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소설 20

사카구치 안고 단편집

사카구치 안고 단편집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지음), 유은경(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자정쯤 잠에서 깼다. 지금은 낯설지만, 실은 수백 년 전엔 일상적인 패턴이었다. 밤의 어둠을 촛불로 몰아낼 수 없듯이, 전등이 등장하기 전 대부분 사람들은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저녁 잠에 들어 자정이나 이른 새벽에 깨어, 한밤 중 산책을 나서곤 했다. 유럽에서도 그랬고 조선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밤 늦게까지 밝은 전등 아래 생활을 할 수 있다 보니, 새벽에 잠에서 깨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쉬이 피곤해지는 나이 탓으로 집에 오면 바로 잠을 청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레 새벽에 깨어 어슬렁거리곤 한다. 오늘 그렇게 잠에서 깨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스바토슬랴프 리흐테르(Sviatoslav Richte..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홍은주(옮김), 문학동네 다 읽고 보니,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건 무려 이십년만이다. 가 나온 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일 년에도 여러 차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읽거나 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읽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년에 읽는 소설은 채 열 권도 되지 않고 심지어 서재에는 읽으려고 사둔 소설만 수십권이 될 터니. 우연히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이 소설 를 보게 되어 빌려 읽었다. 예상한 대로의 하루키 소설이었다. 늘 기대하는 모습 그대로 이 소설집에서도 하루키는 가볍고 경쾌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는 너무 진지했다고 할까. 하루키가 어딘가 진지해지면, 그 순간 모든 그의 매력은 반감되고 깔끔하던 그의 작법은 도리어 어설퍼진다. 그 이..

2023년 일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가와 사오, <<헌치백>>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집을 읽긴 했으나,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도 보았으나, 일부만 기억날 뿐이다. 메이지 다음이 다이쇼 시대인데,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나쓰메 소세키라면 다이쇼 시대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바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그리고 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문학상이 바로 아쿠타가와 상이다. 일본의 흥미로운 점은 몇 명의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은 너무나도 놀랍지만, 대중적인 저변은 몇 백년, 몇 천년 전 섬나라 그대로다. 하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한국은 어떻게 조선을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될 테지만, 성리학(주자학)과 양반 계급의 그릇된 세계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일반 대중들은 잘 모르거나 애써 무시한..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지음), 강방화(옮김), 소미미디어, 2021 이불에서 팔만 꺼내 시계를 얼굴 가까이 대어 보니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환갑 기념으로 아내 세쓰코와 딸 요코가 센다이에서 사다 준 세이코 손목시계였다. (154쪽) 최근 소설가 유미리의 근작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마치 사라진 듯, 한국의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헌책으론 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타까웠다. 재일한국인 여류 소설가. 아쿠타가와상 수상 때부터 갖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가. 재일한국인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중간자적 존재를 무기 삼아 싸우던 소설가. 그녀의 소설들은 어느 순간 번역되지 않았고 그녀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 어..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지음), 권영주(옮김), 은행나무 베란다와 창문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형태가 똑같은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2층 집은 벽에, 1층 집은 바닥에도, 볕이 드는 곳과 그늘의 경계가 보였다.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해시계처럼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이동할 뿐이다. 도서관에서 그냥 집어들고 읽었다. '아쿠타카와 수상작'이라고 하나, 그냥 작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시대 일본을 알 수 있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관음증적이면서도 쓸쓸한 봄날의 풍경화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도 독자도 심지어 소설 속 인물들 마저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고나 할까. 결코 속마음을 들킬 필요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때 그 모습만을 묘사할 ..

미친 사랑(치인의 사랑), 다니자키 준이치로

미친 사랑다니자키 준이치로(지음), 김석희(옮김), 시공사 아찔아찔 하기도 하고, 측은 하기도 하고, 동시에 나오미같은 이를 만나고 싶기도 하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상당한 수작이면서, 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쾌하며, 음울하고, 관능적이다. 소설은 적절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한 남자의 터무니없는(바보 같은) 사랑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문학적 강점이 될 것이다. 특히 성적 페티시즘은 군데군데 그 모습을 드러내며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퇴폐적으로 몰아간다. 고려대 김춘미 교수는 아예 “장장 오십오 년 동안 오로지 여자의 흰 살갗과 발이 가져다 주는 희열 만을 그린 작가”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이 당시에 일으킨 반향은 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양윤옥(옮김), 현대문학 소설 쓰는 게 영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소설 쓰는 법에 관심을 기울인 듯 싶다. 실은 소설 쓰는 법 따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소설 쓰는 법을 배우고 소설가가 되는 경우보다, 그냥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우연히 소설가가 되고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후, 몇몇 작가들은 소설 쓰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작법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다. 결국 내가 소설 쓰는 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소설 쓰기와는 무관하게, 소설 쓰기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리고 소설 쓰는 법을 이야기할 정도로 수준 있는 소설가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내 동경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젊은 하루..

풀베개,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나쓰메 소세키(지음), 오석윤(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의 놀랍고 아름다운 시작은, 어쩌면 이 소설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은 독자가 읽게 되는 첫 문장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하이쿠 소설'이라는 후대의 평가도 우호적인 것일지도.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소세키의 '풀베개'에 누워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 [개정판]다카하시 겐이치로저 | 이상준역 | 향연 | 2011.11.08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의 다카하시 겐이치로다! 하지만 십수년만에 읽는 그의 소설은 ... 아, 이런 표현은 심하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읽는 건 시간낭비다. 전혀 유머스럽지 않다. 작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세계에 대한 반체제적인 알레고리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뭘? 너무 쉽게 읽히고 깊이감이 없다. 두서 없고 이야기는 흩어지고 등장인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어로 읽었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다. 현재 일본 문학계 내에서 그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의 일본어 문장이 어떤지 모르는 탓에, 내 평가절하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적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