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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정유재란 1597

2017.07.25 - 10.22,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안에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난 추석 연휴, 우연히 방문한 곳에서 뜻하지 않은 전시와 만났고 그 짧은 후기를 올린다. 각 지역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지만, 내가 방문한 곳 대부분은 전시 프로그램이 빈약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꽤 알차다. 간단하게 전시 내용을 진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인용한다. 


1부는 ‘정유재란 이전 강화협상과 조선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1593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시작된 때부터 강화협상이 결렬될 때까지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다룬다. 2부는 ‘전쟁의 재개와 일본군의 공세’라는 주제로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이 칠천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남원성, 황석산성, 전주성을 연이어 함락하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공격하는 시기를 다룬다. 3부는 ‘조명연합군의 반격과 주요 전투’라는 주제로 조명연합군이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세를 꺾은 뒤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를 다룬다. 4부는 ‘전쟁의 기억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전쟁이 남긴 유산을 생각하는 코너이다. 5부는 ‘종전 이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라는 주제로 전쟁이 끝난 뒤 조선·명·일본 삼국의 변화를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전쟁으로 남아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조선의 산성과 왜성倭城에 대한 영상 등을 보여준다.  (출처: http://jinju.museum.go.kr) 


일본과 조선은 1597년 임진왜란 중 진행된 정전 협상이 결렬되고 재차 조선을 침략하고 1598년 연말까지 이어진 전쟁을 정유재란이라고 일컫는다. 전시되던 유물 중에는 조선인의 코를 베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소 라는, 일본의 문서도 있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위키: 정유재란)


<징비록>, 류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 파직되어 고향 안동 하회에 머물면서 쓴 책. 


<징비록>의 글씨는 거칠고 앞으로만 향해 가는 듯하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약 2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그 때 당시 인구로 15%에 해당되는 수이다. 그 뒤 이어진 병자호란 때에는 50만명이 원나라 노비로 끌려갔다. 국가의 잘못된 판단은 몇 대에 걸쳐 피해를 입힌다. 이는 기업도 마찬가지일 터. 


<난중잡록>,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기록. 1582년 ~ 1610년에 걸친 일기 형식의 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프린트를 한 듯 글이 바르다. 글씨는 작고 일정하며 빼곡하게 들어선 것이 작정하고 기록을 남기려는 듯하다. 실제 <난중잡록>의 후반부는 병자호란의 기록이 남겨져 있어, 조선 중기 역사를 파악하는 데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저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징비록>과 겹쳐 보면 그 마음새가 아린다. 




이 당시에 나온 언문 편지는 처음 본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라... 전쟁의 와중에 살아서 다시 보자고 하지만, 이를 약속하지 못한다는 문구에선 가슴이 시렸다. 


전시되는 유물의 수가 제법 되고 일본  나고야성박물관에서도 7건 10점의 일본 문화재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임진왜란의 유물을 보면서 일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아마 그 당시 대륙으로의 진출 실패로 그들은 근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조선은 대륙과 붙어있으면서 한 때 대륙의 중앙까지 진출했던 경험을 가졌던 터라 대부분 서양 문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 테지만, 일본은 달랐을 것이다. 역사는, 역시 알지 못할 일이다. 그러니 늘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진주성 안에 위치한 청계서원淸溪書院이다. 평상 시에는 닫혀 있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든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본래 진주시 대평면 마동에 있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61년 복원하면서 진주성(晉州城) 안으로 옮겼다. 진양 정씨 후손들이 본 서원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사를 지낼 때만 문을 열어둔다고 한다. 담이 낮아 담 위로 사진을 찍었다. 건물들이 가지런하고 고와서 들어가고 싶었으나,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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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지음), 김욱(옮김), 책읽는고양이(도서출판 리수)




우연히 알게 된 이 책,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매우 산뜻한 울림을 가졌다. 어느 면에선 냉소적이며, 어느 순간엔 포기하는 듯 보이고, 때론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 일상을 사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낙관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까지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종교-카톨릭-가 큰 힘이 되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자주 '운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운명론적이지 않다. 도리어 실용적인 처세술에 대한 격언들, 저자 자신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하며, 지지치 않기를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인내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최선을 다해 기다리고 노력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은 탓이다. 


인간에겐 운명이 강제로 부과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으므로 운명이다. 또 억지로 바꿔본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운명을 토양삼아 인생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 45쪽 


또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길 기원한다. '불행한 사람만이 희망을 소유한다'(62쪽)든가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107쪽)고 말하며 원래 살아간다는 게 그런 것일 뿐이니, 희망을 버리지 버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장점을 깨닫는 것이 재능이라면 타인의 좋지 않은 점을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본능이다. - 131쪽 


일본에선 매우 저명한 작가인 소노 아야코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은 그동안 내 독서가 다소 편파적이었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매우 작고 얇고 짧다.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그 울림은 꽤 길다. 또한 유쾌하고 긍정적이다.(또는 내가 소노 아야코를 읽을 수 있음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1931년생인 소노 아야코의 2015년 신간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그동안 소노 아야코의 여러 수필집에서 발췌한, 일종의 편집본이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녀가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는데, 예전 글들을 모은 책이였던 셈이다. 그래서 일본 아마존의 평점은 상당히 낮다.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소노 아야코의 신간으로 알고 구입한 독자들이 실망하며 낮은 평점을 준 것이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 8점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책읽는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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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그래서 그 조각이나 파편들을 이어붙여 우리가 이해가능하거나 수용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학문적/이론적 시도는 애체로 불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나 그 삶 속의 사람들, 사건들,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그 조작과 파편들의 일부이거나, 그 일부를 묘사한 글이나 풍경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시 마사히코의 이 책,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생각'(7쪽)으로 시작되지만, 그 생각은 정리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고 '원래 이렇지, 뭐' 식의 자조로 끝난다고 할까. 그런데 이 자조 앞에서 우리들은, 독자들은 이론적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무너진다. 기시 마사히코가 펼쳐놓는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 앞에서, 이야기들 속에서 결국 마주하는 건 쓸쓸한 우리들이거나 어디로도 갈 곳 없고 공감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기시 마사히코는 구술 조사를 주로 하는 사회학자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경우에는 한 사람씩 찾아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 개인의 생활사를 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왔다. - 9쪽 



여기에는 다 쓸 수 없지만 구술 조사의 현장에서는 이렇듯, 갑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구술현장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다. 사회학자로서는 실격인지 모르지만, 언젠간 '분석할 수 없는 것'만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 13쪽 


이 책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호소력이 있으며 애잔하다. 


아버지는 수감되고 어머니는 증발되고 아이들은 보육시설에 맡겨졌으니 아무도 없는 방이 되었는데도, 악취와 해충에 대한 민원이 몇 번이나 되풀이해 들어왔다. 그래서 아파트 관리 회사의 입회 아래, 그 분이 여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곳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가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텅 빈 깨끗한 방이었다고 했다. - 62쪽 


학문의 테두리 안으로 모이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우리 삶이며 일상이고, 우리가 길을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이 도시의,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딱히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냥 자신이 수행해왔던 사회학적 연구 속에서, 그 연구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누군가에게 알려지길, 읽히길, 그리고 읽혀졌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으로 이렇게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일지도.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 가든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다. - 80쪽 


우리들은 '책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참여를 하게 된다. 소극적 형태의, 작은 공유이거나 공감이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다.  


네모진 종이책은 그대로 온전히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네모난 창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을 읽으면 실제로는 자기 집이나 거리 밖에 알지 못하면서도 여기에 없는 어딘가 '바깥'이 있고, 자유롭게 문을 열고 어디에라도 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때가 오면 진정 창과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곳으로 풀쩍 뛰어나가는 것이다. - 82쪽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타인에게 무신경한 현대의 우리들. 그렇다고 해서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에게 신경 써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 좁은 지구에, 다 같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아도,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저마다의 쓸쓸한 사연을 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아주 작은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 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을 빼고,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 141쪽 


기시 마사히코(岸政彦)

사진 출처: http://www.hankookilbo.com/m/v/9716234b333841bb96d0651e0d0ad18a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 10점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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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강상중(지음), 김수희(옮김), AK 



강상중 교수의 책이 계속 번역되어 소개된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의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한국과 일본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이름을 쓰는 재일한국인으로, 그리고 일본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그는, 한국과 일본 너머 어떤 곳을 지향하는 듯하다. 적어도 강상중을 읽는 일본인 독자나 한국인 독자는 서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식견을 가졌을 것이다. (손정의도 이와 비슷하고 그는 이미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넘어 세계인이 되었으니까)


이 책은 강상중 교수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안내서이다. 나쓰메 소세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오에 겐자부로를 지나 나쓰메 소세키로. 그 중에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단연코 최고다. 이는 그가 일본소설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이미 20세기 전체를 물들이게 될 어떤 근대성을 포착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상중 교수는 <<살아야하는 이유>>(송태욱 옮김, 사계절출판사)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강상중 교수는 이 책에서 가볍고 부드럽게 그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를,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소세키의 생애와 주요 소설들에 대해 스케치를 하며 소개하고 있다.


