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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미술사 책을 읽기는 하나, 그건 일 년에 한 권 될까 말까이다. 한때 책을 내기도 했고 강의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십 수년 전 일이고, 마지막 잡지 기고를 한 것도 꽤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우연히 강의 제의가 들어왔다. 요즘 아내의 일로 커뮤니티 자치 활동을 잠시 도와주고 있는데, 그 곳에 계신 분의 제안으로 한 차례 강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래는 간단한 강의 개요다. 막상 적기는 쉽게 적었으나, ... 도판 찾는 게 일일 듯 싶다. 요즘은 워낙 온라인 아카이브가 잘 되어 있어 쉽게 도판을 찾을 수 있으나, 정확하고 적절한 도판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라, 꽤 시간이 걸릴 듯 싶다. 동네에서의 반응이 좋으면 나중에 공개적인 장소, 가령 북까페 같은 곳에서 한 번 더 하면 좋을 것같기도 하다. 이런 강의도 자주 해야 까먹지 않는데, ... 머리가 굳어져서 큰 일이다. 


*** 

 

미술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현대미술감상법 


우리의 마음과 예술의 경향 

‘예술은 없고 예술가만 있을 뿐이다’라고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의 첫 문장으로 적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 뒤에 놓여진 예술가의 삶과 그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때의 예술작품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중세 말의 고딕 성당을 알기 위해선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깊은 공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13세기의 유럽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예술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적인 태도가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현대의 어떤 사람은 조용히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아침저녁으로 묵상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교회당 대신 거리로 나가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로마네스크 성당과 고딕 성당의 차이는 이와 비슷합니다. 신의 존재와 신앙의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각기 다른 마음과 태도도 그 시대의, 그 나라의 예술작품을 만듭니다. 





생-드니 성당. (1135 - 1144)



매너리즘과 현대 

예술사에서 매너리즘(마니에리즘)은 16세기 중후반의 지배적인 양식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퇴보로 이해되었던 탓에, 이 양식의 명칭은 경멸적입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그 시대의 예술은 가장 현대적인 예술로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예술 양식이 어떻게 경멸당하고 다시 받아들여지게 되는가 흥미로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 당시의 예술가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게 됩니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1592-94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예술은 크게 고전주의(고전적 예술)과 낭만주의(낭만적 예술)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식에서의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시대와 예술가들,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해하며 현대 미술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도 함께 탐구합니다. 


라파엘로, <초원의 성모>, 1505 



자연주의와 기하학주의 

서로 대립되는 양식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대립되는 양식이 아니라 우리가 외부 세계와 마주할 때 취하게 되는 양식적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자연주의와 기하학주의가 함께 드러낼 때도 있습니다. 자연주의 작품과 기하학주의 작품을 함께 비교해가며 예술가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이해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해봅니다. 


이집트, <사자의 서> 일부, BC.1275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소장품기획전>으로 보는 현대미술과 우리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소장품기획전>은 현대 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 작품 안에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 살피고, 현대 미술 작품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론 뮤익, <침대에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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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탄 - 10점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문학동네


고목탄(枯木灘)
나카가미 겐지(지음), 허호(옮김), 문학동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이복동생 히데오를 돌로 내리쳐 죽이고 감옥에서 살다가 나온 아키유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카가미 겐지는 알고 있을까? 하긴 알든 모르든 내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런 류의 소설은 좋지 않다. 누군가의 비밀스럽고 슬프고 고통스런 삶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런 소설은, 일본의 신화에서 기인한 스토리라는 평자의 의견을 무색하게 만들며, 결국 뒤죽박죽인 가계도에서 벌어지기 마련인 갑작스런 파국을 소설의 말미에 배치함으로써 희망이란 피묻은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강요하듯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싫다. 그들은 엉망인 가계(家系)도 속에서 성실하게 살아간다. 서로의 비밀을 숨겨주며, 내일을 향해 살아간다. 종종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 몇 명이 죽기도 하지만, 내일 해는 떠오를 것이며, 그들은 그 해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우리가 개척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세상 속의 인생은 심술궂은 파멸의 여신이 되어 종종 우리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의 소문이 되기도 하고 진실한 사랑의 훼방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신은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가 된 채 서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피해자가 되었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내일의 해를 기다릴 뿐이다.

