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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신뢰할 만하며 단테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어떻게 근대 문학의 시초가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예증한다. 단테 문학의 변화와 성장은 이 책의 중심 테마이며, <<신곡>>을 향해간다. 



인간에 대한 단테의 미메시스는 고전 고대의 미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미메시스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단테는 고전 고대처럼 인간을 아득히 떨어져 있는 신화적 영웅으로 보지도 않았고, 중세 시대처럼 인간의 윤리적 타입을 추상적으로 혹은 일화적으로 재현하지도 않았다. 단테는 살아있는 역사적 리얼리티 속의 인간, 단일성과 전체성을 간직한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재현했다. 

- 343쪽 



사실적인 표현과 문장이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실제 문학 작품들을 예시하여 중세 후반기의 문학과 단테가 이룬 문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딱딱하고 어색했던 중세 말의 표현들이 어떻게 자연주의적으로, 감각적이며 세속적인 풍성함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이다. 



조반니 피사로 이래 화가들은 세상에 대해 날카로운 지각을 개발해왔다. 그래서 단테와 그 시대의 위대한 화가인 조토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발견된다. 두 사람에게 사건은 자급자족적 리얼리티로 다시 태어난다. 두 사람은 고전적 감각을 지녔고 리드미컬한 구조를 구현한다. 또 이 세상의 감각적 구체성 속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을 파악하는 방법도 상당히 유사하다. 

- 195쪽 




하지만 단테 문학 이상으로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플로티노스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몇 페이지에 걸친 플로티노스에 대한 설명에서 아우어바흐는 중세 초기 미메시스 예술의 몰락을 플로티노스를 통해 설명한다. 실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이해는 나로서도 처음 읽는다. 그만큼 중세 초기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고 플로티노스 철학에 대한 번역이나 소개는 최근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중세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에 대한 무관심, 또는 경멸이 종교적인 이유에서의 엄숙주의라고 여겼던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가져온 여러 요소들을 융합하여 그 자신의 유출주의를 만들어냈고, 신비하면서도 종합적인 명상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영(Spirit)이 참여하는 지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은 내적 원형(이데아)의 상태에서만 순수하다고 보았고 물질 속에서는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 없는 질료는 플라톤의 비존재(non-being)와 동일시되어, 완전한 존재를 갖춘 이데아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하여 질료(물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단순한 저항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물질은 그 다양성과 분할 가능성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악(惡)이 되었다. 영이 물질세계로 유출되기는 하지만, 다양하고 구체적인 물질은 피지스(physis: 이것은 개체화의 시작[principium individuationis]이 되는데 곧 저급한 영혼을 의미함)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악하고 불순한 것이 된다. 따라서 미메시스 예술은 경험적 리얼리티와 접촉하지 못하고 순수한 에우레시스(euresis: 내적 형상의 복사물)가 된다. 플로티노스는 미학의 영성적 체계에 대하여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그 실제적 결과는 미메시스의 부정이었다. 그는 생성(becoming)보다 존재(being)를, 물질보다는 이데아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물질과 변화를 형이상학적 비존재(존재하지 않는 것)와 동일시했다. 이런 사상은 세속적 운명을 예술 속에서 재현된 가능성을 모조리 파괴했다. 

- 56쪽 



두 번째는 그리스도 스토리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 그리고 서양예술작품에서 표현된 다양한 종교적 주제나 소재의 원천 정도로만 여겼지, 그것을 하나의 서사 문학으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아우어바흐는 이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스토리는 로고스logos의 비유(parousia) 혹은 이데아의 나타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1쪽 



그리스도 스토리는 개인적 생활의 강렬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과 풍부한 형식 또한 보여준다. 그 스토리는 고대 미메시스 이론의 한계를 돌파한다. 그 스토리 속에서 인간은 지상의 위엄을 잃어버린다. 모든 일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고, 고전주의에서 규정한 장르의 구분(합리와 우연의 구분)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숭고한 스타일과 천박한 스타일의 구분도 더 이상 없다. 복음서에는 마치 고대 코미디처럼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부, 왕, 고위 사제, 세리, 창녀 등이 그들이다. 지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희극 속의 인물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모든 사회적, 미학적 제한이 철폐된다. 그 무대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을 허용한다. 그 무대에 오르는 캐릭터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혹은 각각의 개별 인물로 등장하든 여전히 다양성을 유지한다. 각각의 개인은 온전하게 합법화되며, 그 합법화는 사회적인 기반과는 무관하다. 그의 현세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그의 개성은 완전히 개발되며, 그에게 일어난 일은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베르도도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그리스도 스토리가 갖고 있는 자연주의(자연스러운 사실주의)는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 전례 없는 것이다. 고대의 시인이나 역사가들은 인간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 53쪽에서 54쪽 



