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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촘스키는 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아마 그의 언어학 이론은 영문학과나 언어학과 학부나 대학원 과정에서나 다루어질 것이니, 일반 독자가 노엄 촘스키의 학문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정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책을 읽게 된 외부의 계기가 있었으나, 나 또한 노엄 촘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이 대단한 언어학자라고 추켜 세웠지만, 정작 그들도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추켜세우는 것인가! MIT 종신교수라서?) 


막상 이 책을 읽으며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알아보니, 그의 언어학 이론은 한 번도 주류 학문이 되지 않았고 무수한 반대학자들과 비판가들만 있을 뿐이었다. 특히 현대의 학문 방향과도 동떨어져서 <<데카르트언어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데카르트주의가 휩쓰는 20세기에 데카르트를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엄 촘스키에 대한 국내 명성은 너무 높아서 함부로 까면 안 되는 사람이 된 듯 싶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노엄 촘스키를 한 번 심하게 깠다가 인신공격까지 나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가지는 기본 가정이 반-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데카르트가 '송과선'이라는 단어로 육체와 영혼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촘스키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언어생득설'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언어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 뿐 아니라 정치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적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초기 저서들과 데카르트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적 관점의 연원을 계몽운동과 낭만주의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면서, 창조성에 관한 담론을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강조한다. 

촘스키는 궁극적으로 훔볼트의 학문에 도달한다. 훔볼트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구성에 관한 가정들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맥락으로 작용한다. 훔볼드는 인간 언어의 창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인간의 언어를 단지 기능적인 의사 소통의 한 형태가 아니라 생각의 표명이자 자기 표현의 방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데카르트적 관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173쪽 ~ 174쪽 



이런 학문적 견지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학자들은 아직도 그의 이론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여기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만 하는 입 진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인 미국 환경 속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우리도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루 다루며, 노엄 촘스키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만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읽기 쉽고 언어학에 대한 연구활동, 언어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절반은 읽히고 절반은 버려질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대부분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으나, 노골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하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지, 언어철학자가 아니다. 더구나 노엄 촘스키는 반-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 있는 언어학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학은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지만, 언급되는 이유는 그의 언어학이 왜 틀렸는가에 집중될 뿐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블로그'에 올라온 스티븐 핑커의 언급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비판이 지난 50년 간 있었지요. 우선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학계에서 정론이며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이라는 식의 표현은 시작부터 맞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정론이 된 적이 없습니다. 매 시대 복수의 언어학자들이 촘스키의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 예를 들어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 관계문법(Relational Grammar), 어휘기능문법(Lexical Functional Grammar), 일반화구구조문법(Generalized Phrase Structure Grammar) 등의 대립 이론들이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보지 않았던 점도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촘스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가 대다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 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더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퍼트냄, 굿맨, 설,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그랬고, 70년대 제롬 브루너와 피아제 학파의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랬습니다. 70년대 인공지능 중흥기의 테리 위노그라드, 로저 섕크, 마빈 민스키도 촘스키를 공격했습니다. 1980년대 연결주의 심리학자와 신경망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있고, 린다 스미스와 같은 “동적 시스템 이론가”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의 아동 언어 습득 연구자들은 촘스키에 반대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는 오해가 생긴 이유는,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접근을 취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유명세와 인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촘스키만을 알았을 뿐,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요. 즉, 명성과 학문적 위치를 혼동한 것입니다.


‘촘스키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주장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이 사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문(syntax)에 대한 몇 가지 기술적인 이론을 발표했고, 동시에 언어가 본능이라는 내용의, 논문의 형태가 아닌 비공식적인 주장을 수십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확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엄밀한 형태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 또는 본능적인 “언어 구조(language faculty)”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특정 언어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예를 들어 일본어나 영어를 우리가 실제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요. 즉 50년 동안 언어의 특정한 측면이 학습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이들이 (실제로 매우 많았지요)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물단지 역할을 촘스키가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보다 정밀한 언어 습득 과정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델은, 여러 문장들을 입력하면, 문법 구조가 출력되는 그런 모델 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실제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모델이 어떤 모양이건,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 본능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나는 1984년 나의 첫 저서인 “언어 학습과 언어 발달(Language Learnability and Language Development)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시도 없이,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어떤 본능적 구조나 가정,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 언어를 신경망으로 구현하려 했던 이들이 썼던 트릭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보다, 그저 본능적인 구조를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델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스티븐 핑커

