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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촘스키는 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아마 그의 언어학 이론은 영문학과나 언어학과 학부나 대학원 과정에서나 다루어질 것이니, 일반 독자가 노엄 촘스키의 학문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정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책을 읽게 된 외부의 계기가 있었으나, 나 또한 노엄 촘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이 대단한 언어학자라고 추켜 세웠지만, 정작 그들도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추켜세우는 것인가! MIT 종신교수라서?) 


막상 이 책을 읽으며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알아보니, 그의 언어학 이론은 한 번도 주류 학문이 되지 않았고 무수한 반대학자들과 비판가들만 있을 뿐이었다. 특히 현대의 학문 방향과도 동떨어져서 <<데카르트언어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데카르트주의가 휩쓰는 20세기에 데카르트를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엄 촘스키에 대한 국내 명성은 너무 높아서 함부로 까면 안 되는 사람이 된 듯 싶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노엄 촘스키를 한 번 심하게 깠다가 인신공격까지 나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가지는 기본 가정이 반-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데카르트가 '송과선'이라는 단어로 육체와 영혼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촘스키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언어생득설'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언어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 뿐 아니라 정치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적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초기 저서들과 데카르트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적 관점의 연원을 계몽운동과 낭만주의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면서, 창조성에 관한 담론을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강조한다. 

촘스키는 궁극적으로 훔볼트의 학문에 도달한다. 훔볼트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구성에 관한 가정들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맥락으로 작용한다. 훔볼드는 인간 언어의 창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인간의 언어를 단지 기능적인 의사 소통의 한 형태가 아니라 생각의 표명이자 자기 표현의 방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데카르트적 관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173쪽 ~ 174쪽 



이런 학문적 견지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학자들은 아직도 그의 이론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여기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만 하는 입 진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인 미국 환경 속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우리도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루 다루며, 노엄 촘스키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만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읽기 쉽고 언어학에 대한 연구활동, 언어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절반은 읽히고 절반은 버려질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대부분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으나, 노골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하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지, 언어철학자가 아니다. 더구나 노엄 촘스키는 반-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 있는 언어학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학은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지만, 언급되는 이유는 그의 언어학이 왜 틀렸는가에 집중될 뿐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블로그'에 올라온 스티븐 핑커의 언급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비판이 지난 50년 간 있었지요. 우선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학계에서 정론이며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이라는 식의 표현은 시작부터 맞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정론이 된 적이 없습니다. 매 시대 복수의 언어학자들이 촘스키의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 예를 들어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 관계문법(Relational Grammar), 어휘기능문법(Lexical Functional Grammar), 일반화구구조문법(Generalized Phrase Structure Grammar) 등의 대립 이론들이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보지 않았던 점도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촘스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가 대다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 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더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퍼트냄, 굿맨, 설,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그랬고, 70년대 제롬 브루너와 피아제 학파의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랬습니다. 70년대 인공지능 중흥기의 테리 위노그라드, 로저 섕크, 마빈 민스키도 촘스키를 공격했습니다. 1980년대 연결주의 심리학자와 신경망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있고, 린다 스미스와 같은 “동적 시스템 이론가”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의 아동 언어 습득 연구자들은 촘스키에 반대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는 오해가 생긴 이유는,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접근을 취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유명세와 인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촘스키만을 알았을 뿐,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요. 즉, 명성과 학문적 위치를 혼동한 것입니다.


‘촘스키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주장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이 사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문(syntax)에 대한 몇 가지 기술적인 이론을 발표했고, 동시에 언어가 본능이라는 내용의, 논문의 형태가 아닌 비공식적인 주장을 수십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확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엄밀한 형태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 또는 본능적인 “언어 구조(language faculty)”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특정 언어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예를 들어 일본어나 영어를 우리가 실제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요. 즉 50년 동안 언어의 특정한 측면이 학습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이들이 (실제로 매우 많았지요)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물단지 역할을 촘스키가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보다 정밀한 언어 습득 과정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델은, 여러 문장들을 입력하면, 문법 구조가 출력되는 그런 모델 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실제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모델이 어떤 모양이건,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 본능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나는 1984년 나의 첫 저서인 “언어 학습과 언어 발달(Language Learnability and Language Development)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시도 없이,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어떤 본능적 구조나 가정,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 언어를 신경망으로 구현하려 했던 이들이 썼던 트릭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보다, 그저 본능적인 구조를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델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스티븐 핑커

