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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건 나야. 나의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바뀐 건 아니야. 외롭고 쓸쓸하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그리고 보면 그로 깔랭을 키우면서 난 날 숨기고 있었던 셈이군. 내 외로움을, 내 사랑을, 내 의도를, 내 진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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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소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뱀 - 그로 깔랭을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지만, 실은 뱀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는 아니다. 에밀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싶은 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을 나누는 삶이 파리라는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는 곳은 창녀집이다. 그 곳에서 이 주인공은 그가 사랑하는 드레퓌스양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하룻밤 이후 그는 그로 깔랭과 떨어질 수 있게 된다.

 

그 정도로 거대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까.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가 왜 권총 자살로 자신의 인생을 끝내었는지 알 수 있을 것같다. 이 책 가득한 유머는 실은 '나 너무 외롭고 쓸쓸해'의 동어반복이며 주인공이 키우는 그로 깔랭이라는 이름의 뱀 또한 실은 주인공의 숨겨진 '반영물'이다. 즉 '꾸쟁(주인공이름) = 그로 깔랭', '인간 = 뱀'의 등식이 성립한다.

 

유쾌한 유머를 가장하고는 소설은 나에게 결정타를 날리며 끝을 맺는다. 

 

"빠리 같은 커다란 도시 속에서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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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도 마찬가지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어. 이미 온 몸 가득 허전함 속에 파묻혀 있으니, 허전함을 알기나 하겠어. 로맹 가리... 나도 권총 자살로 마감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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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리뷰를 쓴 지도 10년이 넘었다. 다시 읽으니,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가 사랑했던 진 세버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은 유머 속에서도 숨길 수 없는 비극을 담아낸다.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비극성을 포착한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은 결코 허전함을 느낄 걱정이 없다. 늘 무언가를 해야 하고 쫓김을 당하고 불안해한다. 대도시에서의 일상인 걸까, 아니면 현대인의 운명일까. 그런데 이 책은 다시 나오지 않나? 로맹 가리의 책들이 다시 출판되던데 말이다. 


-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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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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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덕후 화영 2016.04.17 21:54 신고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지하련 2016.04.18 00:50 신고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Edouard Leve 지음, 정영문 옮김, 은행나무 




소설일까? 그냥 일기일까? 자서전일까? 에세이일까? 예술 형식에 대한 구분이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는 시대에, 장르를 적는 건 무의미하다. 책 표지에 적힌 '장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부적절해보인다. 


이 책의 서술, 그것이 진실인지, 허위인지 에두아르 르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에두아르 르베는 이 짤막한 글 속에서 자신이 여든 다섯 살에 죽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마흔 둘의 나이로 자살하니, 이 책 자체로 일종의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실은 내 일상이, 내 인생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다 부조리하고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그걸 부정하고 있지. 


이미 죽은 자의 자화상.  


서로 연관성 없는 문장들은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대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자화상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개별 문장들은 일종의 취미판단일 뿐, 가치판단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선호를 나타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개별적인 산문이 되고 유명론(Nominalism)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지도. 


짧지만, 읽기 어렵다. 어떤 문장은 흥미롭지만, 어떤 문장은 재미없다. 취향이 특이하지 않고 세계 비판적이지도 않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일종의 유서이거나 기록일지도 모른다. 


형식적으로 무척 흥미롭지만, 문학적으로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적지만, 자신없다. 실은 이런 식의 작법으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일종의 시리즈물이 나오면 어떨까.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르베 식의 자화상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면, 정말 가치있는 무의미의 축제가 될 지도. 



*    * 


에두아르 르베는 사진작가다. 그의 사진 몇 장을 찾아 올려본다. 소설 <<자화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진 모르겠다. 


 

Reconstitutions by Edouard Leve 





몇 장의 작품들을 찾았으나, 많진 않다. 포르노그라피 연작들이 눈에 띈다. 



Sans titre (de la serie Rugby)

edouard leve




에두아르 르베. 어느 프랑스 저널에 실린 르베의 사진 전시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기자는 왜 이 사진을 실었을까. 소설과 달리 꽤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르베. 나도 강인해지고 싶다. 인상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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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미나 마르케스Fermina Marquez

발레리 라르보(지음), 정혜용(옮김), 시공사 





<20세기 전반기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평가는 다소 황당해보인다. '20세기 청춘 소설의 효시'라는 뒷표지의 찬사도 오버다. 작고 흥미로운 소설이나, 과도한 찬사는 도리어 이 소설에 대한 쓸데없는 부푼 기대를 만들고, 짧은 독서 뒤의 실망감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 정직해질 필요가 있겠다. 


1911년. 벨 에포크의 파리. 발레리 라르보의 청춘 소설. 밝고 낙관적이었던 시절, 소녀, 소년들이 보여주는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엔 왠지 진지하고, 그렇다고 철학적인 소설이라고 하기엔 페르미나 마르케스라는 여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간지럽기만 하다. 조아니의 대사는 장황하기만 하고 산토스도 상남자 스타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이야기라기 보다는 젊은 한 때, 설레는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진지하면서 외롭기만 한 스케치라고 할까. 그리고 이 스케치 앞에서 딱 멈춘다. 소설 마지막 부분의 회상은 어딘가 어색하고 '그 땐 그랬지'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 조아니는 군대에서 죽고, 산토스는 결혼해 잘 살고, 페르미나 마르케스는 잘 살고 있겠지로 끝난다. 


1911년, 벨 에포크 시절의 청춘 소설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소설은 읽을 만하다. 하지만 그 배경을 벗어나면, 이 소설은 평범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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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화해 Les accommodements raisonnables 

장 폴 뒤부아(지음), 함유선(옮김), 현대문학 





출처: http://lci.tf1.fr/culture/livres/2008-08/le-nouveau-jean-paul-dubois-est-savoureux-4873947.html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차이를 고려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또한 집중해서,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는 능력이었다. 특히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닌 걸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육체의 살결도 배의 연한 살도 손가락의 기교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정도 흥분이 지나가자, 우리의 신체를 연결하는 뼈 마디마디가 모두 별 차이가 없어졌다. (안나든 셀마든)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에 이르고 싶다면, 생각할 필요가 있는 그런 방식이었다.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부드럽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오래 모든 걸 계속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 307쪽 



우울증에서 벗어난 아내와의 섹스. 폴은 '누구의 육체'든, 그렇다며, 자신을 뒤돌아본다. 우리는 이 소설 내내 어떤 궁지에 처한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프랑스 남자를 만나지만, 그가 왜 그 지경에 몰렸는지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변화, 우울증에 걸린 아내, 도망치듯 프랑스를 벗어나 미국으로 온 주인공 폴. 