사회는 어쩌면 미치광이들이 모여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미치광이들이 모여 맹렬히 싸우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욕을 퍼붓고 빼앗고, 그 전체가 집단적으로 세포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솟아나고 솟아났다가 다시 무너지며 살아가는 곳을 사회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 다소 이치를 알고 분별이 있는 놈은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정신병원을 만들어 가둬둔 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자는 보통 시민이고 병원 밖에서 날뛰고 있는 자가 오히려 미치광이다. 미치광이도 고립되어 있으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지만 단체가 되어 세력이 생기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심한 미치광이가 돈과 권력을 남용하여 대다수 경미한 미치광이들에게 난동을 부리게 하고, 자신은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사내라는 말을 듣는 예가 적지 않다. 

- <<나는 고양이로서이다>> 중에서 


어쩌면 반-시대적이며 지식인 중심적인 소세키의 소설을 부담스러워할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 <<나는 고양이로서이다>>를 읽지 않았지만, 소세키 소설이 가진 태도를 이 책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할까. 


그리고 몰랐던 사실 하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대해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 속에서 매우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동시대와의 거리 두기가 소세키 소설이 시대를 넘어 감동과 울림을 가지게 된 계기가 아닐까. (1,000엔 지폐에 원래 이토 히로부미가 인쇄되었는데, 주변국의 반발로 나쓰메 소세키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이에 비추어 무척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대해 열광하지만, 일부 독자들에게 소세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통해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일종의 교과서 소설에 대한 반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점에서도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재미있고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상중 교수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딱 그 수준에 맞추어 서술해내간다. 



* 최근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다. 아래와 같은 장정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나는 이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번역된 소설들 다수를 구입한 상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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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을 찾아서 - 현대미술의 시작

이우환(지음), 김혜신(옮김), 학고재





번역자인 김혜신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이우환의 글들은 주로 1960년대 말 쓰여졌다고 한다. 60년대 말에 출간된 이 책을 2000년에 일본에서 재 출간하였고, 2011년에 한국의 학고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당시 이 책은 일본 미술계의 ‘태풍이면서 바이블’이었다. 


우리는 이우환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미술 비평가이자 이론가이며 일본 현대 미술에서도 그 위상이 대단한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본어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산문가이며, 그의 일부 글은 일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인정 받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이우환은 일본에서 먼저 유명해졌고 그 다음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그런 다음 한국 미술계에 소개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1960년대 말 이우환은 현상학에서 바라보는 바, 서양 근대 철학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시각을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모노하(もの派)라는 미술 운동을 통해 드러낸다. 이 책은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미술 이론가 이우환을 제대로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그 탄탄함과 생생함이 가시질 않는데, 60년대 말, 70년대 초 메를로 퐁티,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니시다 기타로를 인용하며 일본 현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동시대 일본인들은 그를 질투했을까는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더구나 1960년대 말의 이우환만큼 탁월한 식견으로 뛰어난 글을 쓰는 미술 비평가, 혹은 이론가를 한국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 테이블이나 의자, 풍경 자체는 아무런 시각적인 원근법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다. 실재는 인간의 가치 조정 없이 스스로의 거리를 가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세계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 쪽이 중심이 되어 저 쪽을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표상 관념에 의해 시야의 세계를 원근법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110쪽) 



그는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부정한다. 그는 근대 철학은 실제 세계와는 무관한, 우리 관념의 표상을 상정하고 그 표상을 그대로 투영시킨다고 말한다. 즉 외부 세계는 우리의 관념으로 해석, 투영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바 외부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현상학자들, 특히 메를로 퐁티가 지적하는 바이며, 그 외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해온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메를로 퐁티에서 출발해 니시다 기타로에 이른다. 



우리의 신체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미 모순적 자기 동일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행위하는 것이 보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이 행위하는 것이다. 신체의 움직임은 이미 표현 행위인 것이다. … … 행위하는 것과 보는 것이 결합하는 곳에 신체가 있다. 행위적-직관적으로 사물이 보이는 곳에 신체가 있는 것이다. 

- 니시다 기타로, <인간의 존재> 중에서(227쪽 재인용) 



… …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술가의 온전한 신체라고 해도 좋다. 

- 니시다 기타로, <무의 자각적 한정> 중에서(228쪽 재인용) 



관계항2007



우리가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근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이우환은 이미 1960년대 근대 철학, 근대성(Modernity)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적 방향이나 실천을 고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그 전에는 한국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럴 여유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뭐지?)


그가 집중하고 있는 현재의 작품 활동은 이런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며, 공간인 동시에 시간인 지점이 열리는 순간, 시간은 동시성의 장소로서 만남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은 오는 시간도 가는 시간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의 안과 밖이 상호매개되는 열린 만남의 세계라는 점에서, 비대상적 차원인 것이다. (231쪽)



이런 측면에서 그는 상당히 관념적인 작가이며 일반 대중에게는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특히 그가 지향하는 미니멀한 표현 방식과 20세기 후반 서구 미술계를 주도했던 미니멀리즘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나는 니시다가 말한 ‘절대모순적 자기 동일’을 비동일성의 지평으로 삼아, ‘무의 장소’를 관계성의 표현을 통한 무한한 울림-여백으로 전개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려 한다. 

(… …)

예술의 과제는 인간이 더욱 직접적인 세계로 해방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어떻게 열어 제시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의 상태성으로부터 그것의 현재화로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242쪽) 



딱딱한 미술 이론서인 관계로 일반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술 전공자에게 추천하기에도 이 책은 솔직히 말해 어렵다. 실은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무안하게 여겨질 정도다. 1960년대 말 쓰여져, 그 당시 일본 미술계의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 책을 두고 '어렵다'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럽다. 아직까지 한국 문화, 예술계의 지적 토양은 1960년대 말 일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이다. 


굳이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근대 철학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거칠게 나누고 있었다. 서양 근대 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지 않고 한 쪽 방향으로 다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실은 그의 목적, 원근법적인 서양 근대 미술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적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하긴 이 책은 전문 철학 서적은 아니니... 


미술 이론 전공자이거나 비평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권한다.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우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만남을 찾아서 - 10점
이우환 지음, 김혜신 옮김/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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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simmon Tree(감나무)

Sakai Hoitsu 

(Japanese, 1761-1828)

Period: Edo period (1615-1868)

Date: 1816

Culture: Japan

Medium: Two-panel folding screen; ink and color on paper

Dimensions: Image: 56 9/16 x 56 5/8 in. (143.7 x 143.8 cm) Overall: 65 1/4 x 64 in. (165.7 x 162.6 cm)

(c)Rogers Fund, 1957. Metropolitan Museum. 




사카이 호이츠(Sakai Hoitsu)의 작품이다. 타라시코미(Tarashikomi)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일본적이나, 서구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19세기 초, 일본에는 이미 서구의 문물이 많이 유입된 상태인 듯 싶다. 사카이 호이츠는 유복한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나중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타라시코미 기법이 어떤 것인가 검색해 보았더니, 한글로는 푸하, 네일아트가 뜬다. 이는 구글도 마찬가지여서, 타라시코미 기법을 알기 위해선 영어로 검색해야 된다. 한글로 온라인 상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종종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타라시코미는 일본 회화의 기법 중 하나로, 첫 채색이 마른 후에 두 번째 채색을 하는 기법이다. 두 번째 채색을 할 때 잔 물결이나 꽃잎 등을 흠뻑 젖게(dripping)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위 작품에선 감잎이나 감에서 이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페이스북에 올라온 작품인데, 내 마음에 들었다. 한 쪽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감나무 하나, 그런데 이 감나무도 나무만 남게 될 암시가 가득한 이 작품은 마치 서양의 바니타스(Vanitas)화처럼, 쓸쓸하게 지쳐갈, 외롭게 죽어갈, 그러나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오게 될 봄을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벤야민의 페허 같았다. 


