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16

아르보 페르트 CD 박스 세트

책도, 음반도, 인터넷이 등장하고 오프라인 상점들에서 사라져가니, 그 신비감도 사라졌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부재란 언제나 신비한 법이다. 예전엔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제한적으로 새 책이나 새 음반을 확인했고, 일부는 그런 경로로도 확인할 수 없어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가 지인에게 소개받거나 우연히 들른 상점에서 발견하는 보물들이 있었다. 그런 보물들은 대체로 소리 소문 없이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 깔리곤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떠돌 때쯤, 더 이상 살 수 없거나, 지방 도시 변두리나 시골 읍내 작은 가게를 뒤져야 겨우 나오는 진기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레코드판이 사라지고 시디가 주류가 되어갈 때쯤 상당히 좋은 음반들은 문 닫기 직전의 가게들에서 구했다. 그러나 지금은 검색하면 ..

에릭 사티 Erik Satie

에릭 사티(Erik Satie)의 '짐노페디Gymnopédies'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에릭 사티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가드 멜리낭(Agathe Melinand, 툴루즈국립극장 공동극장장)은 2016년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에릭 사티(1866~1925)에 대해 묘사하려니 복잡한 심정이 된다. 그의 성품에 대해 말하려니 조심스럽다. 그는 반항적이었고 농담을 즐겼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등을 돌렸고, 거처인 아르쾨유의 오두막에 처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를 되살리는 것은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다. 벨벳 정장차림의 젊은 혁명가와, 공증인 차림을 한 사티 중 누구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나 걸어서 교외 생제르맹의 노아유 마을을 가끔 방문하던 사티? 아니면 아르..

나의 서양음악순례, 서경식

나의 서양음악순례 서경식(지음), 한승동(옮김), 창비 한국과 일본은 참 멀리 있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서경식 교수의 유년시절과 내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며, 문화적 토양이 이토록 차이 났을까 싶었다, 일본과 한국이. 내가 살았던 시골, 혹은 지방 소도시의 유년은, 쓸쓸한 오후의 먼지 묻은 햇살과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바다 풍경이 전부였다. 책 속에서 이야기되었던 윤이상 선생의 통영에서의 유년 시절은 내가 겪었던 유년 시절과도 달랐다. 그가 통영에서 살았던 당시(20세기 중반) 보고 들었을 전통 문화라는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서양 신식 문화랄 것도 내 유년시절에는 없었다. 전통 문화와 신식 문화 사이에서 길게 획일화된 공교육과 책을 읽으면 안 되는 자율학습과 텔레비전, 라디오, 팝송이 있었다(..

디어 클래식, 김순배

디어 클래식 Dear Classic 김순배(지음), 책읽는수요일 저자는 피아니스트다. 그런데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그녀처럼 쉽고 재미있게 글 쓰는 재주는 없는 것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금세 빨려들어가, 책 중반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가 부러웠다(그녀의 아버지는 김현승 시인이다. 시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내가 모르는 작곡가들과 그들의 음악, 그리고 내가 알고 있으나,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음악에 대해 저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깊이 있는 내용까지 언급하며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얼마 전에 올린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도 이 책에서 읽은 바를 옮긴 것이다) 1966년 초연된 이 작품은 펜데레츠키 특유의 극단적인 실험기법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모차르트: 차이데; 아리아, Ruhe Sanft - 펠리시티 롯/ 모차르트: 레퀴엠, K626 - 아카데미 합창단/ 라즐로 헬타이 집에 있는 아마데우스 OST LP를 듣지 않은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예전, 2장의 레코드판으로 된 이 앨범을 꺼내 D면 첫 번째로 나오는 이 아리아를 즐겨 들었다. 모차르트는 그냥 천재다. 이 영화는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의 질투이 주 테마다. 그 위로 수놓아지는 음악들. 이 영화의 힘은 대단해서,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살리에르가 독살했다거나, 혹은 살리에르의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와 증오가 하늘을 찌를듯했다고 믿을 지도 모르겠다. 이 스토리는 애초에 소문으로만 떠돌던(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나) 독살설을 푸쉬킨의 라는 짧은 극시로 시작해 피터 쉐퍼(영화 아마데우스..

이스트반 케르테츠(Istvan Kertesz)의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

Ottorino Respighi - The Pines of Rome (Pini di Roma)- The Birds (Gli uccelli)- Fountains of Rome (Fontane di Roma) London Symphony Orchestra Istvan Kertesz 이스트반 케르테츠 박스 세트에서 시디 한 장을 꺼내 듣는다. 어디선가 들어본 선율이라 여겼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무척 극적(dramatic)이다라는 느낌. 부드러우면서도 굵은 선율의 흐름이 지나가며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아마존의 어떤 이는 그 스스로 레스피기의 팬이라면서, 이 앨범이 최고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하긴 나는 레스피기를 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바로 이 음반에 빠져 며칠 째 이 음악만 듣고 있으니까. 데카..

크세나키스Xenakis

하지만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며 인간의 이성적인 냉담함을 약화하는 힘으로 간주되어 왔던) 감상벽이 단숨에 가면을 벗고 증오 속에, 복수 속에, 피를 보는 승리의 환희 속에 항상 존재하는 "광포함의 상부구조"로 등장하는 순간이 (한 인간의 삶에서나 한 문명의 삶에서) 올 수 있다. 내게 음악이 감정의 폭음으로 들린 반면, 크세나키스의 곡에서 소음의 세계가 아름다움이 된 것은 바로 그런 때다. 그것은 감정의 더러움이 씻겨나간 아름다움이며 감상적인 야만이 빠진 아름다움이다. - 밀란 쿤데라, , 123쪽 크세나키스Xenakis의 음악을 매일 같이 듣는 건 아니다. 1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우연히 듣기 시작해 끝까지 듣는다. 솔직히 쉽지 않다. 밀란 쿤데라의 산문 속에서 크세나키스를 읽었고, 오늘 크세나..

슈베르트, 8번 미완성 교향곡

슈베르트 8번 미완성 교향곡의 시작은 우아하면서도 격조있는 애잔함으로 시작한다. 참 오래만에 듣는다. 잊고 있었던 선율을 다시 들었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구나. 바렌보임의 지휘 대신 첼리비다케의 지휘 음향을 공유한다. 바렌보임의 지휘보다 좀 더 긴장감이 더 있다고 할까. 그런데 슈베르트스럽지 못한 느낌이다. 낭만주의적이어야 하는데, 첼리비다케는 각이 잡혀 있는 고전적인 스타일이다. 다행히 바렌보임은 그렇지 않다. 어느새 책도 예전만큼 읽지 못하고 음악도 예전만큼 듣지 못하는 시절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싶은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시절이 나에게 닥쳤고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을 뿐이다. 오늘 오후와 저녁은 슈베르트와 함께 보내야겠다. 찾아보니, 이런 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LP를 책상 밑으로 옮겨놓았다. 1년 넘게 창고에 있다가 겨우 밖으로 나온 녀석들이다. 이 사이엔 젊은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 차이코프스키는 참 매력적이다. 위 영상은 에밀 길레스(Emil Gilels)의 연주다. 피아노가 부서져라 치는 그의 연주는 에밀 길레스의 상징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저 연주는! 강철과 같은 타건 때문에 연주회에서 자주 피아노현을 끊었다고 하는 길렐스에게 있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피아니즘을 상징하는 이모티콘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프리츠 라이너와의 50년대 스테레오 녹음(RCA)과 1970년 로린 마젤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