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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5월 7일. 텅 빈 대체 공휴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 인적이 드문 골목. 몇 시간의 집중과 약간의, 불편한 스트레스. 

태양은 빠르게 서쪽을 향하고 바람은 머물지 않고 그대는 소식이 없었다. 

봄날은 하염없이 흐르고 내 마음은 길을 잃고 내 발길은 정처없이 집과 사무실을 오간다. 


운 좋게 예상보다 많은 일을 했고 그만큼 지쳤고 어느 정도 늙었다. 

몇 만 개, 혹은 몇 백만개의 세포가 소리없이 죽었고 텔로미어도 짧아졌을 것이다. 


책 몇 권을 계속 들고 다녔지만, 5월 내내 읽지 못했다. 

밀린 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대체공휴일, 조금의 일을 했고 나를 위해 와인 한 병을 샀다. 그리고 마셨다. 





최근 콜드플레이를 우연히 듣고 난 다음, 아, 내가 좋아하던 밴드는 벨앤세바스티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새로운 음반이 나오는대로 구해 들었는데, 최근 듣는 것도 뜸했고 음반도 사지 않았다. 

문득 나는 나를 잃어가는 중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살짝 슬퍼졌다. 

다들 그렇게 세월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마저 다 잃어버리면 정말 텅 비게 될까. 그대도 잃고 나도 잃고 내 마음도 날 떠나면, 나는 텅 빈 항아리가 될까. 

그래서 나는 텅 비어 울리고 울리고 울려서 바람이 머물다 가는 어떤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런데, 그럴 수만 있다면, ... ... 아마 오래 차있던 어떤 것이 텅 비게 되면 쪼그라들겠지. 그렇게 쪼그라들어 늙어 초라해질 것이다. 

아마, 그렇게, 다들, ... 사라질 것이다. 

잃은 후엔 사라지는 것이다. 그게 우리 삶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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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팀원들과 하루 일과를 담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름하여 일일보고서. 그런데 그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쓴 게 2주 전이었다. 그 사이 나는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가 일을 했다. 상당량의 스트레스가 육체를 자극했고 적당한 고립감과 쓸쓸함이 내 사무실 책상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형 IT 프로젝트의 제안서를 거의 혼자서 썼고, 어제서야 비로소 제안 발표를 했다. 아직도 400명 앞에서 벌벌 떨며 했던 발표가 기억에 선한데, 지금은 제안 발표 때 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긴장하지 않는다는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초부터 침대에 누우면 현기증이 심하게 일었다. 마치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위에 몸을 실은 듯이. 노년의 의사에게 들은 바로는, 귀 안 쪽, 내 지친 육체의 수평 감각을 조정하는 기관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그 이후 종일 멍한 시선으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세계의 가장자리는 약간 곡선으로 휘어져 안쪽으로 굽이쳐 말려들었다. 몸을 심하게 움직이거나 시선을 급하게 돌릴 때마다 나는 비잉 - 돌아갔다. 그러면서 몸도, 흔들, 흔들, 흔들, …



늦은 아침, 병원 가는 길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이라고 하기엔 찬 바람이, 벚나무 가지에 부딪혀 내 거친 마음에 와 닿았다, 스러졌다. 바람은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건조한 대륙에서 날아와, 반도 끝을 향해 달려가던 중에, 4월 벚꽃과 한 남자의 마음을 만난 것이다.

벚꽃 이파리들이 날렸다. 하늘보다 낮게, 낮게, 낮게… 분홍 이파리들은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소녀의 발간 볼 색깔과 닮았다. 늙어가는 육체,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감성. 참 슬픈 풍경이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터무니없게도 스물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내 십대의 막다른 골목길 같았던 사랑이 그립고 안타까웠다.


간밤에 비가 내렸다. 공기는 한결 깨끗해지고 투명해졌다. 4월 말의 어색한 햇빛이 거리에 내렸다. 그리고 현기증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나 내 몸 밖으로 퍼져 사라졌다. 가끔, 아주 자주.

갈색 보도 블록 위로 곱게 깔린 벚꽃 이파리들. 아마 며칠 지나면 사라지겠지. 마치 우리들의 지나간 청춘처럼. 그렇게.



병원을 가기 위해 거리로 나서자, 지난 여름의 푸른 빛깔이 시야를 가렸다. 푸른 빛, 그건 21세기의 청춘과 어울리지 않는다. 21세기의 중년과도 어울리지 않겠지. 푸른 색, 그건 17세기나 18세기, 바로크를 지나 로코코, 그리고 초기 낭만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색이다. 아니면 정조의 문체에 반발했던, 조선의 낭만적 선비들과 어울리는 색이다. 노발리스나 이옥.

