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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만남 Une Rencontre 
밀란 쿤데라(지음),한용택(옮김), 민음사 



1. 
에밀 시오랑(치오란), 아나톨 프랑스, 프란시스 베이컨,  셀린, 필립 로스,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 밀란 쿤데라가 만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이 산문집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낯선가는 경험해본 이만이 알 수 있으리라. 좋아한다는 그 고백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짓게 만들고 나를 일반적이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결국 기괴한 사람으로 만드는가를.  
 

그리고 치오란은 어떤가! 내가 그를 알게 된 시절부터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인생의 황혼기에 블랙리스트에 자리 잡기 위해 이 리스트에서 저 리스트로 돌아다니는 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징낳아 그의 앞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언급했을 때, 그는 내 귀에 대고 짖궂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놀릴 거예요!"라고 말이다. - 71쪽 

  
에밀 시오랑과 아나톨 프랑스를 알고 읽어본 이만이, 그리고 밀란 쿤데라를 알고 있는 이만이 위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독자는 한정되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의 수는 줄어들 테지. 


  

- 이 책에서 언급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는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인데, 얼마 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에밀 시오랑의 책은 3권이나 번역되었다. 허무주의적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로 온 이후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활동하다가 죽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필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한 몇 되지 않는 이로 손꼽히지만, 번역된 책에서는 이를 온전히 느낄 수 없고 다만 그의 도저한 허무주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2. 
"한 쪽에는 그 어떤 열정도 생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소심한 사람들, 이성적으로 사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논증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보이며, 감성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자들은 늘 유죄를 선고하곤 했다."
- 아나톨 프랑스, <신들은 목마르다> 중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장례식이 프랑스 국장(國葬)으로 치러지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톨 프랑스에 대한 기묘한 침묵에 대해, 심지어 아나톨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시대에 뒤쳐지고 취향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아나톨 프랑스를 인용하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감정적인 비판을 꼬집는다. 

하지만 비단 프랑스 지식인만 그럴까. 위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을 떠올렸다(실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마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증하는 듯 싶지만(왜냐면 현란한 이론가를 인용하거나 뭔가 그럴싸한 주의, 주장으로 언어를 구사하기에), 결국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판단내리니까.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이라는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엔 보수란 없다. 보수적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 한국에선 진보적이라고 봐야할 수준이다) 


3.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은 위대한 유럽 소설가이다. 그의 예술에 첫 번째로 영감을 준 것은 사회적 또는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고, 지리적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추구이며 진정한 실존적 치열함이고, 이 덕분에 그의 소설은 (내 생각으로는) 소설의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나이 속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것은 나이와 함께 변한다는 점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먹어가는 나이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이의 수수께기, 오직 소설만이 밝힐 수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 49쪽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Gudbergur Bergsson)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가령 크세나키스! 


    

- 베르그손이 표지로 나온 책. 그리고 그의 소설, <백조 The Swan>의 영역본 표지. 




4.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산문집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글에서 시작해, 그가 아끼는 몇 권의 소설과 소설가들, 아나톨 프랑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작가 리스트에서 기묘하게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한 조소, 지금은 사라진 체코, 프라하의 봄, 망명한 체코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 크세나키스, 야나체크와 쇤베르크의 음악, 말라 파르테의 소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아래같은 이유다. 바르트를 좋아하냐는 프랑스 젊은이의 물음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아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카를 바르트를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부정신학의 창시자 말예요! 천재예요! 바르트가 없었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걸요!" - 69쪽 

밀란 쿤데라는 그 젊은이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 대해 묻고 있음을 알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를 이야기한다. 카를 바르트를 모를 그 젊은이를 위해 카프카를 살짝 언급하면서 '너랑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라며 속내를 비친다. 이 얼마나 현란한 거부인가! 


5. 
고백하건대, 내가 현재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다. 내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이 짧은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김승옥, 르 클레지오, 뒤라스, 주제 사라마구, 이탈로 칼비노를 지나, 밀란 쿤데라.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체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불어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에밀 시오랑이 루마니아 사람이듯. 그래서 번번히 후보로만 언급될 뿐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보다 한참 문학성이 떨어지는 모디아노가 받는 그 문학상을 말이다. 일본의 하루키가 받게 된다면, 아, 밀란 쿤데라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알기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는 사무엘 베케트가 유일한 듯 싶다)  하긴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도 받지 못했으니. 좀 우습긴 하다. 