몇 해 전 나에게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었던 <<프랑스적인 삶>>과 달리, <<이성적인 화해>>는 밋밋하고 까닭없는 방황이 이미 진행된 채로 소설은 시작했고 시작과 동시에 그 결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결국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 


스크립터 닥터(script doctor)인 폴의 아버지 스테른, 아내 안나, 그리고 자녀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건너간 헐리우드의 휘트먼, 셀마, ... 폴의 주위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동들, 폴과의 대화, 교감을 통해 소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에 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그렇다고 공감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장 폴 뒤부아는 인물에 대한 사려깊은 태도와 쓸쓸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회고조의 문장으로, 내가 읽었던 <<프랑스적인 삶>>에서처럼 뒤부아만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작 <<프랑스적인 삶>>에 비한다면, 이번 소설을 평이했다. 


도리어 소설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폴이 부러웠다. (작중 인물의 환경을 부러워하다니!) 툴루즈에서 LA로.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스스로 요양소로 들어간 아내 안나. 그 사이 폴은 안나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셀마를 만나 육체적 사랑을 속삭인다. 하지만 안나가 우울증에 빠져있듯, 셀마는 마약에 취해 있고, 파티를 할 때, 섹스를 할 때, 그저 쓸쓸했다. 이성적인 화해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방황 끝에 제 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런 희망을 꿈꾸는 걸까. 셀마와의 짧은 밀애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안전한 방황인 셈이다. 안나는 미국으로 오지 않았고 셀마는 프랑스로 가지 않는다. 갈등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우리가 왜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란 의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테니 말이다. 


장-폴 뒤부아의 <<프랑스적인 삶>>은 권하지만, 이 소설은 권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이미 읽은 이들에겐 이 소설 몇 배의 감동을 <<프랑스적인 삶>>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보수적인 기준에서 권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 이 소설은 여느 작가들의 소설들보다는 훨씬 좋다. 






이성적인 화해 - 6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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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문학동네 




아직도 갈리마르에서 일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오고 난 다음 문학동네 초청으로 한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던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소문을 듣고 이 책을 읽던 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류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이도 얼마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최고의 데뷰작을 쓰는 것이 아닐까. 꼭 르 클레지오가 <<조서>>로 데뷰했듯이. 이 소설을 안 읽었다면 서점 가서 사서 꼭 읽어보길.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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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Annam"은 베트남의 옛 이름이다. 베트남은 한 때 프랑스 식민지였고, 그 때의 명칭이 '안남'이다. 실은 중국이 베트남을 부를 때, '안남'이라고 하는데, 이를 프랑스가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쌀을 '안남미'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식민지 베트남 출신이고, 알베르 까뮈나 자끄 데리다의 고향이 식민지 알제리 출신이라는 것은 늘 흥미를 끈다. 


이 소설은 그런 식민지 풍경을 그린다. 문장은 서정적이다 못해, 부드러운 꿈결 같고 동남아시아 특유의 하늘과 대기가 소설 속에 녹아든 듯하다.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길어서, 이 책을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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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바타이유다. 오래 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김정란 교수와의 인터뷰다. 현재 그라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라세는 갈리마르 출판 그룹의 계열사로 알고 있다.  http://blog.aladin.co.kr/urblue/529249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유저 | 김화영역 | 문학동네 | 2006.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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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형수인 거죠. 이런 다정함 같은 게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되는 건가요? 인생이란 너무도 짧아서 서로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인걸요." 

- 필립 솔레르스, '도전' (1956년도 작품) 중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필립 솔레르스의 소설을 뒤적인다.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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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 10점
폴 세르주 카콩 지음, 백선희 옮김/마음산책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Pol-Serge Kakon)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i12bent.tumblr.com/post/242749612/jean-seberg-nov-13-1938-1979-was-an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정해져 있었다.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에밀 아자르Emile Ajar의 팬이거나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의 여 주인공 진 세버그Jean Seberg를 잊지 못하는 이들로. 그러나 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재미있지 않다.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글 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주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장은 우아하지도 치밀하지도 않았다. 또한 이십 대의, 소년같았던 진 세버그를 잊지 누벨 바그La Nouvelle Vague 팬들에게 이 책은 진 세버그의 불행했던 정의감과 열정, 정처 없이 나약하기만 했던 사랑의 감정을, 술과 약에 취해 있던 그녀를 지켜주던 로맹 가리의 마음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연이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 저 길로 지나갔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누구나 의문을 품어본다. 생각 없이 극장 문이나 교회당 입구에 들어서는 일, 한 발짝의 걸음이 그렇듯이 한 번의 눈길이, 미소가 인생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81쪽)




책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인생, 그리고 그 둘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 자살로 이어지는 여러 장면들을 시간 순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에밀 아자르를 제외하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사려고 노력했던 로맹 가리와, 그와는 확연히 다른, 격정적이며 혼란스럽고 정처 없는 삶을 살다 마흔 하나에 자살하는 진 세버그 사이에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서술하기란 저자인 폴 세르주 카콩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꽤 벅찬 일이였으리라. 그 만큼 둘의 인생은 확연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엔 사랑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문제이고, 사랑은 거친 현실적 삶 속에서 잊히는 것이다. 진 세버그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었을 것이고, 우연히 만나는 낯선 사랑이 자기 삶의 해답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흑인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젊은 시절의 불합리를 고치고 싶었을 테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비현실적이었고 미 정부와 FBI는 그녀의 그런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방해하고 압박했다(이 책에서 이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유대인으로 자라 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였던 조종사 출신의, 소설가 로맹 가리에게 이러한 진 세버그의 열정은 한편으로는 아름다웠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 세버그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로맹 가리는 혼신을 다해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치 딸에게 여느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권총을 입에 물고 당기기 전 책상에 남긴 편지에 가리는 이렇게 썼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231쪽)



진 세버그가 그녀의 차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1년 후, 로맹 가리도 권총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프랑스 문단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에밀 아자르가 실은 로맹 가리 자신이었음이 밝혀지고, 로맹 가리를 비난하면서 에밀 아자르에겐 격찬을 보냈던 문학 평론가들은 입을 닫았다.



