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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신뢰할 만하며 단테가 어떻게 문학적으로 성장해 나갔으며, 어떻게 근대 문학의 시초가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예증한다. 단테 문학의 변화와 성장은 이 책의 중심 테마이며, <<신곡>>을 향해간다. 



인간에 대한 단테의 미메시스는 고전 고대의 미메시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전혀 없었던 미메시스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단테는 고전 고대처럼 인간을 아득히 떨어져 있는 신화적 영웅으로 보지도 않았고, 중세 시대처럼 인간의 윤리적 타입을 추상적으로 혹은 일화적으로 재현하지도 않았다. 단테는 살아있는 역사적 리얼리티 속의 인간, 단일성과 전체성을 간직한 구체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재현했다. 

- 343쪽 



사실적인 표현과 문장이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를 실제 문학 작품들을 예시하여 중세 후반기의 문학과 단테가 이룬 문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딱딱하고 어색했던 중세 말의 표현들이 어떻게 자연주의적으로, 감각적이며 세속적인 풍성함을 가지게 되는가를 말이다. 



조반니 피사로 이래 화가들은 세상에 대해 날카로운 지각을 개발해왔다. 그래서 단테와 그 시대의 위대한 화가인 조토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발견된다. 두 사람에게 사건은 자급자족적 리얼리티로 다시 태어난다. 두 사람은 고전적 감각을 지녔고 리드미컬한 구조를 구현한다. 또 이 세상의 감각적 구체성 속에서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을 파악하는 방법도 상당히 유사하다. 

- 195쪽 




하지만 단테 문학 이상으로 이 책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것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플로티노스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몇 페이지에 걸친 플로티노스에 대한 설명에서 아우어바흐는 중세 초기 미메시스 예술의 몰락을 플로티노스를 통해 설명한다. 실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이해는 나로서도 처음 읽는다. 그만큼 중세 초기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소개가 거의 없고 플로티노스 철학에 대한 번역이나 소개는 최근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중세 예술에서의 미메시스에 대한 무관심, 또는 경멸이 종교적인 이유에서의 엄숙주의라고 여겼던 것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가져온 여러 요소들을 융합하여 그 자신의 유출주의를 만들어냈고, 신비하면서도 종합적인 명상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하여 영(Spirit)이 참여하는 지상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은 내적 원형(이데아)의 상태에서만 순수하다고 보았고 물질 속에서는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형상 없는 질료는 플라톤의 비존재(non-being)와 동일시되어, 완전한 존재를 갖춘 이데아와는 정반대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하여 질료(물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단순한 저항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물질은 그 다양성과 분할 가능성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악(惡)이 되었다. 영이 물질세계로 유출되기는 하지만, 다양하고 구체적인 물질은 피지스(physis: 이것은 개체화의 시작[principium individuationis]이 되는데 곧 저급한 영혼을 의미함)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악하고 불순한 것이 된다. 따라서 미메시스 예술은 경험적 리얼리티와 접촉하지 못하고 순수한 에우레시스(euresis: 내적 형상의 복사물)가 된다. 플로티노스는 미학의 영성적 체계에 대하여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그 실제적 결과는 미메시스의 부정이었다. 그는 생성(becoming)보다 존재(being)를, 물질보다는 이데아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물질과 변화를 형이상학적 비존재(존재하지 않는 것)와 동일시했다. 이런 사상은 세속적 운명을 예술 속에서 재현된 가능성을 모조리 파괴했다. 

- 56쪽 



두 번째는 그리스도 스토리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을 종교 경전으로, 그리고 서양예술작품에서 표현된 다양한 종교적 주제나 소재의 원천 정도로만 여겼지, 그것을 하나의 서사 문학으로 접근하지 못했는데, 아우어바흐는 이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스토리는 로고스logos의 비유(parousia) 혹은 이데아의 나타남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 51쪽 



