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Art History - a very short introduction

Dana Arnold, Oxford, 2004 




그러고 보니, 원서를 통독한 것은 참 오랜만이다. 그만큼 읽기 쉬운 평이한 문장으로 되어있기도 하고 책 제목 그대로 introduction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거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미술사(art history)를 조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와 예술 비평에 대한 비교나 예술작품감정(Connoisseurship)에 대한 언급도 있으며, 신미술사(New art history)나 철학사의 영역에서 바라보는 예술작품, 또는 예술사도 포함시키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설명들이 명확하고 단순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데리다의 <<The Truth of Painting>>를 설명하기도 하고 도상해석학이 등장하기도 한다. 약 100페이지 남짓한 짧은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Dana Arnold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What is art history? 

Writing art history 

Presenting about art history

Reading art

Looking art 


이 책의 목적은 명확하다. 


This book is intended as an introduction to the issues and debates that make up the discipline of art history and that arise from art history's central concerns - identifying, categorizing, interpreting, describing, and thinking about works of art. (이 책은 미술사라는 학문을 구성하는 동시에, 미술사의 중점 관심사들 - 예술작품들에 대해 정의하고, 분류하며, 해석하고 묘사하고 사유하는 것 - 로부터 생겨난  쟁점들과 논쟁들을 소개하기 위해 씌여졌다)


하지만 예술작품만 보자면, 어쩌면 이 책은 필요없을 지도 모르겠다. 


This kind of visual material can have an autonomous existence - we can enjoy looking at it for its own sake, independent of any knowledge of its context, although of course viewers from different time periods or cultures may see the same object in contrasting ways. (이러한 종류의 시각적 소재들은 자율적인 존재를 가질 수 있다 - 우리는 그것들의 콘텍스트(배경)에 대한 어떤 지식들에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 다른 시대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람자가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반대의 방향의 보게 될 지라도, 작품 그 자체로 보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뒤따르게 되는 질문들, 누가 만들었지? 이 작품의 주제는? 언제 만들어진 걸까? 등에 대한 일련의 활동이 모여 예술사라는 학문이 된 것일지도.  


미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다수의 도판이 나오며 미술사의, 최신 논쟁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번역된 여타 책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신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아래 글은 꽤 의미심장해 옮겨본다. 


The Dinner Party

Judy Chicago

1979, 브룩클린 미술관 소장 

https://www.brooklynmuseum.org/eascfa/dinner_party/home (The Dinner Party에 대한 다양하고 자세한 자료를 읽을 수 있다) 


My idea for The Dinner Party grew out of research into women's history that I had begun at the end of the 1960s ... the prevailing attitude towards women's history can be best summed up by the following story. While an undergraduate at UCLA, I took a course titled the Intellectual History of Europe. The professor, a respected historian, promised that a the last class he would discuss women's contributions to Western thought. I waited eagerly all semester, and at the final meeting, the instructor strode in and announced: 'Women's contributions to European intellectual history: They made none.'

I was devastated by his judgement, and when later my studies demonstrated that my professor's assessment did not stand up to intellectual scrutiny, I became convinced that the idea that women had no history - and the companion belief that there had never been any great women artists - was simply a prejudice elevated to intellectual dogma. I suspected that many people accepted these notions primarily because they had never been exposed to a different perspective.

As I began to uncover what turned out to be a treasure trove of information about women's history. I became both empowered and inspired. My intense interest in sharing these discoveries through my art led me to wonder whether visual images might play a role in changing the prevailing views regarding women and women's history. 

- Judy Chicago, The Dinner Party (1996) pp.3-4 (25쪽 - 26쪽) 




* Art History를 미술사로 옮기고 art work를 예술작품으로 옮겼는데, 이는 미술작품이라고 하면 painting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였다. 






Comment +0





그림을 본다는 것 Looking at pictures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지음), 엄미정(옮김), 엑스오북스, 2012년 (원저는 1972년에 출판)






나는 그림이 주는 기쁨을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려면 그림에 관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 7쪽 



그림을 즐기기 위해선 배워야 한다고 케네스 클라크는 말한다. 우리가 뭔가 배울 땐, 성적 때문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이다. 배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비밀을 조금 더 알게 될 것이고,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찰 지도 모른다. 아마 중세를 지나 근대를 향해 가던 서유럽인들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랬을 것이다.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은 어두운 세계를 환하게 밝히는 것과 같다. 