언젠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이 작가는 자살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 어쩌면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에 대한 사랑을 에밀 아자르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말 대로 ‘이 경계를 넘어서면 당신의 승차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Au-delà de cette limite votre ticket n'est plus valable).’






출처: http://www.purepeople.com/media/romain-gary-et-jean-seberg-en-1971_m573983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진행형이고 포기를 모르는 마음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랑에 대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 그리고 진 세버그 팬에게만 권할 뿐, 나머지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이 책은 그 가치를 발휘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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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고 있는 산문집에서 그리운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기뻤다. 그 이름은 파트릭 모디아노. 프랑스의 대중적인 소설가(?), 라고 하면 그런가. 다른 이들 - 미셸 투르니에, 르 끌레지오 등 - 과 비교해 어떤 문학성으로 승부한다기 보다는 서정성, 분위기 등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고 할까.


내가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던 때 언제였는지 아련하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그리고 대학시절까지 그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 스토리가 기억나진 않지만, ... 지금 그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진다. 


번역된 그의 소설 몇 권을 리스팅해본다. (예전 내가 읽었던 소설들은 이제 품절이거나 절판이다. 이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역

도라 브루더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운비 역




팔월의 일요일들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옮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파트릭 모디아노 저/김화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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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 10점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민음사



조르즈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Joural d'un cure' de compagne』, 
안응렬 옮김, 삼성출판사, 1988.




H. S. 휴즈가 쓴 『현대 프랑스 지성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가를, 모리스 삐알라의 영화인 『사탄의 태양 아래』의 원작자로,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유명한 영화인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원작이 바로 이 소설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들의 문화적 편식은 꽤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실들은 그의 명성을 빌어 내 감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잔 수작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하길 바란다. 우리가 아주 가끔 말할 수 없는 떨림과 흐느낌, 영혼의 고통을 느낀 다음 그것을 표현할 말들을 찾기에 실패한 순간, 매우 어리석게도 객관적 사실만으로 그것을 빗대어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이 유명한 소설을 모른단 말이야’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명성은 독자의 감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이란 때때로 정당화하기 힘들고 그들마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신을 향해 가는 한 발 한 발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믿음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지닌 자로서 살아가는 것 또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거리에 네온사인 십자가가 늘어날수록 도시가 피폐해지고 황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범하다는 것은 하나의 죄악이며 마귀의 함정이다. 그들은 신을 믿는다라고 말만 할 뿐,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

이 젊은 신부는 자신의 본당(카톨릭 교회의 행정구분의 제일 작은 단위) 마을에서 자신의 고독과 우울을 써나간다. 하지만 신을 믿는 자의 행동이란 이방인의 것이고 끊임없는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그 오해 속에서도, 자신의 몸이 죽어가고 있는 속에서도, 자신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을 조금도 모른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127쪽)

(사족이지만 난 이 소설 속 젊은 신부의 눈빛을 보면서 울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해 둔다. 작은 꼬마여자아이 세라피따 뒤무셸이 앙큼한 표정으로 한 말-“그건 신부님 눈이 하도 예뻐서 그래요”-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감동을 표현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언어가 내 인생만큼 어리석고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1990년대 후반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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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28. Mon.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가 번역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소설이 되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에선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내가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흥분과 떨림을 잊을 수 없다. 지금 읽어도 그럴까. 아마 그럴 것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를 알고, 그의 글을 읽으며 감동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직 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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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 - 10점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폴 장 툴레가 좋아하던 저녁 시간이다. 이맘때면 지평선이 흐릿해진다.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 액체성의 침묵으로 가득 찬 지평선 … … 시인이 마음 속에서 삶을 증류하여 은밀한 비밀, 향기롭지만 독을 간직한 비밀을 추출해내던 시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팔과 입을 가진 사람들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고 있다. 큰 길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기저기 불빛이 비친다. 시인은 대리석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이 밤이, 마치 한 송이 백합처럼,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 11쪽




솔직히 이 소설을 추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라면, 베르나노스는 한 번쯤 읽어야 할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은 깊고 우아하며, 그러면서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도 그 고통 속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서사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의 굴레, 신의 존재, 자신의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그로 인한 환각과 맹목, 죽어가는 시간과 자신의 영혼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지평선이 흐릿해진 저녁 시간에서 시작해 아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난다(어쩌면 아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이야기는 내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마치 우리들의 현대적 삶처럼).


“아! 아! … …” 울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때처럼, 매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리 짧은 밤이라 해도,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셀러멘은 어느새 입술 연지를 발랐고, 주정뱅이들은 술에서 깨어났다. 밤의 향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아직 식지 않은 채 하얀 시트 속으로 숨어든다. … …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 …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곳에 유일한 정의(正義)가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 셀러멘: 몰리에르의 극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다. 남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여자를 말한다: 옮긴이)
- 274쪽




프랑스와 모리악은 베르나노스에 비하면 너무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단순한 표면 밑의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며, 그 고뇌하는 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어떤 죽임일지라도 말이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 혹은 믿음.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신앙마저도 인스턴트 음식이거나 자신의 건강을 지속시켜주는 영양제처럼 변해버린 요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이 소설은 너무 낯설고 정신적이다. 마치 중세의 어느 시대를 거쳐가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하며 고통스러운 종교적 환각과 환청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베르나노스의 인물들은 그 속을 꼿꼿하게 선 채 지나가며 울부짖는다. 휴즈의 말대로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고통스럽고 중세적이며 기사도적이었다.’(H.S.휴즈, 현대프랑스지성사, 문학과지성사, 135쪽)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이 주로 신부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소설은 종교 소설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가치있는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인간의 영혼이 현대의 물신주의 속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으며, 심지어 분열되어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할 때, 분명한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나는 살아있고 고통받지만 앞으로 나갈 것이고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내 삶, 내 신념, 내 확신, 내 믿음의 존재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묻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다. 마치 현대라는 강물이 바다를 향해 시류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갈 때, 그의 인물들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한다. 심지어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귀한 신마저도 그의 옆에 없음을 직감했을 때조차도.