인용: http://newspeppermint.com/2016/12/08/m-chomsky/




노엄 촘스키의 정치적 활동이나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무수한 진보 지식인들이 인용하여, 다소 식상하기까지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노엄 촘스키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저서들은 제대로 읽히지도, 소개되지도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진 않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이 왜 잘 알려지지 않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현대 철학의 지평 위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반-데카르트주의 환경 속에서 노엄 촘스키는 분명한 어조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활동에까지 연결될 수 있겠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 8점
로버트 바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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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보수, 

이상돈(지음), 책세상 





서평집이다. 두껍다. 색인까지 포함하면 700페이지가 넘는다. 하지만 쉽게 읽힌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궁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보수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11쪽 ~ 12쪽  

 

그래서 이 책은 현 정권과 이전 보수 정권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어야 할 텐데,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박근혜 정권 하의 정책에 대한 언급은 가끔 보이긴 하나, 직접적이지 않다. 아마 이런저런 이해 관계 속에서 공격적인 발언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공격적인 비난 뒤에 올 여러 불이익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던 듯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그냥 서평집이다. 그것도 보수주의자들이 쓴 원서를 읽고 쓴 서평집(대부분 번역되지 않았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나는 우파다'라고 했더니 내 주위의 진보좌파들이 크게 웃었다. 그러니 다들 나를 진보로 볼 수 있을 텐데(나는 늘 좌파로 보여지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만), 보수주의 저자들 일색인 이 책에 대한 문제적이고 비판적 읽기는 쉽지 않다. 실은 한국에는 보수라고 불릴 만한 이들이 있다면 도리어 '종북좌파'로 불리는 이들이 서구에서 바라보는 바, 보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보수'라고 하면 새정치민주연합 정도가 될 것이고(중도 좌파가 아니라), 새누리당은 보수정당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보수로 포장한 1950년대 정당같다는 느낌. 


저자들은 보수주의란 '중용과 전통, 그리고 합리성을 존중하며, 기존의 문화시스템 안에서 사회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이라고 정의한다.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적 변화를 추구하며,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정부 정책을 의심한다. 

- 230쪽 (Edwin Feulnet, Doug Wilson, <<Getting America Right: The True Conservative Values Our Nation Needs Today>>(Crown Forum, 2006)에 대한 서평, '올바른 보수정책이 필요하다' 중에서) 



하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책들과 저자들도 미국 공화당과 보수 정권들에 대해 공격하고 심지어 진정한 의미로 보수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니까, 한국에서 보수정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운 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읽을 만한가? 솔직히 나는 지난 1주일 동안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마 내 주위의 진보주의자들이 읽으면 화들짝 놀랄 만한 내용도 많다. 가령 피터 스와이저Peter Schweizer의 <<내가 말한 대로 해: 진보의 위선적 모습 Do As I Say (Not As I Do): Profiles in Liberal Hypocrisy>>에 대한 리뷰 일부를 옮겨보자.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사람과 소수인종과 여성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보수주의자들이 탐욕스럽고 환경을 파괴하며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한다. 

- 333쪽 


 한국에서도 그런가? 잘 모르겠다(여기엔 내 개인적 경험까지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위의 인용문처럼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선 일종의 희망 사항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미국은 자본가와 군대가 움직이는 '불량배 국가'이고 이스라엘은 '중동의 악'이라고 비난해서 명성을 얻은 MIT 명예교수 놈 촘스키는 전 세계 진보좌파에게 영웅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40년 동안 국방부가 MIT에 지원한 암호 개발 프로젝트로 연구비를 받아왔다. 촘스키는 자기가 자본주의의 희생자인 가난한 민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사실 그 자신은 매우 영악한 자본주의자다. 강연료와 인세 수입으로 인해 그는 소득이 전체 미국민의 상위 2퍼센트 안에 들 정도로 부자이다. 그는 보스턴 근교 레싱턴이라는 부자 동네의 85만 달러가 넘는 호화 주택에 살고 있으며, 케이프코드에 별장도 갖고 있다. 촘스키는 흑인과 여성이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평생토록 주장해왔지만 정작 자신의 연구 스태프로는 백인 남성만 고용했다. 그는 9.11 태러 후 강연 요청이 많아지자 9,000달러 받던 1회 강연료를 1만 2,000달러로 올렸고,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기가 낼 세금을 줄이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 334쪽 