세 번째는 단테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계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그 철학이 단테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글을 쓸 때 단테처럼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는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이런 단테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퀴나스 철학이었다. 그가 믿고 따른 아퀴나스 철학은 개성적 형태를 중시하고 그에 대한 묘사를 정당화했다. 성 토마스는 이 세상이 하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되었다는 신학적인 교리로써 사물의 다양성을 설명했다.(...) 따라서 천지창조 전체를 두고 볼 때, 다양성은 완전함의 반대 명제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표현이다. 더욱이 우주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에 적극 참여하며, 그 움직임은 우주의 형식들을 움직여 자기-완성으로 나아간다. 이런 행동의 능력이 발휘되는 과저에서 다양성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요한 과정이다.

- 178쪽에서 179쪽 



단테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속적 자연주의는 아퀴나스 철학에 기반해 있는 셈이다. 마치 고딕 자연주의처럼. 


 

책 뒤에 수록된 '인명-용어풀이'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에 대한 설명보다 가령 사랑이나 천국, 연옥 같은 단어에 대한 풀이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책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야겠지만, 이 번역서 자체의 완성도도 나쁘지 않고 강력하게 추천한다. 꽤 밀도가 높은 책이라 읽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것이다. 


아래는 사랑이라는 용어 풀이에 실린 아퀴나스의 사랑에 대한 정의다. 선한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일까. 선미(kalokagathia) 의식은 그리스의 것이라 여겼는데, 중세 후기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원함(velle bonum)이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선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기적 사랑과 우정의 사랑으로 나뉜다. 사랑의 고유한 원인은 선이다. 사랑은 사람의 본성에 타고난 것이나 그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다. 악이 선'처럼' 나타날 때 악을 사랑하게 된다. 아름다움(pulchrum)은 선과 같은 개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름다움의 소유는 보는 것 또는 인식에 있는데, 선의 소유는 사랑 속에 있다. 사랑의 가까운 원인은 선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으면 그것을 결코 욕심낼 수 없다. 사랑의 결과는 상호 침투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것을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자 속에 있고, 또 반대로 사랑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 속에 있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엑스터시(황홀)는 사랑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랑의 대상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격정과 질투는 사랑의 결과이다. 강렬한 사랑은 그것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다 물리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행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부 1편 중에서(367쪽 재인용) 

 


아우어바흐(1892-1957) 



단테 - 10점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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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신앙이 뒤로 물러나고 기하학적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근대(modern)이 시작되고, 그 이후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이성을 버리지 않는다. 


거의 1세기 후에야 철학에서 근대적 이성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취(先取)는 놀랍기만 하다. 이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예술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예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히곤 한다. 이유없는 살인은 용서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유없는 살인을 너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까뮈도 자신의 '뫼르소'가 그토록 많이, 현실 속에 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양식(style) 상, 뒤러의 모든 작품들이 근대적이진 않다. 그는 양식적으로는 후기 고딕과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가 외부 세계와 마주했던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 그 어느 예술가들보다도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뒤러가 끊임없이 연구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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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정리하다가 메모 해놓은 것을 옮긴다. 수지 개블릭의 당연한, 하지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다. 보스와 초현실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설명의 용이성 탓이지, 실제로 보스가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오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스의 작품은 지극히 후기-중세적이고 고딕적이다. 