우리는 종종 끝없는 절망이나 견딜 수 없는 우울,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빠지지만, 결국 살게 되고 살게 되는 원천이 이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심연 속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언젠간 봄이 올 것이고 그 때를 위해 고통스럽더라도 현재에 충실하고 오게 될 미래에 대해 생각하자. 어차피 인생은 힘들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니 말이다. 





참고. 

1) 타라시코미 : http://en.wikipedia.org/wiki/Tarashikomi 

2) 일본 에도 시대의 painting 작품들만 모아 한국에서 전시하면 어떨까? 꽤 흥미로울 것같다. 혹시 진행하게 된다면 내가 가서 자원봉사하겠다. 전시설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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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지하철에서 일본 책을 읽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저 분 일본에서 살다 오셨나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 분들 중 상당수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어가 국어(한국어)보다 더 편한 거다. 생각은 일본어(일본식)로 하고 말은 한국어(한국식)로 하는 거다. 그냥 그런 거다. 

그리고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거다. 그런데 아물지 않은 상처(혹은 흉터로 남은)를 자랑스레 미화시키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이들이 적극적으로 젊은이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흉터는 자랑스런 자신의 일부이고 너희들은 경험해보지 않은 식민지 세대라는 영광의 상처다. 이게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거다. 이번 총리 선임 건도 그런 역사의 일부이다. 식민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그렇게 배웠던 시대가 있었고, 그 시대의 흉터가 이어져 온 것이다.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 흉터를 보고, 그 흉터를 가진 사람들의 무용담에 현혹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투표한다. 그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해 나쁘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스스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용인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옹호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일부를 보지 말고 전체를 봐야 하고, 어떤 역사 속에서 이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박정희를 한국의 대통령으로 알지, 일본어가 편했고 일본어로 사고했던 일본 장교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냥 그런 거다. 그리고 그냥 그랬으니, 그렇게 투표한 거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으니, 내 허락하는 바, 그리고 독립한 한국 정부가 인정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 내, 내가 속한 가족 구성원만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거꾸로 보면, 그렇게 일제 식민지 시대는 영속되는 거다. 식민지 시대 리더 계층은 아직도 리더 계층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리더가 되려면 기존 리더 계층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 속에 리더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가 되면 어쩔 수 없이 표면적으로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된다. 그게 이 사회다. 

내가, 혹은 우리가 지지하는 어떤 리더가 맺은, 겉으로만 우호적인 관계를 보면서 평범한 우리들은 이 사회가 바뀌었다고 착각하는 거다. 

그리고 선량하고 정직한, 그러나 참 미련스러운 우리들의 상당수는 이 사회가 바뀌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투표한 거다. 아직 우리들의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들은 지금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는 거다. 

(이런 생각은 참 비관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고 있는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인 이 사회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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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10점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사계절출판사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지음), 송태욱(옮김), 사계절




결국 우리는 각자 자신이 꿈속에서 제조한 폭탄을 껴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껴안고 있는지 다른 사람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나는 내 병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럽의 전쟁도 아마 어떤 시대부터 계속된 것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 나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계속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산문집) 중에서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이 번역되어 나온지도 몇 년이 지났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깨달았다. 그 사이 일본의 지진이 있었고 절망적인 원전 사태가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와 적대적일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의 전작 <<고민하는 힘>>과 함께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그는 이번에도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 특히 나쓰메 소세키에 의존하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설명은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강상중 교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를 인용하면서, '거듭나기twice born'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번민과 나락으로의 절망이 새로운 앎을 열게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전작 <<고민하는 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윌리엄 제임스)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121쪽 


책은 짧고 단단하다. '사랑은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181쪽)처럼 자신을 포함한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주문한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19세기 말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은 틀림없이 종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장에서는 "'자연의 법칙'이 '숭배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학이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112쪽 


이는 계량적 세계의 질서처럼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적인 질문, 형이상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강상중은 신을, 종교를 부정하는 도킨스, 히친스 대신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의 테리 이글턴의 편에 선다.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를 구하는 현대인에게 과학은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중에서


이번 겨울, 이 책은 흔들리는 현대인을 위한 작은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로 이어지는 작은 독서 여행의 시작이 되기를! 


강상중 교수 (출처: 강상중 교수 홈페이지) 



<<고민하는 힘>>에 대한 서평

2011/12/26 - [책들의 우주/문학] - 고민하는 힘, 강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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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많아도, 계속 새 책에 손이 가는 건 예전부터 읽어온 습관 탓이다. 1주일에 1권 이상은 읽어왔는데, 올해 들어 한 달에 2권 이상 읽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손의 습관은 1주일에 1-2권씩 새로운 책 표지에 살갗이 닿아야만 손의 마음은 놓이는 것일까. 





바람은 무척 차고 일은 많고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 중의 하나가, '비밀 없는 사람이 되자'였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강상중의 신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 ... 참, 일본은 대단하기도 하면서 신기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백 년 전에 20세기 후반에 최초로 마주하게 되는 현대적 모더니즘(contemporary modernism)을 보여주고 있고, 그 옆에서 재일한국인 강상중은 현대인의 마음과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 현대 일본을 지배하는 것은 그런 모더니즘이 아니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한국도 마찬가지리라) 


바람은 차고, 마음 속에 비밀만 늘어나는 것이 매우 싫어지는 화요일 오후 사각의 사무실 안 방황은 끝이 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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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op-group.net/blog/nishiumi/2012/08/zurich-30-hours.html)



되도록이면 여유를 가지고 방해 받지 않으며, 생각에 잠겨 있고자 하지만, 내 일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원고 청탁이라도 받으면 청탁 받은 주제에 대해 몰두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해 가족의 허락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선 집, 회사, 집, 회사, 또는 술자리나 저녁 약속이 무한 반복으로 내 앞에 버티고 서 있으니, 개인적 시간은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연극평론가 안치운 선생도 집 안에서의 자기 존재에 대해 적기도 했다. 가족의 일상과 무관하게 책 읽고 글 쓰는. 


가족이 모두 잠 든 한밤 중 시간이 유일하게 나에게 주어지는 개인 시간인데, 요즘은 왜 그리 졸린 지, 잠이 많은 내가 미워지기도 한다.


오늘 나는 사카구치 교헤Sakaguchi Kyohei라는 일본 예술가를 알게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어느 잡지(LIG 아트센터 매거진)에 그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를 돌이켜보았다. 


요즘은 뭐랄까, 좀 트렌드에 뒤쳐진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혹은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랄까, … 그러면서 동시에 비-창의적이고 구닥다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사카구치 교헤의 태도를 보면서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의 생각과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꾸로 보는 것, 경계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  


잡지에 실린 인터뷰 일부를 옮긴다.

(그는 지난 여름, 제 14회 서울변방연극제에 참여하였고, 인터뷰는 그 때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 저는 거리에서 사는 그 분들을 ‘도시형 수렵채집자’라고 부릅니다. 


- 그 분들은 거리에서 재료를 채집합니다. 사람들은 쓰레기를 생산물이 아니라면서 무시하곤 하죠.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무언가를 새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도시에 이미 많은 재료가 있으니까요. 쓰레기가 새로운 재료로 바뀌는 곳, 이것은 무언가를 사냥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무언가를 찾아냈다, 유레카! 그럴 때는 기분이 정말 좋아요. 이것은 아주 건강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 나는 ‘생각’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가능성’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간에 흥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만들고자 합니다. 사람의 생각에 의해 공간은 시작되니까요. 


-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제가 처음 천막에 사는 분에게 ‘집이 너무 좁지 않아요?’라 물으니, ‘이거 집이 아니야’라고 답했습니다. ‘이건 침대인데’하면서 도서관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군요. 그 곳은 책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공원에서는 벤치에 앉아서 여긴 거실이라고, 주유소에서는 휘발유 통을 가리켜 이건 콘센트라고, 푸른 하늘은 지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처럼 생각의 틀만 약간만 바꾸어도 뭔가를 건축하지 않고도 세상을 자신의 공간 요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곧 살아 남기 위한 기술을 만든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것으로 세계를 바꾸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혁명입니다. 눈 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다들 눈치 채고 직접 느끼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층위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믿고 있는 많은 것들이 허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 합니다. 



