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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인문학 +20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The Community of Those who Have Nothing In Common) 

알폰소 링기스Alphonso Lingis(지음), 김성균(옮김), 바다출판사 






우리가 속한 환경의 외계外界를 향해 우리가 전진하는 과정은 우리의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과정이다. 죽음은 세계의 모든 틈새에 존재하고, 심연은 세계를 연결하는 모든 회로의 이면에도 존재하며, 세계를 연결하는 길들의 저변에도 존재한다. (252쪽)




철학서답지 않은, 부드럽고 다소 낯선 문장들은 독자에게 느리게 읽을 것을 요구한다. 이 강제된 느림은 현대스럽지 않다. 책 표지는 알폰소 링기의 글과 어울리고,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담은 책이지만, 산문처럼 읽히는 건 그만큼 문학적인 탓이리라. 번역되자마자 바로 구입했지만,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던 건 저 느리게 읽기가 내 일상과 참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꽤 힘들게 읽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이 서평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이 읽기의 경험은 우리에게 독서에 집중할 한 두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해 줄지도 모른다.


링기스의 철학은 사상의 측면에서나 행동의 측면에서 대학의 상아탑에 갇힌 보통의 포스트모던 학문들을 멀리 벗어나 있다. ... ... 그는 자신의 동료학자들과는 반대로 제 3세계와 고대 문명의 유적지들을 직접 여행하면서 체험한 사랑, 신뢰, 죽음, 육욕을 탐구하고 그 결과들을 독창적인 1인칭 문장으로 유려하게 서술한다. ... ... 링기스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통적인 철학의 강박관념을 떨쳐버리는 철학이다. 

- 스티븐 재니스Stephen Janis(<시티 페이퍼City Paper> 편집위원 및 기자) 

(* Mortal Thoughts - Philosopher Alphonso Lingis Brings the Real World to the Ivory Tower, by Stephen Janis, Citypaper.com) 



링기스는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 즉 타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타자를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그는 서구의 합리성이란 타자를 지우고 배제하며 추방하는 것임을 전제한 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 극복의 계기를 '죽음'에서 찾는다. 책 말미에 그 스스로 타자로서 죽을 고비에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우리와 타자를 이어주는 강력한 끈임을 주장한다.



합리적 공동체가 한창 작업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 - 죽음과 '죽어야 할 운명'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 - 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서로 분리시키고 격리시키는 죽음은 공통 죽음common death일까? 그리고 그런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무無로서 분류될 수 있을까? 

- 38쪽 



그리고 책의 대부분은 합리적 자아가 어떻게 타자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혹은 사색)이다. 합리성과 타자, 타자성의 경계, 개별화된 개인과 타자, 소통, 나라는 존재와 죽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될 공동체에 대해. 



타자에게 내밀어지는 손은 타자의 취약성, 피로, 고통과 접촉하고 그 손의 소유자를 타자가 죽어가는 자리로 데려간다. 그 손은 낯선 정언명령에 순종한다. 이런 타자의 죽음 과정은 나와 유관한 것이다. - 252쪽 



하지만 우리 바깥의 타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 안의 타자도 무시하고 지우며 없애는 것이 바로 서구의 합리성이다.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과정은 그 순간순간 모두가 투쟁의 과정이다. 



소통에 참여하는 과정은 전달하려는 메세지의 배경잡음과 그 메세지 자체에 내재된 잡음에서 메세지를 추출하는 과정이다. 소통은 간섭과 교란에 대항하는 투쟁이고, 배경으로 밀쳐져야 하는 부적절하고 애매한 신호들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소통자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제시되는 신호들에 내재된 잡음들 - 사투리억양들, 틀린 발음들, 모호한 발음들, 더듬거림들, 헛기침들, 돌발적 탄성들, 발설되다가 중단되는 단어들, 문법을 벗어난 축약어들 - 과 시각매체에 포함된 소음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 116쪽 



이 투쟁 속에서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과 그 방법들에 대해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 문화인류학적 사례, 현대 예술이나 과학 기술,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서 끄집어낸다. 



살아있는 우리는 타자들의 죽음에 노출된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것은 근본적인 의무, 즉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들과 동반해야 하는 근본적인 의무이다. 병원에서든 빈민촌들에서든 외롭게 홀로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사회는 급속히 자멸하는 사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공립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 

- 261쪽 



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천천히 읽는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 


덧붙이는 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위 서평과는 무관하게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란 바로 평범한 우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의 논의를 한국 사회에 적용하니, 꽤 심각한 정치학 서적이 된다. 타자란 바로 우리들이고, 합리성으로 무장한 자들은 바로 국가 권력이다. 국가 권력은 타자인 우리를 배제하고 지우고 있었다. 링기스에 의하면, 합리성이란 개개의 특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균질성을 향해간다. 


세계의 잡음을 제거하는 과정은 합리주의자가 되는 과정이다. 소통의 위한 최초 노력은 사고력이 추구할 탈물질화를 미리 시작한다. 하나의 형식을 그것의 경험적 실현과정들에서 독립시키기 위한 노력은 보편적인 것, 과학적인 것, 수학적인 것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 128쪽 



애초에 타자의 죽음이란 죽음이 아니다. 그냥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무시되는 것이며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다. 평범한 우리들은 지금도 죽어나가지만, 국가 권력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러 매체들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하지만, 소통이란 단어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될 뿐, 그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즉 소통의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소통을 폭력의 연속으로 간주하되 특히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폭력의 연속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주장과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의 변증법 과정에서 소통자들 각자를 타자가 아닌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틈새 시간을 목격한다. 그 사람은 그 틈새 시간에 '저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말하는 소통자들'을 목격한다. 소통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증하기 위해 말하는 과정은 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말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소통자의 정당성을 확증할 가능성을 배제해버렸다. 왜냐면 소통은 타자 - 소통자의 상대방 - 가 아닌 국외자 - 야만인, 의인화된 잡음 - 를 침묵시키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 118쪽 



한국의 보수 정권 앞에서 국민들은 타자이며, 국외자이고, 잡음일 뿐이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야 될 자들이며, 그들 앞에서 나서서는 안 될 존재다. 잊혀진 존재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다. 


그러니 우리에겐 자유만 있을 뿐이다.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도 있다. 단 저 성벽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와 어떤 행동을 하는 순간, 그 때서야 비로서 우리가 타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자괴감, 이 무능력함, 그리고 스스로 속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즉 그들을 향한 분노나 투쟁의식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부터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스스로 침묵을 강요한 채 걸음을 멈추고 부서지는 자신의 마음 속으로 숨는다. 


한국 사회의 비극은 드러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곳에 있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면서 끊임없이 무능력하게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타자로 만든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공격하거나 우리들 내부에서 갈등하고 상처입고 상처입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미 타자화된 우리는 한국 사회에 속한 이가 아니다. 국가는 없고 국가 없는 국민이다. 그러니 이 사회의 미래는 더 이상 호소력이 없거나, 지금 당면한 문제만으로 타자인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럽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조차 모른 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으며 따라하면서 타자를 부정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긴 이것도 전체 역사로 보자면, 아주 짧은 기간일지도 모르리라. 아주 사소한... (이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하나) 




* 스티븐 재니스: 탐사 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로 여러 저널리스트 상을 수상했다. 아마존에 저자 페이지가 있다. http://www.amazon.com/Stephen-Janis/e/B009OBYC6O  (누구인지도 모른 채 인용하는 것이 다소 무책임해보여 누구인지 찾아보았다. Citypaper라고 해서 이런 잡지가 있는가 했더니, 미국 대도시마다 다 있었다. 다행히 스티븐 재니스가 쓴 리뷰가 있었지만, 이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시티페이퍼에서 검색되지 않았다. 원문이 사라진 것이다. 해당 시티페이퍼는 볼티모어 시티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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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인문학 

장석주(지음), 호미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년을 즐겁게 하며, 번역과 장식과 위급한 때의 도피처가 되고 위로가 된다. 집에서는 쾌락의 종자가 되며 밖에서도 방해물이 되지 않고, 여행할 때는 야간의 반려가 된다." - 키케로 



일종의 독서기이면서 에세이집이다. 서너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인 장석주의 서정적인 문장들로 시작해, 다채로운 책들과 저자들을 소개 받으며, 책과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고 할까.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이 책은 가벼울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다소 무거울 수도 있다. 깊이 있는 글들이라기 보다는 스치듯 책들을 소개하고 여러 글들을 인용하며 짧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끝내는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처럼, 일요일에 한가로이 읽기에 딱 적당하다고 할까. 다만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가의 문제가 남긴 하지만.   