우선 나는 그림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본다. 그림을 보기 시작한 뒤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지닌 일반적 인상을 알아차리게 된다. 일반적 인상이란 색조와 부분,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좌우된다. 일반적 인상이 주는 충격은 즉각적이다. (...) 그러므로 최초의 충격 다음에는 그림의 부분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색채는 조화로운지, 소묘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는지, 세부를 살펴보고 즐기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가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 8쪽 




하지만 즐기기 위해 배운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낯선 건, 그만큼 배운다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아온 탓일 게다. 의외로 미술에 대한 책은 잘 읽히지 않고, 잘 팔리지도 않는다. 갤러리가 많긴 하지만, 일반인들의 방문은 뜸하고, 전시를 열지만, 작품이 팔리지 않고 팔리지 않으니, 작품 가격은 비싸진다. 거기다 위작 논란까지. 그만큼 미술에 대한 진입 장벽은 높기만 하다. 그리고 현대 미술이든 고전 미술이든 다 어렵다고 여긴다. 심지어 현대 미술은 '난해한'이라는 수식어가 그냥 자연스럽게 붙어다닌다.


실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도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서구에선 중고등학생들이 읽는 책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선 대학생들도 어렵다고 하니, 한국 사람들의 책 읽기 수준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밖에.


이런 면에서 이 책도 어려울 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네스 클라크는 읽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것의 의미를 새삼 물으며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알아두어야만 할 예술가들과 대표작품을 다룬다. 초심자에겐 그림 보는 재미를, 이미 서양미술의 역사에 대해 이해를 갖진 사람들에겐 케네스 클라크만이 알려줄 수 있는 통찰이 흥미로울 것이다. 


책에선 더 많은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으나, 여기서는 3명의 작가들에 대한 케네스 클라크의 생각을 옮겨본다. 



엘 그레코El Greco 



16세기 후반 최고의 작가는 단연코 엘 그레코다. 하지만 그는 수 백년 동안 잊혀져 있던 작가였다. 근대 시대의 매너리즘(마니에리스모) 양식에 대한 경멸은 16세기 후반 작가들의 무시와 천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20세기 초 엘 그레코는 극적으로 부활한다. 


그럼에도 엘 그레코를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간주했던 1920년대의 비평가들은 옳았다. 첫번째는 엘 그레코가 비사실적인 두 양식, 곧 비잔틴과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거치며 화가로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형이상학적 사고 방식을 타고난 덕분에 고전주의적 전통의 주된 전제를 거부한 최초의 유럽화가였기 때문이다. 엘 그레코는 화면의 깊이보다 표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 151쪽 



엘 그레코,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The Disrobing of Christ)

Oil on canvas, Height: 285 cm (112.2 in). Width: 173 cm (68.1 in). 

1577 ~ 1579, 톨레도 대성당 



표면을 중시했다는 표현과 함께 엘 그레코가 "미켈란젤로는 훌륭하지만 그림 그리는 법을 모른다"라고 말했다는 건 참 흥미롭다. 깊이 대신 표면을 중시할 때, 고전적 원근법적 세계는 흔들린다. 중심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균등해진다. 확고한 질서 대신 흔들리는 마음이 전면에 부상한다. 그래서 엘 그레코의 성상화들이 우리 마음을 울리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엘 그레코는 알고 있었다.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





장 앙트완 와토(Jean-Antoine Watteau), 제르생의 간판(The Shop Sign of Gersaint)

Oil on canvas, 163 cm × 308 cm (64 in × 121 in)

1720-1, Charlottenburg Palace, Berlin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L%27Enseigne_de_Gersaint 



신고전주의가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걸출한 천재가 만든 양식이라고 한다면, 회화에서의 로코코 양식은 장 앙트완 와토의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와토의 이미저리는 그가 처음으로 전시했던 그림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향후 10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심지어 와토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에 태어난 후배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 - 1806)는 여전히 와토의 정원, 말하자면 그의 이미저리를 활용했다. - 127쪽 



