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11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 그리고 소나기

임윤찬의 연주를 듣고 라흐마니노프 3번이 저랬지,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연주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들었으나,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임윤찬의 연주를 듣고 바로 저거지 했다. 조성진이 연주한 것도 듣고, 손열음이 연주한 것도 들었다. 조성진이 대단한 걸 알지만, 나에겐 너무 말랑말랑하다. 난 좀 냉정하고 차가운 소리가 좋다. 그러나 조성진의 피아노는 너무 부드럽고 우아하며 성숙한 느낌이다. 그래서 편안해지며 풀린다고 할까. 조금은 날이 서있는 느낌이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아르투어 미켈란젤리다. 그의 연주는 날이 확실히 서 있다. 손열음의 연주도 좋아한다. 그녀의 연주도 정말 좋다. 그런데 이번 임윤찬의 연주는 오, 압권이다. 사람들이 왜 찬사를 쏟아내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악보도 ..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손열음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손열음(지음), 중앙books 지금은 구독하지 않는 주간지에서 손열음의 칼럼을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문장은 그녀를 처음 만나더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음악가(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콘스트 피아니스트')가 쓴 음악(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그런지 음악 평론가나 애호가가 쓴 책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할까, 흥미롭다고 할까. ** 그렇다면 상대 음감이란 무엇인가? 제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절대음감의 반대가 상대음감이다. 한마디로 절대음감이 없는 상태. 절대음감의 소유자가 1만 명 중 하나라는 통계가 맞다면 상대음감은 1만 명 중 9999명이라는 소린데 ….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나 다 가지고 있는..

Jazz, Jazzy, and Gonzalo Rubalcaba

토요일이 끝나고 일요일이 시작된다. 어수선한 주말이 흐르고 가족이 잠든 새벽,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예전처럼 쉬이 음악 속에 빨려들지 못하고 겉돌기만 한다. 나이가 들면 세상 사는 게 조금은 수월할 것이라 여겼는데, 예상과 달리 그렇지 않더라. 예전엔 화를 내고 분노하게 되는 상황임에도, 지금은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고 있는 나를 보면서 쓸쓸해지곤 한다. 나이가 드는 건 좋지 않다. 이젠 마음이 뛰지도 않는다. Jazz를 들으면 Jazzy해질 것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곤잘로 루발카바는 한국에 여러 번 내한한 쿠바 하바나 출신의 피아니스트다. 그가 찰리 헤이든과 음반을 냈는데, 한국에선 이제 구하지 못하고 해외 주문을 해야 한다. 예전에는 음반을 구하기 위해 해외 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비 내리는 날의 녹턴

이렇게 비 올 땐 쇼팽이구나. 쇼팽의 녹턴만 들으면 왜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가던 창원 도립 도서관 생각이 나는지 몰라. 노오란 색인표를 뒤져가며 책을 찾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혼자 온 나를 사이에 두고 앞서 책을 빌리던 아저씨는 무슨 책을 빌렸나 뒤에 빌린 그 소녀는 무슨 책을 빌렸나 궁금해 했지. 아무 말 없이 서서 물끄러미 창 밖을 보며 아주 잠시 내 미래를 생각했어. 그 옆을 지키던 네모난 색인표를 넣어두던 서랍장과 책들 사이로 지나는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들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고 해가 살짝 기울어, 도서관 앞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나들이 나선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던 소리들과 ...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도립도서관은 그대로 있을려나. 내가 타고 다니던 그 시내버스도 그대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LP를 책상 밑으로 옮겨놓았다. 1년 넘게 창고에 있다가 겨우 밖으로 나온 녀석들이다. 이 사이엔 젊은 아쉬케나지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추운 겨울, 차이코프스키는 참 매력적이다. 위 영상은 에밀 길레스(Emil Gilels)의 연주다. 피아노가 부서져라 치는 그의 연주는 에밀 길레스의 상징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저 연주는! 강철과 같은 타건 때문에 연주회에서 자주 피아노현을 끊었다고 하는 길렐스에게 있어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그의 피아니즘을 상징하는 이모티콘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프리츠 라이너와의 50년대 스테레오 녹음(RCA)과 1970년 로린 마젤과의 ..

