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4

2020.05.21. 드가와 함께 당구장에서

Billiard Room at Menil-Hubert, Edgar Degas, 1892, 오르세미술관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잠을 잘 때. 나머지는 조금 힘들거나 많이 힘들거나, 아니면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걱정, 두려움, 후회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다. 아주 짧게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기도 하는데, 그건 사랑에 빠졌거나 사랑을 꿈꾸거나, 사랑에 빠진 듯한 봄바람, 봄햇살, 봄날을 수놓는 나무 잎사귀 아래 있을 때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극히 드물어서 기억되는 법이 없다, 없었다. 원근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 인상주의자들에게 원근법은 고민거리였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원근법을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원근법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건 우리가 보는 방식..

저 너머 어떤 새로움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공평한 걸까. 내일의, 어떤, 발생하지 않은 일이 현재, 혹은 과거에 미쳤던 영향은 대단하기만 하니, 내일을 아는 이 없다고 해서 세상이 공평한 것은 아니다.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은 인과율(law of causality)을 바탕으로 움직이며, 우리 모두는 인과율적 문명의 노예다. 우리 문명은 인과율 위에 축조되었고 우리 사고도 인과율을 벗어나 한 발짝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각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 이 노예 근성은 현 문명에 반하는 모든 혁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던) 운명에 순응하는 개인이라는 표상이 생기고, 모든 이들 -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나이 든 이나 아..

바로크 - 근대와 중세의 종합

찰스 테일러의 에 나오는 주석인데, 바로크Baroque 문화, 혹은 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어 이렇게 메모해 둔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문화사나 지성사에 있어서도 바로크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고대와 대비되는 근대, 그리고 현대적 삶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근대, 그리고 바로크는 그 근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화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찰스 테일러는 루이 뒤프레(Louis Dupre')에 기대어 바로크에 대해 언급하였고, 아래 내용은 그 각주이다. 그리고 이 글은 기억의 보조적 수단으로서의 저장이다. 이 각주에서 엿보이는 뒤프레는 바로크에 와서야 중세적 질서가 근대적 질서 속에 종합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합의 긴장이 바로크 양식을 이룬다는 것. 일견 타당하기도 하지만, 너무 중세적 질서의 영향력을 ..

The dark side of reason

질서는 언제나 선행하는 무질서를 가진다. 그리고 그 질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다시 무질서가 도래한다. 우리가 이성(reason)이라고 부른 것의 역사는 고작 몇 백 년도 되지 않으며, 그 이성대로 살았던 적은, 그 이성의 빛이 전 세계에 고루 비쳤던 적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시대에 이미 반-데카르트주의자가 있었다. 현대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일군의 영국 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길에 편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수선한 마음이 지나자,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어수선해졌다. 어수선한 마음이 지나자, 어수선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갈 뿐이지만, 누군가는 교통 정리를 해줘야만 한다. 마치 이성처럼. 칸트가 열광했듯이, 뉴튼이 그런 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