나카가미 겐지가 강요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일부로 그냥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소설이 잔인하면서도 슬픈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결국은 모든 이가 공범인 세상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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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위스망스 단편선, 손경애 옮김, 문학과 지성사


현대의 압도적인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반-자본주의 예술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토하며, 안정적 삶을 희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19세기에 반-자본주의 사상과 예술 활동이 성행했던 것일까? 그리고 현재와 19세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조리스 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세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품었다.

자연주의 양식에 속하는 위스망스의 세 단편,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마는 개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등짐’의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개인을 등장시키고(반-국가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부그랑 씨의 퇴직’에서는 직장 생활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중년 신사의 강박적 경향을, ‘궁지’에서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돈에 대한 탐욕스럽고 부도덕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등짐’을 제외한 두 단편 - ‘부그랑 씨의 퇴직’과 ‘궁지’ - 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에서 위스망스가 보았던 과거 어떤 세계의 문제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창작활동에 매진해야 할 예술가들마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을 들게 만든다.

현대 독자가 빠져들 만큼의 소설적 재미는 없지만, 19세기 후반의 소설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알기에는 매우 유용한 소설이 될 수 있다.

부연 설명

1. 안타까움에 대하여 - 현대 소설의 양식과 19세기 자연주의 소설 양식과의 차이로 인해,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공격을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현대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성과 알레고리, 상징들로 그 공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의 자아는 그 고통의 실체를 정면 응시를 하기 보다는 비켜보려고 하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봄으로써 그 고통을 방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현대 소설들이 가지는 반역사성은 이러한 도피적 성향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19세기 자연주의에 대하여 -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은 19세기 자연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험실에서 가상의 실험 조건을 만들고 어떤 인과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처럼, 자연주의 소설 또한 등장인물과 소설 속 환경 속의 어떤 인과 관계를 도출시키고자 한다. ‘궁지’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확실히 소설적 재미는 없으나, 어떤 시대, 어떤 체제에 대한 공격 방식으로는 매우 탁월한 양식이다.



궁지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

Comment +3

  • dean 2008.12.31 22:28 신고

    우연히 들렀는데 좋은 글이 너무 많습니다.
    위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부분은 읽는데 소름이 돋네요.

    • 감사합니다. ^^;; 벌써 읽은 지 1년 반이나 지났네요. 위스망스의 다른 소설 한 권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의외로 오래된 소설이 재미있습니다. : )

  • 2009.01.02 20:43

    비밀댓글입니다


예술의 시작에 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 의견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시작되었건 그것은 현대처럼 분화되어진 어떤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방'이면서 '마술'이고 '노동'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용한 이 단어들, 모방, 마술, 노동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언어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예술의 시작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추측이며 그저 그랬을 것이다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아래의 내용도 그러하다.

구석기 시대의 벽화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동굴 속에, 요즘 사람들이 자세를 잡기도 힘든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구석기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구석기인들의 세계는 현재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동물적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때의 인류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자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졌다고 친다면, 앞으로 사슴이 지나갈 때마다 감나무에 감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전혀 무관한 것이지만, 이 때의 인류에게는 연관될 수 있었다.

즉 우리의 지성이 생겨나지 않은 상태이고 인류의 모든 것이 자연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감각 기관이 지각한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가 도래하기 전까지 예술의 역사 속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감각에 충실한 양식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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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1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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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2 > 라스코 동굴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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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3 > 브라상퓌의 여인 La Dame de Brassempouy



하지만 신석기 시대로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갑자기 추상적인 형태의 벽화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예술의 역사 속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극적 단절이 이 시기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은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혁명적’이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신석기농업혁명’이라고 말한다. 드디어 인류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수렵활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 혁명 속에는 세계관의 변화도 포함되어있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 자연과 구별되지 않던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대립된 자로서의 인간, 자연을 이용하고 응용하는 자로서의 인간으로 변화를 의미하였다.