책은 쉽게 읽히고 장석주의 문장은 감미롭고 단아하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에 대해 쓴 짧은 글들 속에서 현대적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연애나 사랑, 책과 독서, 젊음과 늙음, 산책과 요리, 피로와 인생에 대해서. 딱딱한 책들만 읽어온 나에게 이 책은 너무 말랑말랑했다고 할까.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더구나 바쁜 일상 중에 띄엄띄엄 읽기 좋은 책이기도 하다.  





일요일의 인문학 - 8점
장석주 지음/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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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지음), 김태환(옮김), 문학과지성사 



베스트셀러가 된 철학책을 읽었다. 한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한병철의 <<피로사회>>. 몇 해 전 이 책으로 떠들썩할 때, 나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책의 내용보다는 마케팅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초 집 근처 구립도서관 서가에 새로 들어온 책 서가에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 몇 페이지를 읽고 난 다음, 바로 그의 책 세 권을 주문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놀라웠다고 할까. 

단정적인 논조였지만, 일관성이 있었고 나에겐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고 해야 할까.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23쪽 


성과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다. 기업의 목표를 지나 국가의 목표가 되고 가정의 목표가 되며, 너와 나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긍정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고갈시킨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24쪽)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 ...)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privativ하기보다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 21쪽 


그는 피터 한트케를 인용하며, 한트케가 이야기하는 '근본적 피로'를 끌어들인다. 성과사회의 피로를 벗어나기 위해 한트케의 피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피로는, 현실 사회에 묶인 현대인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건 한국적 상상황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우 짧은 책이고 압축적이다. 의외로 책 읽는 속도는 느리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읽은 지 몇 달만에 쓰는 서평인 탓에 허술하긴 하지만, ... 이 책 무척 좋다. 일독을 권한다. 

*     *   
덧붙이는 글 1)
맥그레이스의 <<경쟁 우위의 종말>> 마지막 부분은 개인에 대한 전략에 대한 것이다. 경영학은 이제 기업을 지나 개인의 차원까지 확대 적용된다. 그런데 동시대의 탁월한 인문학자들은 경영학과는 정반대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 시대가 가진 갈등 국면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까. 어쩌면 미국적 이데올로기와 유럽적 이데올로기의 충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대학 교육에 적용하면 아주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인문학의 성과는 보이지 않고 계량적 측정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과사회의 피로 속에서 인문학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과사회 속에서 직장인 교수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성과사회에 적응하다보니,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보지만, 인문학 교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피로사회 - 10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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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08 01:54

    비밀댓글입니다

  • 지하련님 추천 글보고 책 읽어봤습니다. ㅎㅎㅎ


    제 생각엔.... 인문학이 의외로 굉장히 부르주아 스러운 분야라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인문학자의 급여는 배고플지 몰라도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일만큼은 결코 배고프지않기 때문입니다. ㅋㅋㅋ

    게다가 인문학적 감성 및 능력(?)을 통해서 수혜를 얻고자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취업따위를 노리는 사람들이 아닌 듯합니다. 요즘 거부가 되는 실크로드라는 IT의 핫한 아이돌들의 흔한 비하인드 스토리 역시 인문학적 소양인 경우가 많습니다. 장래희망이 최소 자기사업체 설립에서 최대 세계적인 기업 총수정도 스케일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인문학인듯 합니다.(혹은 사회를 어느 방향성으로든 우선 엎어보겠다는 야심가이거나;;;;) ㅎㅎㅎ

    얼마 살진 않았지만;;; 살수록 사회라는 단어가 합리, 이성, 원리, 원칙, 개념 과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ㅜㅜㅜㅜ

    • 실은 합리, 이성, 원리, 개념과 사회, 혹은 우리 삶은 매우 깊숙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걸 철학 서적을 읽으면서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요. 그리고 '굉장히 부르주아'스러운 분야가 된 것도 없지 않아 있는 듯해요. 저같은 경우에도, 돈벌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돈벌이와 관련없는 부분에 대한 의견까지 피력하기도 하고 글을 남기기도 하니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 비슷한 종류입니다.돈벌이와는 무관하죠. 하지만 살아가다가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의 깊숙한 곳에는 철학적인 질문이 있죠. 가령 '왜 나는 그/그녀를 사랑하는 것일까'따위의 질문 말이죠. '왜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왜 나는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도 비슷합니다. 실은 이런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철학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의 백미는 서양에서는 플라톤이 될 것이고, 동양에서는 공자가 될 것입니다. 최초에 질문한 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의 답을 구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최초의 철학은 동시에 문학이며, 기하학이고, 자연과학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회가 복잡해지는 만큼 철학도 복잡해졌고 우리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듯, 철학도 보다 단순하고 분명한 일상어로 우리 삶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철학 책은 뭔가 여유로운 사람들이 읽는 책 비슷하게 여겨지는데, 실은 그렇지 않고, 도리어 여유롭지 못한 이들이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왜냐면 여유는 세상을 얼마나 깊이 있게 보고 이해하고 대처하느냐에 달려있으니깐요. ^^

  • 저도 지하련님께서 정성스럽게 달아주신 답글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쩌면 부르주아구나 ㅋㅋㅋ 라는 생각에 저런 답글을 달아봤습니다.

    저는 ... 인문학의 힘을 누구보다 믿습니다. 다만, 대중은 저와는 의견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저를 힘들게 합니다. ㅎㅎ



오래 전에 읽은 인터뷰인데, 블로그에 스크랩을 해둔다. 


**


<파워인터뷰>[단독] "'가장 창조적인 5% 인재'는 그냥 내버려두는 게 최상"

김대식 腦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40725115605537 


**

 

스크랩을 하기 위해 프린트해두었던 인터뷰를 다시 들춰보는데, 일이십년 전과 비교해 확실히 세상이 빨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의 발달과 관련 지식의 전파도 빠르고 이러한 것들이 실생활에 반영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 이러다가 급격한 붕괴나 반발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김대식 교수는 현재 중앙선데이에 기고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중앙선데이에 가서 검색해봐도 될 것이다. 


인상적인 두 구절을 옮긴다. 


** 


"인간의 선택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치면 그 당구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단일한 인과관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관계가 합쳐져 이뤄진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선택의 풍경'이란 말을 쓴다. 산꼭대기에서 하나의 공을 굴리면 산의 풍경에 따라 공이 굴러내려 온다. 프레임은 선택돼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기계다."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대학교 교수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들의 뇌를 만들어주는 게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어렸을 때 교육은 평생 바꾸기 어렵다. 특정 이념이나 특정 종교, 정치적 성향 같은 것은 집어넣으면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뇌가 유연성이 높은 시기에는 수학, 물리와 같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먼저 가르치고 역사, 사회, 윤리 등의 개념은 나중에 가르쳐야 한다. 어렸을 때 이런 것을 가르쳐 놓으면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 


**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참 똑똑하고 현명해야 하는데, 갈수록 대우가 낮아지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똑똑하고 현명한 학생들이 교대에 가는 건 아니기 때문에, 교대에 가서 제대로 공부하는 지도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대학동기 중의 한 명은 교대를 다니다 자퇴했는데, 이유는 졸업하면 선생님으로 갈 수 있는 안정성으로 인해 너무 엉망인 대학생활을 하는 모습에 크게 절망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뭐 이건 20여년 전 버전이지만.ㅡ_ㅡ;; (아이고 나도 나이가 이렇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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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덱스, 현대미술 

(원제 Le Photographique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지음), 위베르 다미슈 Hubert Damisch(불어 옮김), 최봉림(불어를 한글로 옮김), 궁리 (대림이미지총서05) 





Jackson Pollock (1912-1956)

Gelatin silver print, 1950

National Portrait Gallery

Smithsonian Institution

Gift of the Estate of Hans Namuth

Image copyright Estate of Hans Namuth



그러나 분명 나무스는 사진가로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가적 역량으로 촬영 각도, 프레이밍, 흑백 콘트라스트, 그리고 문제가 되는 사진 대상의 모든 구성 요소를 고려했다. (...) 