그의 예술 활동은, 그의 생각을 그대로 옮기는 행동이자 실천이다. 일본 정부로부터 1엔도 받지 않았다는 그는, 생각대로 실천한다. 아래 그의 여러 작품들을 옮겨보았다. 시각 예술 작품이라고 하기엔 미적 완성도가 없고 도리어 일종의 연극이며 행위 예술으로 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그는 반-시간적이다. 연극이나 행위 예술은 정해진 시간 안에 일회성으로 끝난다면, 그의 작품은 그것들과는 반대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예술적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은 '반-시간 예술'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엄밀하게 조형 미술적 형태를 가진다.  


   



The House Bike 2001 

http://www.0yenhouse.com/en/The_House_Biker/  

(오토바이 뒤에 싣고 다니다가, 아무 곳에서나 내려서 살 수 있는 이동식 집이다)





움직이는 집 ( A Mobile House)

http://blog.naver.com/mtfestival/100160421189 

(14회 서울변방연극제에 참가한 작품이다)






짓지 않는 건축가, 사카구치 교헤 

http://magazyn.co.kr/11037 

(이 인터뷰는 LIG 아트센터 매거진보다 더 상세하다. 읽어보길 바란다. 아마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집’ 제작 워크숍, 7월 6일(금) 오전 10시 - 야간 / 동숭동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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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 기한을 넘긴 책을 도서관에 반납했다. 반납하는 내 손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일어났다. 마치 지구 밑바닥을 흐른다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용암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하듯, 2011년의 봄이 오는 속도로 굳은 살들이 허옇게 올라왔다. 나는 무인 대출반납기에 서서 책 한 권을 반납했다.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여러 차례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늘 진 곳을 번갈아가며 낡고 오래된 갈색 구두 굽이 보도블럭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구두굽은 보도블럭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 소리가 그렇게 상쾌하게 들릴 수가.



회사 일 때문에 요 며칠 한남동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태원에서 내려 한남동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 일본에 사는 지인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고 다행히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에 안심했다. 위기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던 면을 보게 만든다. 쓰나미가 밀려드는 와중에도 연신 고지대로 대피하라는 방송을 외치다가 사라진 스물여섯의 동사무소 여직원. 다른 자동차들이 다 출발하고 나서야 출발하다가 물살에 휩쓸려 간 소방차. 그리고 그것을 방송하고 난 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뉴스를 진행하던 심야의 한국 여성 앵커.




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리가 왜 듣고 싶었을까.

위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강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위대하게 한다.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났고 원자력발전소는 계속 위험한 상태이지만, 그 사이 일본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나는 그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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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민음사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어떤 계획을 세워서 자연을 억지로라도 자기의 계획에 맞추려드는 고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이란 인간이 세운 그 어떤 계획보다도 위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자연을 거역하고 자기 계획을 고집하게 된다면, 그건 버림받은 아내가 이혼장을 방패 삼아 부부 관계를 증명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 228

 


모든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된다. 적어도 다이스케에게 있어선 그랬다. 그는 자연의 이치대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다. 아무 일도 기획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으며 그냥 조용히 외부 세계와는 무관한 듯 그렇게.

 

 

다이스케는 책상 위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약간 열려있는 툇마루의 유리문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심은 색비름의 빨간 꽃잎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큰 꽃 위에 햇살이 가득했다. 다이스케는 허리를 굽혀 꽃 속을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가늘고 긴 수술 끝에서 꽃가루를 따다가 암술 끝으로 가져가서 정성스레 발랐다.

- 58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아무 일도 못 하리라 여겨지진 않았다. 많은 책을 읽었고 부드러웠으며 신중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하루 일상은 단조로웠지만, 지식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런 종류였다. 그는 매일 차를 마셨고 책을 읽었으며 다양한 화초가 자라는 정원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달리, 자연을 따르기로 한 다이스케에게 있어 '자연'이란, 이 외부세계의 어떤 거대한 흐름 이전에 정처 없이 떠도는, 자기자신에게마저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사람의 마음, 나무의 마음, 구름의 마음, 식물의 마음이 모여 이 거대한 자연을 이루듯, 그 시작에는 다이스케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솔직해진다는 것의 무모함이란, 자기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21세기 초반의 TV 드라마들 대부분은 이 마음의 자유가 가져오는 통속적 비극에 대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이여,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말고 어른이, 이 세계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생각하고 움직여라)

 

요즈음 마음이 쓸쓸하니 자주 와주세요.”라는 미치요의 말에 다이스케는 휘청거리며 100미터 정도를 걸었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여동생인 미치요와 친구인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하였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마음 가는 대로 친구의 부인인 미치요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비극을 선물한다. 우리 비극의 원인은 바로 자연이다.)


 

왜 저를 버렸지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대고 또 울었다.

- 286

 

 

미치요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면서 띄엄띄엄 한 마디씩 말하고 있었다. ‘너무하세요’, ‘잔혹해요라고 말하며, 지나간, 이미 버림받은 사랑을 되새기고 있었다. 친구의 아내가 된 미치요 앞에서 19세기 후반의 다이스케는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용납하지 못할 어떤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없어요?”

라고 물었다.

그런 건 없어요. 뭐든지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떠돌이 생활 …….”

떠돌이 생활을 해도 좋아요. 죽으라고 말씀하시면 죽겠어요.”

다이스케는 또 한번 전율을 느꼈다.

- 316

 

 

이 흥미로운 소설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사랑에 대해선 별 내용이 없다. ‘그 후이라는 소설의 잔인한 제목처럼, 현대적 비극은 막이 내려간 다음 이루어지고 그 누구도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는 데에 나쓰메 소세키는 의문을 갖는다.

 

다이스케는 19세기 후반 아무런 권력도 가지지 못한 나약한 일본 지식인을 떠오르게 하며, 미치요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일본 여성을 보여준다. 결국 둘의 사랑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이스케와 같은 지식인 류의 고백이란 늘 한 발 늦기 마련이고, 어떤 상황은 종료되고 현장은 깨끗이 치워진 이후다. 그리고 자신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순종하며 늘 자기자신에게 솔직하고 정직하다며, 이미 끝난 사랑의 옷자락 끄트머리를 붙잡곤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봐달라고 해대는 것이다.

 

 

잘 알았습니다.”

라고 다이스케는 간단히 대답했다.

너는 바보 천치다.”

라고 형이 크게 소리쳤다. 다이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얼간이 녀석.”하고 형이 또 말했다.

평소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입심이 센 놈이 정작 이런 때는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잠자코 있구나. 그리고 뒤에서는 부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나쁜 짓이나 하고 말이야. 이제까지 무엇 때문에 교육을 받은 거냐?”

- 348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나고 그 후 아무도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아무렇게나 그 둘은 슬픈 풍경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고 지병이 있었던 미치요는 갑자기 무능력해진 다이스케의 손을 잡으며 죽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란 언제나 잔인하게 공평한 것이다.


그 후 - 10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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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기 2009.12.30 21:07 신고

    몇해 전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싶으면서도 또 스산한 감흥을 가지고 덮었던 책인데
    어제 집에 들어갔더니 엄마가 이 책을 꺼내놓고 계시더군요. 이상하게 <그 후>와 거푸 마주치게 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란 인사를 하러 왔어요.
    새해에는 함 만나서 수다떨 기회라도 있길 바래요. :)

    • 소세키의 소설은 19세기말, 20세기초의 분위기스럽지 않게 스산하더군요. 아니면 우리는 스산하지 않았던 때 없었던 건지. ㅡ_ㅡ;;;
      수다~! 너무 좋아해요.. ㅎㅎ 딸기님두 건강하시고요. ^^ 새해에는 수다를 기필코.. : )

* 몇 년 전에 적었던 글을 업데이트해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Le fifre (The Fifer)
1866; Oil on canvas, 160 x 98 cm (63 x 38 5/8 in); Musee d'Orsay, Paris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의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것은 회화 공간의 평면화이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될 평면화가 마네에게 있어서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는 것이다. 즉 환영주의나 눈속임(Trompe l'oeil)로 이름붙여진 어떤 전통이 후퇴하고 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양식이 두드러지는 최초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평면적 구성이 서양의 사상사나 예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지만, 매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배경 사이에는 검은 선으로 구획되어져 있다. 특히 신발은 매우 독특하다. 이는 실제 모습을 재현했다기 보다는 회화적 특징을 위해 새롭게 그려진 것으로, 이제 현실의 재현을 희생하고 회화적 효과에만 치중하는 방향 전환이 천천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래 두 우키요에 작품을 붙인다.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한 번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근세 유럽에 문화적으로 끼친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특히 북동아시아의 변방 나라로 인식되던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 세계에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 영향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 한국이 고작 IT나 전자제품 등으로 자신을 드러낼 때, 일본은 만화, 소설, 패션 등 문화적인 것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은 이미 19세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활동의 일환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다.


