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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현기증 감정들 +1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

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동일한 테마를 가진 여행의 기록(기억), 이 소설이 장편소설이 되는 이유이면서 제발트가 가지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떠나는 것, 낯선 곳(혹은 잊혀졌던 곳)에서 머무는 것, 그 곳에서 자고 걷고 만나고 이야기하며 얇고 사소한 감정의 변화를 깊숙하게 느끼는 것, 그리고 기억해내는 것, 기록하는 것, ... 소설은 이렇게 구성되어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그런 여행(의 기록)이 아니다. 


밖으로 나오는 길에 흰 염주비둘기 한 쌍을 지켜보았다. 비둘기들은 여러 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날개짓 몇 번으로 나무 꼭대기 높은 가지로 위로 급격하게 떠올랐다가, 짧고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순간 동안 고요히 창공에 머문 다음 다시 앞으로 쏟아질 듯한 자세로 하강하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지막한 구르륵 소리를 냈고, 그 중 몇 그루는 이 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키프로스 나무들 주변에서 날개를 고정시킨 채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70쪽) 


나로선 이 여행들(의 기록)을 따라가기엔 참 힘들었다. 서술은 빽빽하고 무거우며, 한 번 표현된 감정은 곧바로 사물이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독자의 시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따라 아주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참을 읽었다 싶지만, 고작 몇 페이지를 지났을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감정을 서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도리어 딱딱하고 즉물적이다. 독자는 제발트의 서술을 따라가지만, 그 곳으로 감정이입되어 들어가지 않는다, 못한다.  


어쩌면 이것도 늙어간다는 징표일까,  아니면 제발트식 여행(의 기록)이란 그런 걸까. 낯선 나와 마주하거나 잊고 있던 나를, 혹은 내가 무심코 흘려보냈던 기억들을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면서 타자화, 사물화하는 걸까. 여행을 하면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지워나가는 걸까, 그리고 스스로 수수께끼가 되는 걸까.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쪽)


우리는 외부를 끝내 알 수 없다. 실은 내부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은 텅 비었고 영혼의 존재를 알 수 없기에 믿을 수도 없다. 신념은 조각났고 소설은 의미 찾기를 그만 두었다. 고작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감정마저도 객관적으로. 


제발트의 문장이 갖는 독일어의 밀도는, 역자로서의 경험이 참으로 빈약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학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치밀한 종류이며 그것이 갖고 있는 텍스처texture의 성질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252쪽) 


배수아의 의견대로, 너무 빽빽하고 무거워서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제발디언'은, 글쎄다. '제발디언'이라는 단어는 매우 사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일반 독자가 읽기엔 어렵고 재미없고 문장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고 할까. 마치 야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하긴 나도 크세나키스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피사넬로 작품은 아래와 같다. 고딕 양식의 성 아나스타시아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15세기 초반에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작품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일부를 소설에 등장시킬 생각을 하다니... 


St. George Liberating the Princess of Trebizond

Pisanello (1395 - 1455), fresco, 223 × 620 cm (87.8 × 244.1 in)

from 1436 until 1438

Church of Saint Anastasia (독일어 - Pellegrini-Kapelle)  


과감하게 읽으라는 권유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제발트가 살아있었다면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라갔을 것이며, 노벨문학상을 받았거나 그만한 명성을 누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족이긴 하지만 가끔 한국 문학판에 대해 아쉬운 건 번역된(혹은 번역되지 않더라도) 동시대 외국 문학이 어떻게 한국 작가들과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의 초기 작품들을 읽고 나는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 이후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오에 겐자부로가 십 수년 전 하루키를 비난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고 말했듯이, 그녀의 최근 작들이 궁금해진다. 적어도 제발트를 읽고 흔들렸다면 말이다. 



영어 번역판 표지



* 제발트의 다른 소설. 

2016/05/07 - [책들의 우주/문학]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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