 




만남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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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불멸 L'Immortalite'>>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 문학, 특히 소설에서 현대성, 내지 현대예술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기대해보자.



1.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반의 여러 예술들은 고전주의와 가까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 하인츠 보러의 경우 이러한 예술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 현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현대’, 다른 말로 현대에 나타난 고전주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부조리 연극들은 고전적 현대의 붕괴를 천천히 예고한다. 그리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가 무너지고 난 다음 처음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이다. 이 낭만주의는 장르나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의 허점을 노리고 이성의 한계, 이성적 기획들의 실패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낭만주의는 ‘감성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경향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다. 이 속에서 근대적 자아는 분열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분열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즐겁고 희망찬 일이기도 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몰역사적이며 성급한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불멸>에서의 낭만적 경향은 근대적 자아의 분열, 시간과 공간의 혼란, 소설 양식의 붕괴, 자의식 과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경향은 현대 소설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 원근법적 세계의 붕괴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종종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왜냐면 르네상스 초기 연극에서 원근법은 무대를 꾸미는데 매우 유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회화나 회화이론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무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있다. 이는 한 명의 주인공(소실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한다. 다시 부연하자면 프로타고니스트(제1배우, 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제2배우) 간의 대립과 반목, 갈등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음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영웅이, 그 영웅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영웅이 가슴에 품고 있는 신념이나 확신이 승리하거나 실패하게 될 때, 이러한 서사 양식을 원근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주의 연극은 이러한 원근법적 양식을 보여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원근법은 동일한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근대 소설들은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의 소실점 자리에 있는 한 인물, 서사의 주인공을 ‘근대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 마담 보바리, 고리오 영감, 줄리앙 소렐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붕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모네, 피사로 등이 보여준,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는 우리의 세계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가 믿어왔던 그 세계를 거짓이었고 기만이었음을 폭로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모더니즘 예술들은 근대적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 순수한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토 무질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모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으로 인해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넌 날 이해할 수 없어’라든가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그 골이 깊어진 독아론적 태도이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 양식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그 어떤 것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그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평면성은 하나의 원근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치들로 쪼개어지고, 그 가치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현대 소설에서는 한 명의 주인공에서 무수한 주인공으로 늘어나게 되고 종종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게 된다.

<불멸>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 시점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중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 소설은 사건 중심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며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불멸>은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의 내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한 개인의 내면은 다른 개인의 내면과 비교된다.

이 경우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각 개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교류에 대한 제약은 근대 개인주의의 비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호교감적인 형태의 정신적인 교류란 없다.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엇갈린다. 이러한 단절은 현대 소설에서 ‘다중 시점’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몸짓’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작 ‘몸짓’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3.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자의식 과잉

일반적으로 메타픽션은 소설가 소설, 내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해된다.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듯이 소설 속에서 소설에 대한 평가나 의미 부여, 비평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양식들은 사태나 인물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 소설 속에 갑자기 작가가 등장해 사건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거나, 비평문이나 인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메타픽션의 성격은 <불멸>에서는 매우 노골적이다. 자의식 과잉인 작가는, 소설의 창조주이면서 소설 인물들의 주인인 그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스토리의 방향을 보다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설과 인물에 대해서 떠든다.

현대문학이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며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픽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는데, 근대 소설이 원근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나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자아의 모험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험이 근대적 자아의 붕괴로 인해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로 이루어지는 주체의 분열을 야기하거나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작가가 고전적인 작가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을 실재하는 인물로 격상시키면서(작가는 소설 속 인물로 격하되고), 소설 속 세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불멸>에서 이러한 메타픽션의 경향은 소설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한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4. 사랑, 몸짓, 그리고 불멸

아녜스는 현대의 슬픈 사랑을 표상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스스로를 분석하며 지극히 정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로라는 현대의 행복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표상한다. 이 두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하지만 로라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로라에게 육체란 애초부터, 선험적으로, 전일적이고 항구적으로,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였다 : 즉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가져가 그의 앞에 그 육신을 내려다놓는 것. 내면 외면 할 것 없이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부드럽게 천천히 그것을 망가뜨리는 시간과 함께 말이다.
아녜스로서는 육체란 성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희귀한 순간들에만, 즉 흥분이 육체 위에 어떤 인공의 비현실적인 광채를 투사하고 그 빛이 육체를 아름다운 하나의 욕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줄 때만이 육체는 성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녜스가 줄곧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129쪽에서 130쪽)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벤스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류스티스는 그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독자는 아녜스 = 류스티스라는 등식을 이해하지만 루벤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것의 소멸을 어떤 충격적인 계시로 체험했다 : 그는 결정적으로 사랑 저 너머에 있게 된 것이다.
(362쪽)