그리스도 스토리는 개인적 생활의 강렬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과 풍부한 형식 또한 보여준다. 그 스토리는 고대 미메시스 이론의 한계를 돌파한다. 그 스토리 속에서 인간은 지상의 위엄을 잃어버린다. 모든 일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고, 고전주의에서 규정한 장르의 구분(합리와 우연의 구분)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숭고한 스타일과 천박한 스타일의 구분도 더 이상 없다. 복음서에는 마치 고대 코미디처럼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부, 왕, 고위 사제, 세리, 창녀 등이 그들이다. 지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희극 속의 인물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와는 전혀 다르게, 모든 사회적, 미학적 제한이 철폐된다. 그 무대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을 허용한다. 그 무대에 오르는 캐릭터들은 하나의 집단으로 혹은 각각의 개별 인물로 등장하든 여전히 다양성을 유지한다. 각각의 개인은 온전하게 합법화되며, 그 합법화는 사회적인 기반과는 무관하다. 그의 현세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그의 개성은 완전히 개발되며, 그에게 일어난 일은 고상하지도 천박하지도 않다. 예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베르도도 엄청난 굴욕을 당한다. 그리스도 스토리가 갖고 있는 자연주의(자연스러운 사실주의)는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 전례 없는 것이다. 고대의 시인이나 역사가들은 인간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 53쪽에서 54쪽 



세 번째는 단테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계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그 철학이 단테의 문학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글을 쓸 때 단테처럼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는 사상가는 없을 것이다. 이런 단테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아퀴나스 철학이었다. 그가 믿고 따른 아퀴나스 철학은 개성적 형태를 중시하고 그에 대한 묘사를 정당화했다. 성 토마스는 이 세상이 하나의 이미지를 따라 창조되었다는 신학적인 교리로써 사물의 다양성을 설명했다.(...) 따라서 천지창조 전체를 두고 볼 때, 다양성은 완전함의 반대 명제가 아니라 그것의 적절한 표현이다. 더욱이 우주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에 적극 참여하며, 그 움직임은 우주의 형식들을 움직여 자기-완성으로 나아간다. 이런 행동의 능력이 발휘되는 과저에서 다양성은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필요한 과정이다.

- 178쪽에서 179쪽 



단테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세속적 자연주의는 아퀴나스 철학에 기반해 있는 셈이다. 마치 고딕 자연주의처럼. 


 

책 뒤에 수록된 '인명-용어풀이'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에 대한 설명보다 가령 사랑이나 천국, 연옥 같은 단어에 대한 풀이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책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읽어야겠지만, 이 번역서 자체의 완성도도 나쁘지 않고 강력하게 추천한다. 꽤 밀도가 높은 책이라 읽는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것이다. 


아래는 사랑이라는 용어 풀이에 실린 아퀴나스의 사랑에 대한 정의다. 선한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일까. 선미(kalokagathia) 의식은 그리스의 것이라 여겼는데, 중세 후기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원함(velle bonum)이다. 자기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선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기적 사랑과 우정의 사랑으로 나뉜다. 사랑의 고유한 원인은 선이다. 사랑은 사람의 본성에 타고난 것이나 그 본성에 어울리는 것이다. 악이 선'처럼' 나타날 때 악을 사랑하게 된다. 아름다움(pulchrum)은 선과 같은 개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름다움의 소유는 보는 것 또는 인식에 있는데, 선의 소유는 사랑 속에 있다. 사랑의 가까운 원인은 선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이 없으면 그것을 결코 욕심낼 수 없다. 사랑의 결과는 상호 침투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것을 주는 자가 그것을 받는 자 속에 있고, 또 반대로 사랑 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 속에 있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엑스터시(황홀)는 사랑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사랑의 대상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격정과 질투는 사랑의 결과이다. 강렬한 사랑은 그것을 반대하고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다 물리치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가 행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부 1편 중에서(367쪽 재인용) 

 


아우어바흐(1892-1957) 



