 아포리즘이 될 수 있다. 

책은 읽기 편하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연구자에겐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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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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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글을 쓰다 ... 프린트한 종이 더미 사이에 넣어버렸다. 혼자 쓰는 글이라는 마감 같은 있으리 없고, 돈벌이도 아닌 탓에, 쓰다만 개의 , 쓰다만 개의 소설은 계속 짊어진 하루하루 살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사무실에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가지고. 어제 들기 전에 서두와 역자 후기를 읽었고, 한동안 가방 속에 머물게 것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새로운 >> 읽다가 '철학자가 처한 현실' 그것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관계 등에 대해 생각했고,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년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다시 읽었고, 뭐랄까,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할까, ...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개념적 파악을 위해 정치적 현실을 논리화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헤겔에서는 "사유를 정치적 규정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하는 정치적 규정들을 추상적 사유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사태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사태가 철학의 계기이다. 논리가 국가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논리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헤겔의 <<법철학>> 이러한 비판을 받을 만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 강유원, '옮긴이후기' 중에서



그런데 지적은 철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질 있는 아닐까. 하르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앎이 없이는 실천적인 과제에도 접근할 없다. (중략) 사실 모든 기술은 자연의 법칙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의술은 생물학적인 지식 위에, 정치술은 역사적 지식 위에 구축된다. 철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대상이 보편적인 ,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포괄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바심을 누르고 숙고의 길을 찾으며 또한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또한 서슴지 않는 , 요구 사항이 시급하고 과제가 절박했을 때조차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 언제나 독일 정신의 강점이었다'
- N. 하르트만, <<존재론의 새로운 >> 중에서



현실에서 뒤로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고 사유하고 반성하는 . 그것이 철학의 길인 셈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정을 종료하여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Als der Gedanke der Welt erscheint sie in der Zeit, nachdem die Wirklischkeit ihren Bilduingsprozess vollendet und sich fertig gemacht hat.)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
- 헤겔, <<법철학>> 서문 중에서(임석진 , 한길사)



이제서야 철학과 실천 사이의 묘한 긴장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셈이다. 앞의 사태를 두고도 철학자는 사유한다. 그 사태가 끝날 무렵에서야 뭐라고 말하지만, 이미 현실적인 사태는 끝이 나 있을 무렵이고, 정리정돈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어떤 이가 와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참견을 한다. 현실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힌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선. 그런데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이것이 '독일 정신의 강점'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이전의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마르크스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독일 정신을 가지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정확한 판단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실은 현실 한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변두리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게 현대 이론의 정설이다. 그러니 현대란 반-이론의 시대이고 합리적인 것들이란 믿을 수 없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으며, 의사결정이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뒤로 유예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반-헤겔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가 동시에 휩쓴 시대라고 할까. 그러니 이론과 실천이라는 테마도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관찰한다는 것이고 관찰하는 것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는 것이며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여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것 또한 철학이기도 하다.

결국 남는 건 나이고, 내 삶이고, 내 사유뿐이다. 그것이 시뮬라크르로 남든 간에. 그래서 이제서야 철학책이 제대로 읽히는 것일까. 

 


* 위에서 언급된 책들 
헤겔 법철학 비판
칼 마르크스 저/강유원

법철학
G.W.F 헤겔 저/임석진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존재론의 새로운 길, 손동현 역,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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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동의 이론 Theories of Social Change
리차드 아펠바움 R.P.Appelbaum 지음, 김지화 옮김, 한울


오래된 책이라 지금 시중 서점에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문학 전공자라면 꼭 읽을 책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집에 온 사람 중에 사회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친 분이 있었는데, 방에 꽂힌 하버마스 책을 보고는 '이런 책도 읽어요'하면서 묻던 것이 기억난다. 도리어 난 그 물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상식으로는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역사서와 철학서는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문화이론서니 기타 비평서들을 읽어야 한다. 그러니깐 기본적인 책은 다 읽어줘야 한다. 대학에서, 대학원에서 이런 상식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무 어렵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인문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도 어려운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이다. 사법고시생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 인문학도다. 예일대의 인문학 대학원에서는 힘든 인문학 전공을 포기하고 가는 곳이 로스쿨이나 경영대학원이라고 한다. 이야기가 잠깐 딴 곳으로 흘러갔는데,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요하임 빙켈만은 책을 읽기 위해서 하루 4시간만 자기 위해서 잠 습관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인문학자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주위에 알고 있는 위엄 있으신 대학 교수님들부터 살펴보라. 이런 사람이 몇 분 있는지.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어낸 원인이다. 인문학의 위기가 있다면 말이다.

서두부터 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은 사회학 책이고 사회학 전공자들만 읽어야 된다는 편견을 버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가령 미술사를 전공하는 이가 제일 먼저 읽어야 할 책은 서양철학사와 서양지성사, 서양문화사이다. 이러한 총론을 읽고 난 다음 각 개별 학자나 시대에 대한 서적을 읽어야 된다. 쓸데없이 화집 들고 다닌다고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사는 역사학의 한 분과학문이다. 그림책 보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신기한 일이다. 책 좀 더 읽고 시간 아껴가며 공부하고 확실한 지식을 얻으라고 주문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아펠바움의 이 책은 사회 변동에 관한 여러 학설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사회 변동 Social Change에 관해선 이 책 한 권 정도는 읽어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그냥 한 권 통째로 외워둬야 되지 않나 싶다. 그러니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베끼는 편이 마음이 편하지.