와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우울해진다. 절반은 포기하고, 절반은 포기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노는 것같다고 할까. 그 애상은 로코코 시대 전반을 물들였다. 한 시대(토지 귀족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부르조아지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계몽주의와 로코코는 같은 시대의 양식이다. '제르생의 간판'은 와토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새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위키피디아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작품의 디테일을 확인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




Eugène Delacroix,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 

oil on canvas, 81 × 99 cm (31.9 × 39 in)

루브르 박물관 

이미지출처: https://fr.wikipedia.org/wiki/Entr%C3%A9e_des_Crois%C3%A9s_%C3%A0_Constantinople 




오히려 그는 예술은 상상력을 비추어 사건을 재창조하므로 시의 특질을 띤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아마도 매우 많은 이류화가들을 미혹했던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BC 65 ~ BC 8)의 조언, '시 같은 그림 ut pictura poesis'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마지막 유럽 화가였을 것이다. - 93쪽 



H.W. 잰슨(서양미술사가)이었던가, 낭만적 고전주의와 고전적 낭만주의라고. 다비드가 낭만적이고 들라크루아가 고전적이라고. 어쩌면 케네스 클라크의 견해에 힘입어, 들라크루아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고전주의자일 지도 모르겠다. 낭만주의였으나, 그의 마음은 확고하게 고전적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스토리를 전달하였으며, 의미를 담아냈다. 그런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던 위대한 예술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그 이후 나온 아카데미 화가들, 제롬이나 부게로 같은 이들은 무식하게(성실하게) 그림만 그린 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대가 어떻게 변하는지 몰랐으며, 그 변화를 거부했다.  











Comment +0


니나 카렐Nina Canell 개인전 <새틴 이온Satin Ions>

2015년 5월 29일 - 8월 9일 

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 





전시 팸플릿을 읽어야만 이해가 되는 예술 작품은 어떻게 받아야 들여야 할까. 그리고 이해만 될 뿐이라면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작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니나 카렐 개인전인 그런 종류의 전시였다. 마치 '현대 미술의 제 무덤 파기 프로젝트'로 여겨질 정도라고 할까. 


요점만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어떤 심리적 환기'를 가지고 와야 한다. 칸트는 이를 '쾌', '불쾌'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니나 카렐 작품 앞에서 멈칫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연구이긴 하지만, 그래서? 연구는 실험실에서 하는 것이다. 마치 외계인의 언어처럼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진 여러 작품들을 보면서 난감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이번 전시 <새틴 이온>에서는 오늘날의 무선 인터넷과 같이 와이어리스의 세계의 기반이 되는 지하 매설 케이블에 관심을 두고, 서울 근교에서 수집한 재활용 케이블 덩어리들로 전시의 마지막 챕터를 구성한다. 오늘날 수많은 디지털 정보는 선이 없는(wireless) 상태를 지향하지만, 이는 사실 지하의 보다 많은 양의 케이블 증가라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만들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관심에서 서울 근교의 케이블 재활용센터를 방문하여 녹아 내려 형태가 변화한 상태와 향후를 위해 재탄생되는 미래적 시간을 함의한 상태 사이에 놓여져 있는 케이블 덩어리들을 수집한다. 케이블의 심지가 빠지고 껍질만 남은 피복 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모양이 변형된 이 덩어리들은 수십 미터의 물리적인 길이가 '정보'의 송수신이라는 비물질적 거리를 드러내는 덩어리로 변모한 역설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 전시 팸플릿 중에서  




추상화된 디지털 정보는 물질적인 케이블에 의존한다? 그래서?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 혹은 디지털과 케이블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는 언어와 책의 관계와 같다. 말과 혀의 관계다. 즉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은 보이지는 것들을 매개로 한다. 표현되지 못한 우리의 생각이 우리 육체 속에 담겨져 있듯이. 마치 뭔가 대단한 연구인 양 포장하고 있지만, 늘 있던 어떤 물음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니나 카넬은 물체의 성질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물성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의식한다. 서로 다른 재료와 물질이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작가의 조각은 이러한 인간의 시각에는 쉽게 포착되지 않지만 공간 내에 공존하는 비물질적인 영역의 항상성(consistency)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 전시 팸플릿 중에서  