모리스 삐알라 감독이 연출한 '사탄의 태양 아래'(1987) 트레일러. (* 한국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나, 오래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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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데라토 칸타빌레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문학과지성사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




뒤라스의 세기도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 그의, 그녀의 세기가 있었듯이, 뒤라스에게도 그녀만의 세기가 있었다. 그녀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녀 옆엔 늘 서른 다섯 살 연하의 젊은 연인이 주름진 뒤라스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녀의 유작 ‘C’est Tout그게 다예요’는 마치 젊은 날의 그녀가 찾아 헤매던 언어와 사랑의 완결판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 얇은 책 위로 젊은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곤 하던 시기도 있었다.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재의 베트남)에서 태어난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알베르 카뮈와 같이, 식민지령 출신이었다(알베르 카뮈는 북아프리카 태생의 혼혈이었다). 그리고 누보 로망의 시대를 관통하며, 누보 로망과는 전혀 다른 글쓰기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완성한 여류 작가로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 ‘내 사랑 히로시마’로 알랭 레네와 같이 영화 작업하였으며,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피터 브룩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피터 브룩 감독, 잔 모로, 장 폴 벨몽도 주연.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이 소설은 뒤라스의 비밀스런 일기장과도 같은 작품이다. 짧은 순간 스쳐가듯 어느 여인의 사소한 방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은, 실은 그 속엔 여인의 내밀하고 농염한, 어쩔 수 없이 갇혀 지낼 수 밖에 없는 상류층 여인의 억압된 욕정과 솔직한 애정 결핍이 뒤범벅되어 끝 간 데 없이 끈적끈적한 외로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이렌이 떠나갈 듯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시내 구석구석은 물론, 바닷바람에 실려 저 멀리 변두리와 주변 도시에까지 우렁차게 들렸다. 황갈색이 더욱 짙어진 석양빛이 홀벽을 쓸어갔다. 황혼 무렵이면 종종 그렇듯, 하늘이 오히려 고요하게 부푼 구름 속에 머무르고, 구름을 벗어난 태양은 마지막 불길을 사르며 빛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사이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지만 다른 날 저녁처럼 결국 그치고 말았다.
“전 두려워요.” 안 데바레드가 속삭였다.
- 118쪽



하지만 뒤라스의 글쓰기는 언제나 가볍고 스쳐가는 듯한 언어의 운율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인물과 사건의 표면만을 훑고 지나간다. 마치 건조한 인상주의 작품처럼.

 

“처음으로 밝히는 것인데,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나는 비밀스레 겪어낸 개인적 체험을 전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외설적이라는 평을 받을까 두려워 이 경험 주변에 벽을 쌓고 거울로 둘러놓았지요. 경험이 격렬했던 만큼 더욱 엄격한 형식을 택한 것이랍니다. 이 작품 속에는 내가 숨어 있어요. 다른 어느 작품에서보다 더욱더 말입니다.”
- 129쪽

 

편지를 읽고 있는 뒤라스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뒤라스의 저 문장들은, 이 작품을 접하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읽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여주인공 안 데바레드와 뒤라스가 겹쳐져고, ... ... 어느 순간, 안 데바레드 자리에 뒤라스가, 그리고 그녀는 우리들의 비밀스러운, 쓸쓸하고 외로운 연인이 된다. 


이처럼 인물들은 특권적 관찰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지 않으며, 감정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대신 조심스럽게 추측될 뿐이다. 따라서 내면의 격정을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문체기법이 사용된다. 단어들은 필연적인 위치에서 엄격하게 통제되고 지각 작용과 문체가 일체화되어 절제와 암시, 간접화의 문체 기법들은 표현효과를 높여주는 것은 물론 구조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뒤라스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으로서 새로운 언어 기업의 지평을 열어 보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자해설 중에서, 133쪽








하지만 이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녀의 초기 소설 몇 편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이러한 문장, 글쓰기,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동어반복적 양식이 아니라, 늘 새롭게 읽히는, 마치 변덕스러운 여성의 마음을 닮은 듯 우리에게 읽힌다. 그녀의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마음을, 그들을 둘러싼 사건과 풍경을, 그저 스쳐가듯, 표면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녀는 깊은 곳에 숨겨진 어떤 것들을 끄집어낸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이번에도 그것을 알고 있다. 가슴 사이에 꽂은 목련 꽃은 완전히 시들어 버렸다. 한 시간 만에 한 여름을 겪어낸 것이다. 사내는 곧 정원을 지나쳐 더 멀리 갈 것이다. 그가 지나갔다. 안 데바레드는 가슴에 꽂은 꽃은 비틀어대는 끝없는 몸짓을 계속 하고 있다.
- 109쪽


 

안 데바레드의 방황이 ‘제 자리 뛰기’와도 같은 궤적을 그리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심난한 여정임을 뒤라스는 특유의 감수성과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향한 우리의 마음, 우리 영혼의 제 자리 뛰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행인가를 뒤라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그녀의 연인 얀 안드레아.


 그리고 그녀가 얀을 위해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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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i 2010.04.08 17:15 신고

    몇 주 전 뒤라스가 각본을 쓴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답니다. 물론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든 것도 있겠지만 대사가 어쩜 그렇게 매혹적이던지.. [모데라토 칸타빌레]도 책이든 영화든 꼭 접해보고 싶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 지하련 2010.04.08 18:09 신고

      안 그래도 안부 남기려고 했는데.. ㅎㅎ ..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책도 못 읽고 집중해서 글도 못 쓰고 있어요. (뭐, 그닥 글같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하게 바쁘기도 하고 여유롭기도 한 삶이 좋은데 말이죠. 너무 바쁘네요. 벌써 4월이라니. T_T


부영사 - 10점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정우사



부영사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1984. (민음사 이데아 총서 중 한 권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98쪽)



그들은 계절풍 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혹은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어떤 행동을,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그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혹은 계절풍 속에서, 끊어질 듯 이어가던 서사(narrative)의 가느다란 숨소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 ‘놓침의 독서’는 나의 기억 속에 몇 개의 이름만을, 몇 명의 존재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 그녀, 그, 그녀, 그, 그, ......

