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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포스트모더니즘 +27


백설공주

도널드 바셀미(지음), 김상률(옮김), 책세상 



이 번역 소설을 다시 영어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소설이 될까? 바셀미의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는 미니멀리즘 소설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을 테지만, 너무 성의 없이 옮겼다는 건 바셀미의 소설을 기다려온 나에겐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졌다. 실제 원작에서는 문장은 짧고 단순하며 표현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 번역본에서는 늘어지며 중언부언하면서 양식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그러니 이 번역서를 읽고 바셀미를 읽었다고 하지 말기를. 


도널드 바셀미는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의 한 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미니멀리즘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제서야 소개된다는 것이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는 독자가 거의 없듯, 도널드 바셀미도 한국에선 그와 비슷해 보인다. 언어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번역본은 너무 형편없어서 반드시 영어로 읽어보길 권할 뿐이다. 


찾아보니, 아예 원문과 대조하여 번역서의 표현과 비교하여 새로 번역한 블로그가 있어 링크를 달아둔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최선의 번역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5032 

http://blog.aladin.co.kr/710357193/8797048 

(위 블로그에 가면 <<백설공주>>의 번역에 대해선 여러 개의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평점은 한글 번역본을 읽고 바셀미가 어떠니 평가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 바셀미의 <<백설공주>>가 형편없음이 아니라. 



백설공주 - 4점
도널드 바셀미 지음, 김상률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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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보르헤스전집1)





리타 기버트: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보르헤스: 아니요. 그리고 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충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 인생조차도 겨우 간신히 꾸려왔으니까요. ... ... 나는 약간 표류하며 나의 삶을 살았지요. 



69세의 보르헤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충고를 할 수 없음,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 ... 


지난 설 연휴 읽었는데, 이제서야 간단하게 리뷰를 올린다. 그 사이 이 소설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은 보르헤스의 첫 작품집이다. 


직역하면 <오욕의 세계사>라고 부를 수 있는 보르헤스의 첫 작품집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이후의 그의 소설 세계를 가늠할 많은 특징들이 씨뿌려져 있는 묘판과도 같다. (123쪽) 


역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문학 연구자에게 흥미롭겠지만, 이제 문학을 떠나 있는 나같은 독자에겐 호소력이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이 소설집은 그다지 재미 없었다. 보르헤스 팬들에겐 의미 있겠으나, 보르헤스의 세계를 제대로 알기엔 <픽션들>이나 <알렙> 같은 다른 소설집이 나아 보인다. 


(간단하게 더 언급하지만, 이 소설집은 일종의 재-쓰기로 이루어진다. 이미 책이나 신문 등으로 알려진 불한당 이야기를 보르헤스는 자신의 관점으로 다시 단편소설로 쓰고 있다. 하지만 첫 작품집이라는 점에서 보르헤스 특유의, '메타-네러티브 Meta-Narrative'의 형식은 흔적으로만 드러날 뿐, 본격적이진 않다. 이 점에서 역자인 故 황병하 교수는 '씨뿌려져 있는 묘판'이라는 표현을 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 8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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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egal,

Wendy with chin on hand, 1982




잊고 지내던 조지 시걸(George Segal)을 보고 울 뻔 했다, 아라리오뮤지엄, 낮고 어두운 실내 한 구석에 있던. 


이 작품은 아라리오 뮤지엄에 있던 작품이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었던, 가장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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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갱들이여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저 | 이상준역 | 향연 | 2011.11.08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다카하시 겐이치로다! 하지만 십수년만에 읽는 그의 소설은 ... 아, 이런 표현은 심하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읽는 건 시간낭비다. 전혀 유머스럽지 않다. 작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세계에 대한 반체제적인 알레고리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뭘? 


너무 쉽게 읽히고 깊이감이 없다. 두서 없고 이야기는 흩어지고 등장인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어로 읽었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다. 현재 일본 문학계 내에서 그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의 일본어 문장이 어떤지 모르는 탓에, 내 평가절하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최고의 소설로 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추천하지 않는다. 하긴 소설을 추천하는 경우가 드물어지는 요즘이다. 최근 들어 읽은 소설도 거의 없지만, 추천할 만한 것도 없었다. 






우아하고감상적인일본야구-개정판

다카하시겐이치로저 | 박혜성역 | 웅진씽크빅 | 2005.07.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1999년에 읽고 리뷰를 적었나? 그 전에 읽은 것같은데 말이다. 



1999/02/05 - [책들의 우주/문학]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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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었다.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1975)<셰익스피어의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2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 현대 소설가의 최고봉, 알레고리, 무수한 현대소설가에게 영향을 준 이, 백과사전, 자기반영성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드는 것, 죽는 것, 의미 없음의 공포를, 그리고 사랑의 위대함과 버려야만 완성되는 어떤 예술을 알고 있는 소설가였다. 


그의 문장은 짧고 딱딱했지만, 그 딱딱함은 거친 세월의 때가 묻은 낡은 나무 문짝의 것이었다. 알레고리와 은유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추억,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시작했던 문명의 시작을 되새기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읽었던 보르헤스는 없었고, 이제서야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게 된 것이다. 며칠 전 번역되었으나, 아직 읽지 못한 보르헤스의 책 수 권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보르헤스저 | 민음사 | 2007.05.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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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쇼가 마주 했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자, 연애담, 그리고 이론적 방향에 대한 개요이다. 그래서 연구자에겐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연애 아포리즘이 될 수 있다. 

책은 읽기 편하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연구자에겐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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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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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무명의 젊은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게 어떤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데 쿠닝은 라우셴버그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유명했을 뿐 아니라 작품값도 상당히 비쌌지만 그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한 점을 라우셴버그에게 주었다. 크레용과 유성연필, 잉크, 흑연 등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라우셴버그는 그 그림을 가지고 한 달을 씨름했다. 그림을 완전히 지운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지운 그림을 금박 액자에 끼우고,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이라고 제목과 날짜를 직접 써 넣었다. 라우셴버그는 데 쿠닝의 그림을 지웠을 뿐 아니라, 그 ‘지움’을 자기 작품으로 전시도 했다. 라우셴버그는 작품을 창조한 것인가, 파괴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 ‘예술이 궁금하다’, 마거릿 P. 배틴 외 지음, 윤자정 옮김(현실문화연구, 2004년), 59쪽에서 인용


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Robert Rauschenberg
출처: http://secretforts.blogspot.com/2011/02/erased-de-kooning-drawing-1953.html 


일종의 해프닝Happening이다. 창작(연출) 과정이 예술이 되고 그 과정의 결과물도 예술이 된다. 드 쿠닝도 예술 창작자이고 라우셴버그도 예술 창작자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의 기획자이자 완결자는 라우셴버그임으로 그가 작품의 서명자가 된 셈이겠지.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미술 현대 미술의 흥미로운 한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예술 작품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창조되는가?’라는 꽤나 미학적으로 유쾌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서가에서 꺼내, 다시 읽고 있는 <<예술이 궁금하다>> 1장 ‘예술과 예술작품’의 한 사례로 등장한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은 현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 또는 예술 작품 창작 과정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개념 미술Conceptual Art과 만나게 된다.

라우셴버그의 작품 이미지를 찾다가,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가 최근에 발표한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을 보며 웃었다. 마이크 비들로는 'Not Warhol(Brillo Boxes, 1964)', 1991이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데(엔디 워홀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따라하기를 해서 유명해진 것이지만), 이번에는 라우셴버그의 해프닝을 따라했다(이것도 현대 예술가들의 무시하지 못할 전략 중의 하나다).


Mike Bidlo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 Traces of graphite on paper, mat and label in gold leaf frame. 22-3/8 x 20-7/8 inches. Courtesy of Francis M. Naumann Fine Art, New York.
출처: http://www.artlurker.com/2009/01/objects-of-value-at-miami-art-museum/ 

라우셴버그의 인터뷰 - '지워진 드 쿠닝의 그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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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페이스북에 신디 셔먼의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아련했다.

1954년생의 이 여성 아티스트는 팝 아트 이후 최고의 명성을 얻는 여성 미술가들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대중 문화 속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후기산업사회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묻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미술 잡지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현대 미술 관련 글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그녀가 이젠 좀 뜸하다는 느낌이랄까. 벌써 '원로' 대접을 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세계 미술 트렌드에서 약간 비켜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두 장의 사진 작업을 올린다. 1978년의 연작 시리즈 중 일부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 Untitled Film Still 4, 1978


신디 셔먼(Cindy Sherman), Untitled Film Still 21,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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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올린 칼스텐 해리스의 글에 이어, 다시 한 편 더 올린다. 전문 잡지에 오래 전에 실린 글은 구하기 어렵다. 좋은 글들이 많지만, 누군가 꺼집어 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찾아보지 않게 된다. 블로그에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드문데, 자주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된 일인지 좋은 글 보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 한 몫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적절한 시각과 평가를 가진 칼스턴 해리스의 인터뷰이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필독을 권한다.


- 2002년 2월 월간미술 게재.


독일 철학, 미술사, 건축 이론,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와 그것의 약점에 대해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논의로 유명한 칼스텐 해리스 예일대 교수가 최근 건축철학서 《무한과 원근법(Infinity and Perspective)》을 펴냈다.

원근법을 중심으로 보는 것과 그것의 인식론적인 뿌리를 통해 건축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모든 사람에게 예술의 가치를 설파한 그를 본지 이건수 편집장이 이메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 2년 전 당신은 《월간미술》에 소개된 특별기고문에서 ‘테크놀러지 사회에서 인간 정신의 존위가치를 보존하는 예술’을 밀레니엄의 예술적 지표로 설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동안 예술의 최신 흐름과 발달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날의 예술세계는 ‘개방성’이 특징이다. 뚜렷한 목표 없이도 오늘날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정작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작가들은 최근 예술경향에 흽쓸려 방황하는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을 향한 접근방식에 깔린 불만족은 예술의 윤리적 기능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이 인종, 성(性), 그리고 성적 경향 등 오늘날 주요 문제에 대해 여전히 미숙한 생각을 보여주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이는 곧 ‘몸’에 대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우리의 인식과 함께 얘기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무한한 가능성이 이러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을 조작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정말 혼란스럽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미래’를 향한 주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책임감이 결여된 무분별한 자유는 그 자신을 전복시킬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 존재에 대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어떤 책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 즉 물질 안에서 구체화된 정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해 가정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구체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물질만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과학 밖의 현실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예술이 오늘날 직면한 하나의 - 아마 가장 중요한 - 임무는 과학이 세운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으로 여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각각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경험하는 것은 존중을 전제로 하며, 그러한 창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에 관해 예술은 그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이 그 기준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해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으며,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예술이 위에서 언급한 것을 성취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은 확실하다."

-
당신은 또한 그 인터뷰에서 테크놀러지가 하나의 ‘수단(tool)’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로 상징되는 테크놀러지가 현대예술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테크놀러지의 발전에 따른 인문학과 예술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당시 내가 주장했던 것은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수단이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주인, 즉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테크놀러지가 인간 본성과 대립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테크놀러지의 전제인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가치를 인지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와 지배하고 위협할 때 그 테크놀러지를 거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오늘날 예술의 중요한 기능은 객관화된 이성이 만든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
9.11테러는 하나의 거대한 참사에 그치지 않고 ‘인류’와 ‘문명’이라는 틀 아래 다양한 의견을 양산했다. 예술철학자로서 당신은 9.11테러를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그것이 향후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하는가?