내용이 선정적이어서 아마존에 뒤져보니, 표지도 선정적이다. 촘스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진보주의자들에 대한 실생활을 까고 있다. 리뷰 평점은 나쁘지 않고 2006년 상반기에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인들도 진보주의자들(미국에선 liberals)에 이상하게 높은 절약정신과 도덕율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존 리뷰를 보니, '부자 리버럴이 보수주의자들보다 훨씬 낫다'며 이 책에 대해 별 하나를 주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은 번역되지 않는 걸까? 하긴 내 생각엔 자칭 한국에서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이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다들 영어로만 책을 읽어서 그런 듯 싶다)



- 피터 스와이저의 책 표지. 유명한 사람들이 표지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미국의 급진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 평등, 정의, 소비자 보호, 환경보호, 여성 해방 등을 내걸었지만 정작 자신들의 사생활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을 챙긴 위선자들이라면서, 이제 이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와 비슷한 논지의 이야기를 어느 보수신문이 종종 게재했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정치인들도 비슷한 주장을 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이후, 적어도 보수 쪽에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수 쪽 사람들의 윤리 수준이 더 낮기 때문이다. 

- 337쪽 



아, 박근혜 정권은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않는 저 센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졌으니 말이다(그러면서 보수 정권 어떠니, 종북 좌파 이야기를 해대는 이들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 책에 소개되는 책들 대부분은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서서 미국과 세계 정세, 미국 정치, 이슬람, 유럽, 금융 위기를 바라보고 있다. 정말 흥미롭게도 그런 책들 일색이다. 이상돈 교수가 선호하는 저자들도 눈에 보이고 책들 중에서는 서로 비슷한 논지에서 중복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읽는 중간 가끔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되는 책들 대부분이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에 국제 정세나 보수주의자들의 세계와는 참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설 당시 51개였던 유엔 회원국은 1993년 무려 184개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184개국 중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는 회원국은 75개국 뿐이니, 유엔에 속한 다수의 국가가 독재국가인 셈이다. 

- 447쪽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유엔을 비난하는 책이라든가(부패했던 코피 아난에서 반기문 총장으로 바뀐 지금도 상황이 별반 나아진 듯 싶진 않지만), 세계 정치 구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을 소개할 때면 무능하기만 한 한국을 보며 한숨만 나온다. 


파키스탄 대도시에서는 중국 사업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터키와 중국도 급속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중국을 방문했고, 시진핑 중국 주석은 터키를 방문했다. 중국이 터키에 원전과 항국를 건설하기로 하는 등 두 나라의 경제 협력은 공고해지고 있다. 중국과 이란과의 관계도 깊어가고 있다. 중국은 이란이 수출하는 에너지의 최대 수입국이며, 이란은 중국에 에너지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나라이다. 

- 513쪽 



중국은 머지않은 미래에 미국을 능가할 것이고 러시아는 냉전 시대 만큼은 아니라더라도 서유럽과 미국을 긴장시킬 수 있는 파워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며, 미국으로선 이런 일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미군은 국가 방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유럽, 일본, 한국 등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460쪽 



미군 철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미국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다. 즉 공화당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민주당에서도 나오는 이야기다. 밖에서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국내 재정 적자나 줄이고 나라 살림이나 잘해라는 것이 미국 내 지식인들의 바람이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군비 축소가 이야기될 것이고 주한 미군 감축이나 철수는 미국이 먼저 통보할 것이다. 전시작전권 문제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라면 당연히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인데, 이를 반대하는 게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이다. 그 중의 예비역 장성 한 명은 군사 기밀을 미국 회사에 돈을 받고 팔아넘겼으니...,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이 강력하게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걸까? 아마 주한미군 주둔비용 전체를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바 보수정권이라고 했던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미 미국 내에선 세계 여기저기서 치른 전쟁에 대한 저항이 심각하고 세계 곳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철수는 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조지 W. 부시는 성급하고도 오만한 전쟁을 벌여서 미국의 국력을 손상시켰고, 오바마는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다음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대외 관계에서 소극적으로 돌아선다면 이 세상 많은 곳이 보다 불안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세계를 책임지는 '자비로운 제국Benevolent Empire' 행세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너무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 519쪽 