그와 그 사이, 그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그녀와 그녀 사이, 아이를 밴 몸으로 계절풍 속을 떠돌다 캘커타 속으로 들어온 한 걸인 소녀의 배고픔과 몇 명의 백인 남자들 사이에 서있는 안 마리 스테레뗴르의 공허 사이. 하나의 공간 속을 떠도는, 멀리 떨어진 존재들, 그 존재들의 영혼 깊숙한 곳, 그 곳까지 계절풍은 불고.



** 뒤라스의 문장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녀의 동시대 작가들이라 할 수 있는 누보로망의 작가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작가이다. <<부영사>>는 그녀의 영화 <<인디안 송>>의 원작 소설이며, 그녀의 대표작들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뒤라스의 소설들이 다 그렇듯이 흥미진진한 물결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님을 염두에 두길.

*** 위 글은 2000년대 초반에 적은 리뷰다. 오늘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떠올라, 오래된 자료들 사이에서 이 리뷰를 찾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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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민연우맘 2009.11.20 12:39 신고

    며칠째 부영사.
    부지런한 포스팅으로 방문객에게 즐거움을 주던 주인장 어디갔나.
    아, 짜증으로 점철된 일주일이로다.
    나, 사업한다~ 여러가지로 골 아프네.
    태생이 게으른데 신경쓰면서 돌아다니면서 할 일이 왜 이리 많은고.

    • 지하련 2009.11.20 13:13 신고

      이제 좀 신경써서 포스팅해볼까하고. 딴 이들은 블로그에 올린 글(?)로 책까지 내던데, 나도 제대로 써서 책을.. 흐흠.. 그것보다는, 하도 "지하련씨, 예전 당신 글 좋았는데, 요즘은 엉망이야, 왜 그래?"라는 소리를 최근 들어서 너무 자주 들어, 좀 포스팅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초고만 쓰고 올리지 못하는 글들이 꽤 있네. 크크. 기대하삼~.
      그리고 사업한다고? 사업하지 마삼. 천칭자리는 우유부단하고 느려서 사업에는 별로이네. 그런데 어떤 사업을 하길래? 여튼 돈 많이 벌어, 소원 성취. ; )

  2. 지나가는사람 2011.05.28 14:15 신고

    리뷰가 참 슬프네요 ㅠ_ㅠ

    • 지하련 2011.05.29 12:28 신고

      뒤라스의 소설을 읽는 이가 드문 요즘, 20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에서 뚜렷한 흔적을 남겼지만, 이젠 잊혀져 가고 있는 것같아요.~ 그래서 더 슬플 지도 모르겠어요. ... 뒤라스, 정말 좋은 소설가예요.

프랑스적인 삶 - 10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밝은세상



프랑스적인 삶 Une Vie Francaise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 세상


1.
한 치 앞 미래를 보이지 못한다. 그저 예측할 뿐이다. 과거시제 형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설은 미래에 대한 숨겨진 공포를, 아찔함을, 내일을 향해 발을 내밀기가 무섭다고 독자를 향해 중얼거리는 양식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일의 삶을, 고통스럽고 미련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과거 시제 형 문학(후일담 소설/시)은 과거의 파란만장한 열정과 시행 착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합리화하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래서 이런 류의 문학을 접한 독자들 대부분 그들의 과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몇 독자들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느끼면서 감정적 공감을 형성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미래에 대해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결국 씁쓰레한 현실만 남게 된다. 독자는 그저, 작가의 철없는(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과거를 들었을 뿐이다.

문학이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이 세상, 우리들의 삶을 형성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드러내든가, 아니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 가치를 드러내어 주면 된다. 과거에 어떠했다는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 삶의 본질을, 우리 삶의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에 천착해야 된다. 하지만 내가 읽은 한국의 후일담 문학 모두 과거에 묶여 있었고 미래에 대한 한 마디로 하지 못했다. 오직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같은 실수의 반복으로의 미래가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과거에 대한 회한 만을 드러내었다.

2.
장 폴 뒤부아의 이 소설도 과거 시제 형 소설이다. 어린 시절, 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아내의 죽음과 정신병에 걸린 딸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소설도 미래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허무의 끝’(393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국의 후일담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할 지경이다. 그리고 미래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을 내딛는다. 미래에 대해서조차도 시니컬한 것일까. 그러나 이는 포기도 아니고 무모한 도전도 아니다.

‘시니컬함’(냉소주의)에도 급수가 있다. <<해변의 카프카>>가 결국은 환상 속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니컬하게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세상을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 든 하루키는 깨닫게 되지만, 소설을 변화시킬 힘도, 세상을 변화시킬 마음도 없이 그저 환상 속으로 숨겨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폴 오스터는 더 시니컬하다. 적어도 환상 따위는 만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거대한 현실을 긍정하고 타협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속에서 최소한 자기 자리만 만들고 싶어할 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을 훼손하지도 않고, 원래 시작했던 그 자리로 돌아온다.

장 폴 뒤부아는 어떤가.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자신이 살아가고 살아갈 현실 속에서 한 번도 발을 빼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때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폴 블릭은 끊임없이 시니컬하다. 현대 프랑스 정치와 일상 세계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아니면 소설가의 작법 때문일까. 과거 시제 형 소설이 가지기 쉬운 자질구레한 감정적 표현들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과거를 온전하게 과거로 받아들이기 하기 위한 장치일까.