신의 세계가 가졌던 호소력이 이른 아침의 안개처럼 정오를 향해가면서 사라져갈 때, 그 안개를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의 작품은 먼저 중세말, 근대초의 심리적 방어를 위한 공포적 상상력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의지를 강제할 외부의 제어 수단을 바라기 마련이다. 중세 사람들에게 신의 세계란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이었고, 보스는 그 세계가 존재함을 시각적으로 그려냈다. 이 점에서 수지 개블릭의 '종교적 사실주의자'라는 표현은 매우 타당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초현실주의를 같이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되어 와서 그러한 비교를 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그릇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보스는 동시대 사람들이 괴물에 대하여 갖고 있던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이 관념은 중세의 '불가사의'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오늘날 정의, 원자력, 산업 등과 같은 가장 '최신'이거나 혹은 전통적인 개념과 느낌을 '표현하는' 사회적 사실주의자(social realist)'가 존재하듯이 보스도 '종교적 사실주의자(religious realist)'였다. 
- 수지 개블릭, <<르네 마그리트>>, 14쪽 (천수원 옮김, 시공사)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 Bosch's most widely known triptych, El Prado Museum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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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테일러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있듯이 어쩌면 중세적 질서(창조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위계적 질서와 이 질서에 유비된 현실적 질서)마저도 바로크가 나오기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슬쩍 지나가는 언급 뒤에는 거창하고 복잡한 명제가 놓여 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바로크 문화란 일종의 종합명제라는 것이다. 즉 행위자가 세계에 질서를 구축하는, 내면적이고 창조적인(poietic) 존재라는 근대적 이해방식과 형상(Form)에 의해 틀 지어진 우주(cosmos)로서의 세계라는 더 오래된 이해 방식 간의 종합 말이다. 나중에야 우리는 이 종합 명제를 불완전한 것이며 교체될 운명을 지닌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는 바로크 문화 속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긴장을 볼 수 있다. 그 긴장은 질서와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즉 거기에 이미 존재하는 위계적인 질서 그리고 자신들의 구성적 활동을 통해 그 질서를 지속시키고 완성하는 행위자들 사이의 긴장인 것이다. 이 행위자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의미에서 위계 질서의 바깥에 있고 평등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그와 필적한 것의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루이 14세의 말과 같은 혼성적 정식화는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뒤프레(Dupre)의 책에 제시된 바로크 예술에 대한 흥미로운 서술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Dupre, Passage to Modernity, pp. 237 ~ 248. 뒤프레는 바로크가 인간 행위주체성과 그것이 발생시키는 세계 사이의 "최후의 포괄적인 종합 명제"라고 말한다. 거기서 이 행위주체성에 의해 발생한 의미들과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발견한 의미들에서는 어떤 관계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과 갈등으로 가득 찬 종합명제이다.

바로크 교회는 정적인 질서로서의 우주보다는 신에 이러한 긴장의 초점을 맞춘다. 이 신의 힘과 신성은 우주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향성의 힘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의해 취해지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따로 떨어진 권력의 중심으로 개념화된, 신적인 질서와 인간적인 질서 사이에서 근대적인 긴장을 빚어내면서"(226) 말이다.

뒤프레는 바로크 문화가 "포괄적이며 영적인 비전"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발생 중인 세계에 형식과 구조를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개인이 있다. 하지만 - 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종교적 의미가 있다 - 그 중심은 여전히 초월적인 근원과 수직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 있다. 인간 창조자는 매개체들이 하강하는 단계를 거침으로써 그 근원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 인간적이며 신적인 - 이중의 중심이 바로크의 세계상을 중세의 수직적인 세계상과 구별 짓는다. 중세의 세계상에서는 실재가 단일한 초월적 지점으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몇몇 특색 안에서 미리 나타난 바 있는, 이후의 근대성이 지닌 확실하게 수평적인 세계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중심 사이의 긴장이야 말로 바로크에 복잡적이고 불안정하면서도 역동적인 특성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237)
-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128 -129


아래 관련 글 2개를 올린다. 하나는 찰스 테일러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이고, 하나는 바로크 예술에 대한 글이다. 서양미술사 책을 내기 전에 요약, 메모해놓은 글이다. 이젠 미술 관련 글을 쓸 시간조차 없이 바쁘니...





뒤프레의 책도 꽤 재미있을 것같은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ㅡ_ㅡ;;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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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중세주의는 현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19세기의 낭만적 중세는 거침없는 산업화 속에서 사라지고 20세기, 21세기의 중세주의는 학문 연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진지한 동경, 숙고, 찬미로 바뀌고 있다. 마치 12세기 르네상스론이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듯.

그 사이로 에스토니아 출신의 아르보 페르트가 있다. 미니멀리즘과 중세적 성스러움 속에서 그는 미사곡과 성가곡을 작곡한다. 그의 음악은 슬프고 그리운 중세를 닮아있다. 불가능함을 불가능함으로 받아들이고 자연과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중세를...