간단하게 목차를 살펴보자.

머리말 - 예비적 정의
1. 진화론
1) 고전적 진화론: 진보의 관념
1. 찰스 다아윈
2. 단선적 사회진보이론
3. 유기체 이론: 전문화, 분화 및 통합
2) 진화론의 현대적 변형
1. 근대화론 또는 통시적인 단선적 변동이론
2. 기능주의와 체계이론의 여러 측면들: 적응성 향상
3. 신진화론: 다선적 진화, 일반적 진화와 특수적 진화
2. 균형이론 - 항상성 homeostasis 개념
1) 생물학에서의 유추
2) 사회과학에서의 이용
1. 기능주의와 체계이론
2. 문화지체이론
3. 인간생태학이론
3. 갈등이론 - 모든 사회유기체에 고유하게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변동
1) 맑스주의: 변동의 변증법
2) 현대갈등이론: 맑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
갈등관념의 유지
4. 생성몰락이론 - 성장과 쇠퇴의 과정
5. 사회변동이론의 분류 및 연구
1) 사회적 변동의 연구
1. 여러 주요 이론가들이 보는 변동연구 분야의 현상태
2. 대안적 도식
2) 사회변동의 이론들


제일 먼저 진화론이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회변동에 대한 일관적 설명을 한 중요한 학자들은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아마 다윈은 '과학자아냐'라고 반문할 지 모르겠으나, 다윈이 19세기와 20세기에 끼친 영향력은 마르크스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우리가 진보에 대한 개념, 가령 환경에 적응해나가 결국 성공하리라는 관념은 전적으로 다윈에게 의존된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성격은 마르크스에게도 나타난다. 미래에 대한 개념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었지만, 이 미래에 대한 개념을 진화, 또는 진보와 연결 짓는 것은 19세기에 와서이다.

사회 변동 이론이란 사회가 어떤 요인으로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가에 대한 이론들을 말한다. 가령 사회는 복잡한 방향으로 나가는가, 아니면 단순한 방향으로 나가는가 따위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회 변동 이론은 진화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화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중심을 두는 이론(균형이론)과 사회 내의 갈등에 중심을 두는 이론(갈등이론), 이와는 무관하게 사회는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는 이론(생성몰락이론) 등이 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학자들은 사회는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가령 마르크스는 사회변동을 '계급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보는데 반해 파슨스는 '균형 유지'에 무게를 둔다. 즉 사회는 어떤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내에 어떤 변동이 발생하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변동이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한다.

생성몰락이론에는 슈팽글러, 소로킨, 베버 등의 학자가 속할 수 있다. 슈팽글러의 경우, 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그냥 수필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그의 문장은 꽤 아름답고 감동적이긴 하지만 논증의 대상은 아니다. 최근 그의 <<문명의 충돌>>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지만, 웃긴 짓이다. 그를 대단한 학자로 여긴다면 매우 큰 오해다. 아펠바움도 그는 생성몰락이론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의 이론은 검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문서로서도 매우 적당한 책이라 생각된다. 이 책을 읽고 뒤렌도르프와 소로킨에 대해서 따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뒤렌도르프의 경우에는 마르크스의 사회변동이론을 이어받으면서 논증가능한 형태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경험 데이터로 논증가능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과 20세기 들어서 그의 이론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내세운, <<공산당선언>>이나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보여준 형이상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배경에 있다. 적어도 이것은 통찰력 있는 것이며 현재까지도 그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로킨의 경우에는 사회변동의 체계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모든 것들과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논리적 추론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작업에 가깝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문화나 예술까지 포함시킨 그의 사회변동이론은 나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리처드 아펠바움의 <<사회변동의 이론>>을 꼭 구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매우 유용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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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입문 - 10점
그래엄 터너 지음/한나래


         
문화 연구 입문

그래엄 터너 지음(김연종 옮김)   한나래
          


         
          이 책의 원제는 <<British Cultural Studies>>이다. 즉,  제목 그대
       로 영국의 문화 연구 전통에 대한 입문서이다. 그러나,  입문서라고 해
       서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서이기 때문에, 꼼
       꼼히 읽을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의 구성은 제 1부  기본 원칙들-<제 1 장 문화  연구의 이념>,
       <제 2 장 영국의 전통:간략한 역사>. 제 2 부 중심 범주-<제 3 장 텍스
       트와 맥락>,<제 4 장 수용자>,<제 5 장 민속지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
       학>,<제 6 장 이데올로기>.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문화연구(혹은 문화이론)에 대한 교양강좌가  각 대학교(원)나
       사설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그 곳에
       서 이루어지는 강의는 절대로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난
       다면, 그건 강의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문화연구(문화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
       이 있었음으로해서 몇 권의 책과 여러 강의에도 가보았지만, 알  수 없
       는 묘한 반감같은 것이 있었다. 그 당시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
       만, 최근에 들어 약간의 가닥을 잡았다. 이 가닥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
       하기로 하고, 먼저 '문화이론의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적어보겠다.
         