인용: http://newspeppermint.com/2016/12/08/m-chomsky/




노엄 촘스키의 정치적 활동이나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무수한 진보 지식인들이 인용하여, 다소 식상하기까지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노엄 촘스키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저서들은 제대로 읽히지도, 소개되지도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진 않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이 왜 잘 알려지지 않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현대 철학의 지평 위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반-데카르트주의 환경 속에서 노엄 촘스키는 분명한 어조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활동에까지 연결될 수 있겠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 8점
로버트 바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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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성이란 우리의 출신배경, 언어, 국적이 타자의 존재로부터 자주 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확실성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성은 또한 대외 정책이나 사회 정책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 행위에 대한 단일한 규준을 찾아내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야기된 적의 침략에 대해 비난한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 정부가 더 약한 집단을 침략할 때 똑같이 비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언행을 규정하는 어떠한 법칙도 알지 못한다. 세속적 지식인들에게는 확고한 인도자로서 경배하고 숭배해야 할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의 표상>> (최유준 옮김, 마티) p. 11 


나이 들어 뒤늦게 알게 되는 학자가 있다면,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대학 시절엔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만, 포스트모더니즘 열풍 속에서 읽혀진 학자들 중 한 명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그는 그런 유행과는 무관한 전통적인 인문주의자였다. 몇 년만에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위 문단을 읽으면서 잠시 멈추었다. 


보편성이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보수적인 느낌이 풍기지만, 21세기 한국에선 저 단어마저도 종북좌파로 오해될 것이다. 실은 권력의 지원을 받는 미디어에 의해 우리가 알고 있다는 단어들의 의미나 배경은 더럽혀졌다. 그렇게 더럽혀진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파되며 무비판적으로 이해되고 수용된다. 노무현 정부가 미디어와 대립각을 세우며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이 하듯 다양한 토론과 논쟁 속에서 보다 나은 방향을 나아가고자 하였다면(그러나 그 정부는 모든 미디어로부터 왕따 당했다, 심지어 진보적이라 불리던 한겨레나 프레시안으로부터도!), 그 이후 들어선 이명박 정부부터는 교묘하게 미디어를 장악했다, 그리고 미디어는 권력 앞에 아무 소리도 못했으며, 기자들은 자랑스럽게 '기레기'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앞에선 그 어떤 질문도 못하는 **들이 야권의 대선 후보들 앞에선 기를 세우고 질문을 해댄다. 


'보편성이란 인간적 행위에 대한 단일한 규준을 찾아내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의미'하지만, 21세기 한국 사회에선 철없는 이상주의처럼 여겨진다. 나에겐 참 보수적으로 읽히는 저 문장이, 한국에선 참 좌파스럽게 이해될 것이라 생각하니, 참 슬프다. (아니면 내 오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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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짬뽕을 폰 카메라로 찍기란 쉽지 않았다. 임시로 있는 사무실 근처 중화요리점에서 짬뽕에 이과두주를 마셨다. 붉은 색으로 장식된 벽면 아래 짙은 갈색 나무 무늬 테이블과 검정색 천이 씌워진 의자에 앉아, 바람과 오가는 사람들에 흔들리는 출입문을 잠시 보았다. 





이것저것, 그냥, 잠시, 보는 시절이다. 정해져 있지 않아 자유롭고 정해져 있지 않아 불안한 시절이다. 자유와 불안, 혹은 두려움은 등가적 관계를 이룬다. 최초의 인류가 선악과를 먹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자유 속에 깃든,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가지고 왔다.