http://www.lib.cyut.edu.tw/act/lact/93_library_week/contents3_4.asp 


Yoshitoshi《Heron Maiden》,1889,浮世繪
http://vr.theatre.ntu.edu.tw/fineart/chap10/chap10-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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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구성 - 10점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마티



일본의 재구성
패트릭 스미스(지음), 노시내(옮김), 마티, 2008




1. 일본과 한국, 그 닮음에 대해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리고 읽었던 일본인은 이 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하긴 나도 박노자의 책을 읽고 우리 한국인들, 우리들의 가치관, 그리고 우리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뜨끔했다. 한국인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박노자는 자신이 살아왔던 서양 세계의 가치관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트릭 스미스의 이 책은 박노자가 한국, 한국인에 대해 묻는 것 이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분석하고 따져 묻는다. 그리고 많은 문헌들과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은 그 동안 나왔던 일본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었는가를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매우 불편했고 아팠다. 그리고 가끔은 일본 속에 숨어있는 한국과 만나기도 했다. 가령,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우익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었고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시아 대륙 침략을 후원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족벌 경영 체제의 재벌을 해체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전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35쪽)


한국의 상황과 꽤 유사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제 식민지의 순사가 바로 한국 정부의 경찰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는 동안, 김구가 암살당하고 임시정부에 속해있던 중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소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임시정부는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현실 공간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책자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광복 대신 건국에 방점을 찍는 순간 시작된 일의 사소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할 말도 많고 종종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책과는 대체로 무관한 내용이다.

최근 정치적 상황이나 정부와 여당의 정책 방향은 도를 지나쳐, 잘못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과거와 소란스럽긴 하지만 나름대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현재 사이의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길 염원하는 듯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다수의 법들과 다양한 제재 장치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잘못된 과거 속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근대 일본의 유산과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전쟁 전 식민지 세대들 중 일부는 일본어로 황국신민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그들 극히 일부는 광복 한국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을 것이고, 일본어로 생각하고 쓰고 읽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며(http://intempus.tistory.com/790),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 후손들에게 그런 생각의 일부는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은연 중에 이어져 오는 것은 아닐까? 내 생각이 매우 위험한 가설에 지나지 않겠지만서도.

현대 일본이 그들만의 독자적인 과거사를 정립하지 못하고 과거사에 있어서는 중국과 한국에 대해 열등감을, 근대 이후에는 서양 국가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근대 이후 일본이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은 조금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쨋든 악전고투 끝에 민주주의를 이루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정부와 여당의 여러 정책들은 다소(혹은 매우) 위험해 보일 정도로 과거 회귀적임을, 더구나 대다수의 역사학자들까지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수정 문제나 한국 정부의 정통성 부분 등, 일본의 정치가들이 그랬듯이 한국의 정치가들도 그렇게 새롭게 채색된 한국의 가면을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2. 일본의 근대(Modern), 그리고 근대적 자아

현대
일본은 이러한 과정 속에도 다수의 학자들은 서양의 근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한국에 번역 소개되는 무수한 서양 번역서들 대부분이 일차적으로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최근까지도 국역본 대부분은 먼저 번역된 일본 번역본에 의존했음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20세기 초반에 사용하기도 했으며, 가라타니 고진같은 비평가는 세계적인 지명도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스타급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아래의 인용문은 낯설다.

일본인은 루소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무수한 계몽시대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으며 근대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읽은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을 한쪽으로 제쳐두었다. 근대 경제는 이룩했으나 (여러 측면으로 미루어 보건데) 근대사회는 이룩하지 못했고, 패전 후 황국신민이 아닌 시민이 되었으나 참여할 만한 시민사회는 형성하지 못했고, 민주주의의 조직은 갖추었으나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뭐라고 정의하든 간에 일본은 절대로 포스트모던이라 할 수 없다.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 (313쪽~314쪽)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과 실제 일본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가 아는 일본은 책이나 잡지, 혹은 만화나 영화로 만나는 가면으로서의 일본(수출용 일본), 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탈색된, 혹은 변장된 일본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19세기 일본의 정치가들이 먼저 시작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과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여했고, 그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세대의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버렸다. 재일한국인과 같은 외국인(백인이 아닌), 일본 내의 부락민,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국가였던 오키나와 등 자신들 내부에 많은 차별을 만들어놓고 있으면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인 스스로도 이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일본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주체성, 또는 근대적 자아)이 가장 거대한 문제일 지도 모른다.

외국인이 제일 빨리 깨닫는 일본인의 특징은 남에게나 자신에게 진심을 숨기는 습관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전부 가면을 쓰고 있고 각자 가면 쓰는 법을 배운다. 이 가면을 통해일본인은 남들과 가까이 살면서도 떨어져 사는 방법을 배운다. 일본이 이상하게 속이 텅 비고 모호하여 표면은 잔잔하고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갈등과 긴장, 역류와 불안감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늘 그래왔다. 단지 최근에 와서 마치 뚜껑이 열린 듯 가면의 일부가 벗겨진 듯, 그 현상이 좀더 뚜렷해졌을 뿐이다.
(74쪽)


일본인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사랑 표현을 쉽게 하는 한국인이 낯선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일본 내의 부락민 운동하는 이들도 그렇지 않다고 패트릭 스미스는 말한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와버린 셈이다.


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조차 개인을 민족국가 개념에 끌어다 붙였다. 후쿠자와의 실수, 즉 “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보는 실수는 이후에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112쪽)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닌 채,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의도되어진 일본인은 경제 발전에 몸을 내던지는 근대 무사의 모습에서, 전쟁 중의 일본 군인, 그리고 현대 기업의 직장인의 모습 등으로 변화하지만,  어느 것 속에서도 '스스로의 나 자신'은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혼자, 나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다채롭게 살았던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뒤로하고 도망가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세상이 시골과 도시, 전통과 근대, 외국과 일본, 하는 식으로 우열로 나뉘는 집단들의 집합체라는 일반적인 시각을 그는 거부했다. ‘자기다워진다’는 것, 즉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큼이나 불투명한 과제가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세키 이후 그의 신념을 공유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은 소세키가 제시했던 ‘진실’에 걸맞게 살아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376쪽 - 377쪽)


그리고 이러는 동안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본인들은 소속감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그 그물망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121쪽)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반에 어느 일본 작가가 요염하고 매혹적인 것을 뜻하는 ‘비타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미적 감각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기대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선호하며, 욕망의 대상과 가능한 거리를 좁히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최대한 목적 실현의 가능성을 음미하는 것이 ‘비타이’에서 얻는 쾌감의 진수라는 것이다.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영원히 타자이다. 꿈꾸는 상태가 실현되는 것보다 나은 모양이다. (21쪽)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기분을 만끽한다. 꼭 히로히토 천황의 연설 전과 연설 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도, 일본인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어쩌면 역사적으로 두려워하게끔 만든 것일 수도).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은 일본이 항복한 날을 다음과 같이 놀랍게 묘사한다. 그날 구로사와는 스튜디오로 와서 히로히토의 항복연설을 들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도쿄 시내를 걸어서 통과하던 구로사와의 눈에는 온 국민이 고귀한 일본정신인 국체와 덴노의 명예를 위해 금방이라도 죽을 각오인 것처럼 보였다. 다들 “경황이 없었다. 일본도를 빼들고 앉아 칼날을 망연자실 내려다보는 상점주인도 있었다.” 젊은 구로사와는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히로히토의 연설을 들었다. 그를 포함한 7,000만 명의 일본인은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그날 생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구로사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집에 돌아갈 때는 거리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상점가 사람들은 마치 다음날 있을 축제라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들뜬 표정으로 소란스러웠다." (303쪽 ~ 304쪽)



3. 진짜 일본을 찾아가는 일본 현대 문학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오에가 말했다. “저는 작가로서 보통사람들이 사는 주변부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내면적 자아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주변부야말로 진정한 일본 문화가 그렇지 않은 것과 함께 변천해가는 곳이지요.” (392쪽)


오에 겐자부로의 저 말처럼, 한국인들이 냉전과 독재 속에서 악전고투하여 민주주의를 얻어내었다면, 똑같이 일본인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 하지만 한국에서도 진짜 일본을 그려보여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대신 무라카미 하루키를 선택했듯이, 일본도 그런 것은 아닌까 걱정스럽다.

