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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민음사에서 내던 <<세계의 문학>>이 지난 겨울호로 '발행을 중단'했다, 혹은 폐간했다. 문학 잡지의 사소한 발행 중단이라고 하기엔 <<세계의 문학>>이라는 잡지가 가졌던 위상이나 내가 즐겨보던 잡지엿던 터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고 난 다음, 처음 샀던 문학잡지이기도 했던 <<세계의 문학>>. 그 해 박일문이 '하루키 패러디'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고, 나는 <<세계의 문학>>에 실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와 달리, 좀 더 문학주의적이라고 할까, 이론주의적이라고 할까. 그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랬다. 그동안 많은 여러 문학 잡지들이 발행을 중단했다. <<문학정신>>, <<외국문학>>, <<상상>> 등등. 세상이 변하면 문학도 변하고, 문학잡지도 변해야 한다. 가끔 들리는 공공 도서관에 비치된 문학잡지들을 보며, 누가 저 잡지들을 읽을까 언제나 궁금하다. 결국 학생이나 관계자, 또는 나같은 이들이 읽을테지만. (나 같은 이들이라, ... 적고 보니,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그래서 마지막 호를 샀다. 산 지 벌써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채, 이 글이나 적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소셜 미디어와 사람들 간의 소통 증가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 미디어같은 것들의 등장과 활성화로 사람들이 자주 대화하고 소통이 늘어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반대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간다. 서로 얼마나 닮았는가를,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향해 갈 뿐, 서로의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않는다. 다른 점들이 부각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차단한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비슷한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결국 우리는 비슷한 끼리끼리 모여 섬을 이룬다. 


그렇게 문학도, 문학잡지도 섬이 된 것이 아닐까. 한 때 문학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대화할 기회 조차 없었던 이들을 이어주던 다리가 되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고립되어가는 섬이 되고 있다. 


<<세계의 문학>>이 발행을 중단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의 존재나 위상이 예전만 못하고 잡지도 그러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제 문학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가야하는 건 아닐까. 


소설가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보면서 그녀의 수상보다 저들은 번역문학도 자신들의 문학 속으로 끌어당기는구나하며 부러웠다. 우리에게는 번역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비평 따윈 없다. 그리고 한국의 문학이 그것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에 대해 돌아보지도 않는다.


제발트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다큐멘터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 스스로 다큐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러다가 진짜 다큐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문학은 타자를 받아들이며 성장해간다. 아니, 예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간다. <<세계의 문학>> 마지막 호 편집자 서문에 알레시예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비전, 즉 내 귀가 어떻게 삶을 듣고 또 내 눈이 어떻게 삶을 보는가를 전달하는 데 가장 잘 맞는 장르를 계속 찾아왔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본 후 결국 나는 인간의 목소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르를 선택했다. 실제의 사람들은 내 책 속에서 전쟁이나 체르노빌 재난, 그리고 거대 제국의 몰락 등 시대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 그들 공통의 역사에 대해 구술로써 기록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말로 옮기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람과 세계가 매우 다면적이고 다양해진 상황에서 예술 속 다큐멘트는 점점 흥미로워지는 것에 반해, 그와 같은 예술은 종종 무기력해졌다. 다큐멘트는 그것이 원래의 상태를 포착하고 간직할 때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우리를 데려다준다. 그 다큐멘트 자료들로 20년간 작업을 하고 그것으로 다섯 권의 책을 쓰고 난 후, 나는 예술이 사람들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 영원한 인간을 찾아서 A Search for Eternal Man, 알렉시예비치. 

(http://alexievich.info/indexEN.html)



내가 형식의 문제나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늘 고민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알레시예비치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밖에.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박은정 역,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중에서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의미있는 문학인가 판단하기 위해 범주와 장르를 따르는 것은 좋은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즉 그 목소리와 내용으로, 그 영혼과 긴박함으로, 그 진실과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로서 우리의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확장하는 글쓰기로써 삶과 죽음에 반응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필립 구레비치Philip Gourevitch, 논픽션은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Nonfiction deserves a Nobel, <<Newyorker>> 2014. 10. 9 



<<세계의 문학>> 창간호다. 1976년에 태어난 이들도 이젠 40대인가.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호메로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플라톤이 저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했던 그 비극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글이 두서없고 뜬금없다. 문학이라, ... 참 오랜만에 생각해보게 된다.  



출처: http://myungworry.khan.kr/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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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 - 6점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문학동네



밀어 密語 
김경주(지음), 문학동네 





육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겉도는 하나의 선이다. 몸의 선은 그 자체로 숨 쉬는 비율이며 튀어오르는 정밀한 뼈들을 감추고 있는 이미지다. 쇄골은 육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선線의 풍경이다. 