시각적으로도 흥미롭지 못했고 주제의식도 또한 문제적이지 않았다. 더구나 작품들이 보여주는 미적 완결성은 형편없었다. 재미있지도 않았다. 대단한 테크놀러지가 담긴 것도 아니고 전자파 구덩이로 만든 것도 아니다. 솔직히 이 전시를 위해 내가 낸 세금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너무 안타까워서 전시 설명을 위해 서 있던 도슨트(혹은 큐레이터였는지도)에게 물어보았다. 작품이 마음에 드냐고? 아. 그녀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현대 미술이 암울해지는 순간이다. 지금도 몇몇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현대 미술의 무덤을 파고 있는 중이다. 아주 열심히. 그리고 일군의 평론가들도 여기에 동참에 일반 대중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단어를 사용해가며 깊숙이 깊숙이 땅을 파고 있을 터이다. 








Comment +0





'싹' 그리고 '정물화: 살아있는 것의 소고' - 김주연 사진전

2016.4.7 - 5.3, 트렁크갤러리, 서울 





트렁크갤러리도 참 오랜만이었다. 설치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사진 작품으로 만났다. 2008년의 쿤스트독이었나, 아니면 다른 전시에서였나, 김주연의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선명한 작품 스타일로 한 번 보면 기억하게 된다. 그 동안 다양한 공간/물건에 식물을 키웠는데, 이번엔 옷이다. 



김주연, 존재의 가벼움I -2,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 144×108cm, 2014



시간은 현대 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다. 김주연은 그 위로 생명의 시작과 끝은 넣으며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공간을 탈세속화시킨다. 세속에서 일정 기능을 수행하는 어떤 것에 씨앗을 심음으로서, 그것이 가지고 있던 세속의 기능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마치 버려진 물건처럼, 버려졌다가 기적처럼 식물에 의해 전혀 다른 기능과 목적으로 되살아 나는 듯하다. 


그런데 이건 무엇을 지향하는 걸까? 여기에선 고객을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자연 속에 버려지는 모든 것들 위로는 무조건 어떤 것이 자라기 때문이다. 그게 식물이든 곰팡이든.  결국 작품들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깊은 산 속에서 마주할 때와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것이 다를 뿐. 

  


김주연, 정물화살아있는 것에 대한 소고I, 사진, 90×60cm



갤러리에서 인류 문명을 부정하는 작품을 만나, 우리와 무관한(혹은 거부하는) 자연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의문과 우려가 될 수 있겠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들 대부분, 그것을 위치한 콘텍스트를 상실하는 순간 전혀 다른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김주연의 작품들은 자라나는 식물 속에서 우리를 다시 묻는 일종의 질문이며 반성이 된다.   




김주연, Metamorphosis, 아시바구조물, 신문지 약 18000부(3톤), 씨앗식물, 가변설치, 2008









Comment +0



한동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날 밤 꿈 속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여기며, 며칠 지내다가, '아, 그건 꿈이었지'하는 식이었다. 다행히 그건 몇 달 가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단지 더 쓸쓸해진 것 뿐. 


대한민국의 회사원들이, ... 아니 지난 수십년 간 IT 기술에 기반한 급격한 정보화,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쟁의 격화로 인해 OECD 대부분의 국가 지식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심해졌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해졌다. 나도 나이가 들고 직무가 늘수록 그런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있다.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출근길 카페에 들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사왔는데, 마실수록 속이 쓰려오는 것이 내 현재를 말해주는 것 같기만 하다. 


잠시의 위안을 얻기 위해 사진을 뒤진다. 그리고 ... 레티티아 몰레아르 Laetitia Molenaar. 에드워드 호퍼의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가다. 



충무로 사진 축제 때 극동빌딩에 전시되었던 모습. 


아래는 실제 작품 사진. 

Second Story Sunlight, 2012 © Laetitia Molenaar 

http://lejournaldelaphotographie.com/entries/9529/laetitia-molenaar-here-comes-the-sun 




Summer Evening, 2012 © Laetitia Molenaar



저 작품 사진 속에 내가 들어간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세계다. 19세기말 유미주의자들의 세계. 삶은 예술을 닮아가다가 예술 속에 묻힌다. 보드리야르는 그것을 시뮬라크르라고 말했지. ~... 마치 쓸쓸함 속에 우리가 묻혀 침묵 속에 살아가듯. 