"
9월 11일 이후 ‘테러’는 뉴스와 우리 마음속에 너무 많이 언급되어 왔다. 그날 아름다운 아침에 멋진 건축작품이 테러의 목표물이 된 것이다. 어쩌면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리스트의 마음속에 테러의 목표물이 되도록 유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테러리스트는 세계무역센터가 갖는 상징성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과는 모순된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파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세계무역센터의 부재는 이제 미국도 상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상징이 되었다. 테러리스트가 남긴 이 ‘빈 공터’는 우리 삶을 불안하고 공허한 창문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어떤 이는 테러리스트를 겁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헌신하는 명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수천 명의 삶을 희생하는 행위가 비겁함이란 말로 이해되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에게 죽음은 어떤 공포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경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쉽게 포기할 만큼 의미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까? 우리는 그러한 부정적인 확신에 대해 논의해야 하고, 그 파괴된 자리에 세계무역센터를 대신할 어떤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그런 확신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테러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인정해야 한다. 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뉴욕커(The New Yorker)》라는 잡지는 9월 11일의 참사에 대하여 아담 자가제스키(Adam Zagajewski)의 시로 끝맺었다.

파괴된 세상을 찬미하려고 노력하라 / 6월의 해가 길던 날들과 / 와일드 스트로베리와 몇 방울의 와인과 이슬을 기억하라 / 그리고 망명자들의 버려진 집을 뒤덮은 쐐기풀도 / 파괴된 세상을 찬미해야만 한다

나는 《뉴욕커》가 9.11테러 기사를 실으면서 잡지 중앙에 파괴되기 전, 석양 속에서 빛나던 세계무역센터의 이미지를 실은 그들의 결정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잡지의 표지를 검은색으로 처리한 그들의 결정 역시 높이 산다. 왜냐하면 그 검은색 속에서 세계무역센터의 실루엣을 더 검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검은 실루엣은 《뉴요커》의 중심에 있는 빛을 더욱 강조해 주었다. 다시 말해, 어떤 기념물이 들어서든지 그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나는 세계무역센터의 잔해를 보존하여 쐐기풀들이 그것을 덮은 채 자라길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테러에 직면하여 예술은 ‘파괴된 세계’를 찬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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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학을 연구하는 버클리대의 마누엘 카스텔스(Manuel Castells) 교수는 ‘정보화시대’에 관한 그의 연작 《네트워크사회의 출현》, 《정체성의 힘》, 《천년의 종언》에서 산업사회의 핵심이었던 정치, 경제 논리와 문화적 정체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아 그 힘을 잃고, ‘네트워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로 옮겨간다고 지적했다. 당신은 21세기를 주도할 가장 중심적인 흐름을 무엇으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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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내다볼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정보 테크놀러지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정보와 테크놀러지가 자유를 가져왔으며 다가오는 시대에도 변함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성(性)을 갖고, 자신의 언어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어떠한 출구도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에 생각하지 못했던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거나 우리의 성을 바꿀 수 없다면 이것이 하나의 짐처럼 여겨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누가 이런 조작을 하는 것인가? 아직도 본질적인 자아가 남아 있는가? 무엇보다 테크놀러지의 발달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유를 약속할 수도 있지만, 자아 상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위협이 예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정보의 충격과 네트워킹과 같은 테크놀러지가 우리 삶에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새로운 테크놀러지는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테크놀러지의 도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최근 출간된 당신의 저서 《무한과 원근법》을 직접 보내 주어 잘 읽어 보았다. 책을 살펴 보면 독일 철학과 이론, 미술사, 건축 이론, 과학 등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모더니티의 르네상스 신학적인 뿌리와 철학에 대해 깊이 연구했음을 알 수 있다.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 맥길대학 교수는 쿠사너스부터 갈릴레오까지 초기 모던 사상가를 연구해 우리 시대를 위한 희망과 가능성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극찬했다. 한스 브루멘버그와 알렉산더 코이레 같은 과학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비평적인 자세를 취하며 모더니티의 숨겨진 가능성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최근 당신의 연구 분야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미술의 철학적 의미를 찾기 시작했던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당신의 철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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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에 출간된 《무한과 원근법》은 작가에게 유용한 책이 되기를 바라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 책에서 나는 몇몇 포스트모던 비평가에 반대하며 ‘모더니즘’을 변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가 니힐리즘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사실을 이해하고, 그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과학과 테크놀러지가 가정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고찰했고, 그것이 중세 기독교 문화의 자기 발전의 산물임을 증명했다. 우리가 이런 발달의 합리성을 이해할 때, 과학이 가정하는 현실 자체와 동일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성이 지은 체제의 창을 모든 의미의 근원으로 ‘여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발표된 논문 <이방세계에서. 니힐리즘의 탐험(In a Strange Land, An Exploration of Nihilism)> (19 61)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역시 예술의 문제도 다룬 바 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최근 저서에서 더 자세히 다룬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Nicholas)의 작품을 언급했고, 현대예술의 의미를 논의했다. 새로운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리얼리티의 의미와 세계와 예술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그 논문을 통해 나는 예술을 ‘객관화하는 이성으로 세워진 세계’라는 건물의 창을 열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보았다.

또한 이것은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믿음과 탐미주의 사이(The Bavarian Rococo Chu-rch:Between Faith and Aestheticism)》(1983)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철학을 전공한 내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아카데믹한 철학을 참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하이데거와 르네상스에 관해 다룬 나의 다른 철학 저서와 별다른 차이점은 없다고 본다. 책의 대부분이 18세기 교회를 다루고 있지만 《바바리안 로코코 교회》는 모더니티의 합리성과 한계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 세계의 건축의 창을 지금 세계가 무시하려는 리얼리티의 차원으로 다시 열려는 시도였다. 뿐만 아니라 《부서진 프레임, 세 개의 강의(The Bro-ken Frame, Three Lectures)》(1989)와 중국어로도 번역된 《건축의 윤리적 기능(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1997)에서도 비슷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재 쓰고 있는 책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왜 예술가인가(Why Art)?》라는 가제를 붙인 이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와 현대 예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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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평소 즐겨 보는 책은 무엇인가? 또한 당신은 어떻게 정보를 섭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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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질문이다. 역사를 통해 뛰어난 철학가의 책을 포함해 수많은 책이 내게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하이데거(Heidegger)는 특히 중요하다. 또한 《무한과 원근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15세기 추기경 니콜라스도 내게 각별하다.

그러나 나는 내 사유의 전개가 책보다 미술작품이나 건축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무엇이 그림 그리기에 집착하게 했는지 잘 모르나, 그림은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늘 함께해 왔다.

건축에 대한 관심도 일찍 시작되었다. 7세 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공습이 계속되는 베를린에서 쾨니쇼펜으로 이주했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파괴된 건물과 사이렌이 울린 뒤 다락방에서 보았던 불타는 베를린, 그리고 나와 함께 놀던 친구와 그의 집이 폭탄에 맞아 사라진 것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장면을 보았을 때 이런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을 떠나 피난처로 찾았던 쾨니쇼펜, 그 작은 도시에서 즐거웠던 경험을 말하고 싶다. 그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작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

그 작은 교회는 나에게 전쟁 중 베를린에서 보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다. 하이데거가 지구를 표현함에 있어 고대 그리스 신전이 세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하며, 그 신전에 윤리적 기능을 부여했던 것과 같이 나 역시 그 교회에 대하여 미학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는 이 교회가 세운 세상이 나를 배제시켰을지라도 그 교회가 제시하는 지구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지구와 사람들은 교회나 책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지난 1월 24일 타계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지적한 대로 세계화를 위한 테크놀러지, 경제 등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을 흡수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 과거 인류의 문화유산을 생성해 오던 교육, 교양, 사회활동이 미국이 주도하는 영화, 엔터테인먼트, 오락산업에 흡수되고 있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렇듯 세계화에 따른 문화단일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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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지적한 ‘발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의 등장에 적지 않은 우려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예술을 위하여 ‘본질’을 회피하고자 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반대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문화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안감은 근본주의와 파시즘을 더욱 잘 받아들이게 했다.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다른 가치체계와 그것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약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는 변화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의 어떤 변화도 그저 주어지지는 않으며, 거기에는 매우 사려 깊은 숙고와 저항이 요구된다. 작가들이야말로 그러한 심사숙고와 저항에 많은 기여를 해야 하며, 철학자 역시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 철학자는 무분별한 철학 용어를 남발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방식을 지킬 수 있으므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철학을 연계하는 것에 쉽게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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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변화하는가? 만약 변화한다면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세기를 거칠수록 예술, 그리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변화하고 있다. 유럽에서 18세기는 중요한 시작을 의미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종교적?윤리적 기능의 예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예술은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가장 중요한 발단은 1960년대일 것이다. 아서 단토(Arthur Danto)는 ‘예술의 죽음(종말)’에 대해 말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의 절정이 예술의 종말이라고 말했던 단토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다. 단토의 주장처럼, 지난 40년간 예술(세계)에 어떤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 새로운 담론은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런 현상을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해방’으로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자유’란 방향 상실을 의미한다. 예술은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다. 쿤데라는 예술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가벼움이 헤겔이 예술의 최고 기능으로 간주한 인간의 심오한 관심사에 대한 예술의 참여를 되찾으려는 갈망을 품게 하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을 보지 않고 그에 대한 관심을 언급하는 학문이 내놓는 견해를 들으려는 것이 ‘모더니티’의 특징이라고 했다. 사고와 숙고가 예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헤겔의 생각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성(性)?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관한 언급을 예술이 다시 감당할 수 없다. 미숙한 철학적 개념을 품고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과거 예술이 갖고 있던 최고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의 최고 기능을 되찾음으로써 헤겔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예술을 중시하는 하이데거와 의견을 같이한다. 다만 오늘날 한 명의 뛰어난 작가에게 이러한 예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 애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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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미 지적한 대로 현대미술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힘을 상실한 채 공허한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여전히 현대미술은 종결되어야 하는 것인가? 현대미술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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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성이 세운 세계의 창을 여는 것이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가 이런 창을 열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비유를 들어 답을 얘기한다면, 15세기 서양에서 미술은 원근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근법은 부르넬레스키(Brunelleschi)와 알베르티(Alberti) 때의 작가에게 마술과도 같았던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인위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예견했듯이 이러한 마술의 대가는 리얼리티의 상실, 초월성의 상실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리얼리티는 그것의 연극적인 재현으로 대치되었다. 미술 자체가 시뮬라크라의 창조물임을 인지한 미술이 어떻게 관람객을 리얼리티로 이끌 수 있단 말인가? 내 대답은 이렇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육체에서 분리된 눈 이상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관람객이 자신의 물질성, 물감?캔버스?종이의 물질성, 그리고 종이 위의 붓자국을 통해 물질 속에 정신을 구체화하는 경험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인간을 보는 것은 물질이 지닌 의미의 구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객관화된 이성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나 겪는 것과 기계를 경험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영화 등은 ‘초월성’으로 창을 열 수 있으나 단지 우리가 관심을 갖는 작품의 ‘인공성’을 깨닫는 데 쓰일 뿐이다. 이러한 인공성을 깨닫는 방법은 르네상스 작가가 원근법적 재현의 기교를 물감과 캔버스의 물질성을 비교하여 그 인공성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뉴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시뮬라크라(simulacra)와 진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 동양과 서양이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서구의 문화를 기준으로 동양의 문화를 바라본 게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동양과 서양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예술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동양 예술에 대한 나의 지식이 매우 부족하기에 이 질문에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위험을 무릅쓰고 두 가지 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은 내게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친숙한 서구 역사에서 동양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본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예술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본질적인 인간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는 서양이 동양에 비해 혁신과 발전에 가치를 두어 왔다는 점이다. 테크놀러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경제학자의 생각 속에 자리한 발전에 관한 수치를 생각해 보자. 이런 것은 현대미술에서 매우 흥미롭게 나타난다. 뒤샹이 보통 변기를 전시하고 그것을 작품이라 불렀을 때, 변기와 작품의 분류에 대한 고의적인 혼란은 분명 아름답지 않았지만 매우 흥미로웠다. 오래 전 키에르케고르가 보여 주었듯이, 흥미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종말로 끝나기 마련이다. 지금 현대미술은 그 종말에 다다른 것이다.