오래 이 책을 읽었다. 기대되었다. 김경주 시인의 산문. 그것도 몸의 은밀함에 대한 글이라니.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책들과 작가들이 인용되고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그의 산문은 깊이를 더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독서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두서없는 그의 상념들은 그의 우아한 언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시적 감각은 질서없이 흩어지는 봄날 벚꽃처럼 내 눈 앞에서 반짝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몇몇 문장들과 인용구, 상념의 편린들은 좋았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내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여러 잡지에서 만났던 그의 산문이 무척 좋았던 탓에,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에서 탁월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시인이었던 탓에, 이 책에 대한 내 평점은 낮다. 이는 이 책에 대한 의도적 깎아내리기가 아니라, 이 책보다는 그의 시집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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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즐겨 마시는 커피의 종류를 알고, 네가 하루에 몇 시간을 자야 개운함을 느끼는지 알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인가? 나는 네가 커피 향을 맡을 때 너를 천천히 물들이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일곱 시간을 자고 눈을 떴을 때 네 몸을 감싸는 그 느낌을 모르고, 네가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네 귀에 가닿을 때의 그 느낌을 모른다. 일시적이고 희미한, 그러나 어쩌면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의 울림일 그것을 내가 모른다면 나는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다. 나는 그저 '나'라는 느낌, 너는 그냥 '너'라는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아직도 문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펼치면서 마치 비밀스러운 과거 - 문학이 모든 것이었던 시절을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시선(視線)들은 문장이 풍기는 향기에 숨겨져 모호해지기만 하니 말이다. 


시선 -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원근법이다. 데카르트적이거나 반-데카르트적이고, 무언가(어떤 대상)를 궁금해하거나 원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적이거나 반-플라톤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참 애매하기도 하지. 어떤 글들은 원근법을 아름다운 안개 - 결국은 모호할 뿐인! -로 숨기고 우리를 이끈다. 


종종 아름다운 글들은 우리들은 아프게 한다. 그건 아름답기만 할 뿐이기에. 


문학 비평은 문학 작품에 기생하고 결국 작품 속에 묻힌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비평이 기생하는 작품에 따라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학에서 시작했지만 문학에 가 닿지 못한 이유도 이 탓일까. 


오늘 신형철의 책을 펼치면서 그가 소개하는 여러 작가와 작품들, 나에게 대부분 생소하기만 한 이들 - 몇 명은 술자리에서 만나기도 했고 몇 명은 같이 학교를 다니고 했지만 - 속에서 그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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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 10점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시공사





1.
주기적으로, 떠올리기조차 싫은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송과 신문들은 그 사건을 연일 다룬다. 사람들의 궁금함을 풀어주기 위함이지만, 실은 자신들의 수익모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들의 전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그 사건의 의미와 해석을 쏟아낸다. 실은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와 피해자, 혹은 그들의 가족에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며, 아무런 예방 효과도 가지지 못하는 이야기만 떠들어댈 뿐이다.

먼 훗날, 사람들은 그런 사건들을 기억할까? 아마 정신이 나간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전쟁 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며, 애써 그런 사건들의 의미를 축소시킬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통계학이 아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며,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닥칠 지도 모르는 공포의 일부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것을 우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슬픈 일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해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우리들은 먼 미래의, 우연의 일부로 여겨질 어떤 공포에 대해 무방비로 살아갈 것이 뻔하다. 돈벌이가 기본적인 삶의 방식인 영화는 이런 사건들을 교묘하게 응용할 것이고, 이는 전적으로 허구의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 만들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의견대로 모든 현실은 가상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두에 현대의 미디어들이 앞설 것이다.

2.
‘강호순 사건’을 보면서, 그것의 사회학적 의미와 파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학의 자리를 생각했다. 과연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논픽션 소설이다. 1959년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을 기록한 소설로, 트루먼 카포티의 집요하고 냉정한 서술은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다. 절대로 그런 종류의 사건에 휘말려들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어떤 선량한 사람들이, 두 명의 살인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은 이성적으로는 전혀 납득 가지 않는다.

카포티는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잔인할 정도로 느리게 사건의 전후, 피해자 가족과 살인자 가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살인자들의 재판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사법 제도의 기능에 대해서도 묻는다.