정확하게 이 때부터 인간은 질서를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자연에게 적용된 그 어떤 것이다. 이 때 등장하게 되는 기하학적 양식은 자연의 어떤 특정 대상을 인간이 지각하고 인식하는 어떤 표상(representation)으로 옮긴 것이다. 즉 감각 지각에 충실한 표현이 아니라 감각 지각으로 받아들였으나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상징이나 기호로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집트 시대의 양식은 바로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예술 양식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이집트 시대의 예술 양식 전체를 물들이는 것은 ‘정면성의 원리’이다. 어느 미술책에서 이 정면성의 원리를 적용된 그림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놓은 것이 있어 인용해본다.

- 얼굴은 언제나 측면의 모습으로 표현하되, 정면에서 본 한 쪽 눈만 보이도록 한다.
- 어깨와 몸통은 반드시 정면을 향하도록 한다. 여성의 몸통은 한쪽 가슴만 측면으로 보이도록 한다.
- 팔과 다리는 반드시 수족이 늘어진 자세로 측면의 모습으로 표현해야 한다.
- 서 있는 인물들은 언제나 두 발을 땅 위에 확실하게 딛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이 정면성이 동물, 노동자, 음악가, 무용가 등 세속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인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정면성은 이집트 예술의 위계적 성격을 드러내는 양식 상 특징인 것이다. 이 정면성의 원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에서 표현된 위계적 성격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그 인물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양식 상의 특징인 것이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는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다. 비잔틴의 모자이크 속에서 예수는 황금빛 모자이크 속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그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양식적 특징으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네스크 건물의 부조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부조는 크게 표현하면서 다른 인물들은 작게 표현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된 예이다. 즉 위계적 질서를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내기 위해 취해지는 예술 양식 상의 특징들은 대부분 이러한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집트의 예술 양식의 특징은 내세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영원을 향한 미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당시 이집트인의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 그 때 이집트인의 삶은 ‘변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마다 나일강은 범람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때 이집트인은 현세의 삶에 대한 갈구나 염원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지나 있는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을 염원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단 한 번 이집트의 예술 양식에 변화가 보였는데, 이는 아케나톤왕이 수도를 옮기고 유일신 체제로 바꾸었을 때뿐이었다. 이 때를 하우저는 이집트의 인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만큼 혁명적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기하학주의가 주류였던 이집트 예술 양식 속에서 아주 짧은 시기였을 뿐이다.

이러한 이집트 예술 양식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 무렵 융성하였던 크레타 문명의 예술 양식은 이집트와는 사뭇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기하학주의와 달리 크레타는 상대적으로 자연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집트가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정착 생활이었던 반해 크레타 문명이 해상 교역과 약탈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었고 정지된 삶을 살았던 이집트인들과 달리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크레타인들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즉 동시대의 예술 양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연 환경에 따라 그 예술 양식은 틀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한 시대의 예술 양식이 예술을 창조하는 한 개인이나 집단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치, 종교, 자연 환경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크레타의 예술을 보면서 크레타인들의 ‘예술의욕(Kunstwollen)’을 어떤 것이었나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타인들의 세계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한 때 크레타의 귀족들은 번영을 누렸으며 그들의 예술 양식이 현재까지 벽화나 여러 유물로 남아 전하는 것이다. 즉 귀족이라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현세의 삶을 살았던 이집트의 귀족과 달리 크레타의 귀족들은 쉴 새 없이 바다로 나가 교역을 하며 또는 다른 지방에서 약탈해온 여러 재화들 속에서 현세의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 여겼을 것이며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이 크레타의 예술 양식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예술은 이집트와 크레타 사이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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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 4 > Rock painting from Western New South Wales, at Gundabooka. Aproximately 5,000 years 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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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박동혁 옮김, 하서. 1990)
* 1856년, 플로베르가 35세 되던 해 나옴.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틀렸다! 일부러 애쓰며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떤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 278쪽

에마가 죽고 샤를이 죽고 그들의 어린 딸이 방직 공장에 가게 되었다는 짤막한 상황 설명으로 소설이 끝나게 되었을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에마는 몇 번의 밀애 속에서 사랑을 경험한 것일까? 그러한 에마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에마는 백 오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무심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온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근사한 말투와 매너로 유혹하는 사내에게 입술을 허락하며 깊은 눈빛과 재력을 겸비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녀들.

