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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현대 +24


유감이다

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로운 주체적 운명이다. (26쪽) 


Masks Mocking Death

James Ensor 

100.3 x 81.3 cm, Oil on canvas

1888, Staatsgalerie Stuttgart, Germany 



'가면'은 현대를 특징짓는 몇 되지 않는 단어라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가면'이라는 단어 대신 '정체성(identity)'를 사용한다. 시뮬라크르와 정체성이 결합되면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 결합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 전망을 가능하게 하지만, 비극적이라 여기는 건 나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지도. 


거짓은 삶의 본래적인 양상이다. 문명과 문화는 허영과 기만을 자양분으로 성장한다. (26쪽) 


이십대 후반, 태어나 처음으로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 생의 모토를 '진정성'으로 삼았을 때, 나는 현대 문명과 문화로부터 멀어진 것이다. 그 이후 내 마음대로 살았으니, 나에게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철이 없었다. 세계는 벽으로 둘러쳐져 있었으나, 나에게 벽이 없었다. 하지만 가면을 집어드는 순간, 벽에 손이 닿는 순간, 나는 사라지고 외부세계만 눈에 보였다. 


내적 사색과 사회적 조회가 좋은 삶의 조건이다. (135쪽) 


나는 내적 사색만 추구하는 인간이다. 사회적 조화? 그걸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회적 조화를 찾으려고 하니, 마치 수영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강물에 뛰어드는 꼴이라고 할까. 한 마디로 '찌질이'인 셈이다. 이 책의 부제가 '세상의 모든 찌질이들에게 바치는 헛소리 모음집'이니, 이 글도, 이 책도 헛소리의 한 종류로 구분될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하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에밀 시오랑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였듯이, 나도 내 존재 자체를 저주하게 될까. 모를 일이다. 



* 관련 리뷰 * 

2003/01/25 - [책들의 우주/문학] -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2008/12/24 - [책들의 우주/문학] - 나스타샤, 조지수

2015/02/28 - [책들의 우주/문학] - 원 맨즈 독, 조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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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지음), 이용숙(옮김), 예담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경우를. 채 30분도 되기 전에 다 읽은 이 소설집.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금방 끝나버리는 소설. 그리고 누구나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한 번쯤은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들. 하지만 페터 빅셀은 이 소설들을 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주인공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남자라는 사실이다. 정서적으로 유연한 여성들에 비해 남자들은 실제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 소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작가 빅셀이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더 없이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고 떠난 노인을 날마다 기다리는 작가, 또 요도크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애정으로 감싸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작가적 사명감의 표현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101쪽


고집 세고 편협한 이런 노인들을 만난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따뜻하고 이해가 충만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면 고집 세고 편협한 젊은이들을 만난다면? 과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회와의 소통이 어려워진다면, 그건 그/그녀의 문제인가, 사회의 문제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문제인가. 


작가적 사명감은 이미 일어난 문제를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페터 빅셀의 한계는 여기에 존재한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동화적 시선으로 현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것이다. 


다시 묻자. 당신 앞에 어버이연합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면서 싸우려고 든다면? 엄마부대 봉사단의 할머니가 나타나 편협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리로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는 일베에 빠져 당신의 의견에 대해 사사건건 반박하며 과격한 논리로 공격을 일삼는다면?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무너져내린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의 잘못, 소외되고 편협한 사고와 언어를 가지게 된 이들에 대해 무정하게 대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면, 그건 잘한 일일까? 


글쎄다. 내가 읽은 이 소설집은 좀 형편없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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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박스 프로젝트 2015:

율리어스 포프 Julius Popp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비트.폴 펄스(bit.fall pulse)>는 데이터의 최소 단위 정보 조각(bit)의 떨어진(fall), 즉 쏟아지며 짧은 순간만 존재할 수 있는 정보의 일시성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정보의 활발한 맥(pulse)을 의미합니다. 작품은 실시간으로 인터넷과 연결되어 작가가 고안한 통계 알고리즘을 통해 인터넷 뉴스피드에 게재된 단어의 노출빈도수를 측정하고 각 단어의 중요도에 따라 '물 글씨' 단어를 선택합니다. 전시장 안에서 연속적으로 빠르게 쏟아져 내리는 이 '정보 데이터의 폭포'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에만 유효한 정보의 일시성과 현대인이 이해하고 소화시킬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 정보 과잉의 현대 사회를 시각화합니다. 또한 생동감 있게 오늘날의 주요 사건과 연루된 단어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작가는 개별적인 단어의 가치보다는 인간과 사회가 정보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또한 소비되는 정보의 의미와 가치는 어떻게 변화하는지 주목합니다. 

- <전시 설명> 중에서 




출처: 직접 찍음(낡은 폰 카메라로 찍은 탓에...) 