오늘 아르보 페르트의 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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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옮김)
문학과 지성사



책을 다 읽은 지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여러 번 책을 꺼내 읽으며 노트를 했지만, 쉽게 소개 글은 씌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으니, 나는 거의 십 년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완독하지 못했다. 자끄 르 고프의 ‘서양중세문명’을 금방 완독한 것과 비교한다면, 이 책에 대한 내 느린 독서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책은 두툼하고 활자는 작으며 문장은 길다. 제 1장의 제목은 ‘삶의 쓰라림’이고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에 둘러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의 높이에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를 통해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여행, 직무, 방문 같은 대단치 않은 사건들조차도 강복식이니 의례니 서식 따위를 동반하였다. - 11쪽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중세 시대의 여행에 대해 단단히 각오하라는 어투다. 그런데 이 주의는 책을 읽는 내내 그대로 드러난다. 라틴어와 병기되는 무수한 인용구, 사례, 문헌들.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사고, 다른 종교 아래에서의 삶, 일상, 문화와 예술은 슬프고 기묘하며 어딘가에선 현대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신에게 있어서는 의미 없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nihil cavum neque sine signo apud Deum”

절정기 중세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로 가는 길목의 이정표와도 같은 이 책의 저자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ga(1872~1945)는 문화사, 혹은 예술사가 시작되었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최고의 학자이자, 현재까지 중세 문화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학자이다. 그의 이 ‘중세의 가을’은 중세 후기 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이자, 현대인들이 종종 부딪히는 심리적 갈등이나 병적이고 경련적인 마음이 어떤 배경 위에 이루어져 있는가를 파악하는 우회로와도 같다.

이 책은 역사, 특히 문화와 예술에 집중된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대해 많은 책들이 출간되고 연구자들이 늘어나 마치 중세 연구의 부흥기처럼 여겨진 20세기 후반에도 이 책의 명성이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해진 것도 문화사 연구에 있어 호이징가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시대 전체가 보다 아름다운 삶을 열망한다. 현재가 어둡고 혼란스러울수록 그 같은 열망은 더욱 더 깊은 바람을 띠게 마련이다. 중세 말의 삶은 침울한 멜랑콜리로 가득 차 있다. - 40쪽


 

열렬하고 격하며, 냉혹하면서도 동정적이며, 세계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또 세계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이 시대의 정신은 엄격한 형식주의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같은 감동들은 관례적 형태라는 엄격한 틀 속에 당겨져야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 생활 역시 그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었다. 삶의 사건들은 아름다운 광경이 되었고, 고통과 기쁨 역시 비장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입혀지고 단장되었다. 감동을 표현하는 수단에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감정은 단지 그 미적 표현에 의해서만 그 시대가 열망하던 그 높은 단계의 표현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60쪽



 

삶의 이상으로서 기사도의 개념은 매우 특수한 성격을 띤다. 본질상 그것은 환상과 영웅적 감동에서 나온, 그러나 외관에 있어서는 윤리적 이상을 담당한 하나의 미학적 이상이었다. 중세적 사고는 기사도의 개념을 종교와 미덕에 결부시키면서만 그 기사도적 개념에 귀족적 위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 83쪽



중세 초기의, 신흥 종교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그것이 반영된 여러 종교 의식들은 이제 형식으로만 남아 종교를 지탱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대비되어 변하지 않고 도리어 피폐해지는 삶의 조건들. 신앙의 힘, 기도의 힘 대신 보다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행동들이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우리 정신은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잃곤 한다. 이것이 중세 후기 대다수 민중의 삶이었다. 미학적 형식주의에의 경도는 그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고딕만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학적 표현으로 경도되던 형식주의적 세계 속에서도 생의 실존적 물음은 절대 사라지는 법이 없다.

쇠퇴기의 중세만큼 그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큰 강조와 감동을 부여한 시대는 달리 없었다. 그 시대에는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mori는 호소가 메아리친다. - 166쪽



가령 이런 표현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기분이 들게 할까?

“여자는 음란과 악취 속에서 아이를 배며, 슬픔과 고통 속에 아이를 낳고, 번뇌와 노동으로 아이를 키우며, 탄식과 공포로 늙어간다. Concipit mulier cum immunditia et fetore, parit cum tristitia et dolore, nutrit cum angustia et labore, custodit cum instantia et timore” - 170쪽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신앙의 기운이 깃든다. ‘정신적인 양극 사이의 긴장’, 즉 ‘위선과 텅 빈 편협한 신앙’이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15세기 사람들은 늘 근엄한 신앙에 기괴한 허식에의 애호를 결합시킨다.’