근대의 사실주의란, 초창기 사진처럼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폭로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치기도 하며 주인공의 방황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하고 그/그녀가 그 모험을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라거나 아예 그런 헛된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와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렸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에마는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 44쪽에서 45쪽

소설 초반에 읽게 되는 이 문장 앞에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의 에마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초창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문화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근대의 비극적인 구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역, 심설당), 29쪽

근대의 풍습이란,

“저기 탄 사람들은 내일이면 파리에 닿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음을 가로질러 밤하늘의 별이 총총한 국도를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거리까지 가면 반드시 그녀의 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릿한 장소에 부딪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하나 샀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를 더듬으며 그 안을 온통 헤매 다녔다.
- 64쪽

우리의 에마처럼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랑의 모험에 미련 없이 육체와 영혼을 내맡기는 것.

에마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지붕의 낙수 홈통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빗물이 집의 발코니 위에도 호수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에마는 벽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02쪽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그의 모습을 혼자서 남모르게 그려보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기쁨이 충만 되었다. 에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앞에 있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멍한 기분만이 남아서 드디어는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 109쪽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 그리고 그의 부인 에마 보바리. 그리고 에마 보바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 레옹. 얼마 뒤 레옹은 마을을 떠나고 로돌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로돌프에게 연애란 하나의 취미, 취미의 대상으로서의 에마 보바리.

아. 너무 가슴아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보자. “호감은 열정으로, 열정을 종속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일시적으로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책임 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 <사로잡힌 영혼> 중에서 )

이렇게 순수하고도 순진한 문학 평론가가 어디에 있을까. 샤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바람난 에마를 너무 사랑했던 샤를. 끝내 패배하게 되는 모험으로 가득찬 시대에 샤를은 에마를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험을 하지 않았는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도 모험의 회오리 속에 말려든 것일까.

근대란 사랑이라는 행복하게 하는 아픔마저도 절망으로, 끝없는 혐오로 만드는 시대다. 우리의 에마는 끝없이 사랑을 노래하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쓰라린 사랑의 아픔,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의 상실뿐이었다. 사랑의 대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샤를에게

“네, 네... ... 그 말씀대로예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에마는 샤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기분 좋은 감촉이 샤를의 슬픔을 한층 더하게 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애정을 이토록 나타내 주는 아내를 지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절망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처치를 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몰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 312쪽

과연 에마에게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에마를 사랑하는 샤를. 에마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샤를, 왜 샤를은 에마를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헛된 질문을 하지는 말자. 모든 사랑은 모험이며 불륜이다. 근대의 사랑이란 끝없는 절벽을 향해 가는 자기 파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사랑을 왜 하는 것일까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사랑이 아름답다니 행복하다니 하는 10세기쯤에나 나올만한 말로 순진한 대부분의 독자들을 현혹하지도 말자.

그러나 이러한 환멸은 곧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 에마는 전보다 더 강한 정염에 불타고, 전보다 더 레옹을 탐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르셋 끈을 마구 잡아당겼다. 끈은 미끄러져 나가는 독사처럼 그녀의 허리께에서 소리를 냈다. 맨발의 발끝으로 문이 잘 잠겨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입은 옷을 몽땅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그 이마,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입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필사적으로 껴안은 그 팔에는 뭔가 막연하지만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 277쪽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모험을 떠났던 이들은 가슴에 절망과 파멸, 또는 허무를 안고 돌아와 우리 곁에서 잠든다. 20세기 후반 이후를 물들이는 건 이들이 남기고 간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몇몇의 진지한 이들은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몇 백 년 전부터 시작된 그 모험의 존재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건 한때 위대하다고 칭송받았던 모험의 유산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어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된 거야’ 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는 행위들인 것이다. 꼭 샤를이 죽은 에마가 숨겨왔던 사랑의 유산들을 보고 절망하고 끝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몇몇 진지한 이들도 근대의 유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 샤를이 끝내 에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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