단테 - 10점
에리히 아우어바흐 지음, 이종인 옮김/연암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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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공평한 걸까. 내일의, 어떤, 발생하지 않은 일이 현재, 혹은 과거에 미쳤던 영향은 대단하기만 하니, 내일을 아는 이 없다고 해서 세상이 공평한 것은 아니다.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은 인과율(law of causality)을 바탕으로 움직이며, 우리 모두는 인과율적 문명의 노예다. 우리 문명은 인과율 위에 축조되었고 우리 사고도 인과율을 벗어나 한 발짝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각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 이 노예 근성은 현 문명에 반하는 모든 혁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던) 운명에 순응하는 개인이라는 표상이 생기고, 모든 이들 -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나이 든 이나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이나 - 이 '역시 이럴 줄 알았어'라며 자신의 파괴되어지고 부서지고 있는 보금자리 - 그 곳이 물리적 장소이든 마음 속의 위치든 - 에 들어가 꿈쩍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버마스가 말한 바 있는 공론장의 붕괴는, 어쩌면 우리 문명이 지닌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약점이면서 충분히 예견된 일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그리스 비극이 감동적인 걸까. 고전 비극은 이 치명적 약점 위에 서서, 끝내 실패하고야 말 생(生)의 혁신을 꿈꾼다. 위대한 고전주의자들의 낭만성은 여기에서 싹튼다. 우리가 종종 고전주의자를 낭만주의로 오해하는 이유는, 범속한 낭만주의가 기존 질서에 반하여 무질서, 혼돈, 상상을 이야기하는 것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고전주의자들은 기존 질서 위에서 그 질서와 싸우며, 그 질서와 함께 무너지는 순간에도 질서의 문제점을 말하며,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삶 전체로 투쟁하고 저 질서 너머의 어떤 새로운 질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고전주의자이면서 낭만주의자일 수 있는 것은, 질서를 받아들이며 요청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 전체는 한 편의 비극이며, 새로운 시대의 요청으로 점철되어 있다. 



잠시 들른 까페에서 위의 글을 메모하면서... 출근 전 잠시, 혹은 아주 길게, 게오르그 짐멜의 렘브란트와 메리 올리버의 고래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 들었다. 아. 아무도 날 깨우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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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10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동녘사이언스



블랙 스완 Black Swan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Nassim Nicholas Taleb(지음), 차익종(옮김), 동녘사이언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 비즈니스 저널을 통해서다. 금융이야기가 나오고 월가의 허상을 파헤쳤다는 식의 서평이 나왔기에, 그 땐 파생 금융 상품의 허점을 통렬하게 비판한 경제 서적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렇게 홍보하는 편이 책을 많이 파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검은 백조의 발견'과 같은 아주 예외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문명이나 이론, 학문의 세계라는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으며, 연역법적 접근은 이미 폐기되었고(책에선 연역법은 아예 언급되지도 않지만), 귀납법적 접근마저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책을 '플라톤주의에 반기를 든 금융공학자의 탁월한 저서'라는 식의 인문학 서적으로 포장했다면 팔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할 테니.

금융 관련 서적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고, 읽을 책들이 밀려있었던 탓에, 나는 이 책을 몇 년이 지난 최근에서야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은 지난 세기 최대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 그 전에는 영국 경험론 철학자 흄(David Hume), ...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은 후기 회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까지 언급하는 정체불명의 책이었다. 거기에다 독일의 천재 수학자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의 정규분포곡선을 거대한 지적 사기(GIF, Great Intellectual Fraud)라고 공격하며 그 옆에 만델브로(Benoit Mandelbrot)적 무작위성, 프렉탈(Fractal)을 대비시킨다.

이 쯤 되면 이 책의 난이도가 걱정스럽겠지만, 생각만큼 어렵진 않다(반대로 번역이 염려스럽긴 하다). 어렵지 않은 이유는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목적은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
단 하나의 예외로 무너질 수 있는 이론들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마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없는 이야기들은 다 제외하고, 최대한 쉽게 풀어쓰고, 노골적인 표현('통계학자들은 강의실을 떠날 때 뇌를 두고 나오는 경향이 있어서 너무나 사소한 추론 오류에 빠진다')으로 주장을 명확하게 강조한다.

1000일의 칠면조 - 흄의 문제

칠면조가 있다. 그리고 이 칠면조에는 매일 같이 안부를 묻고 모이를 가져다 주는 주인이 있다. 귀납법에선 경험적 사실(증거)를 누적시켜 명제를 도출해낸다. 칠면조의 경험 세계 속에선 이 주인은 너무 선량하고 칠면조에게 우호적이다. 1000일째되는 날까지도 주인은 그 칠면조에게 미소를 띠며 모이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1001일째 칠면조는 죽임을 당했고 그 주인 가족은 맛있게 칠면조 요리를 해먹는다.

귀납법적 접근에 의하자면, 1000일까지의 칠면조에게 1001일째의 죽음은 전혀 예상할 수 없다. 1000일까지 칠면조의 경험 세계 안에서 누적된 모든 정보들을 다 모아도 1001일째의 죽음은 논리적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극단적인 사건이 그 전까지 누적되었던 모든 경험적 정보들을 가치없게 만들어버렸다(이런 측면에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신문들을 읽으며 정보 수집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다고 말한다. 정보 수집에 열 올리지 말고 지식을 쌓으라고 조언한다. 플라톤주의(*)에 대한 적절한 포기와 함께).  