시니컬하다고 해서, 폴 블릭은 도망치지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지도 않고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독자를 안타깝게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우리는 결국 현실적 삶 속에서 적극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극적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폴 블릭을 통해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3.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393쪽)


그래서 폴 블릭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저녁 파티가 어떠했는지, 거기 있던 사람이나 거기서 연주했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붉은 립스틱이 지워진 완벽한 계란형인 안나의 얼굴이다. 즉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운명을 끊임없이 무시할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유성遊星, 사슴 같은 눈을 가진 얼굴이다. 목은 또한 그녀의 몸의 모든 관절이 다 그렇듯이 가늘고 섬세해서, 전체적으로 마치 중력의 제 1 법칙과 일반 규칙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139쪽)



그의 아내 안나는 다른 남자와 몇 년 동안 숨겨진 연애를 하다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는다. 그 사고의 여파로, 딸 마리는 정신병에 걸린다. 폴 블릭은 책 인세로 모아두었던 모든 돈을 아내가 남기고 간 빚을 갚는데 다 써버리고, 어머니가 죽고 아들은 일본으로 가고, 딸은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폴 블릭은 소설이 끝날 때조차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내를 미워하지도 않고 정신병에 걸린 딸을 보며 울부짖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열정이나 애정을 애초부터 거세한 인물은 아닐까.

4.
하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한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장 폴 뒤부아의 문장은 서정적이고 위트가 넘치며, 시공간의 운동과는 무관한 인상을 풍긴다. 결국은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살아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정답이 없듯이, 소설은 과거에 대해서 변명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은 이미 결론 난 상태였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절망적인 파국이든, 폴 블릭의 삶이 산산조각 났다고 해서 그가 죽음을 끊고 자살을 택하거나 딸 마리를 버리거나 하는 짓 따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독자는 안다.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도 않고, 현실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우리 대부분도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끝까지 시니컬함을 버리지 않는 이 소설은 삶에 대한 거창한 교훈을, 미래에 대한 격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버리지 않는다. 과거와 똑같이 그렇게 살아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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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Les Choses, 조르주 페렉(지음), 허경은(옮김), 세계사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정해진 환경(콘텍스트) 속에서 인물(텍스트)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전형적인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바탕으로 이 세계가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력한다. 이렇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작법은 에밀 졸라와 닮아있다. 지극히 유희(놀이)적이라는 점. 실험도 일종의 놀이나 게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결말을 알 수 없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으면서 그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그의 인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생각, 또는 사건이나 갈등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는 첨단의 소설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소설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그의 인물들은 버려졌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거친 삶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 수동적이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그가 노렸는지도 모른다. 소설 바깥의 소설가는 그의 인물들을 유기하고, 그의 인물들은 소설 속 세계에서 소설 바깥을 보며, 나는 피조물이야, 나는 저 소설가 친구가 쓰는 대로 그렇게 그려질 뿐이야, 라고 피식거리듯이, 현실의 우리들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유기되어, 끝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버림당했고 앞으로도 버림당할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야, 그러니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해야 해,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페렉의 소설 작법은 극단적인 니힐리즘을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를 이루는 어떤 구조에 반영한 셈이 된다. 그런데, 그래서? 에밀 졸라의 소설이 결국 우리에게 위대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페렉의 이 소설도 재미없는 씁쓸함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고 저 세계는 아직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물들 - 8점
조르주 페렉 지음/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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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위스망스 단편선, 손경애 옮김, 문학과 지성사


현대의 압도적인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반-자본주의 예술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토하며, 안정적 삶을 희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19세기에 반-자본주의 사상과 예술 활동이 성행했던 것일까? 그리고 현재와 19세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조리스 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세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품었다.

자연주의 양식에 속하는 위스망스의 세 단편,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마는 개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등짐’의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개인을 등장시키고(반-국가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부그랑 씨의 퇴직’에서는 직장 생활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중년 신사의 강박적 경향을, ‘궁지’에서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돈에 대한 탐욕스럽고 부도덕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등짐’을 제외한 두 단편 - ‘부그랑 씨의 퇴직’과 ‘궁지’ - 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에서 위스망스가 보았던 과거 어떤 세계의 문제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창작활동에 매진해야 할 예술가들마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을 들게 만든다.

현대 독자가 빠져들 만큼의 소설적 재미는 없지만, 19세기 후반의 소설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알기에는 매우 유용한 소설이 될 수 있다.

부연 설명

1. 안타까움에 대하여 - 현대 소설의 양식과 19세기 자연주의 소설 양식과의 차이로 인해,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공격을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현대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성과 알레고리, 상징들로 그 공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의 자아는 그 고통의 실체를 정면 응시를 하기 보다는 비켜보려고 하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봄으로써 그 고통을 방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현대 소설들이 가지는 반역사성은 이러한 도피적 성향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19세기 자연주의에 대하여 -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은 19세기 자연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험실에서 가상의 실험 조건을 만들고 어떤 인과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처럼, 자연주의 소설 또한 등장인물과 소설 속 환경 속의 어떤 인과 관계를 도출시키고자 한다. ‘궁지’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확실히 소설적 재미는 없으나, 어떤 시대, 어떤 체제에 대한 공격 방식으로는 매우 탁월한 양식이다.



궁지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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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an 2008.12.31 22:28 신고

    우연히 들렀는데 좋은 글이 너무 많습니다.
    위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부분은 읽는데 소름이 돋네요.

    • 지하련 2009.01.01 00:28 신고

      감사합니다. ^^;; 벌써 읽은 지 1년 반이나 지났네요. 위스망스의 다른 소설 한 권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의외로 오래된 소설이 재미있습니다. : )

  2. 2009.01.02 20:43

    비밀댓글입니다


공부를 띄엄띄엄한 탓에,  길고 체계적인 글에 약하고 외국어는 그저 읽을 수준 밖에 되지 못한다.

국제 행사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고 이런저런 일 탓에 불어 공부를 놓아두고 있었던 터라 간단한 인사조차 가물가물한 지경인데, 이번에 들어오신 선생님들 인사 드리러 가야한다.

몇 시간만 하면 간단한 회화 정도를 될 것같기도 한데, 오늘 밤엔 밀린 일도 하고 불어 공부도 해야한다. 오늘 가자는 걸 내일로 미루었다. 헐.