오에 겐자부로의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드디어 전 세계가 일본과 일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중략)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변한 게 없었다. 오에의 소설이 선명하게 보여주듯 오에 세대와 나머지 일본인들 간의 간극은 넓어지기만 했다. 오에가 스톡홀름으로 향할 즈음에는 오에나 아베 코보(1993년 사망)는 일본 문학계에서 멸종된 공룡에 속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미처 거장을 알아보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아키히토는 서둘러 오에에게 덴노상을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덴노상은 자기 작품 속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는 문화를 상징했으므로 오에는 이를 거부했다. 아키히토가 괜히 어색한 원조를 시도했다가 자국 최고의 작가들을 소외시키는 은밀한 현상을 드러내버린 꼴이었다.  (394쪽)


작품성으로나 문학적 위상으로나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에 겐자부로가 어른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갓 유치원을 졸업한 초등학생 저학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간판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소설가로 올려주는 국내의 모 문학잡지나 평론가들을 보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실은 그들의 형편없는 상업주의와 감식안을 탓해야 할 것이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선 몇 년 전에 작은 평문을 쓴 적이 있었다. 하루키 문학은 본격 문학이라기 보다는 상업 문학에 가깝고, 이 점을 인정한 후 그나마 있는 가치에 대해서 적으려고 노력했던 글이다.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 http://intempus.tistory.com/135)

그렇다면 패트릭 스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던 작품에 공통된 맥락은 ‘의도적 무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스로를 “오리지널”이라 일컫는다. “내가 내 소설을 위해 완전히 독자적으로 새로운 일본어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그렇게 선언되어야 진정한 독창성인가?  (중략) 등장인물이 생활하는 환경에 관한 묘사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해 쓴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한 진솔한 묘사를 작품에서 실종시키는 작가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98쪽)

그에게 과거란 무관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모방이나 죽은 전통에서 탈피하라는 과제에 대한 무라카미의 해답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서 아예 통째로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본이라는 문제 많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일본을 외국인처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 바깥에서 일본사회에 대해 쓰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을 하나씩 전부 던져버린 후에도 남아있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이 아닐는지요.” 말도 안 되고 근거도 없는 역설이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 뿌리 깊은 열등감이 또 한 차례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무라카미도 십 년 후에는 감상적인 국가주의자로 변모해버리는 게 아닐까. (397쪽)


패트릭 스미스는 '나쓰메 소세키 - 아베 코보 - 오에 겐자부로'를 분명히 한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100% 동의한다. 이 세 명의 소설가는 일본 근현대 문학의 최정수이다(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가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옆에 슬픈 소설가 두 명 있다면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하기 몇 해 전인 1960년대 후반,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의 외국인 특파원이 취재차 도쿄 남쪽 해변에 위치한 미시마의 집을 방문했다. 미시마가 사는 집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특파원이 털어놓았다. 당시 골수 국수주의자였던 미시마의 집은 번지르르한 서양 저택이었다. 프랑스식 문에, 연철로 만들어진 발코니에, 정원에는 오르페우스 조각상이 서 있었다. “온 집안을 둘러봐도 특별히 일본적인 물건을 찾아볼 수 없네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파원이 미시마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빼면 전부 일제예요.” 미시마의 대답이었다.(292쪽)

일본인들이 과거라는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정신이란 관념이 바로 그 감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미시마는 잘 알고 있었다.(293쪽)

“실패한 비극배우라 함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열심히 사람들을 울리려고 무대에 나가는데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하는군.” (384쪽에서 재인용)

과거가 현대에 대한 보호막이기를 원하던 그 꿈은 미시마, 가와바타와 함께 죽어버렸다. 이제 앞으로 그들과 같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더 있다. 침묵하는 과거와 불협화음 가득한 현재가 뒤섞인 일본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은 꿈 말이다. 과연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일본 소설가들이 재능은 있어도 탁월한 정상급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84쪽)


문득 '위대한 전통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예전 미술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다. 문제 많은 일본 옆에 문제 많은 상태에서 문제 더 만들고 있는 한국. 흥미로운 조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할 수 있을까. 페트릭 스미스는 적어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건데,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리더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말이다.(이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4. 숨겨진 일본

도카이도는 근대 일본을 둘로 나누는 경계이다. 태평양과 도카이도 사이에 놓인 지역이 ‘오모테니혼’ 즉 일본의 얼굴이고, 나머지 지역이 일본의 등에 해당하는 ‘우라니혼’이다. 메이지유신이 이런 구분을 새로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리적 구분에 격변을 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중국에서 문물을 수용하던 수세기 동안 일본의 앞면은 거꾸로 동해 쪽이고 태평양 쪽이 뒷면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9세기에 서구로 눈을 돌리면서 앞뒤가 바뀐 것이다. 도카이도의 한쪽이 근대화되는 동안 다른 한쪽은 과거에 멈춰야 했다.
요즘 ‘우라니혼’은 약간 실례되는 말이다. (중략) ‘숨겨진 일본’이라고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우라니혼은 시골이다. 대나무 수, 계단식 논, 단선철로, 반딧불, 지푸라기 냄새, 가열처리 안 한 곡주가 있는 곳이며 근대 일본인이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 노력했던 곳이다. (254쪽)  


'오모테니혼'과 '우라니혼'의 대비. 다소 낯설지만,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도시과 농촌 사이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근대적 일본’이 ‘전근대적 일본’에 돈을 주어가며 진보를 막는 모습을 보면 그런 행태가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 수 있다. 시골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시골사람들을 전시물의 일부로 삼아 자신이 옛날 그대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조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64쪽)


그런데 한국도 이렇게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벌써 이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우라니혼은 오모테니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타자인 셈이다. 그리고 일본 안에는 많은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열린 피아노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갔습니다. 그때 3주 정도 한국에 머물렀는데, 사람 사는 후텁지근한 냄새가 나던 것과 빨리 일본에 돌아오고 싶던 것이 기억납니다. 두 번째로 한국에 갔을 때는 1980년 대학교 1학년 봄방학 때였습니다. 진정한 내 조국은 한국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갔는데 오히려 제 자신이 얼마나 일본적인지 강렬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16쪽~417쪽에서 재인용) 


1981년 22세의 나이로 지문날인을 거부한 이후 내내 일본 법정을 들락거린 최선애의 법정 진술의 일부다. 꼭 소설가 유미리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그런데 한국도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이 타자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면, 한국 사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일본 사람들은 느리지만, 한발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의 결말은 일본과 미국을 향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 일본인을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전적으로 일본인들의 책임이다. 하긴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고 다듬다 보니, 어느새 2009년이 되어버렸다. 지금 여의도와 종로에서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무수한 인파들 속에서 촛불을 든 이들이 있을 것이다. 흥미롭다. 어째서 정치인들은 19세기나 20세기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토록 변한 것이 없는 것일까.

*      *  

책은 매우 두껍고 방대하며 많은 문헌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은 리뷰를 이렇게 길게 적을 생각은 없었다. 글이 길어지면 초점이 흐려지고 지루해진다. 따라서 위 글도 그러하리라 싶다. 그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으며 한국, 한국사회, 한국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던 책이라 여겨진다. 또한 일본인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일본인을 만날 때나 볼 때 뭔가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더 심해졌다. 내년에는 반드시 일본 여행을 갈 생각이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을 번역하신 noi님에도 감사를. noi님은 이 불성실한 독자를 위해 기꺼이 번역한 책을 보내주셨다. 2009년 최초의 포스팅은 noi님께서 번역하신 책의 리뷰가 되었다. : )  2009년 속을 살아갈 한국과 일본의 모든 개인들이여, 파이팅F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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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롬차 2009.01.01 19:13 신고

    글 잘 읽었습니다~(__) 특히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라는 말이 의미 심장하게 느껴지네요...쩝, 저도 일본은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엔고로 인해서 고민이 많이 되네요 ㅎㅎ 가본곳이라고는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혹은 태국 밖에 없으니~자주 들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
      엔고 정말 걱정입니다. ㅡ_ㅡ;; 2009년에는 환율 문제 제발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2009.01.03 12:39

    비밀댓글입니다

  • 일본의 재구성을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도 계속 밀쳐두고 망설이기만 했었는데 오늘에야 주문을 했네요. 이렇게 상세하게 감상기를 올리셔서 읽는 데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번드르르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한 일본학 서적보다 훨씬 더 사람의 마음을 울릴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했는데, 역시 저자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무척 좋은 책입니다. 한국, 그리고 한국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네요. 패스츄리님의 댓글 덕분에 저도 이 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호쿠사이와 히로시게, 우키요에 속 풍경화
2008.6.4 - 7.4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광화문 흥국생명빌딩)



내가 읽는 책이며, 보는 전시며, 듣는 음악을 다 리뷰한다면, 나는 종일 리뷰만 써야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리뷰 쓰는 것이 일종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터라, 쓰지 않으면 뭔가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어 적기는 하지만, 일종의 소모적인 자기방어전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전시도 벌써 반 년이 지난 후에야 글을 적는다.  