(*이미지 출처: http://whywereason.wordpress.com/tag/nassim-taleb/)


검은 백조 

'백조는 희다'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검은 백조가 발견된 후 이 정설은 바로 폐기되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기존에 통용되던 이론을 거짓말로 만들었다. 탈레브는 평범의 왕국과 극단의 왕국을 대비시키며 극단의 왕국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해서 하나의 관측값이 불균형한 비율로 전체에 충격을 가한다'고 말한다. 

주목할 점은, 현대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전쟁도 평범의 왕국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적을 한 사람 한 사람 처치할 수 밖에 없는 시대에는 전사자 수는 많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대량살상무기로 인하여 단추 하나, 미치광이 한 명, 단 한 번의 작은 실수로도 지구상의 인간을 다 쓸어버릴 수도 있다.
- 89쪽 

하지만 검은 백조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 우리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우리 앎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고 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무시하는 학자들을 공격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씌어졌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도리어 당연한 것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로마의 웅변가, 문학가, 사상가, 스토아 철학자, 정략가이자 덕망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난파선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무신론자 디아고라스(Diagoras of Melos)의 한 추종자가 보게 되었다. 그림의 목적은 기도가 우리를 익사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신론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기도하고도 빠져 죽은 사람의 그림은 어디 있소?"


키케로의 저 이야기는 읽고 나면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 세계에선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의사들이 자주 쓰는 표현 NED는 No Evidence of Disease(질병의 증거 없음)의 약자라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질병이라고 100%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지, 질병 없음의 증거는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얼마나 많은 의사들이 NED를 질병 없음의 증거로 여기고 환자들에게 말하는가를 지적한다.

아주 오래 전에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악전고투 끝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프로그램에는 결과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사연이 나온 것이지, 악전고투 끝에 결국 실패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은 나오지 않았다. 실은 한 명의 성공 뒤에는 나머지 아흔아홉 명의 실패가 가려져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허황된 믿음을 심어주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이라는 것.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기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저자는 예외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론적 논리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 대부분은 평범의 왕국 속에서 살아가고 아주 드물게 검은 백조를 만날 뿐이다.

무수한 보험회사에서는 검은 백조를 들이대며 영업을 하고 검은 백조 상품들은 지금도 보험회사의 기획실에서 연구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반대로 투자회사 담당자들은 고객 앞에 가서 예외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이 발생할 확률은 0.1% 이하라며 99%의 확률에 투자하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결국 기업들의 마케팅 위에 우리의 일상은 만들어지고 흘러갈 것이다. 

실은 너무 많은 정보가 문제다. 거주하는 사람들이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시골 마을에 들어가 1년에 한 두 번 도시에 나온다면, 여러 통신 수단을 다 없애버리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불확실성 위에 있다는 생각이 들까? 이렇게 묻자. 1920년도의 식민지 조선이 불확실할까? 아니면 2012년의 한국이 더 불확실할까? 

이 책은 거짓말을 진실인 양 호도하는 많은 경제학자들과 금융 산업 종사자들, 강단의 교수들을 비난하기 위해 씌여졌지만, 일반 독자에게도 이 책의 호소력은 꽤나 크다. 하지만 현대의 이론들이 다 그렇듯, 그건 틀렸어, 그건 잘못되었어(혹은 반대로 그건 옳아, 그것도 타당한데)라고 말하곤, 그럼 진짜 정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는 않는다.

실은 정답을 몰라도 상관없다. 정답이란 없는 것이니까. 실존주의 이후의 우리(의 인생)는 여분의 존재이고 내던져진 존재이다. 결국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세계다. 다만 그 치부를 플라톤이 숨겨주고 있었을 뿐이다. 

리뷰가 길어졌다. 하긴 짧게 쓰기엔 이 책은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시사적이기까지 하다. 철학에서 순수 수학까지 종횡무진하는 이 책, 한 번 읽어둘 만하다.