이런 이유로 중세는 종종 현대의 우리에게 낯설고 기괴하며 불가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정신적인 사랑은 쉽사리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으로 전락한다 Amor spiritualis facile labitur in nudum carnalem amorem”. 이는 단순하고 순전한 육체적 사랑에 대한 교회의 관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성스러운 사랑을 대상으로 한 지극히 관능적인 환상을 용인하는 것이다. 마치 바로크처럼.

상징주의는 직관에 의해 예감되고, 음악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과 유사한 관계들의 불완전한 표현이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 사람들은 하나의 수수께기에 직면해 있다고 의식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형상들을 분별하려고 애썼고, 이 형상들은 다른 이미지들을 수단으로 해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상징주의는 창조라는 거울에 마주 세울 수 있는 제 2의 거울과도 같았다. 모든 개념은 조형적이거나 회화적이 되었다. 세계의 표현은 달빛 아래 선 성당의 고요함에 도달했고 거기서 사고는 잠들 수 있었다.  - 260쪽

 

호이징가는 중세의 종교 생활, 세속 영역의 확장, 사랑의 방식, 이미지와 상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다. 실은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책을 읽을수록 책은 더욱 복잡해지고 다채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마치 고딕 성당의 스태인드 글라스에 비친 햇살처럼.


중세의 가을 - 10점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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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지엠 2016.10.15 20:03 신고

    그렇다면 중세의 형식주의가 대두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 형식주의는 모든 시대에 등장합니다.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은 20세기를 형식주의 시대라고 할 지도 모릅니다. 반-형식주의를 표방하며 많은 이론들과 예술작품들이 넘쳐났지만요. 따라서 중세의 형식주의가 대두되었다라기 보다는 '모든 시대는 그 나름대로의 형식주의를 가진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같네요. 다만 중세는 눈에 보이는 형식주의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의 형식주의를 가지고 왔으며 이를 교회나 교회 의식으로 형식화시켰습니다. 이는 천상의 질서를 현실 속에 내리기 위함이며, 이 때의 형식주의는 플라톤주의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림과 함께 읽는 서양 문화의 역사 2 - 6점
로버트 램 지음, 이희재 옮김/사군자


깔끔하게 요약된 이 책은 혼자 읽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다. 나같은 독자는 필요한 부분만 읽으면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많은 정보에 비해 짧은 설명이 서양 문화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빠져든 서양 문화사는 너무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현대 사회나 문화에 대해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버트 램의 이 시리즈는 혼자 읽기 보다는 대학 교양 수업의 교재로 적당하다.

'후기 중세: 확장과 종합'라는 챕터 제목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면 일종의 발전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문화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교의 위축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보상으로서의 확장과 종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후기 중세에 있어, 심리적 보상은 크게 문화예술의 측면(고딕 양식과 초기 르네상스)와 도시 자본주의의 시작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표면상으로는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며, 반대로 이 둘의 협력이 종교 권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실은 중세를 지배했던 종교의 어쩔 수 없는 귀결이 이 두 가지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러 사실/정보들의 평면적 나열에 그치며 깊이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장점은 있다. 이 평면적 나열이 역사, 미술, 건축, 음악, 무용, 문학에 걸쳐 있으며, 매우 잘 요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의 교재(이 책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강사나 이에 도전해 볼 강사가 있다면)으로는 매우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가 혼자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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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 르 고프(지음), 유희수(옮김), <<서양 중세 문명>>, 문학과지성사, 1995년 3쇄(1992년 초판)



사람들은 서양 중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왕과 왕비, 기사, 장원 경제, 십자군, 아더왕 이야기, 왕비와 기사 간의 로맨틱한 사랑, 높이 솟은 첨탑의 고딕 성당. 아마 이런 것들이 아닐까. 아닐 지도 모르겠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중세에 대해선 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 책은 서양 중세의 문명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요약하고 정리한 책이라, 독자에 따라선 설명이 인색하다고 여길 수 있고 완독하는 데에 다소 많은 시간이 걸리는 책이다. 하긴 천 년 중세 문명을 일목요연한 구성과 설명으로 다 담아내기 위한 저자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이 시간마저도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중세 개론서 한 권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이제 서양 중세를 암흑시대로 가르치는 선생은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일에 하나,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면 바로 선생 자리에서 쫓아내야할 것이다(아마 내 눈으로 목격하다면, 바로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눈에 중세야말로 고대의 학문과 문화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은 르네상스의 입장에서도 틀린 지적이다. 왜냐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연속성은 중세 고딕 문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쟈크 르 고프는 중세를 지속적인 르네상스의 역사로 파악한다.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 문명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노력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세를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이 점은 이 책의 장점에 속한다.