하지만 중년이 되자, 자유는 보이지 않고 불안과 두려움으로만 채워졌다. 마음 속에서, 육체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 술로 태워지고 술로 열광하고 술로 위로받는 건 자유와 사랑, 순결과 불륜이지, 불안과 두려움은 아니었다. 





선사시대 우연히 발견되었을 술은, 인류에게 두 번째로 값진 선물이다. 그래서 나는 어김없이 짬뽕에 독주를 마신다. 싸구려 독주를. 


이과두주. 이 술은 중국 사람들에게 소주와 비슷한 술이다. 실은 소주보다 더 싼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평균 56도. 



출처: 성학주류 홈페이지(http://www.sunghak.com/)


예전에 마셨던 이과두주는 나쁘지 않았는데, 최근에 마신 이과두주는 알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런 걸까. 어느 주류 회사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온 이과두주 사진이다. 차례대로 알아보면 아래와 같다. 



1. 홍성이과두주(55도, 유한회사 금용 수입)

3.우란산이과두주(56도, Niu Lan Shan Er Guo Tou Jiu,100ml (주)풍원주류 수입 )

4.우란산이과두주(56도, Niu Lan Shan Er Guo Tou Jiu, 125ml (주)풍원주류 수입 )

2(?)/5. 천진식품 제조 이과두주((유한회사 금용 수입)) 



우란산이과두주를 마셨는데, 맞지 않았다. 조만간 다른 이과두주도 마셔볼 요량이다. 


십 수년 전 크리스마스 근처, 대학원 시험을 떨어지고 짬뽕 국물에 이과두주를 마시고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런데 그 때 대학원엘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때로는 떨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학문으로 유리된 세상 속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고귀한 언어의 자존심만을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 때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나를 위로해주시던 분은 계속 공부를 하셨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글을 쓰시지만, ... ...어느 방향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결국 어느 게 정답인지 모를 땐 자신이 정하는 게 정답인가. 





그리고 나는 짬뽕을 집에서 해 먹었다. 재료의 부실함으로 인해 마법의 가루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나름 선방했다. 다음 주부턴 여의도에서 프로젝트 PM을 맡기로 했다. 준비 중인 사업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해졌고, 이 지지부진과 무관하게 경제적 삶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책 읽고 음악 듣고 글을 쓰는 삶을 한 때 동경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한 것은 책 읽고 글 쓰고 공부하는 이들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난립했던 무수한 사상들은 학문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지나친 학문 논쟁과 쌀 한 톨 만들지 않으면서 사사건건 중앙정부의 정책에 토를 달던 학자들이 싫었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통일되었으나, 사상적으로는 통일되지 않았고, 통일할 생각도 없었던 셈이다. 무술이라면 싸움이라도 해서 결판을 낼 수 있었지만, 사상과 학설은 이와 같지 않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 한 무제에 와서야 유교로 사상적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무언가 만들고 생산하며 기여하는 삶. 이게 좋다. 그건 사적인 차원에서 쓰여지는 글 이상이어야 한다. 무언가 생산할 수 있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글이라면 괜찮을 게다. 그런데 그런 글이 어디 쉽나. 잡글이 길어졌다.

*     *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책 <<투명사회>>를 읽기 시작했다. 결국 한병철의 책 두 세 권을 더 구입했다. 그가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한국에도 한병철 교수 정도 내공이 되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독일적 환경 아래에서 다른 일상을 보내며 고민했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글이라 여겨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런 글을 쓰지 못한다. 아니 쓸 수 없다. 우리가 마주치는 한국 사회의 일상은 구한말 조선 시대지, 21세기 유럽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제 3 세계 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만의 고유한 시각, 고유한 해법, 고유한 이론이 나와야 하지만, 인문학은 이미 수입 보따리 상이 되어버렸거나, 아니면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나 또는 동양의 고전들을 들이대거나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나는 반대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늘 확인받고 싶어하고, 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이 세상 한 명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그리고 이게 현대인이다. 한병철 교수는 <<투명사회>>에서 노출된다는 것에 대한 폭력성을 지적하지만, 우리는 노출됨으로써 위안을 얻을 수도 있음을 그는 알지 못한다. 그 위안에 주목하지 않고, 왜 우리는 그 위안에 몸을 맡기게 되었는가를 묻지 않고 투명사회의 한 부분으로 지적하며 그것의 폐해만을 드러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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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번 홈*러스서 팔아서 마셔봤는데 예전 마신 이과두주같지 않게 공업용 독한 향이 심하더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마트보다는 중국 식품 전문점이 좋은 것같아요. 이과두주도 여러 종류를 가져다놓고 좋은 술로 달라고 하면 주네요. 가격도 큰 병도 1병에 만원을 넘지 않네요. ~ ㅎㅎ