나무스의 사진 속에서 폴록은 언제나 커다란 화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어떤 화폭은 벽에 세워져 있고, 어떤 화폭은 바닥에 놓여져 있다. 그 연속 상태 속에서 검은 선과 하얀 선은 뒤얽혀 공격적인 모티브를 형성하며, 또한 아틀리에의 바닥에 보이는 얼룩 반점들 속에서 반복된다. 그리하여 사진은 위아래가 하나로 붙은 공간을 재창조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인체가 중력과 단단한 바닥과 맺는 관계는 아무래도 애매 모호할 뿐이다. 작업실 공간은 더 능동적이고 더 현란한 또 다른 공간에 의해 포섭되어 진다. 물감으로 뒤덮인 평면들의 연쇄 결합은 콜라주의 결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애초의 작업실 벽과 바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여주는 특수한 평면적 시각 효과에서 기인한다. 

- '텍스트로서의 사진 - 나무스와 폴록의 경우' 중에서, 146쪽 



Jackson Pollock painting in his studio on Long Island, New York, 1950.

Credit: Hans Namuth



한스 나무스의 사진은 잭슨 폴록으로 가는 창과도 같다. 크라우스는 이 점을 제대로 지적한다. 우리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을 알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탁월한 시각으로 카메라로 잡아 해석해낸 한스 나무스에 대해선 소홀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여기저기 실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들을 모아 불어로 번역한 위베르 다미슈는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사진에 대한 글들의 가치를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에 비해 손색없다며 격찬한다. 이 격찬에 대해서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점만은 분명하다. 잭슨 폴록 대신 한스 나무스에 대해서 설명하듯, 이 책은 온전히 사진에 대해서만, 사진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씌여진 책이다. 회화적 전통 속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진만을 위한 이론적 지평을 만들고 해석하며 독립적 가치를 논한다. 


하지만 이 책 만만치 않다. 거의 한 달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 겨우 다 읽고 정리하는 지금, 이 모음집에 대해서 뭐라고 적어야 할 지 모르겠으니 말이다. 흥미로움으로 따지자면, 탁월한 비평집들 못지 않았지만, 책은 쉽지 않았다. 사진 이론서이지만, 인문학 서적이며, 사진에 대한 깊은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인문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어쩌다가 미술 비평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직접 사진을 찍는 이들 중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러므로 발자크에 따르면, 자연계의 모든 신체는 일련의 유령들로 구성된다. 유령들은 사방 모두 아주 얇은 막이 무한히 포개어진 잎 모양의 무수한 층들로 이루어지며, 눈은 이를 통해 신체를 인지한다. 

인간은 결코 창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환영처럼 만질 수 없는 것으로 어떤 단단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또는 무(無)에서 어떤 사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다게레오식 사진 촬영은 사진 찍는 대상의 여러 층 가운데 하나를 급습하여 은판에 덧붙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술한 신체는 다게레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령, 다시 말해 신체를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을 잃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 나다르의 회고록 <내가 사진가였을 때> 중에서 (32쪽 재인용) 



거의 읽히지 않는 나다르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읽으면서 '사진적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은 인영, 흔적, 자국의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 어쩌면 이것은 이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중심 테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크라우스는 퍼스의 '인덱스Index'에 의존하며 사진적인 것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Alfred Stieglitz

Equivalent

1930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등가물'에 대해 크라우스는 이렇게 적는다. 



그것은 대기 상태의 각인이다. 빛의 굴절을 통해 가시화된 구름의 형상은 바람의 방향과 습도를 기록하고 가시화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을 구름이 고정시키는 한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기호들이다. <등가물>에서 스티글리츠는 이 자연의 기호들을 비자연 기호로 변환시키는 곡예를 수행했다. 다시 말해 구름이라는 자연의 기호를 사진이라는 문화의 언어로 전환시켰다. 

- 209쪽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파울라 또는 햇살, 베를린>, 1889년 



현재(2014년)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도서관에서라도 구해 읽으면 좋을 것이다. 특히 사진, 이미지, 미술사 전공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난이도는 상당하지만,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로잘린드크라우스저 | 최봉림역 | 궁리 | 200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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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다행스러워 할 줄 그 땐 몰랐다. 막상 직장 생활을 해보니, 이 자본주의라는 것이 정말 공포스러운 괴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능동태를 이야기한다거나 미켈란젤로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이상한지, 심지어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보고 옆에 서 있는 작가와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저 세상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바 변화란 '이론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서 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랏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농부는 곡식이라도 생산해 보탬이 되는데,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학자들은 말만 앞 세우며, 도리어 나랏일에 참견하며 방해될 뿐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오늘 읽은 진태원 교수의 논문 관련 기사.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

그는 현재 유행하는 인문학 담론들이 미국을 통해 유통되고 있으며, 미국화된 담론을 세계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은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것이 아닐 것이다. 


진 교수는 이러한 '괴리'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 담론들,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한다. 진 교수는 "해방의 정치를 제도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는 점"과 함께 '좌파 메시아주의'를 이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들이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해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는 매우 사변적인 정치철학"이라며 "이들 중에서 누구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변성'이 바디우의 '대상 없는 주체', 지제크의 '신적 폭력', 아감벤의 '계급 없는 사회' 등의 개념에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기사 중에서 인용)



진태원 교수의 의도는 현실적인 고려나 실천적 방안의 제시 없는, 사변적 이론가들의 유행를 질타하기 위함이겠지만,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좀 뜬금없어 보인다. 진태원 교수가 보기에도 참 문제 많은 유행이겠지만... 

(몇 권 읽지 않았지만, 리뷰하자면, 지젝은 센스있게 얄팍하고 바디우는 정말(혹은 과격하게) 사변적이고 아감벤은 그래서 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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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이용재(지음), 디자인하우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도 책 한 권 써서, 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경제적인 위기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아주 비현실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뭔가 힌트를 얻을 요량으로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잘 팔리는 책과는 거리가 먼 필자에 가깝기 때문에, 잘 팔리는 책은 어떠한가 살펴보기 위해.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정말 후회했을 것이다. 이 책은 글의 조탁(彫琢)이라든가, 단어의 선택, 문맥의 흐름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심지어 글의 내용과는 무관한 누군가의 리뷰가 글 초반에 인용되기도 하고(재미 삼아 옮긴 듯한) 인문학 기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했고 마치 짧은 참고서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의 리뷰들은 대부분 좋다는 평가들로 채워져 있었으니, 나는 이 책의 문제 이상으로 독자들의 반응이 놀랍고 한편으로 우울해졌다. 마치 이 나라의 형편없는 정치가 생각 없는 국민들의 무책임한 투표와 정치 무관심에서 비롯되듯이, 한국의 저자들도 그런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를 욕할 생각은 없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 테니 말이다. 이제 책읽기도 티브이예능프로그램 보기와 비슷해지고 전업 작가라면 그 지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충분히 시사적이었다.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

이용재저 | 디자인하우스 | 200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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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지음,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란, 5분, 10분, 5분, 이런 식으로 조각난 것이 아니라, 1시간, 2시간, 혹은 하루나 이틀 이상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2013년 가을, 내가 집어든 책은 도서출판 길에서 나온 ‘발터 벤야민 선집 1권 - 일방통행로, 사유이미지’이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내 조각난 시간 틈 속으로 들어와 사뿐히 내려앉은 벤야민의 글들은 번뜩이는 통찰이 어떻게 짧은 글들로 조각나 고딕 교회의 모자이크화처럼 구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결국 발터 벤야민은 20세기의 전반기를 살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인식 태도 - 대중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사회주의적이며 카발라적인 진지함을 잃지 않고 그것을 그 속에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 에서도 기인하지만, 그의 글쓰기 방식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이 책은 벤야민 글쓰기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러한 글쓰기의 급진성으로 이미 조각난 시간, 조각난 일상을 영위하는 현대인에게 꽤 적절한 책이 되었다(그러나 가끔 만나게 되는 곱씹어야 하는 문장들 앞에선 아쉽긴 하지만). 


고전적 예술 양식은 이미 사라지고 그 흔적들이 광고 문구 -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에서 따오거나 유래한 비유적 문장들로 즐비한 - 나 디자인 소품 - 이미 고전 예술을 넘어 현대적 예술 양식의 하나로 인정받는 - 으로 남겨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계란 24시간 꺼지지 않는 케이블 방송처럼 끊임없이 변하며, 이 세계의 본질마저 이미지들의 연속체로 존재한다. 연속체, 즉 영화적인 병렬적 구성 -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를 구성하는 방식인 셈이다. 