앙리 고다르는 세계적인 학자인데, 국내에선 인지도 낮다. 브라질에서 오신 에드손 로사 드 실바 선생도 브라질에선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는 분이라, 브라질 대사관에서 협회로 연락이 왔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의 인문학 지식인층은 너무 얕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세상에나, 앙드레 말로를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단 말인가.

도대체 세계문학전집을 다 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제목이나 작가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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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의 운명. 그/그녀는 현대에 속하지 않고 고대에 속한다. 그/그녀는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사라진다. 침묵 속에 있으면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숨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나, 실은 그/그녀는 끊임없이 여행 중이다. 우아한 몸짓으로 시간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소설은 이제 스토리도, 플롯도 지니지 못한 채, 소설의 운명, 책의 운명, 독서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속하는 것들이 가지는 이 때, 이런 책이 읽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실은 이 소설은 거짓말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지가 될 것이고 한 때 반짝이는 낡은 행성 같은 것이어서 조만간 폭발하여 우주 속으로 부서질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공적인 일res publica 전부가 속화되고 금전에 좌우되는 반면에, 시간, 이타성, 자연, 역사, 성스러움, 언어 혹은 적어도 언어의 묘사까지도 사적인 일res privata이 되었다.”(126쪽)

 

맨 처음 소리 내지 않고 읽었던 중세의 신부는 낯설게 보였다. 그러자 읽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되어버렸고 근대의 개인주의는 어쩌면 이 소리 내지 않는 독서에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른다. 봄날 오후, 책 읽는 그는 한없이 낯설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기에 여념 없다. 세상이 밝아질수록 책 읽는 자들은 어둠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우아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현대를 거부하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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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반디앤루니스 2013.12.20 15:51 신고

    지하련님,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입니다.

    이번에 지하련님의 리뷰를 12월 2주 <반디 & View 어워드>로 선정했습니다. 어워드 관련 적립금은 지하련님의 반디 아이디로 일주일 이내에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늙어간다는 두려움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탄생한다. 그건 현재를 오용하고 있다는 인식과 상응한다.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중에서)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 드림

    • 지하련 2013.12.23 16:44 신고

      감사합니다. : )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은 책 몇 권 주문해야 겠군요. 즐거운 성탄과 연휴 보내세요. ~

자기 앞의 생 - 10점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문예출판사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지음), 지정숙(옮김), 문예출판사



로맹 가리, 필명인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짧은 프랑스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잠시 눈가를 붉혔다. 오랫만에 소설을 읽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이 좋아졌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 추해진다는 것, 그리고 육체가 썩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소설가는 자살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로맹 가리는 1980년 권총 자살로 죽는다. 아마 로맹 가리는 모하메드가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고통 받았지만,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결국에는 생의 안락함을 구하게 되는 어떤 소년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소년은 생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 힘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은 언제나 어둡고 시간은 늘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는 법이다. 그렇게 죽음이 오고 상실이 오고 슬픔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릴 때, 어두운 서랍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 총알 하나를 장전하고 동이 터오는 새벽, 아주 짧고 격렬한 소리를 내며,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영혼이, 인간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고 여겨지는, 육체의 어떤 부분을 박살되는 것이다.

그러면 생은 무수한 붉은 빛으로 튀고 영혼은 가벼워지면서 위를 향하게 된다. 그렇게 로맹 가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을 게다.

참 슬픈 소설이다. "사랑해야 한다"는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의 내용을 매듭짓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절규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에겐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억지로 사랑해야만 ... 억지로라도 사랑해야만 우리는 이 구차한 삶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로 깔랭을 읽고 난 다음에도 무척 슬펐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난 다음에도 슬펐다는 사실을 리뷰를 정리하면서 알았다. 로맹 가리, 되도록 그를 멀리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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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열림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 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98쪽


글쎄, 이 소설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며 선뜻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까. 한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 회고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프랑스 어느 작은 지방 도시 이야기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는 이질적인 느낌만을 더할 뿐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산뜻하고 사뿐했다. 그러니 글쓰기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한 번 들춰 볼만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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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박동혁 옮김, 하서. 1990)
* 1856년, 플로베르가 35세 되던 해 나옴.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틀렸다! 일부러 애쓰며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떤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 278쪽

에마가 죽고 샤를이 죽고 그들의 어린 딸이 방직 공장에 가게 되었다는 짤막한 상황 설명으로 소설이 끝나게 되었을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에마는 몇 번의 밀애 속에서 사랑을 경험한 것일까? 그러한 에마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에마는 백 오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무심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온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근사한 말투와 매너로 유혹하는 사내에게 입술을 허락하며 깊은 눈빛과 재력을 겸비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녀들.

근대의 사실주의란, 초창기 사진처럼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폭로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치기도 하며 주인공의 방황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하고 그/그녀가 그 모험을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라거나 아예 그런 헛된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와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렸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에마는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 44쪽에서 45쪽

소설 초반에 읽게 되는 이 문장 앞에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의 에마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초창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문화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근대의 비극적인 구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역, 심설당), 29쪽

근대의 풍습이란,

“저기 탄 사람들은 내일이면 파리에 닿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음을 가로질러 밤하늘의 별이 총총한 국도를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거리까지 가면 반드시 그녀의 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릿한 장소에 부딪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하나 샀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를 더듬으며 그 안을 온통 헤매 다녔다.
- 64쪽

우리의 에마처럼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랑의 모험에 미련 없이 육체와 영혼을 내맡기는 것.

에마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지붕의 낙수 홈통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빗물이 집의 발코니 위에도 호수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에마는 벽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02쪽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그의 모습을 혼자서 남모르게 그려보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기쁨이 충만 되었다. 에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앞에 있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멍한 기분만이 남아서 드디어는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 109쪽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 그리고 그의 부인 에마 보바리. 그리고 에마 보바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 레옹. 얼마 뒤 레옹은 마을을 떠나고 로돌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로돌프에게 연애란 하나의 취미, 취미의 대상으로서의 에마 보바리.

아. 너무 가슴아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보자. “호감은 열정으로, 열정을 종속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일시적으로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책임 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 <사로잡힌 영혼> 중에서 )

이렇게 순수하고도 순진한 문학 평론가가 어디에 있을까. 샤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바람난 에마를 너무 사랑했던 샤를. 끝내 패배하게 되는 모험으로 가득찬 시대에 샤를은 에마를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험을 하지 않았는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도 모험의 회오리 속에 말려든 것일까.