그리고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슬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가 바로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이슬람극단주의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정책 실패와 함께 미디어 전쟁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유대인은 졌고 이슬람이 이겼다고 진단한다. 더 나아가 서유럽 내 이슬람 인구의 증가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유럽 전체가 이슬람 지역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다양성, 다원주의, 종교적 자유와 관용을 미덕으로 지키는 진보주의자들의 탓이다. 왜냐면 미국과 유럽의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이러한 미덕이 무슬림에겐 미덕이 아니며, 도리어 미국과 유럽 내에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또한 흥미롭게도 반유대주의가 서구 진보주의자들에게 넓게 퍼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또한 이슬람 세계에 대한 관용을 핑계로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된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테러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지만, 유럽 정치인들과 진보주의자들 때문에 무슬림 인구는 서유럽을 장악하고 있으며, 서유럽인들이 믿는 바 그 가치는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고.


책이 두껍다 보니, 서평도 길어지는데(실은 짧게 쓸 수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ㅡ_ㅡ;), 그냥 한 번 읽어볼 만하다는 수준에서 마무리할까 한다(아마 손에 들면 놓지 못할 것이다.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실은 보수주의자들의 책이 거의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소 놀랍고(반대로 서구 진보적 지식인들의 책은 곧잘 번역되는 것과는 반대로), 한국에서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어쩌면 현대 한국 사회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이상돈 교수를 야당에서 영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실은 야당이 서구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 정당에 가깝지만,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중도 좌파 정당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문단만 옮긴다. 


우즈는 하이에크가 '호황과 버블 폭발'을 반복하는 경제 사이클의 근본 원인은 중앙 은행에 있다고 설파한 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말한다. 1930년대 대공황 시절, 하이에크는 이자율을 낮춰서 경기 침체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하이에크는 침체Recession, 또는 공황Depression은 잘못된 투자 때문에 생긴 부작용을 교정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제 모습을 바로 찾는 것인데, 이자율을 낮추면 종국적으로 닥쳐올 붕괴Collapse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라고 오래 전에 지적했다. 

- 611쪽 



최악의 경제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한국은 몇몇 글로벌 기업에 의지한지 꽤 되었다. 지난 정권부터 유독 심해졌는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너도나도 욕을 해댔던 노무현 정부가 그나마 살만했고 이명박 정권 이후는 엉망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더 큰 일은 지금 정부에서 경기 활성화 정책으로 내놓는 것들이 원조 보수주의자라고 평가되는 하이에크가 반대한 정책들이라는 점이다. 정녕 보수 정권인가 싶다. 진보 정권은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아마 다음 정권은 정말 잃어버린 10년을 되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되살려놓으면, 그제서야 제대로 된 입과 펜을 가지게 된 언론들이 나서서 공격을 해대며 기자라는 자존심으로 펜을 들었다며 으쓱거릴 게다. 그리고 너도나도 비난을 하는 통에 국민들도 함께 욕을 해댈 것이고, 그들이 지금 어떻게 살았는가는 몇 년 후엔 다 잊어버릴 것이다. 이것이 한국 국민들의 잠재력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다음 정권도 계속 소위 말하는 보수 정권(미국의 관점에선 전혀 보수가 아닌)이 잡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무조건 다음 대선 때에는 야당이 된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웃긴 짓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 국민들의 잠재력을 오판하고 있다. 화려하게 가짜 보수 정권이 부활하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의 잠재력은 대단하다. 다들 지금 일동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 (아, 나는 정치 블로거가 아니야)


실은 한국은 정말 위험한 기로에 서 있는데,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자들과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정말 상황을 오판하고 있으며 한국의 미래를 진정 걱정하지 않는 듯 보이니, ... 거참, 내가 나라 걱정을 할 판인가. 이제 다시 40대 중반에 실업자 대열에 합류한 판국에. ㅡ_ㅡ;; 