그는 각 단락을 나누고 그 단락마다 에피소드를 담는다. 마치 각기 다른 상품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렬로 늘어선 아케이드를 지나는 산보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거리 풍경처럼, 이 책도 그런 구성을 띄는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산책할 때나 그 산책을 끝내고 혼자 있을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끝없는 허전감, 쓸쓸함 - 혹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행인들 사이에서 경험하는 익명성의 공포 - 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벤야민이 향하는 곳은 그 산책의 본질을 호도하고 그 산책의 외관으로서의 글쓰기 형식 자체이거나 그 산책의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한, 비현실적 이상향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여러 문학작품들에 빗대어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며 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을 통해 현실 변화의 단초를 읽기 보다는 이미 변해버린 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실은 너무 늦게 우리가 벤야민을 읽기 시작한 것이며, 너무 일찍 벤야민이 절망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나마 이런 글쓰기를 통해 변해버린 현실을 알려주는 이마저도 드문 탓에, 벤야민은 우리들의 숨겨진 친구가 된다. 


이 책은 벤야민의 주저가 아니다. 일종의 산문집에 가까우며, 짧은 글들의 연속으로 인해 도리어 독서의 혼란스러움만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을 지도.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발터벤야민저 | 김영옥외역 | 길 | 200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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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즘 철학 - 10점
조중걸 지음/한권의책
 


아포리즘 철학 
조중걸(지음), 한권의책 




결국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말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오랜 철학적 탐구가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철학은 기껏해야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왜 모를 수밖에 없는지, 새로운 앎은 어느 지점에서 개시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이것이 몽테뉴가 말한 바 "내가 무엇을 아는가?"의 의미다.
따라서 철학은 우리에게 겸허하라고 말한다. 오랜 탐구 끝에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가 큰 무지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또한 무지에 잠기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위대했던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신과 관련해 "무지無知의 지知"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  



책이 서점에 나오자마자 구입한 것이 작년 이맘때였는데, 이제서야 겨우 다 읽고 되새기게 된다. 이 작은 책이 가지는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차라리 두꺼운 서양철학사 대신 이 책을 읽는 것이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나 태도를 가지게 하기 위해 적절하지 않을까. 

특히 쇼펜하우어, 니체,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설명은 나에게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아마 몇 명은 이 책의 편파적인 관점 - 저자는 상당수의 근대 독일철학자들을 건너가버린다. 대신 쇼펜하우어와 니체로 채운다. - 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도리어 현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한다. 

거추장스러운 낙관적 합리주의, 이성주의 대신 정직한 비관주의, 현실주의가 더 나은 법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식,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와 행동 사이에 놓여진 이 거대한 단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관적 세계 인식 속에서 합리적 삶을 견지하려고 말도 안 되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베르그송이 말하는 바, 지성이란 내 전부가 아니라 내 일부일 뿐이다. (이렇게 나는 변명을 하나 가지게 된다) 

이 책은 철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좋을 것이고 철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충분히 좋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철학 책에서 읽지 못하는 내용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며, 그 알게 되는 내용은 그간 알아왔던 어떤 세계를 흔들어놓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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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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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 10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새물결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지음), 김덕영, 윤미애(옮김), 새물결 



국내에서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 ~ 1918)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저조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는 철학을 연구하였으며(신칸트주의자이면서 니체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사회학, 미학, 문화비평을 아우르며, 동시에 그의 글들은 대부분은 현대 문명이나 문화, 대도시 사람들의 마음/정신, 일상, 태도, 형식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고, 그의 문장은 짧으면서 뛰어난 문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런 글을 썼다는 점에서 놀라움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발터 벤야민 이전에, 그 누구도 이런 식의 글을 본격적으로 선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유행이란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들 중에서 특별한 것’(57쪽)이고, 이 형식 밑에는 ‘모방’이라는 태도가 흐르고 있다. ‘모방은 우선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투자되는 에너지가 헛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56쪽). 이런 측면에서 지금 한국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영향이 거의 없는, 쓸모 없는 개인적 차별화 경향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게오르그 짐멜을 읽기를 강력하게 권한다. 확실히 그는 한 시대를 주도하는 사상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기도 했다. 


새벽에 읽어나, 지난 몇 주간 읽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끝냈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번뜩이는 짐멜의 통찰력은 놀라웠지만, 전체적으로 '짐멜의 사회학이란 배부른 부르주아 사회학자의 쓸모없는 지적 유희'라는 주류 학계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부분적 동의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짐멜은 그의 지적 재능을 낭비한 경향이 심했다.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들은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역자가 고르고 고른 글이었을 텐데 말이다. (2013. 4. 8) 


적어도 그는 전통적 인문학이 원하는 바의 '어떤 체계'를 벗어나 인상적이고 표피적인 일상의 현상을 분석하였다. 그는 편지, 식사, 유행, 손잡이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의 글이 형편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도 자체가 마치 유행과도 같아, 세월이 지나면 사라질 어떤 것에 대한 감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감상이 아무리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도 하더라도 그는 짧은 글들을 적었고 학문의 체계를 향하던 그 당시 다른 학자들 - 뒤르켐, 베버 등 - 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강력하게 짐멜 읽기를 권하는 것은, 내일 아침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무너져 저 깊은 아래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가지고, 돈과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불편한 타협을 하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게오르그 짐멜 만한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짐멜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모험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삶의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형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전체성이란 개별적인 내용들이 아무리 뚜렷하고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를 지라도, 그 안에는 통일적인 삶의 과정이 관통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결국 모험은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의 중심과 결합되어 있는 이물질이다. 외부는 내부의 형식이 된다. 비록 멀고 친숙하지 않은 우회로를 거쳐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적 삶에서 차지하는 이러한 위치 때문에 모험에 대한 기억은 쉽게 꿈과 같은 색채를 띤다. 
(204쪽) 


20개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의 게오르그 짐멜의 전체를 알 순 없겠지만, 적어도 짐멜이 어떤 사상가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래는 20개의 글 제목이다. 

- 현대 문화에서의 돈
- 대도시와 정신적 삶
- 유행의 심리학. 사회학적 연구
- 장신구의 심리학
- 이방인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손잡이, 미학적 접근
- 얼굴의 미학적 의미
- 양식의 문제
- 알프스 여행
- 식사의 사회학
- 감각의 사회학
- 감사. 사회학적 접근
- 신의. 사회학적 접근
- 편지. 비밀의 사회학
- 모험
- 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
- 비밀, 사회심리학적 스케치
- 분별의 심리학
- 다리와 문 

특히 몇 편의 글들은 놀라움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현대 문명/문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미학적 분석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분한 호소력을 가진다.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경건함, 곧 신에 대한 열망을 인간 영혼의 항구적인 상태로 만든 최초의 종교이다. 이에 반해서 그 이전의 신앙 형식들은 종교적 분위기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연결시켰다. 
마찬가지로, 돈에 대한 열망은 정착된 화폐 경제에서 인간의 영혼이 보여주는 항구적인 상태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는 돈이 바로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사람들이 빈번히 탄식하는 모습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물론 거기에서 돈에 대한 표상과 신에 대한 표상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있는 관련성들을 밝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신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심층적인 본질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다양성과 대립은 신을 통해서 통일성에 도달하게 되며, 또한 신은, 중세 말기의 저 특기할 만한 근대정신인 니콜라우스 폰 쿠사(Nikolaus von Kusa,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순의 지양 - 또는 대립의 지양 - 이라는 사실이다. 존재의 모든 낯섦과 화해 불가능성은 신에서 통일성과 화해를 발견한다는 이 이념으로부터 평화, 안전,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 유래하는데, 이 감정은 신에 대한 표상 및 우리가 신을 소유한다는 표상과 결부된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돈이 자극하는 감정들은 이것과 심리학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27쪽- 28쪽) 


그의 돈(화폐)를 둘러싼 현대 문명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다. 그리고 그 분석은 철학적이며 문화적인 영역까지 확대되어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역자는 짐멜의 이러한 넓은 관심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다소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하지만 다른 한 편 짐멜을 사회학자만으로 보기에는 그의 지적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원래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학 이외에도 철학, 미학, 그리고 심리학이라는 인식 도구와 수단을 구사하면서 방대한 모더니티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거장이다. 우리는 아마도 짐멜의 지적 세계를 인식의 다신주의, 아니 어쩌면 인식의 범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85쪽) 


두서없는 서평이지만,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권한다. 이 책 이외에도 짐멜 선집 2권이 더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책을 구해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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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10점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민음사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 칼 R. 포퍼(지음), 이한구(옮김), 민음사 




이 리뷰는 허술할 것이다. 읽은 지 1년이 지났고, 뭔가 독후감 같은 걸 남겨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허술한 이 글을 핑계삼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을 서가에 꽂을 생각이다. 