따라서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발달을 별로 중시하지 않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자원이 한정된 지구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발전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아직 멀게 느껴지나 자연의 재앙을 대비하는 일에 작가들도 참여해야 한다. 동양, 특히 동양의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발전은 때로 유익한 것이나 종종 그에 대해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한다."

- 동시대 예술과 관련하여 반미학 또는 탈예술 논의는 이제 공공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숭고’와 ‘아우라’를 향한 논의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약 의미를 갖는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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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은 현대 회화나 조각보다 내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 금년에 탄생 150주년을 맞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와 수많은 현대 건축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특히 가우디의 건축물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의 건축물은 현대 세계로의 창을 열어 주었다. 현대 건축에서는 일본의 안도 타다오(Ando Tadao)가 있고, 핀란드인인 주하 레이비스카(Juha Leivisk?도 있다. 그의 작품 미르마크(Myrmakk) 교회는 핀란드의 우울한 겨울에도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베를린에 있는 다니엘 리베스킨드(Daniel Libeskind)의 유대인 박물관은 완성되기도 전에 나를 감동시켰다. 나는 이러한 건축가들로부터 빛이 물체를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감동을 안겨 준 미술작가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에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작품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세잔(Cezanne), 드가(Degas) 혹은 멘제(Menzel)에 감동했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나는 헤겔의 주장처럼 ‘예술이 죽었다’는 가능성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자면, 하이데거처럼 나 역시 헤겔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반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곧 출간될 책에서 오늘날 예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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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동시대 예술은 대중문화와의 상관성 속에서 이해되고 논의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스펙터클의 사회’ 또는 ‘키치’ 개념이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가 갖는 의의는 무엇이며, 키치가 동시대 미술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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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잘 정의되지 않은 현상 혹은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공유하는 현상이다. 나는 최근 저서에서 이런 적대감에 잠재된 가설을 고찰했다. 우리는 아직 모더니스트의 프로젝트도 이루지 못했고 모더니즘의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이미 건축에서 모더니즘의 표현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의 건축가 대부분은 후기 모더니스트의 표현방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화가와 조각가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모더니즘의 초기 단계부터 키치와의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을 제쳐두고 현대미술을 생각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하다. 키치는 스스로 윤리적 기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또는 살바도르 달리(Sal -vador Dali)를 보자. 아니면 안젤름 키퍼는 어떨까? 그 역시 키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저서 《건축의 윤리적 기능》에도 해당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키치라고 불리는 작품을 경멸하는가? 여기에는 무언가 부정적인 것이 암시되어 있다. 우리는 키치가 주장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치가 리얼리티로 향한 창을 여는 대신 단지 시뮬라크라 혹은 폐허가 된 가치체계의 단편으로 그저 세계를 치장하는 생각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이 키치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금송아지 우화’의 교훈처럼, 신(神)이 부재하면 인간은 시뮬라크라를 만든다. 그러나 시뮬라크라에 의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시뮬라크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키치에 대한 논쟁과 투쟁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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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를 즐겨 보는가? 만약 미술전문지를 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미국 등 각국의 미술전문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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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문지에 큰 관심은 없으나 내 아내가 미술사학자인 관계로 정기적으로 꽤 많은 잡지를 구독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술전문지는 현재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과 미술이 발전하는 양상을 계속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미술전문지는 현재 이루어지는 비평과 이론을 더 많이 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이론과 사고가 예술세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전문지는 미술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을 국한해서는 안 되고, 미술 관련자만을 독자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미술전문지는 미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 즉 왜 미술이 중요한가, 왜 미술이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미술이 필요한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 - 윤동희 기자 | 번역 - 김민아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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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는 1937년에 태어나 예일대에서 박사학위(1962)를 받았다. 저서로 《Ba -varian Rococo Church》, 《The Broken Frame : Three Lectures》, 《The Ethical Function of Archit-ecture》 등이 있으며, 《The Meaing of Modern Art》는 《현대미술 - 그 철학적 의미》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현재 예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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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된 카오스 - 6점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3년 4월 21일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강연 중에서), 279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필자가 함)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라는 부제가 붙은, 노르베르트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는 현대 사회 위로 물결치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환경 속에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문화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자의 기대(1)대로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현대 문명의 여러 변화를 ‘카오스’로 받아들이며 이 카오스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휴머니즘적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으로부터 작별하고 뉴미디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표현대로 1923년의 카오스와 1990년대 후반의 카오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볼츠는 ‘정신은 단지 관계들-상호작용들-상황들 그리고 콘텍스트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책들 중의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잡다하게 나열된 사례들과 인용문들은 어떤 구심점을 갖고 기술되었다기 보다는 수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볼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문명은 계속 카오스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도 코스모스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가 급변하여 갑자기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의 전환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또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속에 볼츠의 책처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자 한 저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되기에 볼츠의 이 책은 저자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오해될 여러 인용과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도리어 이런 데이터들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을 보다 뚜렷하게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츠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재 우리 일상의 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이나 세계관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삶은 총체적 예술이 된다’(35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이란 뉴미디어의 예술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1) 이 책은 비전문적인 일반 독자를 겨냥해 복잡한 문화 현상들을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들어 마치 백과사전처럼 서술하고 있어 사전 이해가 충분치 못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역자 머리말 중에서,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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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마르크스주의 - 8점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한길사


후기마르크스주의 Late Marxism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몇 달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지만, 서평을 쓰지 못했다. 딱딱하고 압축적이며 추상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론서를 읽기에는, 내 독서 태도가 성실하지 못했다. 어떻게 겨우겨우 완독하기는 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찬 프레드릭 제임슨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지만, 아도르노는 자신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벤야민에게서 영향 받았겠지만, 실은 벤야민의 독특함 이상이다. 벤야민에 대한 이상한 선호(대중적 인기)로 인해, 아도르노는 종종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대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이론가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산업을 이야기했지만, 문화산업이 가지는 독특함보다는 고전(클래식)문화에 기대어 미국식 문화산업이 가지는 폐해와 악덕 때문이었고, 재즈는 경멸했고,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적 문화 코드와는 거리가 먼 이론가였다. 하지만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에게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마르크스주의를 끄집어낸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이 해석을 그는 한 권의 책을 엮어낸 것이다. 책은 아도르노의 거의 모든 저서들을 오간다. 또한 철학, 사회학, 문학을 오가며, 아도르노의 사유가 가지는 성격과 현대 사상과의 유사성,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 아도르노가 가지는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적 우세종이라는 강력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아도르노의 중요성은 차라리 그의 사회학적 내지는 철학적 비판 속에 있을 것이다. 사실 아도르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좀더 초보적인 단계가 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재현의 문제이다. (중략) 비록 모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총체성은 존재할 지 모르지만 인식될 수도 묘사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 총체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변증법이란 - 부정변증법 같이 실망과 분노를 자아내는 변증법일지라도 -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작업인, 이 원의 전체 넓이를 구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읽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두께도 두께지만, 아도르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읽기 어렵다. 또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아도르노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프레드릭 제임슨의 편파적인 시각에서의) 후기마르크스주의자 아도르노에 대한 비판적 해설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기에 이 책을 손에 들 이가 있기라도 한 걸까. 나 또한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책제목에 이끌려 구입했지만 말이다.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재현이나 총체성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약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부생에겐 어려운 책이고 대학원생에게나 적당하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뭔가… 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뭘 읽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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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8점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이유인지, 뭔가 있어보이면서도, 실제로도 그 뭔가가 있는 저자나 책을 만나기가 이렇게나 어려울 수 있을까. 20세기 후반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 전반의 주요한 관심사가 ‘글쓰기’가 된 듯 하다. 심지어 한국의 몇몇 저자들 -김영민, 김진석 등 - 도 매우 이상한 글쓰기를 보여준 적 있었다. (난 아직도 그 때의 호들갑스러운 지식인들의 반응을 기억한다. 정말 대단한 글쓰기였다면, 지금쯤 모든 이들이 그렇게 글 쓰고, 그 글쓰기에 대한 메타 비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실은 그들이 그런 이상한 글쓰기에 빠지게 된 것도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나쁜 영향 때문이다.

확실히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 이후 ‘언어’은 이 세계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하려면, 무조건 걸고 넘어져야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언어로 된 구조물, 그 중에서 가장 만만하면서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여겨지는 문학작품들이 그 대표가 되었고, 일군의 저자들은 문학을 닮은 글쓰기를 ‘탈구성적 글쓰기’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속은 텅 비어있으면서) 뭔가 있어 보이는 글쓰기에만 매달리는 이들과 여기에 빠지는 순진한 이들 때문이지. (굳이 ‘지적 사기’를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얼마 전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책을 읽었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든 탓인지, 폴 드 만이라는 이름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영문학을 전공한 이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폴 드 만 해대서, 매우 대단한 학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위시하여 정치적이며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에 대한 풍부한 글과 책을 소개하는 이들도 폴 드 만, 폴 드 만 해대는 모습에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할 정도의 학자구나 하고 여겼다.

웃긴 짓들이다. 내가 읽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폴 드 만은 비-현실적이며, 또한 심각할 정도로 이론-중심적이서, 현실세계가 어떻게 되던, 나는 책 속에 빠져서 책 속에서만 살아갈래 하는 이론가처럼 읽혔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당신이 뭐길래 폴 드 만 같이 대단한 학자를 비난하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속에 인용된 테리 이글턴의 입장을 좀 길게 인용해볼까 한다.