          1.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
          2.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3. 담론은 권력이다.
         
          어느 강의에서 적은 것으로 기억되는  이 세 가지 기본적인  특징은
       전적으로 구조주의적이며, 정치적이다. 첫  번째의 '기호는 독자의  또
       다른 세계/현실이다'라는 문장에서의 '기호'란  꼭 글자 뿐만  아니라,
       영상기호, 패션, 건물, 도시공간, 모든 기호학적인 논의가 가능한 것들
       을 의미한다. 즉, 문화이론의 대상은 우리가(* 독자)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시간적인, 공간적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연구  대상으로 한
       다. 두 번째의 '텍스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구
       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텍스트를 얼마만큼 분석해낼 수 있을까, 또한 과연 세상의 모든 것들을
       텍스트는 담고 있을까? 세 번째 '담론은 권력이다'라는 문장에서의 '담
       론'이라는 단어와 '권력'이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렇
       다면, '담론discourse'이라는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
         
          "담론들은 그것이 형성되는 제도와 사회적 실천의 종류에  의해, 그
       리고 말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말을 하는 상대의 위치(position)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담론의 영역은 동질적이지 않다. 담론은 사회적이다.
       어디서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진술이 만들어지고 단어와 단어의 의미가
       사용된다. (... ...) 모든 제도(institution)에는 개인에게  배당된 담
       론이 있고, 담론의 위계질서(hierarchy)가 있다."
          - <<담론이란 무엇인가>> 다이안 맥도넬(임상훈 역. 한울) 11쪽에서
       12쪽.
         
          간략하게 인용하였지만, 인용된 부분을 통해서  보자면, '담론'이라
       는 단어가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해됨을 알 수 있다(*  '권력'이라는 단
       어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즉,세 번째  문장인 '담론
       은 권력이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지배담론을 쥐고 있는  자에게 권력
       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이론이 우리 인문학의  주된 흐름
       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먼저, 문화연구는 유럽의 학문이라는 점이다.
         
          "전체성, 그리고 분리되고 복잡한 부분들을 연결시키는 합리적 틀에
       기초한 설명이 위대한 대륙적 사고 체계의 특징이다."(이안 챔버스. 25
       쪽. 재인용)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니? 즉, 문화연구는 유럽적 학문의  한 경향
       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 먼저 '문화연구'를
       수입함에 있어 저 꼴 사나운  '위대한 대륙적 사고'라는 것부터  비판,
       분석하여 없애는 일부터 필요하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국내의 인문학연구자들은 서구의 그것을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한 예로, 영국의 문화 연구에서 '하위
       문화sub-culture'에 대한 연구가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짐으로해서 국내
       연구자들도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영국의 하위문화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
       을까? 폭주족(?), 혹은 건달(?) 양아치(?)로 구분되어질 수  있는 부류
       의 문화가 그들의 하위문화일까? 내가 보기엔 전적으로  다르다고 생각
       된다. 영국의 하위문화적 전통은  젊은 세대의 부모세대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그 이전 세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폭주족 문
       화는 팝문화영향 때문이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폭주족이었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문화를 향유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위문화에 대해 너무  쉽게
       연구를 하려는 것같아 안타깝다.(* 연구를 하려면,  먼저 하위문화라는
       단어 자체부터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 정의내려야 할 것이며,  또한 그
       것은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 등 여러 학문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영국의  문화연구는
       그들의 인문학전통, 특히 영문학  전통에서 벗어나 이루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영국 문화연구자들이  이전엔 문학연구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좌
       파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연구는 전통 때문이라기 보
       다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엔
       임상훈처럼 문학을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  해석한다(;<<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 역자서문에서)). 하지만, 그 정치적인 이유는  이미 퇴색되
       어졌다. <<문화과학>>이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에 대해서 공개적
       인 채널을 통해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들 문화
       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화과학>>이 노렸던 정치
       적인 목적은 이루어진 것같지 않으며, 문화담론들은 지배권력의 이데올
       로기로 이용되거나, 상업자본의 그것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사
       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존재가 순수예술이다(* 필자의  순수예술에 대한
       사랑을 용서하시라). 여기에 대해선 다분히 감정적인 어조로 <<K에게>>
       라는 글에서 언급했음으로 그냥 넘어가겠다.
         
          글이 서평적인 성격을 넘어서버리고 말았다. 읽는 사람 각자 나름대
       로 읽어주었으면 싶다. 혹시, 현재 이야기되는 '문화연구'에 대해서 알
       고 싶다면, 그래엄 터너의 <<문화이론입문>>이 도움이 될 것이다.
         
          * 문화이론, 문화연구 라는 말을 섞어 사용하였다. 이 두 단어의 차
       이란 거의 없다. 단지 문화연구라고 했을 때에는 영국의 그것을  더 상
       기시키기는 하지만, 별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였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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