근대란 사랑이라는 행복하게 하는 아픔마저도 절망으로, 끝없는 혐오로 만드는 시대다. 우리의 에마는 끝없이 사랑을 노래하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쓰라린 사랑의 아픔,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의 상실뿐이었다. 사랑의 대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샤를에게

“네, 네... ... 그 말씀대로예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에마는 샤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기분 좋은 감촉이 샤를의 슬픔을 한층 더하게 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애정을 이토록 나타내 주는 아내를 지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절망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처치를 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몰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 312쪽

과연 에마에게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에마를 사랑하는 샤를. 에마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샤를, 왜 샤를은 에마를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헛된 질문을 하지는 말자. 모든 사랑은 모험이며 불륜이다. 근대의 사랑이란 끝없는 절벽을 향해 가는 자기 파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사랑을 왜 하는 것일까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사랑이 아름답다니 행복하다니 하는 10세기쯤에나 나올만한 말로 순진한 대부분의 독자들을 현혹하지도 말자.

그러나 이러한 환멸은 곧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 에마는 전보다 더 강한 정염에 불타고, 전보다 더 레옹을 탐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르셋 끈을 마구 잡아당겼다. 끈은 미끄러져 나가는 독사처럼 그녀의 허리께에서 소리를 냈다. 맨발의 발끝으로 문이 잘 잠겨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입은 옷을 몽땅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그 이마,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입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필사적으로 껴안은 그 팔에는 뭔가 막연하지만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 277쪽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모험을 떠났던 이들은 가슴에 절망과 파멸, 또는 허무를 안고 돌아와 우리 곁에서 잠든다. 20세기 후반 이후를 물들이는 건 이들이 남기고 간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몇몇의 진지한 이들은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몇 백 년 전부터 시작된 그 모험의 존재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건 한때 위대하다고 칭송받았던 모험의 유산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어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된 거야’ 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는 행위들인 것이다. 꼭 샤를이 죽은 에마가 숨겨왔던 사랑의 유산들을 보고 절망하고 끝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몇몇 진지한 이들도 근대의 유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 샤를이 끝내 에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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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문학과 지성사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다.
- 제 32장, 292쪽.


소설 1 : 이제 소설은 몽상과 개인의 독백만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소설에 있어 Reality란 실제의 세계(real world)를 반영할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 하나의 고백(confession)일 경우에 Reality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인과란 무시해야하는 것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달콤하고 지적인 사랑의 단어들은 전통적인 소설이 가져다주지 못한 그 무엇을 가져다준다.

포스트모던적 인생 : 앤디 워홀의 욕망. 이미지들로 자신을 채우기. 현대의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예술가들의 전략. 끊임없는 자기 노출과 대담한 행위와 인터뷰. 대중의 욕망 위로 겹쳐진 예술가의 모습. 그 뒤로 사라져버리는 실제 예술가. 하지만 포스트모던적 인생이 격하기 그지없는 허무한 날개짓이라면, 은밀한 생은 ... ...

은밀한 생 1 : 아름다운 대중 혐오증.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믿는 현대의 어떤 병에 대한 작은 치료법.

은밀한 생 2 : 사랑에 대한 독백.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사랑했던 자들에 대한 회상. 사랑에 대한 독서. 사랑에 대한 낙서. 하지만 사랑은 책 속에만 있고, 사랑은 독서에만 있고, 사랑은 몽상 속에만 있고, ... 사랑은 ... ...

소설 2 : 뛰어난 작가들이 숨어사는 작은 성.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그 성의 모습도 바뀌는 법. 이제 시간도 공간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우리 영혼 속에서만 가치있는 것... ... 추상의 세계, 몽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 그 여행의 이름. 은밀한 생. 또다른 이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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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우연, 앙골라 말라, 문학동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 어떤 매혹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와 매혹이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까지도 시적인 풍경으로 묘사한다.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르 클레지오의 화법이나 문장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꽤나 지루해할 만한 소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고 프랑스에서도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일 것이다. 다음 기회에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을 올릴까 한다. 따지고 보면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아마 이삼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무척 재미없어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나이에 따라 읽히는 소설이 틀리다고 했는데,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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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10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열린책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기엔 너무 끔찍스러운 이 소설은 영웅주의와 유미주의가 뒤섞인 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자기 파괴로 일관되어 있다. 그르누이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르누이적 세계-냄새로만 자기 정체성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바로 신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소설의 시작부터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인으로서의,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속한다. 자신을 매혹시키는 향기를 소유하기 위해 그가 하는 행동은 극단적 유미주의로서 '아름다움' 이 외에 이 세상의 절대적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당신들도 그르누이가 혐오하는 인간들 중의 한 명이며 그래서 그르누이가 당신의 옆으로 지나갈 때, 그르누이가 쳐놓은 향기의 저주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며 그르누이의 영혼을 알지 못할 것이라며 끝없는 조롱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것은 쥐스킨트가 바로 독자에게 퍼붓는 독설인 셈이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이 소설을 읽고 열광하는 독자들의 어리석음이란. 난 이 소설이 끔찍하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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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水Le De'luge』, 르 클레지오 지음(* 이휘영  옮김), 동문선.
     1988.

           

        * 그대들은 죽음을 모르고 있다 *


        익명성: 이것은 누구나 혼잡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 도시의
     비극적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소와 베송은  이
     익명성 속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서, 소설은 프랑소와  베송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개되지만, 프랑소와 베송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가 보는 사람들, 거리들, 풍경들만 독자의  눈동자 속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인공 대신 독자의 눈동자 속에  들어온 사람
     들, 거리들, 풍경들에서 독자는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줄거
     리도, 특별한 인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특별하지 않은 공간 속을, 특
     별하지 않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홍수'뿐. '홍수' 속에선 그대도
     나도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나무조각이라도 잡아야  하건만, 물살이
     너무나 세차기 때문에 난 이미 지쳤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소와 베송은 그런 나이다. 오, 저주스런 오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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