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4

12월 23일 사무실 나가는 길, 나는.

방배동으로 나가는 길, 중대 앞 버스 정류장 인근에서 효자손을 든 5살 무렵의 꼬마 여자아이와 길거리 카페 문 앞 긴 나무 조각들로 이어진 계단을 네모난 카드로 뭔가 찾는, 흰 머리가 절반 이상인 중년의 여자가 실성한 듯 두리번거렸다. 어제 불지 않던 바람이 오늘 아침 불었고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년의 여자와 꼬마 여자아이는 제 갈 길을 잃어버린 듯했다. 겨울 추위는 제 갈 길 잃어버린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는다. 지구의 겨울은 거짓된 길이라도 제 갈 길을 가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인류의 역사도 길 잃은 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데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발목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호랑이 무늬의 앙고라 자켓을 입은 꼬마 여자아이는 추위에 새하얗게 변한 얼굴 위로,..

초겨울의 빛깔

내 서재가 있는 곳은 김포공항 근처의 작은 빌라 4층이다. 창 밖으로는 빼곡히 들어차 있는 빌라들의 옥상과 나즈막한 산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 12월말의 햇살이 건조한 색채의 빌라 외벽에 닿아 미세한 소리들을 만들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들이 오래된 먼지에 뒤섞여 내 빈곤한 영혼과 내 거친 폐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지만, 실은 나는 '아름다운 침묵'을 배우고 싶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순수한 열망이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백 년 전 소쉬르를 기억해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날 멘델스존과 자클린 드 프레는 사소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연말 근사한 공연이라도 한 편 보러갈 생각이었는데, 불행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