칼 포퍼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현대의 위대한 과학철학자이면서 보수적 자유주의자로서, 플라톤부터 마르크스까지 '중심(이데아)를 지향하는 어떤 체계'(또는 전체주의)를 극도로 싫어해서 끊임없이 반증을 제시해야 된다고 역설한 학자.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당신은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고상한 플라톤 대신 현실적으로 이율배반적이며 학문적으로 전체주의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플라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칼 포퍼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할 지도 모른다. 


아마 시대적 환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적 환경을 변명삼기에 포퍼의 이론적 호소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학문의 세계에서 포퍼는 이상한 비주류에 속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전투와 같은 삶을 영위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포퍼만한 학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 조지 소로스가 포퍼리안이고, 블랙 스완을 쓴 나심 탈레브도 포퍼리안인 것을 생각한다면, 포퍼를 무시하는 인문학자들 옆에 포퍼를 추앙하는 현실주의자들의 모습은 흥미롭기만 한다. 


1권, 2권으로 나누어진 이 책은 1권은 플라톤 중심의 시대를, 2권은 마르크스 중심의 시대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 다수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전체주의적인가를 포퍼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는 여기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고 도리어 자기 스스로 포퍼리안이 되어간다는 사실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강력하게 추천하지만, 글쎄, 이 책을 읽으라고 선뜻 이야기하기엔 책은 두껍고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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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읽은 지 1년이 지났다면 다시 한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ㅎ 더 자세한 리뷰 기대해보겠습니다~

    • 기대를 해주신다고 하니... 흠... 2권 읽고, 포퍼 해설서 한 권 더 읽고 난 다음 한 번 도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noi 2013.01.31 19:43 신고

    포퍼도 알고봤더니 빈의 유대인 집안 출신이더군요.. 그 시대의 철학적 거목들, 아니 문화계 지성계 전반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빈 출신 유대인들이 얼마나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는지 정말 놀라워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제와서 막 자랑스러워 하지만, 자기들이 나치에 협조했던 과거 때문에 이 학자들이 전 세계로 떠돌아야 했던 건 잊고 싶어하죠.. 얄밉다는..^^;;

    • 지금 그 곳에서도 유대인을 만나는 일은 없으신지요?
      빈 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에 똑똑한 유대인들이 고루 퍼져 있는 듯해요.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 빈의 유대인 지식인들이 20세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긴 했죠.
      민족성이 있기 보다는 지역성이나 문화적 배경을 더 믿는 편인데, 유대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면 민족성(혈연적인)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유대인에 대한 호의가 사라지고 있고요. 가령 유대인들은 계산에 너무 밝다 든가, 유대인들은 폐쇄적이다 든가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더라고요. ㅎ

    • 아. 그리고 중앙선데이라는 주간신문에서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라는 칼럼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sunday.joins.com에 가서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로 검색해보시면, 20세기를 풍미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걱, 유대인' 하시게 될 지도.. ^^;;

    • noi 2013.02.01 20:28 신고

      알려주신대로 검색해서 목록을 죽 훑어봤는데 알던 사람도 있고 유대인인줄 미처 몰랐던 사람도 있고, 정말 대단한 리스트네요. 슬슬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일상생활이나 모임에서 접하는 현지인들이야 스스로 유대인임을 밝히지 않으면 잘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생활구역이었던 빈 2구를 가면 지금도 검정 전통적인 의상을 입은 정통파(orthodox) 유대인들을 쉽게 볼 수 있어요. 2구를 비롯해 빈애 살던 유대인들은 2차대전 중에 거의 몰살당하고, 살아남은 소수는 미국과 이스라엘로 거의 다 떠나버리긴 했는데 전후 새로 동유럽에서 지금까지 꾸준히 유입된 유대인 인구가 꽤 됩니다. 근데 이들이 옛날 서구화됐던 빈 유대인들과는 달리 많이 보수적이고 말씀대로 '폐쇄적'이어서 문화적 충돌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오스트리아인들이 자기들이 지은 죄가 있으니까 잘 해주려고 노력하지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아직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과거 - 문학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시선(視線)들은 문장이 풍기는 향기에 숨겨져 모호해지기만 하니 말이다. 


시선 -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원근법이다. 데카르트적이거나 반-데카르트적이고, 무언가(어떤 대상)를 궁금해하거나 원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이거나 반-플라톤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글들은 원근법을 아름다운 안개 - 결국은 모호할 뿐인! -로 숨기고 우리를 이끈다. 


종종 아름다운 글들은 우리들은 아프게 한다.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이기에. 


문학 비평은 문학 작품에 기생하고 결국 작품 속에 묻힌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비평이 기생하는 작품에 따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문학에 가 닿지 못한 이유도 이 탓일까. 


오늘 신형철의 책을 펼치면서 그가 소개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나에게 대부분 생소하기만 한 이들 - 몇 명은 술자리에서 만나기도 했고 몇 명은 같이 학교를 다니고 했지만 - 속에서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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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글을 쓰다 ... 프린트한 종이 더미 사이에 넣어버렸다. 혼자 쓰는 글이라는 마감 같은 있으리 없고, 돈벌이도 아닌 탓에, 쓰다만 개의 , 쓰다만 개의 소설은 계속 짊어진 하루하루 살고 있는 셈이다.

오늘은 사무실에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가지고. 어제 들기 전에 서두와 역자 후기를 읽었고, 한동안 가방 속에 머물게 것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존재론의 새로운 >> 읽다가 '철학자가 처한 현실' 그것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관계 등에 대해 생각했고,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년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다시 읽었고, 뭐랄까, 뭔가 답답함을 느꼈다고 할까, ...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개념적 파악을 위해 정치적 현실을 논리화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헤겔에서는 "사유를 정치적 규정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전하는 정치적 규정들을 추상적 사유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사태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의 사태가 철학의 계기이다. 논리가 국가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논리를 증명하는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헤겔의 <<법철학>> 이러한 비판을 받을 만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 강유원, '옮긴이후기' 중에서



그런데 지적은 철학 전반에 걸쳐 이루어질 있는 아닐까. 하르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철학은 존재자에 대한 앎이 없이는 실천적인 과제에도 접근할 없다. (중략) 사실 모든 기술은 자연의 법칙성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의술은 생물학적인 지식 위에, 정치술은 역사적 지식 위에 구축된다. 철학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대상이 보편적인 ,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포괄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조바심을 누르고 숙고의 길을 찾으며 또한 뒤로 멀찍이 물러서는 또한 서슴지 않는 , 요구 사항이 시급하고 과제가 절박했을 때조차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 언제나 독일 정신의 강점이었다'
- N. 하르트만, <<존재론의 새로운 >> 중에서



현실에서 뒤로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고 사유하고 반성하는 . 그것이 철학의 길인 셈이다.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정을 종료하여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Als der Gedanke der Welt erscheint sie in der Zeit, nachdem die Wirklischkeit ihren Bilduingsprozess vollendet und sich fertig gemacht hat.)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ammerung ihren Flug.)
- 헤겔, <<법철학>> 서문 중에서(임석진 , 한길사)



이제서야 철학과 실천 사이의 묘한 긴장을 마음으로 이해하게 셈이다. 앞의 사태를 두고도 철학자는 사유한다. 그 사태가 끝날 무렵에서야 뭐라고 말하지만, 이미 현실적인 사태는 끝이 나 있을 무렵이고, 정리정돈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어떤 이가 와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참견을 한다. 현실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힌 사람들 사이로 들어와선. 그런데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이것이 '독일 정신의 강점'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이전의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앞에서 마르크스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현실 앞에선 아무 것도 수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독일 정신을 가지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정확한 판단과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실은 현실 한 가운데에서도, 현실의 변두리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게 현대 이론의 정설이다. 그러니 현대란 반-이론의 시대이고 합리적인 것들이란 믿을 수 없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으며, 의사결정이란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뒤로 유예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반-헤겔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가 동시에 휩쓴 시대라고 할까. 그러니 이론과 실천이라는 테마도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버렸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관찰한다는 것이고 관찰하는 것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철학자들이 걸어온 길을 되새기는 것이며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여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되지만, 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것 또한 철학이기도 하다.

결국 남는 건 나이고, 내 삶이고, 내 사유뿐이다. 그것이 시뮬라크르로 남든 간에. 그래서 이제서야 철학책이 제대로 읽히는 것일까. 