이 책은 우리가 중세에 대해 알아야하는 대부분의 주제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겠다. 서양 중세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담고 있는 교과서.

중세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우 좋은 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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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지음), 김석희(옮김), <<로마인이야기 14 - 그리스도의 승리>>, 한길사, 2006





자신의 시대를 알고 있다는 것,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견하고 있다는 것, 아니 관대하고 넓게 세상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문제를 진단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후대의 사람들은 주저 없이 ‘배교자’, ‘시대착오’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                   *

이 점에서는 세속인도 성직자도 마찬가지다. 이 로마에서 주교를 맡고 있는 사람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번은 로마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알려진 사람이 로마 주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로마 주교로 삼아주면, 내일이라도 당장 기독교로 개종하겠습니다.”
- 330쪽

율리아누스 황제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고 그가 시행한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기독교의 반발을 사게 된다. 이 전투적인 종교의 신봉자들에게 율리아누스 황제는 ‘배신자’였던 셈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불합리나 전투성, 배타성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대단한 흥행 속에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진진한 로마 세계로 독자를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 역사학자가 아닌 소설가의 입장에 가깝기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이 시리즈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재미있는 역사책도 드물다.

로마 후기는 여러 가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기독교의 확장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표했을 때 확실히 엎질러진 물이 되었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 엎질러진 물을 없애고 제국을 바로 잡기에는 너무 일찍 죽었다.

종교가 ‘관용’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그 종교에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고 그 종교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성직자들은 귀족처럼 행세하기 시작했고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버리자, 모든 것은 분명하게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는 사라지고 르네상스 인들이 그렇게 경멸했던 중세의 천 년 암흑은 이렇게 시작된다. 왜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를 막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불행한 유년을 보내고 혼자 적지에서 죽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좋아했던 이 황제의 곁에 친구는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를 자처했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맡겨진 불행한 사람들을 버릴 수 있을까? 그들에게 행복한 일상을 보장하는 것이 이제 나의 책무일세. 내가 여기 있는 것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야.’

페허로 변해버린 로마의 변방에서 학창 시절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황제로 즉위한 후 동방의 도시에서 그는,

‘나는 갈릴리 사람들(기독교도)이 믿는 것이 이 지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황제로서 실증해보고 싶네. 그들이 말하는 칭찬할 만한 가르침, 그들은 그것을 가난한 사람한테만 허용하고 게다가 천국에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만, 그 미덕과 행복은 현세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제위에 있는 동안 정착시키고자 하는 공정한 통치를 통해, 그리고 종교와 관계없는 복지 사업을 통해 달성하고 싶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네.’

라고 적는다. 하지만 율리아누스 황제의 제위 기간은 서기 361년부터 363년, 고작 3년이었다. 너무 젊었으며 또한 불행했다.

기독교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수도장관이었으며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논쟁을 벌였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버린다. 하긴 더 이상 막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졌으니. 그리고 천 년 후 심마쿠스가 살았던 그 로마에서 신의 시대인 중세를 ‘암흑’이라고 부르며 경멸하게 되는 이유는 무얼까. 똑같은 종교를 믿는 후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로마제국에는 율리아누스 황제와 심마쿠스만 있었던 걸까. 종종 ‘시대 착오’라는 경멸을 받는 이들이 있다. 하긴 시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디로 가는 지로 모른 채 앞만 향해 내달리고 있을 때, 그 앞을 가로 막고는 ‘이 길이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건 시대에 분명 역행하는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런데 왜 나는 ‘시대착오’라는 단어에 더 끌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율리아누스황제는 철학 공부를 하고 사색에 잠겨있었으면 좋았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전투라고는 해보지 않은 그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누가 그 사실을 믿었을까. 그리고 그가 일련의 개혁 조치를 시행했을 때, 그것이 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고려도 없이 오직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배교자 율리아누스’라고 부른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로마인 이야기 14 - 10점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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