이글턴은 ‘굶주림, 혁명, 축구 게임 그리고 스페인산 백포도주를 탈구성적 입장에서 아직 결정할 수 없는 텍스트로 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고통스러운 실제 사건(굶주림, 혁명)과 경박한 텍스트를 나란히 병치함으로써 탈구성의 부조리함을 개진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현실의 위계(굶주림, 혁명, 축구 게임 그리고 스페인산 백포도주)를 텍스트의 동질성으로 와해시키는 탈구성적 요구의 위험을 강조하고 있다. 열거된 것 가운데 백포도주는 다소 품위가 떨어지고, 굶주림보다는 덜 현실적이며 덜 중요하다. 마치 스페인산 포도주와 같은 서구의 퇴폐주의적인 물건의 존재가 아프리카 기근의 원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의미는 탈구성적 입장의 수사학적 관심이 기근이라는 야만적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굶주림이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정치학의 충분한 기초다. 하지만 단지 그렇기만 하다면 문제는 쉬울 것이다.
사실상 이글턴은 여기서 드 만의 저작이 개진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166쪽~167쪽)


그런데 테리 이글턴의 이 지적은 자신의 확고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입장만 있다면, 기본적으로 가능한 지적이며 비평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국내에 너무 많아 보이는 건 개인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폴 드 만은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며 텍스트 자체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평하는데,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사회계약론’은 약속에 관한 생각을,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그것을 약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드러낸다. 그렇게 추측을 통해서 약속은 유일하게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약속’과 관계되는 언어의 형상적 차원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선 의미를 닫고(로고스 중심주의), 그 자체의 오독의 (오)해독을 중첩시키며 그것을 제시하는 의미를 다시 무화한다. (탈구성) 이처럼 ‘사회계약론’같은 텍스트는 대립적인 제스처가 문법 영역에서의 무한히 열린 의미 생산과 충돌하며 생산되었다. 달리 말해서,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의 독서 가능성(단일하고 고정된 의미의 관점의 가능성)을 전제하나, 그러한 독서가 불가능함을 드러내는 것이다.(80쪽)




이렇듯 폴 드 만은 독서의 불가능성, 이론의 불가능성(저항)을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테리 이글턴의 폴 드 만이 가진 생각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특히 드 만의 비평은 문학 언어가 부단히 그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는 데 바쳐져 왔다. 실로 드 만은 그 과정에서 다름 아닌 문학의 ‘본질’ 자체를 정의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던 것이다. 드 만이 올바로 인식하고 있듯이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불가피하게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literally) 글자 뜻 그대로(literal)라고 믿는 것은 실수이다. 철학, 법, 정치이론도 시와 마찬가지로 은유(metaphor)에 의거하고 있으며 똑같이 허구적이라는 것이다. 은유가 본질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고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바꾸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언어는 가장 강렬하게 설득력을 지니려 하는 바로 그 때에 자신의 허구적이고 자의적인 성격을 노출시키곤 한다. ‘문학’은 이런 애매모호함이 가장 뚜렷한 영역인데, 그 안에서 독자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수사적인 의미 사이에 처하게 되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없어서 ‘읽을 수 없게’ 된 텍스트에 의해 끝없는 언어의 심연 속으로 어지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은 은연 중에 자신이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즉 문학작품이 말하는 바가 그 행하는 바와 다르고, 문학작품적 구조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은 그 본성이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형식의 글들도 똑같이 수사적이고 애매한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속여넘긴다. 동료인 힐리스 밀러와 마찬 가지로 드 만에게 있어서 문학은 비평가에 의해 해체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문학이 스스로 해체하는 것임을 밝혀줄 수 있으며 더구나 바로 이 해체작용을 문학 스스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 ‘문학이론입문’, 창작과비평사, 179쪽)



폴 드 만이 관심 기울인 것은 현실이 아닌 텍스트였고, 텍스트 내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라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폴 드 만의 저서를 사서 읽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폴 드 만을 읽을 시간에, 폴 드 만이 열 올렸던 저자들의 오래된 저서를 다시 읽는 것이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폴 드 만에 대한 충분한 안내서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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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 '시뮬라시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학자이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의 암울한 사회 분석을 싫어했으며,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끔찍함을 무시하면서 장 보드리야르를 전파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의지하는 책이나 이론은 오직 시뮬레이션 이론이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극단적인 반-플라톤주의자이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자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전도된 이상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 이후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희석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들에 의해 새롭게 조작된 것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하이퍼-리얼리티나 시뮬레이션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철학의 시작부터 고매한 영혼을 아프게 했던 눈 앞에 보이는 것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참과 거짓, 실재와 가상)에 종지부를 찍고 거짓과 가상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한 그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면서 그의 이론이 마치 포스트모더니즘 구세주인양 전파하던 국내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역겨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찬양하는 이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의 세계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사이퍼와도 같음을, 그리고 그 귀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사람들과 만날 일도, 그런 사람들이 쓴 글을 볼 일도 없지만, 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마치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설은 끝났'고 '영상(영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류의 글을 아무런 생각없이 써댄 문학이론가(문학평론가)들을 떠올릴 때마다 치미는 울화와 비슷하다. 그 때부터 한국 문학의 하향 평준화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나는, 전혀 다른 매체적 특성을 가진 소설과 영화를 마치 한 부모 밑에서 난 이복형제 다루듯 써댄 글들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장 보드리야르.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천사처럼...

얼마 전 나는 그가 죽기 전에 쓴 '세계화의 폭력성'이라는 글을 읽었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마키아벨리를 떠올렸다. 전도된 이상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를. ... 어찌되었건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의 분석에 있어서 탁월한 시각으로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나, 끊임없이 되새겨 볼만한 통찰을 숨기고 있으며, 그의 암울한 세계관과 대결하면서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긴다.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써, 유용한 시사점을 담고 있는 글이라 여겨진다. 이 글은 르 몽드 디플로마크 2008년 12월 한국어판에 실렸다.


세계화의 폭력성


- 원래 보편성은 하나의 이데아였다. 그런데 이데아가 세계화 속에서 현실화 되면서 이데아는 이데아로서 자멸하고 종말을 고하게 된다. 인간이 그 본보기다. 인간은 죽은 신의 빈자를 차지한 뒤, 세상을 홀로 지배하게 됐지만, 최종적 이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적이 없어진 인간은 적을 내부에서 키우며, 비인간적인 종양 덩어리를 분해낸다.

- 바로 여기로부터 세계화의 폭력성이 생성된다. 즉 모든 형태의 거부, 나아가 최후의 죽음 같은 모든 형태의 기이함까지도 몰아내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사실상 알력과 죽음이 금지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폭력성과,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폭력성 자체를 종식시키고 모든 자연적인 질서, 몸, 성별, 탄생 혹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동되는 폭력성 등이 그것이다.

- 폭력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유해성이라고 해야 할 듯 하다. 왜냐하면 그 폭력성은 바이러스성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염되고 쇠사슬처럼 엮어져 반응하며, 서서히 우리의 모든 면역력과 저항능력을 파괴한다.

- 누가 세계화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까?

- 시스템을 작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긍정적인 양자택일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특이성들. 그 특이성들은 양자택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가치 판단이나 현실 정치의 원칙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 특이성들은 최상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 종교적인 교리만큼이나 교조주의적인 세계 권력은 모든 형태의 다양성과 개성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교조주의 적 논리 아래, 모든 다양성과 개성들은 좋든 싫든 간에 세계의 질서를 따르든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 한쪽의 일방적인 기부는 권력행사다. 선(善)의 제국, 선의 폭력성은 바로 보답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혹은 노동(하지만 노동은 상징적인 보상이 못된다. 결국 폭동이나 죽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을 빌미로 노예의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는 주인을 대신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도움을 줄곧 받아야 하는 무자비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 굴욕당한 사람들과 모욕당한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처럼, 테러리즘은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테러리즘 또한 총체적인 테크놀로지, 절망적인 가상(virtuelle)의 현실, 그리고 '세계화되어' 퇴락한 모든 종과 인류의 윤곽을 그려낼 네트워크와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근간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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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뮬라시옹이 뭔가 한참 고민했는데
    시뮬레이션을 프랑스어로 발음한거로군요;;

    사실 이번 글은 대부분 이해도 못했고 대략적인 그림만 그려질 뿐인데요.

    저는 여느 작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만 보더라도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모습을 그리는 것보다 쉽게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필름 표면 위에 빛을 이용해서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 사진이
    기술을 타고 발전해서 현재까지 이르렀고
    그를 통한 각종 manipulation과 alteration이 있었고,
    결국에는 필름을 넘어서서 전자신호로 이뤄지는 디지탈시대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필름은 단지 생산량이 줄어들었을 뿐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받고 있으며
    단종시켜버린 폴라로이드 필름또한 수많은 매니아들의 영향으로
    생산공장이 다시 생길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 글쎄요.
    이쪽 분야를 전혀 모르는 제가 보기에는
    역사, 인생, 시대를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걸로 바라본다라고만 생각되네요.
    사람의 삶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건 사실이지만
    애기가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수록 다시 애기가 된다고 하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말만 길었지.... 저도 먼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_-

    •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민음사)나 리처드 J.레인의 '장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를 한 번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장 보드리야르의 사상은 특히 현대 매체 예술(미디어 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약간 어렵긴 하지만, 한 번 읽어봐도 될 것같아요. ^^

    • 어... 어렵네요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해도;;;
      기회가 되면 찾아보겠습니다만...;;;
      이건 한글이던 영어던 못 알아보겠는걸요;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10점
조중걸 지음/프로네시스(웅진)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조중걸(지음), 프로네시스

 

키치’(Kitsch)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은 키치를 설명하기에 구체적인 스타일이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어떤 인식론적 태도라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카르스텐 해리스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저자들은 키치를 이발소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인식론적 태도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키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영국 경험론을 이야기하고 현대 물리학과 현대의 추상 미술의 기원을 탐구해야만 한다. 이를 다 설명해야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실은 이 설명을 듣고 있는 (지적으로 무능하거나 성실하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의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교수나 강사도 드물다. 

이 책은 ‘키치’라는 단어에 대해 적고 있지만, 실은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허위’에 대한 집요하고도 논리적인 공격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치라는 단어 대신 ‘불행하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이 행복을 가지기 위해 받아들이는 허위적 태도’로 표기해도 무방할 정도다. '키치'라는 단어가 일반 독자의 귀에 솔깃하고 흥미로워 보이겠지만, '키치'와 '키치가 뜻하는 바' 사이에는 소쉬르의 의견대로, 자의적 관계가 있을 뿐이다. 아무런 필연적 연관 관계도 없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키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몇몇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정신과 삶 전반에서 키치적 것들을 다 몰아내고 한순간이라도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이가 있을까?   

오지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공은 불이 꺼진 무대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너무 아찔하지 않은가? 같은 침대에 누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의 입술이 실은 거짓말이라고 탄로난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될 것인가? 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신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저 뾰족한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공중 부벽처럼, 두터운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처럼 기괴하고 현란하며 경련적으로 변하게 된다면? 고흐가 미쳐갈 때, 세잔은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기하학의 성을 쌓고 외부세계로 나가지 않는다. 고흐의 터치와 색상이 자신의 삶을 포기했을 때 나오는 것이라면, 세잔의 고전적인 기하학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영혼을 저 불가해한 현실 세계 속에서 지키고자 했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예술가 모두 이 세계 속에서는 이방인이었으며, 침묵했다.

