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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리퀴드 러브 Liquid Love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권태우, 조형준(옮김), 새물결 




예전같지 않다(그런데 이 문장은 식상하면서도 낯설다. 여기서 '예전'이란 언제를 뜻하는 것인가, 정작 나 자신도 그 때를 지정할 수 없는). 나도, 이 세계도. 


세상이 바우만이 바라보는 바대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변한 세상을 정확하게 바우만은 읽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토록 절망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리라곤 생각치 않았다. 적당하게 우울할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우리 시대에 아이는 무엇보다 정서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부모가 되는 기쁨은 자기 희생의 슬픔 그리고 예견할 수 없는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과의 일괄 거래 속에서 온다.  - 113쪽 



그는 모든 것을 소비 사회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하고 재배열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그렇게 해석하고 이제 관계가 아닌, 언제나 연결/단절을 선택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에 사람들이 놓인다고 진단한다.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소비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Louise Franc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외로운 사람들에게 디스코텍이나 싱글 바는 아득한 추억"이라고 그녀는 결론 짓는다. 그들은 그러한 곳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한 친교술을 충분히 배우지 않았다(그렇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 161쪽 


사람들, 아니 우리들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유대를 맺었던 예전 관계가 무너지고 파편화되었는가를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마트에서 소비 생활을 하듯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성도 사랑도 그렇게 소비된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적 친밀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가상적 인접성의 테두리 안에서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방으로 들어가 혼자 지낸다.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 


소비 생활은 가벼움과 속도를 좋아한다. 또한 그것들이 조장하고 촉진키켜 줄 새로움과 다양성을, 소비하는 인간의 삶에서 성공의 척도는 구매량이 아니라 구매 빈도이다. - 131쪽 


소비사회와 도시는 함께 성장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즐거운 소비 생활로 위로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공동체(커뮤니티)는 가상의 의미로, 상상된 채로 머물고, 어쩌면 현대인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현대국가는 '무국적자들 stateless persons', 불법체류자들 sans papiers 그리고 살 가치가 없는 삶unwert Laben이라는 이념과 동시에 등장했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homo sacre' 즉,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한계 밖으로 내던져진 인간은 누구든 면제시키고 배제할 수 있으며, 어떤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의미도 없기 때문에 목숨을 빼앗아온 어떤 벌도 받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주권자의 권리를 궁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후대에 환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8쪽 


현대 소비 사회의 사랑, 성, 가족, 사회와 도시를 절망적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서 딱 멈춘다.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뿐, 그저 절망할 뿐이다. 책 후반 칸트를 언급하지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터뷰 기사를 여러 번 읽었으나, 그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초반 잘 읽히지 않았으나, 중반이 지나자 술술 읽혔다. 대체로 어딘가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어조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리처드 세넷의 초기 저작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반부에서 칸트를 인용하는 건, 다소 의외였다. 하버마스에 대해선 이상주의적이라 여기는 듯하다.


책을 읽고 난 다음 바우만의 주저인 <<액체근대>>를 구하긴 했으나, 글쎄다. 도리어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세넷의 <<공적 인간의 몰락>>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다. '러브'라는 단어로 인해 사랑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분석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책은 읽을 만 한데, 이 책보다는 바우만의 다른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바우만을 아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 드는 기분은 꽤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리퀴드 러브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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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 가득 먼 대륙에서 건너온 향이 퍼진다. 사치스럽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을 때 처음 마셨다는 이 음료는, 민비가 좋아했고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에서는 몇몇 사람들에게나 알려졌던 그런 사치품이었다. 이제 불과 백 년 남짓 흐른 것인가.

커피의 역사는 흥미로운 사치품의 역사다. 아직도 몇몇 원두들 - 코피루왁, 블루마운틴 등 - 은 그런 사치품에 속하고, 몇몇 애호가들로 인해 꽤 고급스러운 취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너무 어중간해서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전문가스럽지 못하고 아마추어하고 하기엔 너무 아는 척해서 핀잔을 듣기 일쑤다. (아래 내용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은 커피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생각보다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한 이 글을 나는 왜 적었을까.)

커피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커피 두 스푼, 프리마(상표가 그대로 고유명사가 된 커피 크림) 세 스푼, 설탕 두 스푼으로 이루어지는(이는 각자의 취향이 있다) 밀크(?) 커피에서부터 그냥 커피만 두 세 스푼을 넣는 블랙 커피, 일회용 커피 믹스로 탄 커피, 먼지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버스 정류장 옆 자판기 커피까지. (이런 버스 정류장 보기도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전 국토의 도시화가 진행되어 이젠 시골 풍경이란 것이 사라지고 있으니..)