사랑 저 너머에서 루벤스는 류스티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때 그는 얼마간 여자 관계를 끊는 것이 자기에게 나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그 휴지는 연장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몸짓을 통해 각 개인들은 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혹은 소설 바깥 세상에서 개인주의의 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불멸>에서 강조하고 있는 ‘몸짓’은 가느다랗게 이어져있는 사랑과 이해, 포옹의 표상인 셈이다.

‘호모 센티멘털리스’란 단어는 이 소설 속에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하기 사용된다. 사람은 많으나 몸짓은 별로 없다. 소설 속의 어떤 몸짓은 계속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폴이 그 몸짓을 하게 된다. 몸짓을 통해 각 인물들의 감정이, 정신이, 영혼이 연결되는 것일까.

불멸은 사랑의 불멸이 아니라 몸짓의 불멸인 셈이다. 몸짓의 불멸을 통해 다른 것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셈이다. 쿤데라는 원근법적 세계가 무너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며, 사랑은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고 생각 많은 어떤 이가 ‘물망초에 미친 여자’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는, 서로서로 단절되어있는 근대의 비극을 말하면서도 ‘몸짓’을 통해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고 오직 몸짓으로만 연결되는 세계. 그나마 몸짓이 남아 서로를 연결해주는 세계 말이다. 내가 보기엔 더 비극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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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쿤데라의 책에 대해 검색하다가 만족할 만한 글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 들어와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지도 벌써 10년이 된 것같네요. 무척 좋은 소설인데, 최근에 이 소설을 읽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반갑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라는 작품을 읽고 있다. 이 유쾌하지만 슬픈 이 독서 중에 떠오른 몇 개를 노트해본다. 노트란 내 기억력의 또다른 방식이다. 


  1. '투쟁'의 마지막 부분, 소설의 묘사가 연극 무대의 묘사로 바뀌는 부분이 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연극 무대 바깥에 있는 관객으로 변한다. 글을 쓰고 있는 소설가의 의지에 의해. 이러한 방식은 독자에게 소설에 너무 빠지지 말고 소설 속 풍경을 보다 객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소설가의 의도이다. 그만큼 독자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소설가가 의도적으로 객관화를 시켜줘야만 객관화를 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다. 


  2. '소외'란, 독일어로는 Entfremdung, 영어로는 Alienation, 불어로는 Alie'nation으로 표기한다. 이 개념은 헤겔,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를 통해 보다 정교하게 변한다. 이르는 인간이 그 자신을 위해 산출해낸 어떤 것, 자신의 의지나 몸짓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밖으로 대상화된 것이 도리어 원래 주인이었던 것을 타자화시키고 대상화된 그것이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소외적 타자'가 된다. 


  3. 실존Existentia는 소외Entfremdung보다는 조금 더 불유쾌한 단어로서 주체의 상실과 그것의 자각, 이 자각을 바탕으로 한 회복의 운동까지 포함하고 있다. 


  4. 브레이트의 '소격효과'는 관객이 스스로 관객임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이다. 이도 쿤데라나 여러 현대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끊임없이 '넌 독자야'라고 깨닫게 해주는 여러 가지 표현 양식들과 유사한 것이다. 


  5. 철학에서의 '소외'와 예술양식에서의 '소외'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거칠게 말해 인간 주체의 상실, 인간 존재근거의 위태로움을 보여주고 있다면 후자는 양식 상의 소외로서 감정이입의 전통을 중요시하던 예술 양식이 그 전통을 부정하면서 관객이나 독자에게 그 존재 근거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이 '소외'는 실존의 운동 끄트머리에서 볼 수 있는 자기 회복의 계기와 유사하다.  


  6. 앤디 워홀는 그 작품들을 통해 매우 독창적인 소외를 보여준다. 즉 일상 용품을 원래의 자리에서 전시장으로 자리 이동을 시키는 것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전에는 통조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물건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니힐리즘적인 방식으로 전방위적으로 소외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극단화시킨다면, 우리 인간을 공장에 일렬로 세워놓는다면 공장의 부속품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분명 그 역도 가능하다. 인간주체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 옮겨놓는다면 말이다. 그 공간이 어디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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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비는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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