 






Comment +0

사용자 삽입 이미지



Edward Hopper
Summer Interior
1909, Oil on canvas, 24 x 29 inche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New York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따갑고 건조한 여름 햇살이 방 한 가운데로 내리꽂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울 정신적 의지는 지난 밤에 사라져버렸다. 꿈일 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상이거나. 만일의 경우 그것은 최악의 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며 앞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다. 너무 가지런한 실내가 도리어 비현실적이다.

뜨거운 여름날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은 비현실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에게 오래 전부터 빈혈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잠시 후 세찬 소나기가 달구어진 대지를 식힐 것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두렵다. 이 순간이 지나는 것이.

교묘하게 환상과 현실 사이에 육체를 걸치고 있는 그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딱딱한 유화 물감에 자신의 영혼을 붙이고 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어느 공간 속으로 들어가, 멈추어 버렸다. 어쩌면 시간의 틈새로 들어가,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 영원히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바람직한 삶이 될 지도 모르겠다. 




Comment +0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지만, 연주회를 자주 보러 가는 편은 아니다. 유명 연주자의 공연 티켓값은 직장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비싸고, 몇 번 갔던 국내 연주자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수시로 실수를 해대는 그 연주회에서 관객들은 연신 '앵콜'을 외쳤다. ㅜㅜ. 논리적으로 도대체 납득할 수 없었고 그 이후론 발을 딱 끊었다. 

종종 예술의 세계에서는 혹독한 비판만이 살 길을 제시하는 법이다. 그건 금전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이며, 일종의 신념이고 태도이다. 정치적인 것과도 무관하며 도덕적인 것과도 무관한 것이다. 마치 현실 세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세계라고 할까.

하지만 한국에선 혹독한 비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문학 작품의 완성도를 논하지 않고 그 누구도  연주의 형편없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마치 국회의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여 국민을 왕따시키듯이 한국의 작가들과 예술가들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도 예술 작품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우습게도 그건 예술 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 창작자의 돈 문제이거나 정치적 성향, 혹은 때때로 여자/남자 관계 문제다. (정말이지, 너무 끔찍해서 견딜 수 없는 ... 만일 그래야 한다면, 우리는 교과서에서 무수한 철학자, 작가, 예술가들을 지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내가 전문 창작가의 길로 가지 않은 사실은! (그 길로 갔다면 나도 그들만의 리그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초반에는 심한 왕따를 좀 당하다가 견디지 못한 채 리그 포함 수순을 밟았겠지) 

최근 서울시향과 정명훈이 논란의 중심에 올라갔던 모양이다(바쁜 직장인이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있나). 나는 그 사실을 작곡가 진은숙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만 적은 그 글을 읽고, 도대체 교과서적인 내용을 읽으면서 왜 내가 감동을 받고 있나 하는 생각에, 한국이라는 사회가 슬퍼졌다. 




(첨부한 파일은 http://curtaincall.tistory.com/106 에서 가지고 온 파일입니다. 다른 곳에서 진은숙 작곡가의 글을 읽었는데, 그 글은 발췌문이었군요. 의외로 분량이 긴 장문의 글입니다.)

 

Comment +0


중력중독자의 날개 Wings of Gravity Addict
- 김이경 전, 한전아트갤러리, 2012.1.23 - 2.3


첫 전시를 한다는 건 참 고단하면서도 가슴 떨리고, 기대되면서도 쓸쓸한 일이다. 그건 누군가의 시선 아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형편없는 취향에, 보잘 것 없는 언어에, 혹은 금전적 이득과는 무관한 시기와 질투 속에 휩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긴 도리어 지독한 찬사가 작가의 앞길을 망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젊은 작가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란 '작품이 좋네요'이거나 '계속 작업하세요'다. 이 두 말이 가지는, 인생에서의 가지는 위험성과 중독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첫 전시를 한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며 근사하고 아름다운 무모한 출발이다.

한전아트갤러리는 참으로 외진 곳에 있다. 양재역이라는 번화한 사거리 옆,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는, 시설 좋은 갤러리라는 점이지만, 미술 애호가들이 동선을 꾸미기엔 외진 곳이다. 그리고 특별한 기획전(대중에게 잘 알려진 국내 외 작가의 전시나 흥행성을 고려한 대형 기획 전시 등)이 자주(?) 열리지 않는 곳이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작가들에게 다양한 지원을 해주면서 전시 공간을 주는 갤러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일이다. (공기업 한국전력에서 운영하고 있어, 작가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느 겨울날 오후, 거리는 한산했다. 전시일정도 참 얄궂다. 설 연휴가 끼인 1월 말이라니.