‘왜 그 두 명은 살인자가 되었을까’에 대한 아무런 논리적 해답도 없다. 그래서 소설은 더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아프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살인자들 중의 한 명인 딕이 자신의 판결 결과에 대해 불복하기 위해, 법률 서적을 뒤지며, 여기저기 인권 변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이 부당함을 강변하는 모습을 읽을 땐,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살인자들에게도 용서의 기회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용서하고 난 다음은 무엇일까, 사법 제도는 이런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며, 동시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4.
죽은 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들은 끔찍한 상처는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용서도 그들의 몫이다. 우리들의 종교에서는 그 살인자를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한다. 강호순 사건에서 보다시피, 몇몇 언론에서는 아예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해버렸다. 그들은 살인자에게도 인권이 필요한가라고 물으며, 자신들은 독자들에게 진실한 정보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만, 나에겐 상업주의와 정치적 고려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은 용서 따윈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의 질서는 많은 시장 참가자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기회들을 제공한다. 많은 이들이 전문가로 나서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로 활용하며, 방송과 신문들은 연일 머리기사로 다루며, 서로 빠른 정보와 정확성을 내세우며 선정성을 교묘하게 가린다.  그리고 발 빠른 콘텐츠 제작사들(영화나 방송, 출판 등)에서는 이미 콘텐츠 기획안을 통과시키고 제작과 출시 일정을 조정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우연에 가까운 어떤 사건을 그냥 나에게만 안 일어나면 되거나, 통계적으로 나에게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여기고 지나쳐갈 것이다. 실은 그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정신적 깊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 천천히 정리하고 기록하며, 밥벌이에 바쁘고 여유 없으며, 무언가를 기억하기 보다는 잊어버리기에만 익숙한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해주어야만 한다.

진지한 문학이 가지는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트루먼 카포티의 이 소설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여기에 있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이 세상의 끔찍한 뒷모습에 경악하고 몸서리 치면서도, 느리고 진지하게 살아남은 우리들이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한국 문학에 트루먼 카포티 같은 작가도 없고, 이 소설과 같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참 큰 불행이다. 고작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면서 대단한 작가인 양 짐짓 포즈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문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속에서 기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다 읽고 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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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소설집, 창비


쉽게 읽히는 문장, 가끔 보이는 재치 있고 재미있는 표현, 하지만 그 정도? 나라도 혹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 젊은 소설가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김애란의 소설들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덤덤한 관찰의 시선이다. 무덤덤하게, 나(주인공)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적극적 행위의 주체로 나서지도 않고, 극적인 심리적 갈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정치경제학적 환경마저도 벗어나, 이 세상, 이 사회에 대한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특정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기만을 계속할 뿐이다. 심지어는 추억도 없다. 미래도 없다. 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상상이거나 공상, 또는 지어낸 이야기로 둔갑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꿈도, 희망도 없다(세상에, 이렇게 슬픈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뿐이다. 조각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꾸미고 변화를 주는 것. 하지만 세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그래서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의 자아란 사랑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끔찍한 절망에 휩싸여 있거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본다.

그런데 왜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잘 만들어진 소설이며, 심각한 주제나 소재가 등장하지도 않고 어떤 인물, 어떤 사건의 본질적인 측면을 부각할 생각도, 그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표피적인 상황들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 소설을 독자들은 좋아하겠지만, 비평가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뛰어난 소설가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듯이, 비평가들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적어도 김애란의 소설 세계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며 현대 사회가 가진 병리적 현상을 통찰력 있게 드러낼만한 이가 없다는 점은 현 한국 문단이 가진 비극적 단면이다.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사서 읽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든, 한 번쯤 읽기를 권할 만한 한국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열광적인 찬사로 도배될 만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며, 도리어 이 소설이 가진 한계를 면밀하게 분석해 이러한 태도를 가진 현대 문학을 극복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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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淸談)

                    이진명

조용하여라. 한낮에 나무들 입 비비는 소리는.
마당가에 떨어지는 그 말씀들의 잔기침. 세상
은 높아라. 하늘은 눈이 시려라. 계단을 내려
오는 내 조그만 애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때처럼. 눈시울이 붉어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이 흘러오고. 조용하여라. 한해만 살다
가는 꽃들. 허리 아파라. 몸 아파라. 물가로
불려가는 풀꽃의 헤진 색깔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빈 그루터기에 앉아 쉬리라. 유리
병마다 가득 울리는 소리를 채우리라. 한
개비 담배로 이승의 오지 않는 꿈, 땅의 糧
食을 이야기하리라. 萬象이 흘러가고 萬象
이 흘러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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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너무 멀리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이 시를 좋아했다는 사실마저 어색한 토요일 저녁. 팔굼치는 까지고 목은 부어있고 몸과 마음이 아파 어쩌지 못하는 가을. 내 인생의 강물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향해가는 걸까.

이진명의 시를 오랫만에 읽고 영혼의 위로를 구하는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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