내가 우키요에를 기억하는 건 마네 때문이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은 직접적으로 오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근대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거의 최초로 원근법을 극복하고 평면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켰다는 점이며, 이 평면성에 대한 연구가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 바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우키요에가 서양 근대 미술에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유럽을 휩쓸던 '자포니즘japonisme'속에서, 1889년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실 일본이라는 것 자체가 순전히 누가 만들어낸 허위에 불과하다. 그런 나라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런 국민도 없다"
- 일본의 재구성, 25쪽(마티, 2008) 


오스카 와일드의 저 지적은 그 당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19세기 말 일본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게 해주기에는 충분하다.

지난 19세기 내내 외국에 퍼진 일본의 이미지 가운데 일부는 일본인들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지적이다. 와일드는 일본의 이미지가 당시 판화로 유럽 자포니즘을 주도하던 호쿠사이와 같은 미술가들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꾸며낸 창조물"이라고 일갈했다. 대단히 날카로운 관찰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일본의 주요 지도자와 사상가들 또한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것이 분명하다. '일본'이 일본인 자신들의 상상의 산물인 경우도 많았기에 일본인 가운데 오리엔탈리스트가 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 일본의 재구성, 29쪽(마티, 2008)


단편적인 인용이기는 하지만, 이 당시 일본인의 삶과 우키요에 속의 풍속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 있었던 '라틴아메리카거장전'(덕수궁미술관, 2008)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가 엄청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사건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초여름에 있었던 이 전시는 작은 우키요에 판화들이 나열된 조용한 전시장에서 이루어졌다. 평일 낮에 간 것이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19세기의 일본이 도심 한 가운데 비밀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정갈한 느낌의 판화들은 정직해보이기 보다는 너무 장식적이거나 꾸밈이 많았다. 이건 작품의 크기 탓이거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우리들로서 실제 우키요에 작품이 주는 감동이란 미미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꾸며진 어떤 세계 속에 자신을 깊이 담그고 살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세계 속에 잠기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일까.
(위에서 인용한 '일본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간단하게 전시 카타로그에 실린 설명문을 인용해본다.

우키요에는 일본 에도 시대(1603 - 1867년)에 당대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를 일컫는다. 우키요에는 당시 시민층의 경제력 상승에 따른 서민 문화의 발달로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특히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인기가 높아졌다. 에도 초기에는 마을의 일상 생활, 유곽의 미인들,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 예술 공연 등의 특정한 장면을 주제로 많이 담았으며, 에도 후기에는 기존의 미인화나 배우 그림 이상으로 서정을 추구하는 기풍이 나타나면서 아름다운 일본의 풍토를 대상으로 한 풍경화가 서민층에도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풍경화란 경치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서, 근대에 들어와서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무한함, 무상함, 영원, 생명력, 활력, 편안함 등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초기에는 배경 묘사에 머물렀으나 점차 풍경 묘사가 중심을 이루면서 원근법, 음영법, 농담법 등과 같은 기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묘사의 절정에 이른 작가로서 가츠시카 호쿠사이와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들 수 있다.





* 일본 문화에 관심있는 분이라면서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http://www.jpf.or.kr/)를 추천합니다.
* 본 블로그는 비상업적 블로그이며, 위에 사용된 이미지들에 대한 저작권을 득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작권자의 요구가 있을 경우 바로 삭제토록 할 것입니다. 이미지의 출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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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바다 2008.12.17 14:32 신고

    오..이 사람 그림 좋아하는 데요.. 종이담는 조그만 파일철로 가나가와만의 파도가 그려진 것을 샀다는.... 근데 전시회가 열렸었군요.. 아쉬워라.

  • 2008.12.19 22:02

    비밀댓글입니다

  • 호쿠사이 자료 보러 들어왔다가 알게되었습니다.
    다른 자료들,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관심도와 기능(?)이 저와 많이 비슷하네요.
    즐겨찾기했으니 자주 놀러오죠~

  • 위 그림들은 저작권이 말료된 작품이므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고흐와 관련한 일본풍의 그림들을 정리해 올려놓고 검색으로 다녀갑니다.
    글도 엮었구요.

    휴가 중일가요... 조흔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저작권이 만료되었군요. 감사합니다. ^^
      즐거운 휴가 되시고요. : )

    • 각 나라마다 인정 기간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보통은 저작권 인정은 저작자 사후 5-70년입니다. 아직 세계적으로 70년 이상은 없다고 할 수 있지요...

      한 주의 시작, 월욜이네요.
      좋은 일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파리에 계신 작가의 메일을 받았다. 내년 2월에 일본으로 간다고 하니, 내년 일본에서 볼 수 있을 것같다. 남편은 프랑스 작가인데, 7~8미터 길이의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구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동경에 계신 noi님께도 연락해야지. 아참, 아직 책을 읽지 못했다. 빨리 읽고 서평을 올려야 겠다.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할 책임을 알기에 좀 태평스러웠다. 서문은 읽고 서가에 놓아둔 상태다.

이젠 시차엔 적응한 것같은데, 잠자는 시간을 놓치면 잠을 통 자지 못한다. 오늘도 벌써 새벽 두시 반이다. 오후엔 오랜만에 옷을 샀다. 겨울 옷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없다는 걸 며칠 전에 알았기 때문이다. 운동화도 한 켤레 샀다. 운동화라기 보다는 트래킹화. 피트니스 센터 사물함엔 운동화가 하나 있고 외출용으로 간단한 운동화도 한 켤레 있고 해서 트래킹화를 샀다. 등산도 갈 겸해서. 등산화는 왠지 부담스러운 관계로.

저녁엔 운동을 했다. 지난 주 토요일에 운동을 했으니, 이틀 만이다. 좋은 일이다. 나란 인간에겐 반드시 운동이 필요하다. 술 대신. 베르그송의 의견대로, 우리의 지성은 우리의 생명에 종속된 것이다. 즉 문제는 육체다. 운동 습관을 확실하게 들이고 술을 줄일 생각이다. 하긴 예전에 비한다면 엄청 줄인 것이긴 하지만.

이번 주에도 몇 번의 점심 약속과 몇 번의 저녁 약속이 있다. 이번 주에는 이력서를 새로 업데이트를 하고 여기저기 보낼 예정이다. 미술 비즈니스계로 전직하기 위한 몇 번의 모험이 거의 실패로 향하고 있다. 마지막 시도를 하고 난 뒤, 깨끗하게 4-5년 후로 미룰 생각이다.  이번 11월이 나에겐 매우 중요한 달이 될 것이다. 미술 쪽에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워낙 연봉이 낮은 곳이라 있다고 하더라고 꽤 고민해야 겠지만 말이다).

파리 유학도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결혼 이후라는 고집을 십 년째 꺾지 않고 있으니, 큰 일이다. 아무래도 내 인생에 결혼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나에게도 오디세우스의 아테나
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거 참 어려운 일인 듯.


파리 사진을 올린다. 나는 파리 사람들이 좋다. 적당히 수다스럽고 적당히 관용적인 척하면서도 지킬 건 다 지키는 그들이. 프랑스의 지방 마을로 가면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랑팔레가 있는 거리와 연결된 다리다. 다리 너머로 에펠탑이 보인다. 내가 있는 동안 파리 날씨가 참 좋았다.

다리 교각 옆에 서 있는 기둥. 기둥 위로 황금빛 조각상이 눈에 띈다. 그런데 실제 금 도금이다. 이 금 도금 기술도 꽤 난이도가 있는 것이어서, 모두 아랍 쪽에서 배워온 것이라고 한다. 이 금 도금 기술에 대해선 다음에 자세히 언급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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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10점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모멘토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 미의식과 군국주의>>, 오오누키 에미코 지음, 이향철 옮김, 모멘토.