하루는 길거나 짧다. 인생도, 사랑도 길거나 짧다. 마치 박제가 되어버린 연필같다. 병원의 책상, 노년의 의사는 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말했다. 나는 나아졌다기 보다는 다소 덜 어색해진 현기증이라고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만큼 쓸쓸한 것도 없다. 그리고 완벽하게 익숙해지는 순간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죽음이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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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잠시 휴식을 취해보지만, 기대보다 늘, 언제나 빠르게 오후 1시가 오고, 오후 2시가 온다. 이 회사를 다닌 지도 벌써 2년이 넘어서고 있다. 제대로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했으나,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내 뜻대로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옳거나 제대로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고 타인을 고려하고 이후 이어질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지고 걱정이 많아진다.



사무실에 커피를 내려 마시며, 이제는 사라진 에어로시스템의 작은 미니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다. 이젠 제 수명을 다한 듯한 캔우드 리시버 앰프를 사무실에다 옮겨 놓았는데, 언제 한 번 제대로 된 소리로 날 즐겁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2011년이 나도 모르는 사이 시작되었고, 내가 알아차리기 전에 2012년이 될 것이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계획했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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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가지고 나갈 때조차, 나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아직 익숙치 않은 탓이다. 도리어 어떤 풍경을 보고 그것에 어울리는 문장을 고민하는 편이다. 최근 한 달간 내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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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동사무소 옆 흰 벽과 거울이 인상적인 카페에서 더치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이 너무 좋았고 같이 있었던 이도 좋았다. 집 안에서 키울 수 있는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커피에 대해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녀에게서 커피를 선물받았다. 그런데 아직 드립퍼를 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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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에 있는
카페 향에서 있었던 재즈 연주 풍경이다. 최근 들었던 그 어느 재즈 밴드들보다 수준급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주에 비해 모인 사람들이 다소 적었고 단골들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도 바쁜 일상 중이라,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즐겁게 술에 취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 그런 일이 있었나 가물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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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와인은 깊고 두터운 향을 경험하게 해준다. 특히 몇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마실 때야 말로 이 와인의 진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땐 너무 급하게 마셨고 결국 취하고 말았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면 근사한 와인 파티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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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라 투르의 세컨 와인이다. 가격 대비 무척 훌륭한 와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 잡지의 어워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위의 마고 와인을 마신 후, 이 와인은 너무 밋밋했다. 난 구대륙의 무겁고 진한 와인을 너무 좋아한다. 와인 이야길 적다보니, 와인 마시고 싶어진다. 아, 이 와인 중독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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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박 갤러리엘 갔다. 주위의 풍경이 좋았고 현재 전시 중인 정광희 선생의 작품은 너무 좋았다. 갤러리 근처의 한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몇 분과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과 만날 땐, 늘 조심스럽다. 조용히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닥터박 갤러리 대표님과 관장님, 그리고 미술평론가 윤진섭 선생님도 함께 식사를 했으나, 인사를 나누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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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난 사람들 중에
블랙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있다. 살사 댄스 강사이기도 한 그녀는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살사를 춘다. 그녀의 초대로 홍대 근처에서 열린 파티엘 갔다. 생각해보니, 이런 파티는 처음이다. 춤이 어우러진 근사한 파티였다. 나같은 이는 술만 좋아라 할 텐데, 연주와 춤을 함께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위의 사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는 강재선 선생이다. 모스크바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정식 클래식 연주자인데, 라틴 음악에 빠졌다고 한다. 나도 흥에 겨워, 잠시 살사 스텝을 배웠으나, 서른 중반에 이른 몸의 기억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막춤 세대라 매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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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미술에 매혹되거나 혹은 사진이라는 것에 매혹되었다면, 대기에 민감해질 수 밖에 없다. 왜냐면 대기의 변화에 따라 풍경의 색채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것을 최초로 발견한 예술가가 바로 인상주의자들이다. 바로크 풍경화가들이나 몇몇 낭만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자연 풍경의 미묘한 변화가 실험되기도 했으나, 이를 주도적인 경향으로, 깊이있는 분석과 표현으로 이끌어낸 이들은 인상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은 현대의 사진가들이 아닐까 싶다. 어제 오전에는 인사동에서 여러 전시를 보았고 몇 명의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사진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 종일 미술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 보기 드문 하루였다. 저녁 6호선 광흥창 역 근처에서 몇 장의 평범한 사진을 찍었다.  

좋은 작품들은 좋은 향기가 나고, 좋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나에게서도 좋은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에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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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나는 사진들... 참 잘 봤습니다. 그리고 그안에 담겨있을 음악과 웃음들도 같이 경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 와인은... 술을 안하기에 패스지만요 ^^

    카메라 어떤 것 쓰시나요? 디지탈은 아닌 것 같은데요.

    • 상태가 좋지 않은 사진들은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것입니다.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콘트라스트 정도는 손을 보긴 했지만요. ^^
      맨 밑의 사진은 니콘 D-70s로 찍은 것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긴 하나, 거의 찍지 않아서 산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도 신제품입니다.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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