커피를 마시는 때도 여러 가지다. 인연에도 없는 낚시를 가서 어류라고 불리는 생명체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쉬지 않고 마셔되는 불쾌한 커피부터, 사랑하는 연인과 눈빛을 뒤섞으며 마시는 낭만적 커피, 기말 시험을 준비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어느 아침의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커피,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원고를 쓰던 어느 새벽의 쓸쓸한 커피까지.

참으로 많은 커피들이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수많은 이들의 위로나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왜 고통인지는 각자의 공상에 맡기기로 하자) 

나도 어느 새 여러 커피들을 전전한 끝에 정착한 것이 드립식 커피다. 이 방식의 매력은 손쉽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커피 원두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몇 가지의 장비가 필요할 뿐이고. 

준비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경제적 형편에 따라서는 가격이 제법 될 수도 있다.  먼저 드리퍼(Coffee Dripper)가 필요하다. 나는 두 개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대형 마트에서 산 드리퍼와 칼리타 드리퍼이다. 당연히 마트 드리퍼가 저렴하지만, 막상 두 개를 같이 사용하다 보니, 마트 드리퍼로 내린 커피는 결정적으로 맛이 없다.

이유는 아래 유리 서버로 내리는 부분에 나 있는 구멍이 칼리타 드리퍼보다 작다. 그렇다 보니, 가늘고 느리게 물을 부어도 금세 물은 고이게 되고 커피 맛은 둔해지고 탁해지고 거칠어진다. (이런 맛을 다르게 표현하면 커피 맛이 무거워지고 진해지며 거칠 매력을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으니, 이걸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다.)

(역시 취향의 세계는 말 장난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테니,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래 뜨거운 물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유리 서버가 필요하다. 굳이 커피 전문 샵에서 파는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위의 드리퍼가 올려지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냥 머그잔 위에 드리퍼를 올려놓고 조금씩 커피를 내려 먹어도 상관없다.

그 다음은 주전자! 드립 전용 포트가 필요하다. 이건 무척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이 녀석의 가격은 최소 몇 만원 이상이다. 심지어 전문 브랜드 제품은 십만원 이상 나가고, 비슷한 모양의 대형 인터넷 쇼핑몰 제품도 최소 몇 만원 수준에서 구할 수 있다. (실은 주전자 주둥이가 긴 만원 대 녀석도 있긴 하지만, 이것도 전문 제품과 비교해 주둥이에 난 구멍 크기가 큰 관계로...)

이렇게 장비(?)들이 준비되면, 원두 커피를 구입하면 된다. 대형 인터넷 쇼핑몰이나 동네 커피숍을 이용하자. 하지만 동네 커피숍에서는 200g에 무조건 만이천원 이상 줘야 한다. 하긴 100g에 육칠천원 선을 하기도 하지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였을 경우에는 400g(200g + 200g)을 만오천원 이내로 구입할 수 있으며, 여과지는 서비스로 준다. 주문할 때는 꼭 드립용임을 명시해야 한다.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커피 원두를 어느 정도 크기로 부수는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동네 커피샵 - 원두 로스팅까지 하는 샵에서 100g이나 200g 정도 구입해서 마시는 것이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로스팅한 날짜와 원두의 상태 등을 모두 감안해서 골라야 할 것이다. 나도 몇 군데의 샵을 전전한 끝에 요즘에는 인터넷쇼핑몰이다. 하긴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몇 곳을 전전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면, 뜨거운 물을 준비에 주전자(드립전용포트)에 담아 커피를 내리도록 하자. 이 때 커피 원두의 양은 몇 번의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각기 원하는 커피 농도가 다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서 가늘고 천천히 물을 붇는 것이 좋으나, 이는 조금의 훈련이 필요하고, 심지어 오른 쪽으로 돌리면서 내려야 된다고 하기도 하고 왼 쪽으로 돌리면서 내려야 된다고 하기도 하니, 각자 알아서 편한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커피 원두에 골고루 물기가 스며들어 커피를 추출하기 위한 것이니, 천천히 돌려가며 뜨거운 물을 붓는 것은 필수적이다. 


드립용으로 부숴진 원두커피는 구입하자 마자, 바로 냉동실에 넣어 보관한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원두 커피의 맛과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밀폐 용기에 담아 따로 보관하거나 조금씩 구입해 커피를 내려 먹는 것이 좋다. (밀폐용기는 다이소에 가면 몇 천원에서 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실온 보관을 추천한다. 또한 냉동실에 있다가 나온 원두로 실온 상태로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드리핑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역시 신선한 드립용 원두커피를 조금 사서 빨리 마시는 것이 드립 커피를 즐기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적게 된 건, 이 글을 적기 전에 이런 소재의 글이 꽤나 유용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인데, 막상 적고 보니 지루하고 유용한 것같지도 않다. (재미없는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이미 드립 커피 마실 사람들은 알아서 다 마시고 있을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커피숍을 가진 나라에서 단골 커피숍 하나 쯤을 있을 테니 말이다.