정말로 이 세계에는 아무런 질서도, 원리도 없는 것일까? 우리의 삶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으며, 그저 우연하게 왔다가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는 것일까?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하며, 현대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그렇게 여겼으며, 철저하게 그들의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음을 강조한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현대의 고전주의자들인 모더니스트들이 자신의 내부에 견고한 성을 짓고 고전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마저도 거짓과 허위라며 부정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은 도리어 자본주의와 흥미로운 결탁을 만들어내며, 거짓된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어떤 양식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 예술의 문제 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거짓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예술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예술과 세계에 대해 궁금해지듯이, 우리의 정신적 방황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나에게 서양 미술사를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한) 저자는 지성사(특히 철학과 역사)를 바탕으로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 철학(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과 데카르트를 구분짓는 방식으로 기하학을 이용한다. 좌표 평면 상에서의 직선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면서 근대에 있어서의 ‘운동’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과 바로크 예술의 연관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아르놀트 하우저가 인상주의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베르그송의 철학과 드뷔시의 음악, 프루스트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러한 지성사적 이해에 기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우저는 철저하게 유물론적 입장에 서있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이나 르네상스 고전주의에 대해서는 통찰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조중걸의 말대로 ‘예술은 기술의 문제라기 보다는 예술의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욕’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예술에 대한 기술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왜냐면, 기술은 철저히 인과적 관계 위에서 예술을 설명할 수 있지만, 예술의욕은 인과적 관계를 무시하며 그 당시의 사람들의 심성, 일상적 삶, 학문과 역사 등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먼저 요구한다. 이 책에서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고 철학과 과학을 가로지르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여러 번 읽기를 권한다. 적어도 현대 예술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래야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최소한 진실해질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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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展
로댕갤러리   2007. 5. 18 - 8. 19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르는 ‘시간의 배’에 승선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것은 몇 세기가 채 되지 않는다. 사상의 영역에서 시간과 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진리는 시간을 떠나 영원성에 속해 있는 것이며 변하지(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플라톤은 한시도 이데아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고대를 지나 중세는 전지전능한 신을 내세웠고 이는 근대 초까지 계속 되었다.

시간과 운동은 하나의 짝이다. 이 둘은 사상의 영역에서처럼, 예술의 영역에서도 같이 등장하며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주제를 담당한다. 레베카 호른의 작업들은 시간과 운동 속에서 이루어진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없다. 모두 전동 모터를 가슴에 품고 있다. 심지어 페인팅까지도 어떤 운동의 정지된 한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탐구가 필름에까지 옮겨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의 작업들은 전동모터에 기댄 깃털, 조가비, 물, 물감, 철사 등이 어떻게 시적 서정성을 소유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 예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감수성의 한 예를 증명하고 있다.

확실히 보기 힘든 전시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현대 예술이 어느 단계까지 진화해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다. 또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예술이 보여주는 시적 서정성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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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술 6월호에 실린 레베카 호른 전에 대한 진휘연 교수(sadi)의 리뷰 글에서 옮긴다.

미술사적 견지에서 본다면 호른은 1970년대 초, 신체아트, 퍼포먼스, 영화라는 새로운 태도와 매체를 통합한 작가로 평가될 수 있고, 실제 시간과 실제 공간 안에서 작품 형성과 수용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개념미술의 계보에 속하는 작가이다.

그리고 흥미로운 구절 하나 더.

작가는 일찍이 파이버글래스(유리섬유)와 폴리에스터를 다루면서 폐에 심각한 질환을 얻게 된다. '아무도 내게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라는 원망 섞인 회고와 함께, 그런 유독성 소배를 다루던 여성 작가들이 모두 암을 얻게 되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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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Presque Rien Sur Presque Tout)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 지음, 유정희 옮김, 문학세계사, 1997


Story는 시간 위에서 인과적 관계를 이루며 진행된다. 드라마가, 영화가, 그리고 위대한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선 Story가 사라진 독백으로 가득하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내가 보기엔 좀 있어 보이는 문장들로 구성된, 난해한 수필집이라고 하는 편이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정의내리기에 가깝다. 그런데 수필집으로 정의내리더라도 이 책은 독서의 재미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불어 원문으로 읽는다면, 분명 현란한 언어 구사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의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번역본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재미마저 없다는 점이 이 책의 완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혹시 난해한 수필집, 아니면 정말 기상천외한 소설 형식(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숨겨진 보물일 지도 모르겠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장 도르메송/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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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BOURGEOIS : Abstraction 
(루이스 부르주아: 추상)

A P R I L  2 0 - J U N E  2 9,  KUKJE GALLERY



나는 그녀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작품을 보았지만, 그녀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녀의 작품은 무미건조한 물음표에 가까웠고, 그녀를 향한 찬사와 열광이 되레 이상하게 여겨졌다. 결국 그녀 작품에 대한 비평을 찾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는 그녀 작품들. 내가 남성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더 건강해서 그런 것일까. 읽어도 선뜻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다가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는 매우 건강해서 병적인 나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가 관심을 가졌다는 기하학에서 영향 받았다고 평가되는 ‘The Three Graces'(삼미신, 1947년 작)은 기하학적이기 보다는 원시예술적이었다. 19세기말 20세기초 많은 모더니스트들을 열광시켰던 아프리카의 토속 예술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The Three Graces'는 그러한 원시성을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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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Exit 출구 없음


‘No Exit'(출구 없음, 1989년 작)은 ’근본적인 불안감과 도피 심리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 작품이 불안해 보이지도, 어디로 도피하려는 심리도 엿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근본적인 고립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출구 없음‘이란 갇혀 있다는 의미이고 계단 앞 두 개의 큰 나무공이 성적인 암시라면, 자발적 갇혀 있음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계단은 불안의 상징이나 은유가 되지 못하고 끊어진 계단의 높이와 병풍처럼 둘러쳐진 벽의 높이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곳은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불안하거나 도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단 위로 올라가지 않기 위해 벽도 세우고 계단도 자른 것이다. 더구나 계단 아래에는 성적인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으니, 왜 그 곳에서 나가고 싶어 할까.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을 우아한 방식으로 극복해 내는 건강함의 양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아니면 내가 느끼는 불안이나 상처, 소외나 고립과는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거나. ‘밀실’이라는 작품은 확실히 건축적이다. 그런데 표현 양식에서 ‘건축적’이라는 의미는 그 자체로 고전적 건강함을 의미한다. 역시 루이스 부르주아는 건강한 예술가이다. 이 점에서 그녀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가령 ‘부르주아는 무의식과 내면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욕망,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등의 경험을 표출하고자 했고 이는 주로 인체를 바탕으로 한 성적인 이미지나 에로틱하거나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부르주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과 삶의 안정성을 향해 가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들(상처, 소외, 고독 등)을 견고한 형태(기하학적이거나 추상화된 양식) 속에 가두거나 욕망의 문제를 신비로운 생명이나 탄생과 결부 짓고, 끊임없이 역동적인 운동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부르주아는 20세기 초 고전적 양식의 모던 화법으로 포스트 모던한 주제들을 소화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후세의 예술사가나 비평가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우아해 보이긴 했지만, 열광적인 찬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그녀만큼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국제갤러리 신관은 국제갤러리 옆으로 나 있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있다. 네모반듯한 건물 앞의 공터가 있어 시원한 청량감을 선사한다. 루이스 부르주아 전은 무료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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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르주아는 아직도 과거의 고통과 상처에 묶여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이겨 내는 방법을 찾았고, 그 방법이 바로 예술인 것이 아닐까요. 스스로의 상처와 정면대결해서 그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을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합당하겠죠. 적어도 그녀의 "Cell" 연작을 본 후의 저의 생각은 그랬습니다.

    • 국제갤러리에서 배포한 한 장 짜리 전시 설명문이 제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루이스 부르주아 작품에 대한 대다수의 평(온라인에서 구할 수 있는)이 그녀를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정말 '건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애님의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매우 고전적인 예술가라고 생각됩니다.

  •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2008.09.02 13:07 신고

    저는 오늘 Louis Bourgeois 를 구겐하임에서 보고 왔습니다.(미국에서 학교를다녀서요;;)다른 사람 이미 저정도 시기에 이르면 Bourgeois의 그녀의 예술적 Ambition이 반영된 시기라고 한다고 써놓았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이미 어느정도 불안은 극복하고 리움에도 있는 대형 작품들과 같은 공적인 영역에 관심을 쏟는 시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훨씬 그전에 작품들(1940년~50년대) 집과 여성을 주제로 한 연작들을 보시면 Eva Hesse에서 보이는 여성미보다 더 우울한 모습, 여성이 집으로 도피하나 완전히 도피할수없는 그런 작품들이 훨씬 주류를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국제 갤러리에 자금이 부족해서;;;;;;;;;;;;앞에 Series는 안들고왔지 않을까 생각되네요..그러한 여성적인 고민은 후반부에는 많이 사라지는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호르몬의 상실과 곁들여서 말이죠. 그냥 풋생각이네요..!

    • 부르주아의 전체 작품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쓴 글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국제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만 보고 리뷰를 쓴 것이고, 그 점에서 국제 갤러리에서 만든 전시 설명은 저와는 다른 견해였습니다. 도리어 저는 고전주의적인 부르주아를 느꼈으니 말이죠.
      하지만 부르주아의, 초기 작품들이나 전시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에서는 '우울한 모습, 여성이 집으로 도피하나 완전히 도피할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미술 잡지 등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 다시 루이스 부르주아에 대해 살펴봐야겠군요. 덧글 감사합니다.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데이비드 하비 지음/한울(한울아카데미)


서울에서 딱 일주일만 살면서 매일 아침 일간지를 챙겨 읽으며, 출근길 지하철, 퇴근길 버스를 타보자. 어떤 기분이 들까.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에 대해선 숙고할 틈도 없이, 생각하는 것을 꼭 죄악이라는 듯 여기며, 현재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진 않을까. 하긴 그렇게 채찍질해서 현대 한국이 세계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살아남았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으니(아니, 많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살아야된다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왜 이렇게 되었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예술과 미학에 경도된 채, 실존주의적 체념을 가슴 한 곳에 묻고 사무실과 집을 오가며,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무심하게 흔들리는 나에게, 데이비드 하비는 주옥같은 인용들과 함께, 혼돈스러운 현재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며 꼿꼿하게 서있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은 아직도 유효하다!

테리 이글턴의 ‘압도적이다!’라는 찬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본질을 드러내며, 그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와 문화와 예술, 미학, 그리고 일상생활, 이들 상호간의 관계를 엄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의 지적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불과 몇 십 년 밖에 되지 않는다(1970년대 이후). 가령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뉴욕 주식 시장이 곧바로 한국 증시에 영향을 주는 것’ 따위는 불과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즉 이는 원래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적용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여러 현상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향해가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의 ‘시공간 압축’의 개념은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다는 것에 강조점이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 빨리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러한 속도로 인해 우리 인간의 인식 및 삶의 유형을 예상치 못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것에 강조점이 찍혀져야 된다(시공간 압축은 새로운 개념이라기 보다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에 가깝다). 사회학자인 그가 문화예술과 미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의 변화로서의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이 체제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변화. 그러면서 그는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이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석해낸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듯이, 우리 인간도 과거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알지 못한 채, 현재와 미래만을 바라볼 뿐이다. 최근의 급속한 기술 발달은 과거는 지나간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이미 폐기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압도적 현재와 미래를 만들고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역사는 폐기되고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찾지 않는다. 그런데 하비는 그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나는 딱 한 번 이 책을 추천받았다. 꽤나 많은 인문잡지를 읽었고 많은 지식인들을 만났지만 말이다. 한국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내가 읽은 몇 권 되지 않는 책들 중에서, 마샬 버먼의 책 ‘현대성의 경험’ 이후로 좌파적 시각에서 현대를 통찰력 있게 분석해 낸 거의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 전공자들에게는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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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련님, 안녕하세요.
    저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김현선이라고 합니다.