사사키는 다른 많은 학도병과 마찬가지로 강경한 반전론자였다. 그는 전쟁의 승리에 도취된 일본인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제 2차 세계대전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348쪽)

사사키 하치로오. 1923년생. 토오쿄오제국대학 졸업후 1943년 12월에 학도병으로 징병되어, 1945년 2월 20일 특공대원으로 지원했다. 1945년 4월 14일 특공대 임무수행 중 전사. 향년 22세. 해군 소위였다. (333쪽)



나에게 ‘카미카제’(특공대)는 2차 대전 말기 미쳐버린 일본군 최후의 발악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흐린 바다 위를 나는 프로펠러 비행기. 그리고 멀리 보이는 미군함. 날아오는 총알과는 상관없이 군함 위로 내리꽂히는 비행기. 불타는 군함.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군사적 효과는 매우 낮았고 전후 서방에 일본군 특유의 인상만을 남겨주었다. 일본 민족주의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또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경우엔 채 이 백년도 안 된다. 일본의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이 책은 근대 일본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해주었다.


고대 왕조는 천황이 종교.정치 쌍방의 권력자였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신권 정치였지만, 천황이 8백만이나 존재하는 신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고, 결코 전능한 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대 왕조가 신성한 왕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애도 지나치지 않다. (173쪽)

중세 이후의 역사는 정치. 군사적으로 유력한 무사계급이 천황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의 연속이었다.(174쪽)



고려나 조선의 국왕과 달리 일본의 천황은 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거칠게 말하면 일종의 주술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천황의 자리에 오른 메이지 천황은 초반에는 실질적인 정치 활동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 틈을 통해 이토오 히로부미, 이노우에 코와시 등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근대 일본의 모습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유럽의 여러 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해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든다. 이에 많은 일본인들이 반대하였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은 실제로 강력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러-일 전쟁,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 국민들의 지지까지 얻어낸다.

만약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만큼 러-일 전쟁은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늘 중국이나 조선보다 낙후되어있었고 서구 열강들 틈 사이에서 늘 위축되어 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일본인들의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2차 세계 대전의 전범 국가로서의 일본 권력층들의 야욕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쿠라꽃으로 치장한다.

사쿠라꽃이 지니는 의미는 실로 다양하다. 쌀의 상응물이며 여성이고 장엄하고 화려한 사랑의 축하, 인생의 구가, 죽음과 환생으로서의 사쿠라꽃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사쿠라꽃을 사랑하고 많은 작가들이 사쿠라꽃을 소재로 글을 적었다. 그리고 이 꽃은 안타깝게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 된다. 이 책은 근대 일본이 사쿠라꽃을 통해 일반 민중들에게 그들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주입시키고 응용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특공대원들의 수기를 통해 이를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

미적 가치는 실제 세계와 아무런 관련 없는 가상 세계에 투영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미적 가치에 대한 신봉, 가령 유미주의는 천황에 대한 충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절대자로 믿어지는 어떤 존재를 위한 죽음, 사쿠라꽃이 떨어지듯이, 아름답게 죽는 것. 일종의 세뇌 과정이 있었고 그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어떤 일들을 저질렀던 셈이다.

특공대원들 대부분은 명문 대학을 다니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엘리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도 대부분은 서양 문물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몇몇 특공대원들은 마지막 출격 전에 쓴 유서를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남긴 이들도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도 있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사쿠라꽃 아래 함께 서있었다. 투절한 애국심 따위는 없었다.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초중반에 이르는 특공대원들은 투철한 애국심을 가지고 천황을 향한 끝없는 충성으로 비행기나 잠수정을 타고 갔던 것이 아니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내일 출격날짜가 왔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애써 그 진실을 사쿠라꽃으로 포장하려고 했다. 아마 낭만주의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 특공대원들 중에는, 옮긴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16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일본인 특공대원들처럼 지금 이들도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오인’이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개인 또는 집단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고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해 동일한 하나의 상징이나 의례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얻어내는 경우, 즉 전달의 오인 혹은 부재 상태를 의미한다.(16쪽)



사쿠라꽃은 하나의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사쿠라꽃(=천황) 아래 모인 이들은 서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의지한다. 미적 가치가 정치적으로 악용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일본의 사쿠라꽃이 아닐까. 청춘의 아름다움이 사쿠라꽃으로 포장되고 그들의 덧없는 죽음이 사쿠라꽃으로 피어날 때, 그들의 죽음은 보상받아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죽음 앞에선 그들은 그렇게라도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 천황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종종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나 예술가들이 미적 가치만을 떠들고 있을 때, 이것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허술한 짓인가를 알고서 떠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가상 세계에 대한 열정이 예술적으로는 고귀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실제 세계 속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소설에서 유미주의를 이야기했듯이, 그도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는 그가 세뇌당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미주의는 매우 ‘과격한’ 양식이다. 이는 예술 세계 속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 속에 투영되었을 때의 경우다. 포스트모더니즘 양식들이 보여주는 유미주의적 성향이 종종 위험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미주의, 미학주의, 이상주의 같은 것들과 정치와의 상관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책은 이 주제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을 전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 일본의 형성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려줄 것이고 미적 가치와 현실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쿠라꽃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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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가을이 오면 그대 울게 되리, 가을이 오면 그대 옷자락 끝을 붙잡고 바람 속에 둥지를 틀리, 가을이 오면 그대 눈물 얼어 심장이 되고 그대 눈동자 갈색으로 늙어 빛바랜 훈장이 되리, 그대 향한 이 마음 주춤거리는 사이, 아,  가을은 무섭게 내 가슴 도려내리니, 손가락 자르고, 발가락 자르고, 그대 위해 글을 쓰지도, 그대 향해 걸어가지도 못하게 하여, 그대 향한 이 마음 식히리라.
          
02.
오랫만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순간들이 모여있는 곳이 계절과 계절 사이이다. 
          
이틀 전엔 밤을 세워 공부를  했고, 어젠 새벽 한  시까지 도서관에 있었다. 보통 일어나는 시간이 오전 11시쯤이니,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처음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회의에 사로잡히곤 한다. 나로  하여금 공부를 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자존심'이다. 이건  일종의 나르시즘이기도 하다. 가끔 새벽 잠을 청할 때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순간 날 지탱하는 것도 '자존심'이다. 
          
자본주의 속으로 들어가느냐,  자본주의 속으로  들어가지 않느냐의 갈림길에서 난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선택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나혼자만의  선택일 뿐, 우리  부모님이나 동생들, 혹은 내가 나중에 만나게 될 내 가족들을  위한 선택은 아니다. 이미 선택은 끝났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과연 내 선택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이윤 뭘까.
          
03.
9/20 <댓스 댄싱>. 잭 하레이  1985
10/18 <태양은 외로워>.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1/15 <메트로 폴리스>. 프리츠 랑 1926
12/20 <베니스에서의 죽음>. 루치노 비스콘티 1971
           
위의 영화 상영 목록은  환기미술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이달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들이다. 입장료는 5천원. 집이 미술관 옆이면서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한 번  가야 겠 다. 그런데, 잭 하레이는 어떤 놈이지? 
           
04.
오에 겐자부로의 『동시대게임』을 다 읽었다.  작년 12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몇 달이 걸린 셈인가! "오에의 작품세계는 고향 숲속 마을, 갇힘, 성, 핵, 반전, 장애자, 공생, 공포, 절규, 환상, 우주, 미래, 인류, 재생, 구제 등 다양한 주제를 추구해 왔고, 문체는 특이하며  난해하다"라는 편집위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다음 읽을 오에의 소설을 골라본다. 
          
지금 새로 손에 잡은 소설은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이다. 지금 레이몬드 카버의 영문소설은  교보문고에 가면 구할  수 있다. 내가 잡은 건 번역본이다. 영문으로 구하고 싶은 건 도널드 바셀미와 리차드 브라우티건이다. 
          
05.
언젠가 스터디 때  '일본은 동네동네마다 틀리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국은 박통의 근대화로 인해  동네동네, 도시도시가 똑같다고 의견이 수렴되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엔 그냥 넘어갔지만,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을 듯하다. 왜냐면, 일본이  단일국가체제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얼마나  많은 소부족들이 있었는가.  하지만, 한국이 단일국가체제로 지내온 것은 천년이 넘었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일본은  동네동네마다 틀리고, 한국은  왜 동네동네가 똑같은가'에 대한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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