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12

2월 10일, 단상

최근 두 개의 법정 판결은, 브라질의 사례를 떠올리게 만든다. 문자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을 '축자주의'라 한다. 몇몇 종교에서 보이는 퇴행적 급진주의는 이것으로 인해서다. 법조문도 마찬가지여서 문자 그대로 읽는 잘못을 범하면 안 된다. 결국 해석과 적용의 문제가 뒤따르게 되고, 판사의 자질 문제가 떠오른다. 게으른 신문기자가 결국엔 자극적인 단어로 클릭을 유도하는 위장 마케터가 되거나 검찰이나 정부가 이야기하는 대로 그대로 적는 받아쓰기 만점 전문가가 되듯,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 판사는 영혼 없는 판결로 현실을 위태롭게 한다. 지난 정부 시절 한국은 선진국의 축포를 쏘아올렸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다. 전세계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고 ..

어느 저녁

조금 빨리 사무실을 나왔지만, 그래도 집에 오면 늦었다, 늘. 연휴 때 미사에 가지 못했고 음력으로 다시 시작하는 새해라, 나름 반성한다는 뜻으로, 평일 저녁 미사엘 갔다. 본당 보좌 신부님 헤어 스타일이 변해 다른 신부님이 오셨나 생각했다. 퍼머를 한 단발이었다가 이젠 단정한 스타일이다. 나이 든 신자들은 좋아하시겠다고 적었다가, 나도 나이 들었음을 떠올린다. 평일 저녁 미사를 금방 끝난다. 그래도 미사를 보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이제 서둘러 집에 갈 시간이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집에 도착하니, 아들은 학원에서 오지 않았고 아내도 퇴근을 하지 않았다. 살짝 냉기가 도는 어두운 집에 전등을 켰다. 조금 늦게 들어오는 불빛, 인공의 환함. 나는 다시 집을 나왔다. 면세, 침묵, ..

misc.

수십년은 되었을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한밤 중, 퇴근 후 마신 술이 부족해, 집에 들어와 마트에서 사다놓은 위스키를 꺼내 한 두 잔 들이키다가 그냥 취해버렸다. 아마 취한 내 마음과 달리 내 귀는 이브 몽땅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뻐했을 것이다. 수백장의 음반을 놔두고도 듣지 못하는 요즘 내 신세를 보면, 뭐랄까, 음악을 듣는 것도 젊은 날의 사치같다. 지금은 그저 추억. 최근엔 몰트 위스키에 빠졌다. 와인에 빠졌다가 이젠 위스키로 넘어가는 중이다. 나이 탓도 있겠다. 아니면 더위 때문인가.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보면서, 역시 호크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는 평면과 입체를 교묘하게 섞어놓으면서 그 사이를 응시하는 관객에게 도리어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

렘브란트와 짐멜

짐멜의 를 열심히 읽고 있다. 2018년 독서 결산 포스팅도 못하고, 작년 연말에 읽었던 몇 권의 책 서평도 못 쓰고 있다. 대신 짐멜을 열심히 읽고 있다. 책은 딱딱하고 난삽하지만, 마치 뵐플린이 양식의 측면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조망하듯, 짐멜은 렘브란트의 작품 세계를 르네상스, 혹은 그 이전의 예술가들과 보편성/개별성의 관점에서 비교하며 근대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은 개별성에 집중하면서 각 인물마다 개성적인 포즈와 역동성을 부여하여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걸작을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내 독서는 늘 파편화되어 있는 탓에, 절반 정도 읽었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구절도 없이 어렴풋하게 펼쳐질 뿐이다. 여유라도 되면 '짐멜 읽기' 모임같은 거라도 하면 좋을련만..

자정의 퇴근길

자정이 지난 지하철 9호선. 선정릉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달려가는 급행. 신논현역. 즐거운 유흥을 끝낸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수다를 나누며 등장. 자신의 취하고 지쳐보이는 얼굴 사이로 피어나는 웃음의 어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별안간 낯설게 여겨졌다. 실은 요즘 내 모습에 스스로 상당히 낯설어 하곤 있지만, 어쩌면 나이 들면 갑작스레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나오자,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고 택시마저 보이지 않고, 대신 밤을 지키는 술집들이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다행이다. 밤을 지키는 술집들이 있다는 건. 어쩌면 아직 살만한 곳임을 알리는 징표 같은 게 아닐까. 수백년 전 밤길을 가던 나그네의 눈에 비친 주막의 불빛처럼, 그렇게. 찰칵..

패스트푸드 저녁

야근을 할 때면, 혼자 나가 햄버거를 먹고 프로젝트 사무실로 돌아온다. 재미없는 일상이다. 근사하지 않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매니지먼트는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가 많고 긴장을 풀 수 없다.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가 전체 프로젝트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퇴근길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요즘은 ... 조용한 단골 술집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하지만 조용하면 장사가 되지 않는 것이니, 다소 시끄러워도 혼자 가서 술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가끔 바Bar같은 곳을 들리지만, 벌이가 시원찮은 샐러리맨이 가서 맥주 한 두 병 마시기엔 눈치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벚꽃과 술

몇 개의 글 소재, 혹은 주제를 떠올렸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시작했지만, 가끔 글도 참 못 쓰고, 지적 성실성도 지적 통찰도 없는 이들이 교수가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그럴 여유가 존재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동한다. 공동체는 무너졌고 쓸쓸한 개인만 남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지금 한국엔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지만, 내 일상에는 변화가 없다. 자본주의가 무섭다는 생각을 서른 초반에 했고 자본주의의 사슬에 매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나를 마흔 초반에 발견했다. 쓸쓸하다. 벚꽃은 어김없이 봄이면 핀다. 벚꽃이 머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