 


* 위에서 언급된 책들 
헤겔 법철학 비판
칼 마르크스 저/강유원

법철학
G.W.F 헤겔 저/임석진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존재론의 새로운 길, 손동현 역,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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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칼스텐 해리스의 글에 이어, 다시 한 편 더 올린다. 전문 잡지에 오래 전에 실린 글은 구하기 어렵다. 좋은 글들이 많지만, 누군가 꺼집어 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찾아보지 않게 된다. 블로그에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드문데, 자주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된 일인지 좋은 글 보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 한 몫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적절한 시각과 평가를 가진 칼스턴 해리스의 인터뷰이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필독을 권한다.


- 2002년 2월 월간미술 게재.


독일 철학, 미술사, 건축 이론,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와 그것의 약점에 대해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논의로 유명한 칼스텐 해리스 예일대 교수가 최근 건축철학서 《무한과 원근법(Infinity and Perspective)》을 펴냈다.

원근법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것의 인식론적인 뿌리를 통해 건축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모든 사람에게 예술의 가치를 설파한 그를 본지 이건수 편집장이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 2년 전 당신은 《월간미술》에 소개된 특별기고문에서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밀레니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동안 예술의 최신 흐름과 발달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개방성’이 특징이다. 뚜렷한 목표 없이도 오늘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정작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작가들은 최근 예술경향에 흽쓸려 방황하는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을 향한 접근방식에 깔린 불만족은 예술의 윤리적 기능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인종, 성(性), 그리고 성적 경향 등 오늘날 주요 문제에 대해 여전히 미숙한 생각을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이는 곧 ‘몸’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우리의 인식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을 조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정말 혼란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미래’를 향한 주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무분별한 자유는 그 자신을 전복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어떤 책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 즉 물질 안에서 구체화된 정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해 가정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물질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과학 밖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예술이 오늘날 직면한 하나의 - 아마 가장 중요한 - 임무는 과학이 세운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각각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경험하는 것은 존중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창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에 관해 예술은 그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그 기준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으며,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성취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은 확실하다."

-
당신은 또한 그 인터뷰에서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로 상징되는 테크놀러지가 현대예술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른 인문학과 예술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당시 내가 주장했던 것은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수단이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 즉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테크놀러지가 인간 본성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의 전제인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와 지배하고 위협할 때 그 테크놀러지를 거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오늘날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객관화된 이성이 만든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
9.11테러는 하나의 거대한 참사에 그치지 않고 ‘인류’와 ‘문명’이라는 틀 아래 다양한 의견을 양산했다. 예술철학자로서 당신은 9.11테러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그것이 향후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하는가?

"
9월 11일 이후 ‘테러’는 뉴스와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이 언급되어 왔다. 그날 아름다운 아침에 멋진 건축작품이 테러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어쩌면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 테러의 목표물이 되도록 유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테러리스트는 세계무역센터가 갖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과는 모순된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파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세계무역센터의 부재는 이제 미국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상징이 되었다. 테러리스트가 남긴 이 ‘빈 공터’는 우리 삶을 불안하고 공허한 창문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테러리스트를 겁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헌신하는 명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수천 명의 삶을 희생하는 행위가 비겁함이란 말로 이해되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죽음은 어떤 공포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쉽게 포기할 만큼 의미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까?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인 확신에 대해 논의해야 하고, 그 파괴된 자리에 세계무역센터를 대신할 어떤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그런 확신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테러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는 9월 11일의 참사에 대하여 아담 자가제스키(Adam Zagajewski)의 시로 끝맺었다.

파괴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라 / 6월의 해가 길던 날들과 / 와일드 스트로베리와 몇 방울의 와인과 이슬을 기억하라 / 그리고 망명자들의 버려진 집을 뒤덮은 쐐기풀도 / 파괴된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

나는 《뉴욕커》가 9.11테러 기사를 실으면서 잡지 중앙에 파괴되기 전, 석양 속에서 빛나던 세계무역센터의 이미지를 실은 그들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잡지의 표지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그들의 결정 역시 높이 산다. 왜냐하면 그 검은색 속에서 세계무역센터의 실루엣을 더 검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검은 실루엣은 《뉴요커》의 중심에 있는 빛을 더욱 강조해 주었다. 다시 말해, 어떤 기념물이 들어서든지 그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나는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를 보존하여 쐐기풀들이 그것을 덮은 채 자라길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테러에 직면하여 예술은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
정보사회학을 연구하는 버클리대의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 교수는 ‘정보화시대’에 관한 그의 연작 《네트워크사회의 출현》, 《정체성의 힘》, 《천년의 종언》에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정치, 경제 논리와 문화적 정체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아 그 힘을 잃고, ‘네트워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로 옮겨간다고 지적했다. 당신은 21세기를 주도할 가장 중심적인 흐름을 무엇으로 보는가?

"
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정보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정보와 테크놀러지가 자유를 가져왔으며 다가오는 시대에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성(性)을 갖고, 자신의 언어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어떠한 출구도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생각하지 못했던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거나 우리의 성을 바꿀 수 없다면 이것이 하나의 짐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누가 이런 조작을 하는 것인가? 아직도 본질적인 자아가 남아 있는가? 무엇보다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유를 약속할 수도 있지만, 자아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위협이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정보의 충격과 네트워킹과 같은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러지의 도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최근 출간된 당신의 저서 《무한과 원근법》을 직접 보내 주어 잘 읽어 보았다. 책을 살펴 보면 독일 철학과 이론, 미술사, 건축 이론, 과학 등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의 르네상스 신학적인 뿌리와 철학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 맥길대학 교수는 쿠사너스부터 갈릴레오까지 초기 모던 사상가를 연구해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한스 브루멘버그와 알렉산더 코이레 같은 과학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비평적인 자세를 취하며 모더니티의 숨겨진 가능성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최근 당신의 연구 분야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미술의 철학적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당신의 철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
몇 달 전에 출간된 《무한과 원근법》은 작가에게 유용한 책이 되기를 바라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책에서 나는 몇몇 포스트모던 비평가에 반대하며 ‘모더니즘’을 변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가 니힐리즘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실을 이해하고,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가정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고찰했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 문화의 자기 발전의 산물임을 증명했다. 우리가 이런 발달의 합리성을 이해할 때, 과학이 가정하는 현실 자체와 동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성이 지은 체제의 창을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발표된 논문 <이방세계에서. 니힐리즘의 탐험(In a Strange Land, An Exploration of Nihilism)> (19 61)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역시 예술의 문제도 다룬 바 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최근 저서에서 더 자세히 다룬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Nicholas)의 작품을 언급했고, 현대예술의 의미를 논의했다. 새로운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리얼리티의 의미와 세계와 예술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그 논문을 통해 나는 예술을 ‘객관화하는 이성으로 세워진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또한 이것은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믿음과 탐미주의 사이(The Bavarian Rococo Chu-rch:Between Faith and Aestheticism)》(1983)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철학을 전공한 내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아카데믹한 철학을 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르네상스에 관해 다룬 나의 다른 철학 저서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고 본다. 책의 대부분이 18세기 교회를 다루고 있지만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는 모더니티의 합리성과 한계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 세계의 건축의 창을 지금 세계가 무시하려는 리얼리티의 차원으로 다시 열려는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프레임, 세 개의 강의(The Bro-ken Frame, Three Lectures)》(1989)와 중국어로도 번역된 《건축의 윤리적 기능(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1997)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왜 예술가인가(Why Art)?》라는 가제를 붙인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와 현대 예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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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평소 즐겨 보는 책은 무엇인가? 또한 당신은 어떻게 정보를 섭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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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이다. 역사를 통해 뛰어난 철학가의 책을 포함해 수많은 책이 내게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하이데거(Heidegger)는 특히 중요하다. 또한 《무한과 원근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도 내게 각별하다.

그러나 나는 내 사유의 전개가 책보다 미술작품이나 건축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무엇이 그림 그리기에 집착하게 했는지 잘 모르나, 그림은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늘 함께해 왔다.