9세기 무렵 이디오피아에서 시작된 커피가 유럽에 본격 전해진 것은 17-8세기 네덜란드 무역상들을 통해서이다. 그 사이 여러 무역상들을 통해 유럽에 전파되었으나,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으며, 또한 이교도의 음료라는 이유로 금지된 것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 글을 적다 보니, 내려 놓은 커피가 다 식었다. (그런데 식은 커피를 전자렌지에 데우면 확실히 맛이 없다. 차라리 다시 내리는 편이 좋으니, 렌지에 데우는 행위를 하지 마시길.)


* 파란 색으로 덧붙여진 글은 다른 곳에 올린 포스팅에 커피 애호가가 댓글을 달아주어, 이를 반영한 설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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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칸트의 물 자체는 라깡의 현실적인 것처럼 상징화에 저항하는 암호이고, 신(그에 관해서는 우리는 일정한 속성들을 서술할 수 있다)보다도 더 수수께끼적인 것이고, 한갓 부재의 기호이다. - 테리 이글턴, '미학사상' 중에서



약간의 스트레스,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책읽기는 예전만 못하고,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문장은 헛된 상상에 미끄러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있다. 상상의 나래란, 마치 닿을 수 없는 흰 구름과 같아서,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변화라는 것이 적당한 자극이 되어, 하루하루가 모험이 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테리 이글턴의 책을 펼쳐보다, 위 문장을 되새겨 읽었다. '물 자체 = 부재의 기호'라는 테리 이글턴은,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일까. 거대한 부재 앞에서 서서 눈 앞에서 보이는 물질적 현실과 싸우는 어떤 것을 연구하고 있는 것일까.


추억에 대한 낡은 책 속에서 순결한 거친 표면을 가진 그녀의 음악을 끄집어 낸다. 시드셀 안드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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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숲'



문명화된 숲


어렸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을 뒷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내 호기심을 자극하던 뒷산 너머에 있을 그 무언가, 미지의 세계. 거대한 바다가 있거나 반짝이는 조명으로 찬란한 대도시이거나, 아니면 내가 세계 최초로 발견하게 되는 외계인 마을이거나. 그리고 결국 나는 뒷산에 오르고 만다. 오전 일찍 집을 나선 나는 마을 뒤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키에 적당한 길이로 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사용하면서. 그렇게 몇 시간을 올라갔을까. 산 정상은 보이지 않고 좁은 길 흔적마저도 사라진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새들 소리만 들리고, 눈앞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 속으로 가느다랗게 내려앉은 햇빛뿐. 이 때쯤 되면 나를 지배하던 호기심은 어디론가 뒷걸음쳐 그 모습을 숨기고, 숲 속은 별안간 두렵고 무서운 어떤 것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올라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뒤로 돌아 마을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지만, 어느 방향에서 올라온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고 등 뒤 공포의 크기는 시간이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면 갈수록 더 커져만 간다. 산 정상으로부터 물들어가는 어둠이 산 아래까지 스며들었을 무렵, 겨우겨우 마을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하게 되고 눈앞에 보이는 마을 불빛을 보며 안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안전한 문명의 불빛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자연과 안전하고 아늑한 문명의 대비를 최초로 경험한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산행을 하더라도 등산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는 가지 않게 되었다. 어렸을 때의 이 사소한 경험은, 실은 오래된 ‘안전한 문명과 야만적 자연의 대비'다. 가령 중세 유럽의 ‘숲’은 ‘가상적 혹은 현실적인 위협과 위험으로 가득했다.' 밤에 늑대로 변신하는 도깨비들이 출현하였고, 야수와 반야만인이 살고 있었다. 그 곳은 ‘장원과 장원, 지방과 지방 사이의 변경 지대였으며, 특히 전혀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한 가공할 만한 어둠으로부터 굶주린 늑대들이며 산적들이며 약탈적인 기사들이 갑자기 출현하였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서양 중세에 있어서 모든 진보는 가시덤불과 소관목, 또는 만일 불가피하거나 기술과 장비가 허용된다면, 거목과 처녀림, 페르스발의 ‘황량한 숲’, 단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침침한 숲’에 대한 개간과 투쟁과 승리의 결과이다'. (자크 르 고프, <<서양중세문명>>, 유희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2년, pp. 155~158 참조)