    저희 반디앤루니스는 이번 다음 View와의 제휴를 통해 <반디 & View 어워드>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매주 '다음 VIEW'에 노출되는 블로그 중 좋은 글을 선정하여, 선정된 블로거분들께 반디앤루니스 적립금을 지급하여 시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하련님의 리뷰가 <반디 & View 어워드>에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리며, 적립금 지급을 위한 반디앤루니스 아이디와 다음뷰 발행 닉네임을 담당자 메일(anejsgkrp@bandinlunis.com)로 6월 3일까지 보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또한 앞으로도 <반디 & View 어워드>를 매개로 지하련님과 좋은 인연 계속 이어가길 소망합니다. 그 밖에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담당자 메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매주 <반디 & View 어워드> 선정작은 반디앤루니스 책과 사람 페이지(http://www.bandinlunis.com/front/bookPeople/awardReview.do?awardType=02)와 다음 파트너 view 베스트 페이지(http://v.daum.net/news/award/weekly)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김현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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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종말 이후>>, 아서 단토(지음), 이성훈/김광우(옮김), 미술문화, 2004년
(Arthur C. Danto, After the end of Art –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다 읽고 난 다음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더구나 꽤 저명한 사람의 책이라, 내심 기대를 했는데, 거참, 한심하지.

예술의 종말이란 낯선 주제가 아냐. 이건 헤겔 미학의 주제야. 여기에서 ‘종말(End)’는 곧잘 근대성에 반대하는 후기 근대주의자들의 어투이기도 해.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건 단토는 헤겔을 끔직하게 좋아하는데, 후기 근대주의자들 대부분이 지독하게 헤겔을 싫어한다는 점이지. 대체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기 근대주의가 실은 코제브의 헤겔 해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이 책의 결론은 단순해. 바자리식의 미술 이해의 역사가 끝났고 그린버그식의 미술 이해도 끝났다, 그러니 이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끝났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아무리 읽어도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좋아하는 라캉이라면 ‘대문자 A의 예술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했을 꺼야. 여기에 대해서 단토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는 건 아냐.

애초부터 예술은 진보하는 게 아니었거든.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변화한다고 할까. 우리 삶같이. 여하튼 단토는 이런 식으로 기존 방식으로 이해되던 예술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예술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지.

문제는 이게 다라는 데 있어. 뒤라스의 마지막 책 제목을 흉내 내려고 한 건 아니야. 그런데 정말 C’est Tout야. 내가 보기엔 아서 단토는 그가 이야기하는 ‘탈역사적 미술’에 대해서 좀더 충실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게 무엇인지 말이지. 왜 말레비치의 사각형과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어야만 했어. 그런데 그런 설명은 없거든. 또는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변을 해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는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모방의 시대에서 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나 모던의 시대에서 포스트모던의 시대로의 이행에서 일어난 단절이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에서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양식의 이행에서 일어난 변화와 어떻게 틀린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가 전자의 두 이행을 ‘단절’이라고 파악한다면, 전성기 르네상스와 후기 르네상스도 ‘단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또한 종말은 너무 식상한 방식이야. 그리고 단토의 이해는 너무 표면적이고. 그는 그저 기존의 역사는 끝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예술이 철학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식인데, 뽈 발레리가 생각나는군. 뽈 발레리가 <<드가, 춤, 데생>>이라는 뛰어난 책에서 ‘회화만큼 지적인 예술을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했던 거 말이야. 발레리가 보기에도 회화는 지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고 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했거든. 실은 오래 전부터 예술은 철학의 문제를 고민해왔다고 할 수 있어. 결국 단토의 생각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식상한 것들의 반복인 셈이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대단한지 난 잘 모르겠거든. 누가 나에게 설명해줄 사람 없을까. 단토의 다른 글이나 책을 읽어볼까, 하긴 단토가 여기저기 인용되고 인정을 받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숨어있겠지. 아마. 다시 단토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 책은 사지 말고 뒤에 실린 역자의 해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 단토의 글보다 역자의 해설이 더 이해하기도 쉽고 단토의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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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6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Believing is Seeing
마리 앤 스타니스제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현실문화연구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두 번 적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적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책에 대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다들 찬사 일변도여서 이건 아닌 것같아 여러 번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라면 원고지 10장 정도의 분량과 슬라이드 20개만 있으면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의 다섯 배 많은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러고 보면 다들 현대 미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대 미술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째 자기자신에 대해서 솔직하지 못한 관계로 18세기나 19세기의 생각 방식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때문이라고 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대 미술 비평가들이 잔뜩 어렵게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비평 이론을 몰라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운 이론이 왜 필요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작품까지 어려운 이론을 들이밀고 있으니 말이죠.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입니다.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제목입니다. '믿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1+1=2가 맞나요, 아니면 1+1=3이 맞나요?

다들 첫 번째가 맞다고 하겠지만, 몇 분은 왜 저린 질문을 던질까 고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진 의도는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1,+,1,=,2, 3은 다 기호입니다. 추상적인 관념입니다. 원래는 실재하는 사물의 셈을 하기 위해 빗대어 사용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 이젠 관념만 남은 것입니다. 수학이라는 학문이 그렇죠. 그러니깐 빈껍데기일 뿐입니다. 실제 세계에 대응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좀 어렵군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1+1=2가 되고 1+1=3이 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believing이란 하나의 규범이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책의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입니다. 미술도 하나의 믿음(개념)이며 규범이고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미술(art)라는 것은'이것은 미술'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했을 때, 보이는 것만 미술로 인정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것은 미술이 아니고 이것은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저자가 예로 든 모든 것은 다 미술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 우리'가 바라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시스틴 성당 천장화)가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미술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오늘날의 의미로 미술로 인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지점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술이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미술의 역사 또한 그 당대적 의미 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미켈란제로의 후기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지금 우리가 봐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16세기 중후반의 예술가들, 파르미지아노, 폰토르모, 로소 플로렌티노의 작품들은 무척 현대적입니다. (* 매너리즘 시기의 예술가들입니다.) 오래 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당시에 오늘날과 같은 미술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그들의 작품들은 엄연히 예술 작품입니다. 현대 어느 예술가들의 작품보다 감동적이죠.

위에서 제가 '믿음은 규범'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이라는 제도와 규칙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미술로 인정받기 위한 여러 규칙, 규범,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현대 미술은 이러한 규칙, 규범, 제도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것은 진보는 아닙니다. 그저 변화일 뿐입니다. 어제 북서풍이 불다가 오늘은 남서풍이 부는 것과 같은 변화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듯 그런 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인위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것도 인간사가 그렇듯이 그렇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죠.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미술 내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미술 자체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실은 모든 예술 이론가들의 꿈이 미적, 예술적 자율성의 확보인데, 웃긴 소리입니다. 왜냐면 예술은 혼자 자족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이 아닙니다. 왜나면 예술은 예술 창작의 대상(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간에)이 필요로 하며 감상자를 필요로 합니다.

미술의 양식 변화는 미술 내의 어떤 동인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미술 외부의 변화가 더 큰 요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근대 미술의 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왜냐면 근대 생활은 개인주의 진전으로 이어지듯이 근대 미술도 개인주의화되기 때문입니다. 서명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나쁘지 않습니다. 전 다소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을 뿐이죠.

하지만 미술사와 모더니즘의 발전,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 대중매체의 창조, 오늘날의 미술과 문화에서는 순수미술은 물러나고 대중 문화를 차용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씁쓰리합니다. 왜냐면 대중문화, 대중매체를 차용한다고 해서 그 미술 작품이 미술관에서 전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리어 그것은 강화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저급화'라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즉 쓸데없는 소비자본주의적 오브제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짓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치적 메타포를 집어넣습니다. 이건 요즘에도 통용 가능하는 방식입니다. 정치적 아방가르드 예술이 실제 세상에서 정치적 아방가르드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대중들은 그것에 동의할까요? 전 매우 회의적입니다. 차라리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기존 미술에 대한 반발이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양식적 특징이라고 보기엔 너무 한계가 빤히 보이거든요.

뒤샹이 변기통을 가져다 놓은 이유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일반 대중에게 야, 니네들이 바로 예술가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아카데미 미술가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지만, 도리어 뒤샹의 변기통이 진짜냐, 가짜냐라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 아이러니를 극복할 자신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대로 현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여기에 대해선 아무런 견해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한참 잘못된 논문입니다. 철저하게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성된 이 논문은 '아우라'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것 이외에는 나머지 것들은 예상을 빗나간 글입니다. 그런데 왜 이 논문을 읽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예상보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강의 교재로 하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 기회가 닿는다면 이런 식으로 도판 잔뜩 넣은 책을 내고 싶군요. 글은 작고 도판이 많으니, 글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작을 테니 말이죠. 현대 미술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이 책에 대해서 읽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알아두셔야할 것은 저자의 견해는 현대 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라, 개념미술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에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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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인 2013.06.09 13:22 신고

    제가 읽었던 많은 책들을 읽으셨고, 그에 관한 색다른 시각이나 안목을 갖게 해주시는 서평 감사합니다. 비단 몇 권에 책에 관련된 이야기 뿐만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을 얻어갑니다. 우리가 블로깅을 하듯, 이 책 역시 저자의 생각이고 그가 정의내린 개념일 뿐인데 저같은 일반인들은 너무 수직적인 자세로 미술을 대하는 것 부터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확대시킨 비평가들, 또 그들처럼 인식해야지만 '고상한 취향'을 향유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오류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저 같은 문외한은 그저 읽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만요.. ㅎㅎ 모쪼록 감사합니다. ^_^

    • 거의 10년 전에 쓴 리뷰이네요. 그리고 흥분해서 썼군요. ㅎㅎ 문제 제기만을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많은 이들이 찬사를 해서 그 때 꽤 흥분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현대 미술에 대한 변명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문제 제기를 위해서 한 번 볼 필요는 있을 꺼예요.
      댓글 감사합니다. ^^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작품들이 현대 미술인데, 사람들은 현대 미술을 어려워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도리어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는 전문가들의 탓이라 여겨집니다. 실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미술이 현대 미술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

무관심의 절정 - 6점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은민 옮김/동문선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이은민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80



영화 <<매트릭스>>의 주연 배우인 키아누 리버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국내 광고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충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엔 그의 사상은 기존 관념이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체계적인 사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과격한 논리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지함과 성실함이 미덕으로 간주되어야 할 학문의 세계 속에서도 갈수록 말장난만 심해지는 이 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장난은 언뜻 보기엔 뭔가 대단해 보이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여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책을 읽고 그 책의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가 아주 대단한 사상가라고 오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가지는 ‘미학주의’의 무책임함과 경박함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는 ‘노동자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자본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벗어나는 이들은 부모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사라졌고, 계급 투쟁도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 자유를 상실했고 더 이상 자기 원천의, 자기 목적의 주인도 아닙니다. 그는 네트워크의 볼모입니다. 우선권은 네트워크에 있지 그것에 가입한 사람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쪽에 있지 개인 쪽에 있지 않습니다. 집단 역시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상의 하이퍼 리얼리티는 동시에 이 두 항을 삼켜왔습니다. 개인/집단의 이 극점들은 약화됩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이 세계는 갈등이 끝났으므로, 역사에는 종말이 왔고(* 후쿠야마와 비슷한 견해임) 이제 개인, 즉 주체는 자유도, 목적도, 정체성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어떤 야만성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동물적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심각하게 가상과 실재를 혼동하고 있다. 즉 그에겐 이미 실재란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쉽게 말해 그에게 가서 ‘당신은 아무 의미 없는 실재구만’이라고 말하곤 감옥에 넣어버린다고 해서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이론 속에선.