건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었다. 7세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공습이 계속되는 베를린에서 쾨니쇼펜으로 이주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괴된 건물과 사이렌이 울린 뒤 다락방에서 보았던 불타는 베를린, 그리고 나와 함께 놀던 친구와 그의 집이 폭탄에 맞아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처로 찾았던 쾨니쇼펜, 그 작은 도시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작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그 작은 교회는 나에게 전쟁 중 베를린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이데거가 지구를 표현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신전이 세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하며, 그 신전에 윤리적 기능을 부여했던 것과 같이 나 역시 그 교회에 대하여 미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이 교회가 세운 세상이 나를 배제시켰을지라도 그 교회가 제시하는 지구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지구와 사람들은 교회나 책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난 1월 24일 타계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적한 대로 세계화를 위한 테크놀러지, 경제 등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과거 인류의 문화유산을 생성해 오던 교육, 교양, 사회활동이 미국이 주도하는 영화, 엔터테인먼트, 오락산업에 흡수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듯 세계화에 따른 문화단일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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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발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의 등장에 적지 않은 우려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예술을 위하여 ‘본질’을 회피하고자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반대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주의와 파시즘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했다.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다른 가치체계와 그것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는 변화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어떤 변화도 그저 주어지지는 않으며, 거기에는 매우 사려 깊은 숙고와 저항이 요구된다. 작가들이야말로 그러한 심사숙고와 저항에 많은 기여를 해야 하며, 철학자 역시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 철학자는 무분별한 철학 용어를 남발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방식을 지킬 수 있으므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철학을 연계하는 것에 쉽게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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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변화하는가? 만약 변화한다면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세기를 거칠수록 예술,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하고 있다. 유럽에서 18세기는 중요한 시작을 의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종교적?윤리적 기능의 예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예술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가장 중요한 발단은 1960년대일 것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의 죽음(종말)’에 대해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절정이 예술의 종말이라고 말했던 단토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단토의 주장처럼, 지난 40년간 예술(세계)에 어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담론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현상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해방’으로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자유’란 방향 상실을 의미한다. 예술은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쿤데라는 예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가벼움이 헤겔이 예술의 최고 기능으로 간주한 인간의 심오한 관심사에 대한 예술의 참여를 되찾으려는 갈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을 보지 않고 그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는 학문이 내놓는 견해를 들으려는 것이 ‘모더니티’의 특징이라고 했다. 사고와 숙고가 예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성(性)?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관한 언급을 예술이 다시 감당할 수 없다. 미숙한 철학적 개념을 품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과거 예술이 갖고 있던 최고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의 최고 기능을 되찾음으로써 헤겔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예술을 중시하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오늘날 한 명의 뛰어난 작가에게 이러한 예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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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미 지적한 대로 현대미술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힘을 상실한 채 공허한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여전히 현대미술은 종결되어야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오늘날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성이 세운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가 이런 창을 열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유를 들어 답을 얘기한다면, 15세기 서양에서 미술은 원근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부르넬레스키(Brunelleschi)와 알베르티(Alberti) 때의 작가에게 마술과도 같았던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인위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예견했듯이 이러한 마술의 대가는 리얼리티의 상실, 초월성의 상실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리얼리티는 그것의 연극적인 재현으로 대치되었다. 미술 자체가 시뮬라크라의 창조물임을 인지한 미술이 어떻게 관람객을 리얼리티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내 대답은 이렇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육체에서 분리된 눈 이상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물질성, 물감?캔버스?종이의 물질성, 그리고 종이 위의 붓자국을 통해 물질 속에 정신을 구체화하는 경험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인간을 보는 것은 물질이 지닌 의미의 구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나 겪는 것과 기계를 경험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 등은 ‘초월성’으로 창을 열 수 있으나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갖는 작품의 ‘인공성’을 깨닫는 데 쓰일 뿐이다. 이러한 인공성을 깨닫는 방법은 르네상스 작가가 원근법적 재현의 기교를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을 비교하여 그 인공성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뉴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시뮬라크라(simulacra)와 진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 동양과 서양이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서구의 문화를 기준으로 동양의 문화를 바라본 게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동양과 서양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술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양 예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에 이 질문에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 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은 내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친숙한 서구 역사에서 동양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예술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본질적인 인간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는 서양이 동양에 비해 혁신과 발전에 가치를 두어 왔다는 점이다. 테크놀러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경제학자의 생각 속에 자리한 발전에 관한 수치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것은 현대미술에서 매우 흥미롭게 나타난다. 뒤샹이 보통 변기를 전시하고 그것을 작품이라 불렀을 때, 변기와 작품의 분류에 대한 고의적인 혼란은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오래 전 키에르케고르가 보여 주었듯이,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종말로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 현대미술은 그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따라서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발달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자원이 한정된 지구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발전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직 멀게 느껴지나 자연의 재앙을 대비하는 일에 작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동양, 특히 동양의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은 때로 유익한 것이나 종종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시대 예술과 관련하여 반미학 또는 탈예술 논의는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숭고’와 ‘아우라’를 향한 논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약 의미를 갖는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현대 건축은 현대 회화나 조각보다 내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 금년에 탄생 150주년을 맞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수많은 현대 건축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의 건축물은 현대 세계로의 창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일본의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있고, 핀란드인인 주하 레이비스카(Juha Leivisk?도 있다. 그의 작품 미르마크(Myrmakk) 교회는 핀란드의 우울한 겨울에도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다니엘 리베스킨드(Daniel Libeskind)의 유대인 박물관은 완성되기도 전에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이러한 건축가들로부터 빛이 물체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감동을 안겨 준 미술작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에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작품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세잔(Cezanne), 드가(Degas) 혹은 멘제(Menzel)에 감동했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헤겔의 주장처럼 ‘예술이 죽었다’는 가능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하이데거처럼 나 역시 헤겔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 출간될 책에서 오늘날 예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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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동시대 예술은 대중문화와의 상관성 속에서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스펙터클의 사회’ 또는 ‘키치’ 개념이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가 갖는 의의는 무엇이며, 키치가 동시대 미술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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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잘 정의되지 않은 현상 혹은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는 현상이다. 나는 최근 저서에서 이런 적대감에 잠재된 가설을 고찰했다. 우리는 아직 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도 이루지 못했고 모더니즘의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표현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의 건축가 대부분은 후기 모더니스트의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화가와 조각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부터 키치와의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을 제쳐두고 현대미술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키치는 스스로 윤리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또는 살바도르 달리(Sal -vador Dali)를 보자. 아니면 안젤름 키퍼는 어떨까? 그 역시 키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저서 《건축의 윤리적 기능》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키치라고 불리는 작품을 경멸하는가? 여기에는 무언가 부정적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키치가 주장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치가 리얼리티로 향한 창을 여는 대신 단지 시뮬라크라 혹은 폐허가 된 가치체계의 단편으로 그저 세계를 치장하는 생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이 키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금송아지 우화’의 교훈처럼, 신(神)이 부재하면 인간은 시뮬라크라를 만든다. 그러나 시뮬라크라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시뮬라크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키치에 대한 논쟁과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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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를 즐겨 보는가? 만약 미술전문지를 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미국 등 각국의 미술전문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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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에 큰 관심은 없으나 내 아내가 미술사학자인 관계로 정기적으로 꽤 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술전문지는 현재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미술이 발전하는 양상을 계속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미술전문지는 현재 이루어지는 비평과 이론을 더 많이 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이론과 사고가 예술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전문지는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국한해서는 안 되고, 미술 관련자만을 독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술전문지는 미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 즉 왜 미술이 중요한가, 왜 미술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미술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 윤동희 기자 | 번역 - 김민아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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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는 1937년에 태어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1962)를 받았다. 저서로 《Ba -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 : 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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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속해있는 독서모임입니다. 제가 까페 운영자이기도 하고요.

벌써 2년을 향해가네요~.

 

인원도 적고 읽는 책들마다 한숨 소리만 나오는 것들이라

한달에 한 번 모이는 자리에 나오는 사람은

10명이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많으면 7명..

그것도 매달 바뀌니.. ㅋㅋ

 

하지만 아래 책들을 보니, 뿌듯해지네요.

저도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못했을 책들입니다.

직장생활도 하고 집에 일찍 들어가기도 해야 하고 ..

 

제 블로그에 독서모임 빡센(http://cafe.naver.com/spacewine)을 한 번 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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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한 변명 - 10점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한길사


2003년쯤 적어놓은 서평이다. 이 서평을 다시 꺼내 읽어보니, 안타깝게도 내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없어지고 있는 것같다. 그만큼 인문학 공부는 뒤로 밀리고 회사 일에 쫓겨 글쓰기나 인문학 공부에 게을러진 탓이리라. 자고로 인문학 공부는 오래 시간 책상에 앉아, 많은 것들을 되새김질해야 되는 법. 그래야만 어렴풋하게나마 뭔가 건질 수 있다.
'역사를 위한 변명'은 현대 역사학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고전이다(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을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란 어떤 것인지 마르크 블로크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면, 혹은 관심에 두고 있다면 이 책은 필독서이다.  