그러나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면, 금세 눈은 환해지고 즐거워진다.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 뭔지 아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작품을 보면서 뭔가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전시된 작품을 보며서 의미를 찾아야 된다는 강박증은, 마치 더운 여름날 땡볕 밑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가서는, '나무 그늘은 말이야, 나에게 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여름 날의 나무 그늘은 그냥 그늘이고 그 때 마침 나를 쉬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단 조건이 하나 붙는데, 그건 나무 그늘 밑에 가기 전 땡볕에서 땀을 흘려야 하는 것.





작품들은 한결같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러나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실은 우리 현대인들 모두가 저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까 말이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어쨋든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니, 아직까지 실패는 아니지 않은가. 실은 이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직장에서 짤리더라도, 누군가의 버림을 받더라도, 어쨋든 다시 그 비슷한 것에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거나, 적어도 심장은 '대롱대롱' 그 호흡을 이어갈테니, 너무 절망하지 말자. 




매달린다는 건 어떤 사이에 위치한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작품들에는 한결같이 날개가 있고 그 사이에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날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날개를 움직이지 않는다. 

  




날개가 없거나 머리와 몸이 떨어져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긴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은데, 몸이, 마음이, 시대나 환경이 따라주질 못해 오르지 못하는 것이 한 두 번인가. 그냥 그럴 뿐이다.

작품은 말 없이 우리 처지를 보여주고 우리는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본다.




사진이 좋지 않으니, 실제 작품를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이번 주말 한전아트갤러리의 한 전시는 우리들의 숨겨진 예술 욕구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Comment +0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과연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은 맨 먼저 무엇을 할까?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인간은 그 새로운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설명한다. 그러다가 그 설명하기에서 막히면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만들어 붙인다. 즉 이 세상은 우리의 언어와 같이 보이고 표현되고 구성되어 있다. 이 세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한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옮긴다. 딱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만큼만 옮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다. 종종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가령 누군가가 오백년 전에 '아파트'와 같은 주거 시설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 때는 '아파트'라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에 설명을 붙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표현할 수 있는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단어나 개념, 표현의 창시는 주로 예술가의 몫이다. 그들의 주도로 이 세상은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진다. 또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푸른 색도 있고 푸르딩딩한 색도, 푸르스름한 색도 있지만, 이런 단어가 없는 나라에서는 없는 색이다. 이와 반대로 그 나라에는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는 것이 있다.
 
하나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 말에서 다른 말로의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다른 문화를, 다른 삶의 태도를,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 그리고 다르게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심지어 동물 울음소리도 다르게 듣고 다르게 표현하지 않는가.

각각의 언어마다 그 언어에 대응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는 다른 나라와 겹치지 않는 특별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 영역은 우리 인류가 확장할 수 있었던 세계 인식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큼만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간다. 

고유한 언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언어를 보존해야 하고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와서 그 언어로 새롭고 창조적인 언어적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단일 언어로 향해 가는 듯 싶다. 그러면서 우리 인류는 전체적으로 한 발 한 발 뒤로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 우리는 한 때 알고 만지고 느낄 수 있던, 경험했던 어떤 세계를, 어떤 영역을 잃어버리고 있다. 

딸기님의 <기후 변화로 언어가 사라진다>는 그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그런 예는 역사적으로 무수하게 많았다.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는 <언어의 죽음>이 있다. 이 외에 언어의 생성, 소멸에 대한 책들은 여러 권 나와있다.


언어의 죽음
데이비드 크리스털 저/권루시안

Comment +2

  • 언어의 죽음 쌓아두고 못 보고 있어요... ㅠ.ㅠ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인가, 그 책도 아주 좋아요.

    • <사라져가는 목소리들>도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저도 쌓여있는 책들.. ㅜㅜ.. ...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이미 절판되었네요. 쩝... 거참, 절판된 책 reprint하는 서비스나 ebook 재판매 서비스가 필요할 때입니다.

보르헤스 씨의 정원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
현대 사진과 레디메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