자크 르 고프가 언급하는 바의 그 ‘진보’는 12세기 고딕(Gothic)을 꽃피우게 하였으며, 근대의 정신(Modernity)이 되었다. 이제 숲, 혹은 자연은 인간이 개척해야 되는, 개척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이후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는 자연과학은 이러한 정신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야만적 자연은 그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저 밝게 빛나는 이성의 빛 앞에서 자연은 아무런 힘 없는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네덜란드 바로크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문명화된 자연이다. 인간의 힘 앞에서 그 본래의 원초성, 야만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문명 앞에서 나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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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더르트 호버마
<데펜터의 풍경>
목판에 유채, 53.3*71.7cm, 1662년~1663년경
네덜란드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숭고한 어떤 세계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성의 빛으로 포섭될 수 있을까. 한 때 그런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시대가 있었으니, 그 시대가 바로 바로크 시대였다. 뉴튼과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바흐와 렘브란트로 이어진 그 시대에 인간은 신의 진리를 알아챌 수 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 유일한 존재의 역사는 신의 진리를 알아도 시간 속에 놓여진 운명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었다. 계몽주의 시대를 살다간 칸트는 ‘우리는 결코 물 자체(Ding an sich)가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없고, 사물이 우리들에게 현상하는 대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금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높이 솟아 방금이라도 내려앉을 듯한 험한 절벽, 번개와 우뢰를 품고 유유히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자랑하는 화산, 황폐를 남기고 지나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는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러한 것들이 가지는 위력과 비교해서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한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될 뿐이다.
- 칸트, <<판단력비판>>, 이석윤 역, 박영사, 1996년 중판, p.128


칸트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연은 숭고한 것이다. 그에게 숭고미는 문명의 빛이 닿지 않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한 자연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킨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숭고한 자연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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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떡갈나무 숲의 대수도원 묘지>
캔버스에 유화, 110.4*171cm, 1809년경
베를린 국립 미술관.


낭만주의자들에게 자연은 지친 우리 영혼을 쉬게 해주는 안식처를 넘어 기독교의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신적인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된다.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가장 막강한 대안이요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범유럽적 경향이었으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자연에 대한 숭배가 종교적인 것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자, 숭고한 자연의 모습은 몇몇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소박하고 친근하며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19세기 후반 영국 라파엘 전파와 프랑스 인상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후대 미술사가들의 극단적인 평가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존 에버릿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숲 속 개울물 위를 떠내려간다. 그녀의 얼굴은 당혹스런 슬픔으로 가득 차 있고 그녀의 주검 주위로 버드나무와 데이지꽃, 장미와 제비꽃 등 낭만주의자들을 매혹시켰을 꽃의 상징들로 장식되어있다. 이제 숲 속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흘러가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여기에 비해 인상주의자들에게 숲은 너무 건조하고 딱딱하며 지나치게 쓸쓸한 어떤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캔버스에 유화, 76.2*111.8cm, 1851년경
런던 테이트갤러리.



(*월간 <숲> 8월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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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도서관에서 가지고 간 책들을 읽었다. 쿤데라의 <불멸>을 다 읽었고 창해 ABC북 시리즈의 한 권인 <베르메르>와 지성의 샘에서 나온 아담한 사이즈의 <칸트>를 읽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칸트>를 읽는 몇 십분 동안 너무 집중을 한 탓인지, 지금 머리가 무척 아프다.
여기 몇 가지를 메모해 둔다.


  1. 불멸

  밀란 쿤데라의 소설 이름이다. 바흐친이 말한 다성성, 또는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가 등장하는 이유는 허구와 실재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매우 철학적인 통찰을 담고 있는데, 형이상학에서 문제되는 가상과 본질의 문제와 연관된다. 이는 다시 변증법적 순환과 연결된다.
 
  2. 베르메르

  베르메르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관능적이다. 이러한 관능성은 로코코와는 틀린데, 로코코적 관능성은 보다 직접적이라면 베르메르적 관능성은 보다 은유적이며 치명적이다.

  3. 칸트

  표상과 관련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미메시스(모방)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칸트 철학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며 논리적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감각적인 부분, 육체적인 부분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중세철학과 많이 닮아있다. 이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혁명적이긴 하나, 그 이전의 철학과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여러 징표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칸트에서는 감각적인 부분, 육체적인 부분, 즉 보다 직접적인 부분에서 시작해 그것이 어떻게 인간 오성의 개념과 연결되는가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물자체의 세계는 인간 오성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신의 세계는 아예 배제해버렸다. 쿠자누스가 인간의 언어로 신의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며 그 시작을 알렸고 칸트가 그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겔은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고 천명해버린다. 이를 통해 헤겔은 근대적 정신의 한 극점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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