아마 혹자는 그것을 단어 그대로 이해하지 말고 은유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은유’란 문학이나 예술의 단어이지, 철학이나 사상의 단어는 아니라는 점을 명시해야만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 두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끄 데리다의 경우 이 둘 사이를 오가면서 철학의 허구성을 해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실재성이 실재를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 앞에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 놓여 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 앞에는 우리 삶이 놓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면서 자신이 맞다고 주장하는 말장난에 능한 얼치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말장난에 놀아나는 무수한 식자들이 있고. 한 번 보드리야르의 팬들이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대로 한 번 살아본다면 어떨까? 까뮈의 팬들이 뫼르소처럼 살아가지 않는 이유는 문학이 가진 미덕과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설마 나에게 보드리야르는 위대한 소설가예요라고 말하는 이는 없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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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불멸 L'Immortalite'>>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 문학, 특히 소설에서 현대성, 내지 현대예술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기대해보자.



1.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반의 여러 예술들은 고전주의와 가까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 하인츠 보러의 경우 이러한 예술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 현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현대’, 다른 말로 현대에 나타난 고전주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부조리 연극들은 고전적 현대의 붕괴를 천천히 예고한다. 그리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가 무너지고 난 다음 처음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이다. 이 낭만주의는 장르나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의 허점을 노리고 이성의 한계, 이성적 기획들의 실패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낭만주의는 ‘감성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경향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다. 이 속에서 근대적 자아는 분열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분열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즐겁고 희망찬 일이기도 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몰역사적이며 성급한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불멸>에서의 낭만적 경향은 근대적 자아의 분열, 시간과 공간의 혼란, 소설 양식의 붕괴, 자의식 과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경향은 현대 소설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 원근법적 세계의 붕괴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종종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왜냐면 르네상스 초기 연극에서 원근법은 무대를 꾸미는데 매우 유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회화나 회화이론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무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있다. 이는 한 명의 주인공(소실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한다. 다시 부연하자면 프로타고니스트(제1배우, 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제2배우) 간의 대립과 반목, 갈등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음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영웅이, 그 영웅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영웅이 가슴에 품고 있는 신념이나 확신이 승리하거나 실패하게 될 때, 이러한 서사 양식을 원근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주의 연극은 이러한 원근법적 양식을 보여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원근법은 동일한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근대 소설들은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의 소실점 자리에 있는 한 인물, 서사의 주인공을 ‘근대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 마담 보바리, 고리오 영감, 줄리앙 소렐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붕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모네, 피사로 등이 보여준,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는 우리의 세계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가 믿어왔던 그 세계를 거짓이었고 기만이었음을 폭로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모더니즘 예술들은 근대적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 순수한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토 무질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모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으로 인해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넌 날 이해할 수 없어’라든가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그 골이 깊어진 독아론적 태도이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 양식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그 어떤 것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그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평면성은 하나의 원근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치들로 쪼개어지고, 그 가치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현대 소설에서는 한 명의 주인공에서 무수한 주인공으로 늘어나게 되고 종종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게 된다.

<불멸>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 시점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중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 소설은 사건 중심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며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불멸>은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의 내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한 개인의 내면은 다른 개인의 내면과 비교된다.

이 경우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각 개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교류에 대한 제약은 근대 개인주의의 비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호교감적인 형태의 정신적인 교류란 없다.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엇갈린다. 이러한 단절은 현대 소설에서 ‘다중 시점’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몸짓’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작 ‘몸짓’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3.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자의식 과잉

일반적으로 메타픽션은 소설가 소설, 내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해된다.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듯이 소설 속에서 소설에 대한 평가나 의미 부여, 비평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양식들은 사태나 인물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 소설 속에 갑자기 작가가 등장해 사건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거나, 비평문이나 인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메타픽션의 성격은 <불멸>에서는 매우 노골적이다. 자의식 과잉인 작가는, 소설의 창조주이면서 소설 인물들의 주인인 그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스토리의 방향을 보다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설과 인물에 대해서 떠든다.

현대문학이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며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픽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는데, 근대 소설이 원근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나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자아의 모험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험이 근대적 자아의 붕괴로 인해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로 이루어지는 주체의 분열을 야기하거나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작가가 고전적인 작가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을 실재하는 인물로 격상시키면서(작가는 소설 속 인물로 격하되고), 소설 속 세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불멸>에서 이러한 메타픽션의 경향은 소설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한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4. 사랑, 몸짓, 그리고 불멸

아녜스는 현대의 슬픈 사랑을 표상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스스로를 분석하며 지극히 정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로라는 현대의 행복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표상한다. 이 두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하지만 로라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로라에게 육체란 애초부터, 선험적으로, 전일적이고 항구적으로,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였다 : 즉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가져가 그의 앞에 그 육신을 내려다놓는 것. 내면 외면 할 것 없이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부드럽게 천천히 그것을 망가뜨리는 시간과 함께 말이다.
아녜스로서는 육체란 성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희귀한 순간들에만, 즉 흥분이 육체 위에 어떤 인공의 비현실적인 광채를 투사하고 그 빛이 육체를 아름다운 하나의 욕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줄 때만이 육체는 성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녜스가 줄곧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129쪽에서 130쪽)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벤스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류스티스는 그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독자는 아녜스 = 류스티스라는 등식을 이해하지만 루벤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것의 소멸을 어떤 충격적인 계시로 체험했다 : 그는 결정적으로 사랑 저 너머에 있게 된 것이다.
(362쪽)

사랑 저 너머에서 루벤스는 류스티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때 그는 얼마간 여자 관계를 끊는 것이 자기에게 나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그 휴지는 연장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몸짓을 통해 각 개인들은 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혹은 소설 바깥 세상에서 개인주의의 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불멸>에서 강조하고 있는 ‘몸짓’은 가느다랗게 이어져있는 사랑과 이해, 포옹의 표상인 셈이다.

‘호모 센티멘털리스’란 단어는 이 소설 속에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하기 사용된다. 사람은 많으나 몸짓은 별로 없다. 소설 속의 어떤 몸짓은 계속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폴이 그 몸짓을 하게 된다. 몸짓을 통해 각 인물들의 감정이, 정신이, 영혼이 연결되는 것일까.

불멸은 사랑의 불멸이 아니라 몸짓의 불멸인 셈이다. 몸짓의 불멸을 통해 다른 것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셈이다. 쿤데라는 원근법적 세계가 무너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며, 사랑은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고 생각 많은 어떤 이가 ‘물망초에 미친 여자’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는, 서로서로 단절되어있는 근대의 비극을 말하면서도 ‘몸짓’을 통해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고 오직 몸짓으로만 연결되는 세계. 그나마 몸짓이 남아 서로를 연결해주는 세계 말이다. 내가 보기엔 더 비극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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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쿤데라의 책에 대해 검색하다가 만족할 만한 글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 들어와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지도 벌써 10년이 된 것같네요. 무척 좋은 소설인데, 최근에 이 소설을 읽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반갑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 10점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그 존재를 유지해 나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 인간들이란 그 아슬아슬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허황된 희망을 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란 바로 그런 허황된 희망으로 축조된 사회이고 포스트모던 사회 속의 우리들은 그 희망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것도 던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 더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까닭에 끊임없이 그 희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란 매우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존재함'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꼭 꿈 속의 소녀를 잊지못해 그 소녀를 그리며 그 소녀가 현실 속으로 걸어나오길 바라는 젊은 화가의 바램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란 현실 속의 누군가를 꿈 속의 소녀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2.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말하는 토리스몬도는 그가 말하는 그 순간까지만 정당하고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믿는 성배기사단도, 그가 믿는 어머니도, 그가 믿는 신념도,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인간'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꼭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하듯이 그가 믿는 바도 그와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셈이다.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의 대비로 인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서사를 위해 그는 아질울프의 명령에 따르며 동시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유로서만 존재하는 자와 연장으로만 존재하여 자연의 모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승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다만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계속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쫓는다. 그리고 프리쉴라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는 자에게 매혹당한 채 "그 사람은 남자야, 진짜 남자야, ... ... 하룻밤 내내 천국이었어......"라고 말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즉자(en soi)로서만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앞에선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깨달으며, 브라다만테와 프리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소설을 읽어나가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게 매혹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아질울프는 자신의 존재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리스몬도에게서 듣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나서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가 사랑하였고 프리쉴라가 매혹당했으며 그 어떤 전투도 그의 하얀 갑옷에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던 위대한 기사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입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발도는 '투구를 향해, 갑옷을 향해, 떡갈나무를 향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아질울프를 불렀'지만, "기사님! 갑옷을 입으세요! 프랑스 군대와 귀족 사회에서 기사님의 지위는 분명해졌습니다!"라고, "기사님, 당신은 존재합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갑옷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투구는 땅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3.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남긴 <이 갑옷을 로실리오네의 기사 람발도에게 남기노라.>라는 쪽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근대의 신념이 탈근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람발도는 그 하얀 갑옷을 입었고 그녀 앞에, 브라다만테 앞에 선다. 그리고 그를 아질울프라고 믿는, "드디어 당신이 저를 찾아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라고 소리치는 브라다만테는 람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소설 속 이 소설을 써나가는 수녀가 브라다만테라는 사실을 드러나는 순간, 모든 사건들은 허구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람발도가 그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는 달려오는 브라다만테에게 '나 역시 서투르게 행동하는 그런 남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넌 모르겠지? 행동을 할 때마다 욕망이나 불만족이나 불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라는 걸 넌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거짓없이 무언가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들과 똑같이 존재하는 그 기사에게 희망을 걸어야할 것이다.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의, 람발도를 향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마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몸짓으로 람발도가 계속 그의 생을 꾸려나가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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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기원전 만 여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아직까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술사 최초의 '자연주의'양식이며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진정한 선조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깊은 동굴에서, 그 어둠과 싸우며 감각에 충실하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싸운다'는 것의 의미. 현대 예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유는 예술의 역사가 운명과 싸우고 현실과 싸우고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위한 노력의 역사임을 현대 예술가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표현하고 있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앞으로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것인가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만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 대답을 구할 수 있다. 경박한 영상들이 범람하고 스타는 제조되며 정치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아예 정치에 무관심해져 버리며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도 자기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온통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뿐인 시대.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비된 물품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대.