* 플라톤주의(Platonism): 이 단어는 이제 일반명사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까. 이 책에서도 별다른 언급없이 '플라톤주의'라는 단어가 수시로 등장하니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플라톤주의'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탈레브가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플라톤주의란 플라톤 철학과 그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 혹은 철학(학문)적 경향과 전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말하듯,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니,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 대부분은 플라톤주의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며(현실세계), 학문 체계의 순수성(이데아세계)만을 추구하는 주류 경제학자들, 금융 산업 종사자들, 강단 철학자들과 일군의 교수들을 모두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결과적으로 극단적 예외 사항으로 무너질 것이 뻔한 이론적, 학문적 틀을 고집하는 바보들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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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운동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데아에 공허나 부정적인 것을 덧붙여야 한다. 플라톤의 "비존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는 이런 것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마치 산수의 한 단위에 영이 합쳐지듯이 이데아와 합쳐져서 이데아를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수화시키는 형이상학적 공허인 것이다. 불변적이고 단일한 이데아는 이에 의하여 무한히 퍼져가는 운동으로 분산된다. 권리상으로는 오직 불변적인 이데아들만이 있어서 상호간에 움직일 수 없이 꽉 들어차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질료가 나타나서 공백을 거기에 덧붙여주고, 동시에 우주적인 생성을 분리해 낸다. 질료는 파악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면서 이데아들 사이에 잠입하여 마치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든 의심처럼 끝없는 동요와 영원한 불안을 자아낸다. 불변의 이데아의 지위를 하락시켜 보자. 그러면 그에 의하여 우리는 사물의 영구적인 변화를 획득하게 된다. 이데아 내지 형상은 의심할 것없이 예지적인 전 실재, 즉 전부 모여 [파르메니데스적] 존재의 이론적 평형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전부라고 하겠다. 감각적 실재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이 평형점의 양쪽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동요인 것이다.
-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315~316쪽. ('베르그송의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 서광사, 183쪽)


고전주의자, 혹은 플라톤주의자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낭만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저 하늘의 별빛과 내 마음의 별빛이 일치하던 시대의 아름다움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을 접하면서 나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이라든가, 이상적인 아름다움, 영원한 가치 따위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퇴근길에 베르그송의 저 문단을 읽으면서 약간 울컥했다. 모험으로 가득찬 그리스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은 마음 속으로 모험이지만 모험이 아닌 어떤 세계, 움직이지만 실은 정지해 있는, 그래서 꽉찬 어떤 세계를 염원했고 그것을 남겨놓았다.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 달기라고 하지만, 플라톤 철학도 알고 보면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에 나왔고 이 둘의 사상은 고대 이집트의 세계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가 어떤 곳인가. 이 곳에선 죽음은 또다른 탄생이고 영원이며, 운동은 일종의 반복이고 시간을 끊임없이 도는 것이며 직선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란 없다. 세상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며, 여기에 예외란 없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몇 천 년 후에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지적한다. 그의 철학은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곡선을 그리는 듯 하다. 그의 문장은 대단히 아름답고 비유적이다. 그리고 설득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마 10년 전의 나라면 베르그송을 인정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 이래저래 실패의 흔적들만 얼굴에 남긴 채 일상을 보내는 나에게, 베르그송은 아주 슬픈 위안이다. 그는 나에게 정지해있는 모든 것들은 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그것의 신비나 가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한다. 하지만 난 아직 그것의 신비나 가치, 아름다움에는 관심없고 플라톤이 잡고자 했던 어떤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실은 나도 그런 것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추구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내 옆의 사랑이 변치 않았으면 바랬고 내 언어가 영원하길 염원했으며 변하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이데아이든 형상이든 물자체든, 반드시 있다고 믿었다.  

'영원의 움직이는 이미지인 시간',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한 표현이다. 그는 시간마저도 붙잡아버렸던 것이다. 그는 시간을 부정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배하는 이 현실 세계는 도대체 평가할 만한 가치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세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현실 세계를 한 발짝 벗어나지 못하지 않는가. 칼 포퍼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것도 바로 이런 경향 때문은 아니었을까. 

베르그송이 그간 읽히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Comment +2

  • 저도 플라톤 주석 달기라는 애기를 많이들었는데요..
    플라톤의 필레보스를 읽고 있노라면 뭐랄까..
    정제되고 순환되지 않는 이데아라는 개념이
    무한이 반복하고 진화되고 있는 이상의 개념으로 바꼈었는데요...
    전 철학과라 관심이 많네요 ㅋㅋㅋ

    • 화이트 헤드의 표현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시지 마시고, 그냥 플라톤 철학이 서양 철학사 내에서 가지는 위상에 대한 표현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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