슈베르트,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쇼팽과 루빈스타인, 차이코프스키와 에밀 길레스가 언급된 몇 개의 포스팅을 적고 수정했지만, 예약으로 걸어둔다. 오늘 너무 많은 포스팅을 올리게 되기에(이제 나도 그런 걸 신경써야 할 때가 왔다). 어느 새 일요일 오후이고 쓸쓸하다는 기분에 잠긴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연주를 듣는다. 20세기 피아노 연주의 낮을 지배했다는 루빈스타인과 밤을 지배했다는 호로비츠의 연주다. 흥미롭다.

엘렌 그리모의 특별수업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 엘렌 그리모 지음, 김남주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엘렌 그리모의 특별 수업 엘렌 그리모(지음), 김남주(옮김), 현실문화 진정한 행복이란 피상적인 행복에 만족하지 않는 데 있다. 훌륭한 그림이나 시나 노래에 스스로를 헌신하듯 행복에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에 자신만의 붓질, 자신만의 표현, 자신만의 음을 입혀야 한다. 멋진 작품은 저자가 자신 안으로 침잠해 그 바닥을 파내 그 안을 삶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새 한 마리, 돌 하나, 나무 하나가 태양에 연결된 빛처럼 에덴에 소속된 그 낙원을, 그 에덴을 되찾는 데 있다. 행복이란 그런 완벽한 조화,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의 노래, 천사의 날개가 우리를 스칠 때 우리 영혼에서 나오..

벨라 바르톡의 일요일 아침

지난 일요일 오전에 적다가 ... 이런저런 일상들로 인해 이제서야 정리해 올리는 글. 어제(토요일) 읽다가 펼쳐놓은 책, 정확하게 378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 페이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여러 의사결정에 집단의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것에도 집단적인 거리낌이 있다. 조직들은 지난 일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회피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제프리 페퍼Jeffrery Pfeffer의 1992년도 저서, 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를 번역한 이 책의 제목은 '권력의 경영', 내가 이번 주 내내 들고 있는 책이다. 어제 내려 놓은 이디오피아 모카하라 드립커피는 식은 채 책상 한 모서리에 위치..

걸어가면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었다.

대출 기한을 넘긴 책을 도서관에 반납했다. 반납하는 내 손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일어났다. 마치 지구 밑바닥을 흐른다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용암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하듯, 2011년의 봄이 오는 속도로 굳은 살들이 허옇게 올라왔다. 나는 무인 대출반납기에 서서 책 한 권을 반납했다.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여러 차례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늘 진 곳을 번갈아가며 낡고 오래된 갈색 구두 굽이 보도블럭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구두굽은 보도블럭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 소리가 그렇게 상쾌하게 들릴 수가. 회사 일 때문에 요 며칠 한남동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태원에서 내려 한남동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걸어갔다. 걸어가면..

예르벤퍼 숲 속 나무들의 낮은 속삭임

예르벤퍼 숲 속 나무들의 낮은 속삭임 - 시벨리우스, 작품 75번 - 다섯 개의 피아노곡 조금의 미동(微動)도 없이 투명한 유리창 너머 우두커니 서, 사각의 방 안을 매섭게 노려보기를 몇 주째, 여름날의 대기는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다. 어디에서 저런 열기를 가지고 오는 것인지, 쉴 새 없이 내 육체를, 내 영혼을 끝없이 높은 여름 하늘의 노예로 만들며, 날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어색하게 튀어나온 동아시아의, 온대성 기후에서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가는 작은 반도 가운데 위치한 거대 도시의 여름을 견디게 하는 것은 대륙의 반대편, 대지의 대부분이 산과 숲, 호수로 이루어진 나라 사람의 100년 전, 작은 피아노 음악들이었다. 빵과 버터를 위한 음악 언제부터였을까.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