공부하는 보수 - 8점
이상돈 지음/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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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엥에서의 주장 Positions(1964~1975)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지음), 김동수(옮김), 솔, 1991 








정치는 나를 열광시켰으며 나는 공산주의 투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철학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유물론과 그 비판적 기능, 즉 과학적인 지식의 편에 서며, 이데올로기적인 '지식'의 모든 신비화에 대항하는 기능, 그리고 신화들과 거짓말들의 단지 도덕적인 포고에 대항하여 그것에 대해 합리적이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기능이었다. - 44쪽 



* *


솔직히 말해, 이 글은 어색하다. 1991년 양장본으로 번역 초판이 나왔고 1996년 보급판 3쇄까지 나왔다. 보급판 3쇄, 내가 읽은 책이다. 내가 알기로 그 당시 보통 2,000부를 출판하였으니, 지금과 비교하여 많이 팔렸고 많이 읽혔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알튀세르가 사라졌다.


그 많던 독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내 앞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강제하던 선후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그 강제의 폭력성을 떠올릴 때면 그들이 저항하던 폭력적 사회와 그들의, 갓 들어온 신입생들과 소위 운동권에 대해 관심이 없던 동료 학생들을 향한 폭력성은 닮아있음을, 그리고 결국 그들이 이 사회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공범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맑스의 전(全)이론, 다시 말해 맑스에 의해 확립된 과학(역사적 유물론)과 맑스에 의해 열린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은 계급 투쟁을 그 중심과 핵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계급 투쟁은 맑스-레닌주의적 노동운동의 정치적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이론에 있어서, 그리고 맑스주의적 과학과 철학에 있어 '결정적인 고리'다. - 69쪽 



이십여 년 전에도 읽었을 위 문장을 다시 읽으니, 참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부터 생겨야 하는데, 솔직히 계급 의식을 만들기조차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아니 부르조아 -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이미 호소력을 잃은지 오래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용감하게 프로이트와 라깡을 마르크스 안으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르겠구나. 



왜 철학은 단어들을 두고 서로 싸우는가? 계급투쟁의 현실은, 단어들에 의해 '표현되는' '사고들'에 의해 '표현된다.' 과학적, 철학적 추론 속에서 단어들(개념,범주들)은 인식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철학적 투쟁 속에서 단어들은 또한 무기이고 폭탄이며 진통제이고 독약이다. 모든 계급투쟁은 때때로 한 단어의 편에 서서 다른 단어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요약될 수 있다. - 54쪽 



알튀세르의 이런 면 - 이론적 실천 - 으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단호하게 알튀세르의 이론을 거부한다(알튀세르의 제자들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이, 자끄 랑시에르 등이 있다).



자크 랑시에르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 박기순,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새롭고 다르게 사유하다> 중에서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261 



하지만 이 작은 책,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인 이 책이 읽혀야 한다면, 그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논문 때문이다. 아마 철학 전공자보다 영화나 미디어 전공자들이 더 많이 읽었을 이 논문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꽤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 짧은 논문을 통해, '생산 관계들, 즉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들의 재생산'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이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 국가가 허용하는 폭력에 의해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 - 군대, 경찰 등 - 과 달리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하며, 종교(다양한 교회들의 체계), 교육(공적, 사적인 다양한 '학교들'의 체계), 가족, 법률, 정치(다양한 정당들을 포함하는 정치적 체계), 조합, 커뮤니케이션(잡지, 라디오, TV 등), 문화(문학, 예술, 스포츠 등)에 걸쳐 있다고 말한다(실은 그냥 이 사회 전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결국 기존 체제는 억압적 국가 장치로 관리되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유지된다. 여기에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과정'이 포함되는데, 이는 '완전히 혼자서 활동'하도록 하면서 '종속에 의해서, 종속을 위해서만' 존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각각의 개인들이 자유로운 주체임을 알게 되는 것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각성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이고 이 호명은 보다 거대한 주체(신이거나 국가이거나)에 의해서다. 즉 누군가를 불러줌으로써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올리고 그 주체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심는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통해 기존 생산관계는 확대, 재생산된다. 어쩌면 이러한 확대, 재생산 구조에 저항하고 해체하는 것을 알튀세르는 이론적 실천으로 여겼는지도. 