역사를 위한 변명
마르크 블로크(지음), 한길사





1. 인문학 공부

하버마스를 읽고 있었을 때, 사회학 석사 과정에 있는 이가 날 보더니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와 비슷하게 마르크 블로크의 이 책을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전공이 졸지에 역사학도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책이나 마르크 블로크의 책을 읽는 것은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을 전공하면서 소설책이나 시집, 되먹지 못한 비평서만 읽는 이들을 경멸하듯이 철학을 전공하면서 철학책만 읽는 이들을 경멸한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현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어떤 통찰력을 가지려고 할 때, 손에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역사책이다. 문학과 철학을 지나 도달하게 되는 학문의 영역이 바로 역사다. 그리고 이 책, '역사를 위한 변명'은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2. 아날학파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인간에 대한 학문'이라고 말한다. 인간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당시 사회, 또는 시대의 기반을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터, 칼뱅, 로욜라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틀림없이 과거의 인간이고 16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역사가는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아가 당시의 정신적인 분위기에 젖어들어, 우리 시대와는 다른 의식의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 70쪽~71쪽



그 당시의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 역사학자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이것들의 진위여부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사건들까지 추론해내어야 한다.

마르크 블로크는 프랑스의 역사학파인 아날학파의 제 1세대 학자이다. 아날학파는 일상사에 집중하기 시작한 최초의 역사학파이다. 그들의 목적은 거대한 정치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영웅을 중심으로 기술되는 역사학의 허점을 비판하고 우리들의 이름 없는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위적인 시간 구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것을 뜻한다.


3. 역사 연구 방법의 필요성

현대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이 책을 먼저 읽어둘 필요는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바대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본질적인 성격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역사학의 정의, 연구 방법, 목적, 쓸모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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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파아란영혼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파아란영혼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 감사합니다. ^^ ... 그런데 읽을 책들이 밀려 있는 관계로 참가하지 못할 것같아요. 어제 서점에서 신간 코너에 놓인 책을 보니, 꽤 재미있을 것같더군요~.. ㅎ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베이컨은 르네상스 시기의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위치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있다. 분명 그는 현재 우리가 이야기하는 경험론 철학의 선구자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종교적 신앙은 철학의 범위에서 제외해버렸다. 

‘우리는 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감탄하고 숭배할 뿐이다. 철학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인생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이 인생이라는 극장에 있어서 관람객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과 천사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요 해석자인 까닭에 자연의 진행을 사실에 있어서 또는 사유에 있어서 관찰하는 한계 안에서만 행위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 한계를 넘어서서는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못한다’고 단언한다. 

그는 사람을 종종 그릇된 판으로 이끌기 쉬운 위험한 요소들을 지적하면서 마음의 우상(idols)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우상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람을 거짓에로 말려들게 하는 마음의 모든 경향을 일컫는다. 이 우상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베이컨의 한계는 분명하다. 종교의 문제에서도 그러하지만, 자연과학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그는 자연과학을 양적 측면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사물의 관한 질적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또 질은 양과 수를 상관 관계시킬 수 있다는 것, 또 양과 수에 의거하여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보는 근대 물리학의 기본 개념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근대 자연과학이 양적 측면에서 이해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케플러, 브루노, 갈릴레이가 공유했던 생각이며 고대, 중세와 본질적으로 틀린 근대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참고 문헌
렘프레히트, 서양철학사
슈퇴릭히, 서양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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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의 역사
Ideas and Men - The story of western thought
크레인 브린튼 지음, 을유문화사




살아가면서 어떤 인생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모색을 하게 된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에서부터 거대한 문제들(Big Questions)까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인류의 역사는 문제 해결의 역사이고 욕구 충족의 역사였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고 욕구가 충족되려면 먼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할 듯이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유리창에 금이 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인생의 방향이라는 것도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 이해의 한 방식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세계를 신이 창조한 어떤 것, 그래서 신이 다시 구원해주는 그 날을 향해가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당하여 세계는 희망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사상의 역사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폄하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에서 빠진 것은 객관적 사실과 자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이 빠져 있다. 요즘 하도 반지성주의의 물결이 세차게 대중의 머리를 휘어 감아 돌리는 바람에, 이러한 사실을 종종 잊게 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의 사상 사조는 분명 '반지성주의'이다. 실존주의자들, 후기 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이러한 반지성주의의 스타들이다. 하지만 반지성주의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지성'이다. 이는 '지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지, 이제 지성에 대한 판단중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보다 면밀하게 지성에 대한 연구와 탐구를 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사상사(지성사)를 꼼꼼하게 읽는 것은 전문 학자의 몫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하나의 텍스트나 사상은 그 당시의 역사적 맥락을 상실한 채 현대로 전해져 온다.

현대 기독교와 중세 기독교는 다른 성격의 종교이다. 똑 같은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신에 대한 해석이 판이하게 틀려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변화는 현실 세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즉 변해가는 현실 세계를 따라가기 위해 종교도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현대 사회가 개인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으로 분열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나름대로 힘든 여정이긴 하지만, 지성사를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독서가 수반되었을 때, 현대의 분석 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현재 이 책은 온라인서점에서 구할 수 없음. 오프라인 영풍문고나 교보문고에서 구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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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오래된 글인데 2012년에 쓰신 글들도 있기에 댓글 달아봅니다. 혹시 이 책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학생인데 이 책을 구할 데가 없네요. 중고나라에 올라온 것도 없고요..

    • 사시는 곳이 서울이시라면, 영풍문고나 반디앤루니스 오프라인 서점에 가셔서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영풍 문고는 약 1년 전쯤 있는 것을 확인했거든요. 온라인으로는 구하기 힘듭니다. 오래된 책이라. 저는 이런 책들은 자주 오프라인 서점을 방문해 뒤져서 사거든요. 제가 구입했을 무렵(2000년대 초반)에도 온라인 서점에서는 절판으로 나온 책입니다. ~ 책은 무척 좋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성사 책 리스트도 한 번 추려서 올려볼께요. ^^

    • 아 인터넷 상에서 못 찾아도 오프라인에 있는 경우가 있나요? 한 번 가서 찾아봐야 겠네요! 꼭 필요한 책이라..ㅠㅠ 아무튼 감사합니다! 지성사 책 리스트 올리시면 꼭 와서 볼게요! ^^


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아롬미디어



에라스무스 -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승리와 비극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하나의 세계관이 여기 있다. 하지만 이 세계관은 사람을 유혹하지도 선동하지도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을 내뿜지도 않는다. 언제나 차갑고 건조하다. 늘 조용하고 방관자의 시선을 가진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해내어 보는 이를 찬탄케 만들지만 곧바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 그런 세계관이다. 그래서인지 이 세계관은 다른 편에 서서 보면 늘 우유부단하며 지나치게 신중하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더구나 언제나 교육의 중요함을 설파하며 교양을 강조하고 문명화된 인간을 요구한다.

“현재의 제 모습, 저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Salve itaque etiam atque etiam, pater amantissime, pater decusque patreiae, litterarum assertor, veritatis propugnator invictissime.(안부 올립니다, 다시 한번 안부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조국의 명예, 예술의 수호신이여.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실의 투사시여.)”

젊은 프랑수아 라블레는 늙어가고 지쳐가는 에라스무스를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교육과 웅변(eruditio et eloquentia)의 시대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언어인 시대, 이제 사고한다는 것은 패거리들의 망상이 돼버렸고 루터식 아니면 교황식으로 획일화되고 학자들도 품위 있는 편지나 소책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 아낙네들이 하는 식으로 거칠고 저급한 욕지거리를 서로 퍼부어대는 시대’에 젊은 라블레는 고백을 한다.

흔히 인문주의로 번역하는 Humanism의 역사는 서구 근대의 역사이지만, 늘 미완의 역사로만 그친다. 하지만 ‘실현되는 않는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고 츠바이크가 서술하고 있듯이 무릇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와 지식인들에게 인문주의의 이상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막 시작하는 히틀러의 독일 속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뒤새기면서 광신을 멀리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문주의의 이상과 염원을 갈구하고 있다.

“언제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스스로 지쳐버리는 것이 모든 광신의 운명임을. 영원한 것, 조용히 인내하는 것, 즉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과 광신의 시대 속에서 츠바이크는 사람들에게 에라스무스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브로노프스키, 매즐리슈,(<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푸른 역사, 388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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