  • 다른 사람들이 나에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너무 마음에 드는 말이네요.

    저것도 읽어봐야겠에요.

    • 아.. 그러고 보니, <<투명사회>>는 읽다 말았어요. ㅜㅜ..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이번 일이 끝나면 다 읽어야겠군요. ~

지식인의 종말 - 8점
레지 드브레 지음, 강주헌 옮김/예문




지식인의 종말
레지스 드브레 지음, 강주헌 옮김, 예문


이 책은 오늘 지식인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를 통렬하게 비판한 책이다. 그래서 나는 지식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 책을 읽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과연 나는 지식인인가를 다시 한 번 물어볼 때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니깐 대학을 나왔다고 대학원을 나와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웃긴 일이다. 그럴 땐 드브레의 말처럼 "누구건 지식인이라 자처한다면, 나는 그를 기꺼이 지식인이라 불러주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단어가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다. 아래 글을 보자.


노블레스! 그 기원인 로마가 보여 주었듯이 노블레스는 본질이 되기 전에 직업이 되어버렸다. 프랑크 왕국이 성립된 후 봉건체제로 들어서기 전에 이 땅에는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는 행정가 집단, 즉 레스 퍼블리카Res Publica를 꾸려가던 노빌리타스nobilitas가 있었다. 노블레스는 게르만어에서 전사를 뜻하지만, 이탈리아어에서는 국가에 대한 봉사를 뜻한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성城의 주인은 안으로 감추어진 경영의 주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지식인과 작가가 공직에 뛰어드는 것, 즉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은 특권의 상실이 아니라 자연스런 일이었다. (중략). 다스린다는 것은 지배하는 것인 동시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봉사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노블레스는 아리스토크라시(희생보다는 특권을 전제로 한 귀족)로 변해갔다. 지식인도 실질적인 노력이나 기여 없이 상징적인 보수를 바란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크라시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지식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다.
- 175쪽에서 176쪽


부언하자면, 귀족이란 사회의 특권 계층이 아니라 전쟁이 났을 때 집안의 남자들이란 남자들은 다 나가 맨 앞에 나서서 싸우는 이들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한 마을, 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던 이들을 다른 이들이 기꺼이 귀족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을 담보한 특권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노블레스이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 담보로 내놓은 목숨이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목숨을 지키기 위한 특권 계급으로 변질되어간 것이다.

그러니깐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말을 할 때는 현재의 '있는 집'을 기준으로 삼아야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집'을 기준으로 삼아서 새로운 노블레스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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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도록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면 어느 것이 옳다고 쉽게 판단내릴 능력도, 판단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되, 충분히, 그리고 사려깊게 비판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비판적인 태도가 냉소적인 태도로 흘러가면 안 된다.

   "미국의 기만적 논리를 충직한 앵무새처럼 복창하는 지식인들이 버젓이 행세하는 사회를 미국이 새삼 존중할 리 없다." 한국일보 4일자, 어느 칼럼에 실린 문장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집에서 조선, 중앙, 동아일보를 받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조선일보는.

   나는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회의적이고 비판적일 때, 지식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보머Baumer의 지식인 계급에 대한 정의가 있어서 여기에다 적어본다. "참으로 심원하고 독창적인, 비교적 적은 사상가들의 집단 및 문화적인 철학자, 과학자, 신학자, 일반 학자들은 물론, 창조적인 문인, 예술인, 대중 전달자 그리고 지성적인 독자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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