그 외의 논문들, <프로이트와 라깡>,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맑스주의와 계급투쟁>,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도 읽을 만하다. 하지만 이런 책에 관심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싶고, 이 책은 이제 시중에서 구하기도 어려우니, 다시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 지도 의문스럽다. 동시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나 접근이 아니라, 그냥 정치 일반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면 충분해 보인다. 그 정도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니까. 그냥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도 지금은 이상한 시대다. 보수라는 단어까지 부끄러운 시대가 되었으니, 마르크스주의는 그냥 신기루다.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인데, 이제는 그 단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생각할 때, 이명박 정권은 보수를 표방하고 들어선 첫 정권이었지만 독단적인 국정 운영과 부패, 비리 의혹으로 얼룩져 실패한 정권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런 오점을 청산하고 태어난 합리적인 보수정부이기를 기대했건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봐서는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한 정권은 부패했고, 또 다른 보수정권은 무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무하다. 

- 이상돈, <<공부하는 보수>>, 책세상, 12쪽 



거참, 이런 시대에 알튀세르라니!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래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영문 번역이다. 관심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연구를 위한 노트 (영문 번역)



*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은 랑시에르를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E.P.톰슨은 아예 책까지 냈다.<<이론의 빈곤>>(책세상, 2013). 알튀세르에 대해 조금 웹 서핑을 해보다가 찾았다. 직장인이다 보니, 이런 책이 나오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렇고, 요즘 주머니 사정도 좋지 않은데, ... ㅡ_ㅡ;; 




아미엥에서의 주장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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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빨갱이'라는 단어가 유행입니다.  아직도 이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이 단어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권과 주류 미디어의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반성하지 않겠지만요)

이 단어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단어이며, 무수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외국으로 내 몰았고, 많은 가족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내었던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좌파, 우파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할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한국의 대다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아래 도표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한겨레21에서 작년 초봄에 실시한 조사 결과입니다. 저는 이 도표를 보고 난 다음, 해방 직후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 조사가 떠올랐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글이라 어디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해방 직후 미 군정에서는 남한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을 조사하였고, 놀랍게도 대다수의 주민들이 사회주의자들이였다고 합니다. 아마 아래의 도표와 같았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850.html 



결국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견지에서 '빨갱이'와 '좌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빨갱이=좌파'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빨갱이'라는 이 모호하고 실체적 정의가 불분명한 단어로 인해 '좌파는 빨갱이'가 된 지금 한국의 풍경은 너무 슬프고 화가 납니다.
 
위 조사 결과에 따른다면,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좀 약한 빨갱이요, 민주당 및 야당, 재야 인사들은 좀 심한 빨갱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 정치판이나 지식인판은 모두 빨갱이 세상입니다. '빨갱이'라는 단어를 지금도 쓰고 있는,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무식한 보수 우익 단체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실은 그 단체에 몸 담고 있으신 분들도 한번 Political Compass(www.politicalcompass.org)를 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말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부터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일까요? 잘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빨갱이의 탄생'이라는 연구 서적이 있습니다. 책값이 비싸고 제 전문분야와는 큰 연관이 없는 전문서적이라 사서 읽지 않았습니다만, 주기적으로 이 책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은 이 단어의 시작과 이 단어가 가진 정치적 의미와 비극상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참 슬프고 비극적인 한국 현대사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이끌어 간다는 여당 정치인들과 보수 언론인들은 아직도 '빨갱이'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꺼리김 없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누죠. 확실히 과거 지향적입니다. 한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기업인들은 내일 경제 환경이나 비즈니스 환경이 어떠니 하고 있는데,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과거를 노래하고, 여기에 현혹된 대중들은 그들의 노래하는 과거를 따라 합창하는 거죠. 여기서 기업인들도 어쩔 수 없이 과거 합창을 따라 하곤 합니다.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기업인들이야 시장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아래는 출판사의 리뷰를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간단하게 나마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빨갱이'의 탄생
김득중




1. 왜 ‘여순사건’인가?