최근 '몸학'이나 'body politics' 등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소망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마 전의 베이컨이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자한 바는 '육체'란 삶을 냉정하게 꾸려나가게 하는 차가운 이성에 적대적인 것, 그래서 버려야만 하는 흉칙한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즘 예술에서의 '육체'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모던적인 뒤샹의 <주어진Etant donn s>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브 클라인은 여러 '해프닝'들을 통해 우리 육체를 보다 직접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또한 우리 육체의 움직임을 사각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차가운 이성의 계산 대신 뜨거운 육체의 분수같이 쏟아오르는 열정이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이 전적으로 감각으로 외부의 사물을 바라볼 때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탈가치화', '탈중심화'이듯이 현대 예술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서로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수 없는, 모나드(monad)처럼 각각 독립된 '육체'로만 존재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개개의 독립된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양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예술의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규범이자 신념으로서 '고전주의'이 가장 확실하게 무너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신숭배(fetishism)'에 대한 경고를 아직까지도 듣고 있지만, 누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승리의 깃발 아래 있으며 돈은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된 지금, 누가 진정으로 한 개체의 진실에 대해 신경을 써주겠는가?


최근의 '몸(육체)'에 대한 관심이 뜬금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 삶의 진실과 허위에 대한 고민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가장 진실한 '육체'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의 끝은 허위적인 '사랑' 대신 진실한 '섹스'를, 구역질나는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진실한 '개인적 가치'를,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 세기의 예술 양식이 어떤 모습일까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번개와 천둥소리에 겁을 먹던 시대가 있었고, 하루 아침에 고전 시대의 문명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대가 있었으니,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낯선 것은 아닌 셈이다.

- 1999년에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기고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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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10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고진의 책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해설의 여기저기에 고진의 단어들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어들이 겐이치로의 소설을 말하는데 적당한가에 대해선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미친 놈이 이상한 소설 하나를 썼군’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웃었다면 이 소설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소설에게서 기대되어지는 것들-탁월한 문장력과 감동이나 교훈-은 이 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스로 쓰레기가 되기를 자처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으로 키취화하려는 태도’로써 정반대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과연 오늘날의 야구가 과연 ‘우아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의 소설들에 대해서까지도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따위의 의문을 품게 만든다.

굳이 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메타픽션’쯤에 갖다 놓을 수 있는데, 왜냐면 이 소설은 소설쓰기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의도적으로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를 야구와 연관시키며, 그리고 소설 속의 모든 인물과 소재들은 야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그 향해한 장소엔 야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소설 속 시점(時點)에서도 야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오며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추구하는 야구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와는 다른 야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의도가 드러난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게 하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또한 소설은 어떤 유기적인 구조나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 형태의 야구의 부재와도 연관된다.

4.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묻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야구에 대한 가지고 있는 태도들이 모여 분명 존재하지 않는 야구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야구(에 대한 태도)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에서 어떤 태도로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허무나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무언가를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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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로부터
       
        세계가 있다. 그리고 난 그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없어도 세계는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난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지금 난 여기 있으며, 동시에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으로(동시에 난  내자신이 부재하
     는 상황을 인식할 수 없음으로). 그렇다면, 왜 난 세계 속에서 아파하
     는 것일까? 나의 고통 때문에, 혹은 타인의 고통때문에.  정말로 타인
     의 고통이라는, 보다 넓게 세계의 고통이라는 것은 내  고통이나 아픔
     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험상 세계의 아픔은  내 아
     픔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소설가 박상륭은  예술가들의 '메시아컴
     플렉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는
     길, 즉 나의 아픔과 세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 현대사상의 모험 - 타케다 세이지(김원구 옮김. 우석. 1996)
       
        '치유'라는 단어 대신 '변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힘없는 단
     어와 힘있는 단어의 차이). 타케다 세이지는 현대사상-현대 프랑스 철
     학들-들은 헤겔-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발이거나, 그것에  대한 절망,
     혹은 연속이라고 정의내리며, 현대사상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현대사
     상들은 한결같이 니힐리즘이며, 회의론(懷疑論)이고, 그러면서 사회와
     개인 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일방적으로 反사회적 심정을 감추지 못
     하는 사상이라고 정의내린다.
        헤겔 철학은 '절대적으로' 이성을 신뢰하였기 체계가 완성될 수 있
     었지만, 과연 그 헤겔적 이성은 믿을 만한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철학이라는 것들의 원조로  '니체'가 소개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이성'은 가치가 있는 것인가?
       
        * 학생운동 - 진보의 몸짓?
       
        요즘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들 중의 하나가 '난 왜  운동권이 되지
     않았을까'이다. 여기에 대해서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대학을 처음
     들어갔을 때, '운동권 선배들의 그 일자무식' 때문이었다.  동시에 꼭
     평생 사회운동을 할 것같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더니  지금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다(* 무턱대고 따라다니던 동기들을 보면  말이 나오
     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난 학과의 아웃사이더가 되기
     로 자처했다.
        최근 임수경의 '난 이념보다 인간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버스 안의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다. 순간 난 내가 왜 운동권을 될 수 없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왜냐면, 난 인간보다 이념을 믿고 있음으로. '이념'이라
     는 단어에 너무 현혹되지는 말자. 이것은 단지 임수경의 말 그대로 사
     용하기 위해서 선택한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단어는
     '이성'이나 '철학' 등으로 바꾸어 사용될 수 있는, 광의(廣義)의 단어
     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광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경험상으로 알
     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인간들은  한발 늦게
     도착한다. 모든 상황은 이미 '광기'들에 의해 종결되었음으로. 그렇다
     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날개짓도 해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어
     두운 전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진보의  몸짓은 '광기
     와 이성 사이'에서 오간다. 한총련이라는 학생운동 단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광기와 이성의 두 갈래 사이에서 한순간  '광기'로 가
     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국가권력의  광
     기'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추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기는 합
     법적인 광기이다. 그래서, 홉스는 국가를 '리바이던'이라고 하지 않았
     는가). 이성은 언제나 합법적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광기를 제외한
     모든 광기는 비합법적인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의 광기를  만든 것
     은 무엇인가?
       
        * 다시 '이성'의 문제로
        
        국가 권력의 광기를 제조해낸 것은 '이성'이었다. 그리고  그 광기
     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이성'뿐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철학들은 그
     이성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버린다.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틀렸어. 이 세상은 너무 단단하단 말이야"라는 한탄의 목소리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전망이 아직도
     유효하다'라는 입장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다. 왜냐면, '이념은
     말로 지껄일 때는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보
     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이념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가져오느냐 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현대사상의 모험>>. 33쪽)
       
        타케다 세이지의 결론은 '그래도, 그래도, 진보를 위해서 ... ...'
     이다. 이 힘없는 결론이 포스트모던철학를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는 방법 중에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 그자체를 초월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가능성이 하나하나의 인간이 저마다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의 초월을 찾는 것을 떠받쳐주는 근거가 된다는 이유로 의하여 현
     실을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위한 여러가지  노력을 시도
     하여 보는 길을 저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같은 책. 241쪽)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발을 멈칫멈칫거린다. 이 멈칫멈칫거림의 흔적
     들이 우리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포스트
     모던철학을 수용하면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율
     배반적 행위는 도리어 우리에게 화를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
       
        * 이성: 유일한 희망
       
        내가 움직이는, 일종의 판단의 축은 크게 감성과  이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대립된다기 보다는 보완적인  관계를 형
     성한다. 이 보완적인 관계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이다. 대체로 작품창작에서는 '감성'에 의존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
     은 대체로 '이성'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둘은 내  작품(혹은 사유思
     惟)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서로 도와주고 있다. 이성적으로  파악된 세
     계를 감성적으로 옮겨놓는 작업임으로.(1) 현대철학들이  '미학'에 주
     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난 현재 이 지점에 서있다.  왜냐면, '감
     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현대  예술들의  주류는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들이
     다.(2) 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아방가르
     드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난 이 지점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다.
     난 나자신의 '이성'을 믿고 있음으로.
       
        _____________
        1. 여기에 대해선 부가의 설명이 필요하리라. 문제는  세계 인식의
     방법일 것이다. 과연 작가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작가의
     '감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고, 도대체 그 작가의 이성적  세계 인식
     과 감성적 세계 인식의 차이는 뭔가라는 의문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위험한 문장이다. 여기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경우라는 점이다. 나의 믿음: 작가는  최대한 합리적(이성)
     으로 세계를 파악해야 하며, 그 파악된 세계를 '재구성'하여 독자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재구성'의 방식에 따라 어떤 소설은 낭만주의소
     설이 되고, 어떤 소설은 누보로망이 된다.
       
        2.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부터  먼저 던져
     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견해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존재하
     다. 한국은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미
     국이나 유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신디 셔먼이나 에릭 피슬같은 예술가들을  모더니스트들로 분
     류하기에 그들은 모더니스트들과 분명히 구분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들의 창작에 대해선 아직 뭐라 평할 단계가 되지 못한다. 이전과 구분
     되고, 뭔가 다르다고 두 손을 들고 환영할 것인가에 대해선 아직 미지
     수이다.
        이 문장에서  이야기한 '감성적 세계인식으로서의 예술'은  팝아트
     이후이라고 볼 수 있다.  가령,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선 그 이전의 미술의 흐름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포
     스트모던 예술가들은 단호하게 이 미술의 흐름의 바깥으로 벗어나  버
     린다.
       
       
        * 덧붙이는 말
       
        01.
        혹시, 타케다 세이지의 <<현대사상의 모험>>을 사려는 생각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보다는 낫다.
     왜냐면, 타케다 세이지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1970년대 초두에 두 개의 상징적인 사건이  났다. 하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이고 또 하나는 아사마 산장에 있었던 연
     합 적군 사건이다. 왜 이 두 사건이 상징적이냐 하면  이들 사건은 이
     른바 좌우의 양익으로부터 사회 체제에 가해진 거의 마지막 직접 행동
     이었기 때문이다."(29쪽에서 30쪽)
       
        그의 이 문제의식은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 나카무라  유지로의 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철학
     과 굴뚝청소부>>에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다.
       
        02.
        위의 글은 타케다 세이지의 문제의식과 내  자신의 상황(문제의식)
     을 서로 연관지어 작성한 글이다. 무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03.
        번역은 '개판'이다. '개판'이라는 표현도 어쩌면  약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으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번역하지 그래?"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 저작권법에 의해 마음대로
     번역도 하지 못한다(* 꼭 일본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난 일
     본어는 하나도 모른다). 이 책의 역자 약력을 보니, 이 정도의 번역도
     꽤나 힘들게 했을 것같다. 그러니, 이 책의 역자에 대해선  아무런 감
     정도 없다. 단지 이 나라의 번역문화에 대한 감정만 있을  뿐. 다분히
     감정적인 발언이지만, '번역 감사원'같은 것을 만들어  엉터리 번역들
     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곳을 만들면 좋겠다. 동시에 번역에 대해 학문
     적 성과를 인정해주어야 함은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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