기존 역사 서술에서 ‘여순반란’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연결을 갖고 남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로 이해된다. 이러한 인식은 여순사건 발발 당시, 이승만 정부가 발표하고 언론 매체가 보도한 여순사건 인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연계된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고 발표했고, 반란자들이 수많은 인명을 살상 했다고 규정했다. 언론은 정부 발표문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고, 더 나아가 여수와 순천이 어떻게 지옥으로 변했는지, 봉기군이 얼마나 많은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는지, 국군은 얼마나 용맹하게 반란 진압에 나섰는지를 상세히 보도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인식은 지금까지도 거의 변화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적 파괴자가 되며, 선량한 ‘우리’는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만 피해를 당한 사람이 된다. 반란으로 촉발된 ‘혼란’은 그것이 더 하면 더 할수록, 이를 바로잡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강력한 진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입증한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는 ‘적’과 ‘아’를 선명히 구별하는 냉전 반공주의적 해석 틀을 갖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이 사건을 초래한 사회적 구조와 정치적 갈등의 과정과 성격, 사건의 전개 과정과 반란의 이유, 사건 이후 일어난 체제의 변화와 그 결과, 그 과정에서 무참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고 ‘빨갱이’로 낙인찍힌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들은 완전히 은폐되었다. 그렇다면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여순사건은 분단 정부수립과 국가 건설 과정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주는 감춰진 기반이자 반공체제를 탄생시킨 한국 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이다. 따라서 여순사건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국가 건설’ 과정과 성격에 대한 이해, 한국 민주주의와 ‘정치’에 대한 이해, 한국 사회에 그 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폭력’과 그 구조에 대한 이해를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여순사건에 대한 공식 역사의 왜곡과 편향, 그리고 역사적 진실과 의의에 접근하길 꺼려하는 태도를 넘어서 여순사건의 다층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이 연구가 주목하는 것은 여순사건 이후 진압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적나라한 국가폭력을 통해 반공체제가 수립되는 국가 건설과 국민 형성 과정이다. 한국 사회는 언제부터 반공을 제일의 국시(國是)로 삼고, 반공을 애국이라 생각하게 되었을까? 공산주의자가 모든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여겨져 멸시되고, 심지어 죽여도 되는 비인간, 절멸시켜야 하는 악마적 ‘종자’로 비약해 사회로부터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말하자면 이 연구는 ‘빨갱이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에 대한 연구와 비판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공산주의자를 멸시하고 심지어는 죽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역사 연구의 답변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2. 한국 사회에서의 ‘빨갱이’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이 용어는 반대자들을 침묵시키며, 정치적 정당성을 일거에 박탈해버린다. 토론과 대화의 정치를 실종시키는 ‘빨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이라는 용어와는 다른 쓰임새를 갖는다. 일제 시기의 공산주의자는 독립을 가장 앞장서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해방 직후에도 공산주의자는 진보적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좌익세력을 ‘빨갱이’로 지칭하였고, 빨갱이를 죽여야만 애국하는 것으로 바뀌었을까? ‘빨갱이’란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1948년 여순사건을 통해서였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란 단지 공산주의 이념의 소지자를 지칭하는 낱말이 아니게 되었다. ‘빨갱이’란 용어는 도덕적으로 파탄 난 비인간적 존재, 짐승만도 못한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를 천하게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는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존재,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땅한 존재,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존재, 죽음을 당하지만 항변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3. 여순사건과 ‘빨갱이’ 색출

1948년 10월 19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만에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제주도토벌 출동반대’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여수·순천·광양·구례·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군인봉기에 호응한 지역 좌익세력과 학생·주캹들이 합세하면서 ‘대중봉기’로 발전했다. 여수?순천 등지에서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식량배급, 친일파 반역자 처단 등의 정책을 폈다. 정부와 미군은 진압작전에 나서 10월 23일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점령했다. 당시 작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미군(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작전·인사·보급을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주도했다. 하지만 봉기군은 지리산 등의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했다.

진압군은 각 지역을 점령한 뒤, 주민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협력자 색출을 시작했다. 우익, 경찰에게 지목된 지역주민들은 재판도 없이 즉결처분 되었다. 중학교 교장, 지방 검사 등은 봉기군을 피해 숨어있었는데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었고, 한 국회의원은 인민재판에 참가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의 협력자 색출 광경은 국가폭력을 통한 ‘편 가르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적으로 규정된 사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협력자 색출 과정과 대량 학살은 누가 ‘민족’과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민족 구성원의 자격 심사과정이었다.

반란 주체들이나 ‘주체들로 간주된 자들=협력자’는 정권에 의해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 존재, 건전한 사회 건설과정에서 뿌리 뽑혀져야 하는 잡초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다. 계엄법도 없이 선포된 위헌적 계엄령은 주민들에 대한 ‘살인 면허장’이었다.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은 전 지역주민을 반란 협조자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여순사건은 단지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봉기군에 죽은 주민들보다 정부 진압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이 훨씬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좌익은 사람을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선전되었다. 이제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진압 작전이 끝난 뒤, 언론·문인·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참혹한 학살을 자행한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이며, ‘악마’이자 ‘비인간’이라고 주장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 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두려움, 이에 동조한 대중들에 대한 공포 그리고 저항의 가능성을 봉쇄해야한다는 압박은 봉기 지역 주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하게 하였다. 폭력의 대상은 공식적으로 설정된 외부의 적(공산주의 집단인 북한)이 아니라 내부의 대중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4. 대한민국과 반공체제의 형성

여순사건은 대중 억압 체제로서의 반공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로 활용되었다. 여순사건에서 경험한 좌익 세력과 대중운동에 대한 공포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작동된 국민 형성의 논리는 대한민국을 반공사회로 만들어 가는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남한 반공체제의 기본적인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제시했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실질적인 기반이 된 구체적인 방식은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헌법’과 1948년의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제주사건과 여순사건 등에서 전면화 된 ‘국가폭력’과 ‘숙청의 정치’였다.

여순사건을 통해 전면적으로 등장한 국가폭력은 ‘빨갱이’를 없애기는커녕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냈다. 국가폭력이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 그 앞에선 주체들은 모두 잠재적인 ‘빨갱이’로 간주되었고, 폭력의 대상이 된 자가 ‘빨갱이’로 규정되어야만 그 폭력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두 번째는 국가보안법, 계엄법 등의 법제적 폭력이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념적 측면과 더불어 신체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생활을 재조직하였다. 촘촘하게 구축된 사회통제의 그물망은 반공체제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게 한 주요한 원천이었다. 감시받는 존재, 통제받는 존재로서의 대중은 잠재적 적으로 취급되었다. 이승만 반공체제는 사실상 대중 억압 체제였던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라는 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인식하는 과정은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국민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하였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기본적인 자격 요건이었다.

대한민국은 국가에 대한 헌신의 증표로써 국민들의 땀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땀’이 국민으로의 포섭과 충성의 증표라면, 배제된 쪽에는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의 역사는 장미빛 대로가 아니었으며, 그 길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는 특정한 이념을 국가 정책으로 선택했다는 데 있지 않다. 반공이라는 잣대로 현실에 존재하는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 자체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폭력을 통해 국민 형성의 진로를 찾아갔다는데 반공주의의 문제가 존재한다.

5. 여순사건이 남겨놓은 미해결의 숙제들

궁극적으로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사고하게 한다. 제헌헌법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 달 뒤에 발생한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방식은 모든 권력은 권력자에게 있으며, 권력을 가진 자가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반공체제 속에서 수십 년 간 반공은 의문시되지 않는 가치였다. 반공은 ‘공산주의를 반대 한다’라는 것 이외에는 그 안에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울림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공허함과 유동성 때문에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다.

61년 전에 일어났던 여순사건이 던졌던 문제들은 지금도 온전히 극복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가 여순사건에서 배우고 반성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순사건에서 나타났던 국가폭력의 문제, 국민 형성의 논리, 반공주의 문제는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기와 결합된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유예되었고, 헌법에 제시된 인민 주권은 언제나 통치권자의 주권에 의해 제약되었다. 여순사건이 역사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의 정치적 문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근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순사건이 남긴 유산을 극복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롭게 되고 더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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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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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