이런 작품은 콘텍스트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 적절한 아이디어와 기술, 데이터(단어)의 조합과 일시성, 조명과 소리. 미디어 설치작품은 공간과 호흡하며 공간 속으로 들어가 공간의 일부가 되거나 공간의 전부가 된다. 공간을 새롭게 하며, 그 공간을 찾아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리의 마음을, 머리를, 몸을 환기시킨다. 율리어스 포프의 작품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설치 작품은 본질적으로 그러하다. 


율리어스 포프는 이 작품으로만 너무 오래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만큼 직접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도심의 공간 속에 들어가기 용이하다. 또한 다양한 매체들과 연계되면서 21세기 초반 문명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점에서도 비평적 찬사를 끌어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대중의 호응(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과 우호적 비평(다양한 매체와 혼합과 연결)을 만들 수 있는 어떤 컨셉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인간 삶에 대한 고독한 탐구와 끊임없는 연마가 아니라, 적절한 탐색과 만남, 괜찮은 아이디어(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가 현대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에게 율리우스 포프의 작품이 매력적인 측면은, 바로 '물소리다.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둔탁한 물소리. 어두운 갤러리 공간에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자들 위로 거칠고 무거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 여운은 꽤 길어서 이 느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디스토피아를 암시하듯. 

더 멀리 나아가선 칸트의 '숭고미'까지. 결국 우리는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현대 문명에 열광할 지라도 그건 순간이며, 떨어지는 물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물이 될 것이다. 어느 새 강이 되고 끝없는 바다가 될 것이다. 

자연의 관점에선 모든 것이 부질없다. 결국 율리우스 포프의 작품이 향하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것은 허무하고 부질없다는 것. 

이 첨단의 미디어 예술가도 현대의 허무주의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허무하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걸까. 그건 관람객의 몫이다.   





미술관에서는 율리우스 포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율리어스 포프(1973~ )는 독일 라이프치히 시각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뉴욕현대미술관(2008), 리옹 현대미술관(2008),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미술관(2009), ZKM(2015) 등의 해외 유수 기관의 기획전에 참가하였으며, 2012년 런던 올림픽을 기념하는 <비트.폴bit.fall> 작품 설치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위치한 그의 작품은 정보의 특성을 주목하고 디지털 시대의 정보와 인간의 상호적 관계를 탐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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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아우스터리츠>>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내 마음의 상처를, 가족의 상처를, 현대의 비극을 다시 꺼내어 보듬고 어루만진다. 대화는 자주 끊어지지만, 기억은 이어지고 소설은 챕터도 없이 그냥 하나다. 시간은 끊김 없고 끊어져 있던 기억들도 그것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듯, 소설은 허구와 사실을 이어 하나로 만든다.


아직도 2차 대전의 상처를 드러내며,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아가는 <<아우스터리츠>>를 보며, 요즘 한국 문학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미국의 이창래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한국 작가들만 무관심한 듯 싶기도 하고...


<<아우스터리츠>>의 명성은 이 작품을 향하고 있는 문제 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 작법에서부터 전혀 다른 글쓰기를 보여주며, 현대 소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1)이라고 이야기하듯,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 보다는 사실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중요한 사실들과 이를 연결하여 소설의 중심 뼈대(내러티브)를 만들고 그 뼈대는 다시 사진들, (건축)공간에 대한 서술, 인물들에 대한 탐구와 인터뷰 등으로 형체를 이룬다. 


그런데 이 작법은 소설 감상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으며, 도리어 전쟁에의 상처, 가족의 비극, 그리고 쓸쓸한 회상 속으로 빨려들게 하며,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소설적 완성도를 지닌다.

 


Bigsby(*) suggests that it was out of frustration with the strictures of academic publication that Sebald turned to creative writing (a vague and ungainly term that, by default, winds up being the most accurate generic description of his work). "He'd originally taught German literature," says Bigsby, "and had published the kind of books that academics do. But he got increasingly frustrated, and began to write in what he called an 'elliptical' way, breaching the supposed boundaries between fast and fiction - not what you're supposed to do as an academic." Sebald himself sometimes described his work as "documentary fiction," which goes some way toward capturing its integration of apparently irreconcilable elements. 


제발트는 학술 서적들의 심한 비난들에 대한 불만으로 문학창작(자연스레, 그의 작품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설명이 될 수 있는, 다소 모호하고 어색한 단어인)의 길로 들었다고 빅스비는 말한다. "그는 원래 독일 문학을 가르쳤어요"라고 빅스비는 말하며, "그는 학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듯 몇 종의 책들을 출판했죠. 그러나 그의 불만은 계속 늘어났으며, 그가 말하는 '생략된(elliptical) 방식'으로이미 가정되어 있던 사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발트에게 대학 연구자처럼 하라고 제시되어져 있던 기존 방식이 아니라." 제발트는 그 스스로 그의 작품을 종종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을 포착하기 위한 어떤 방식들을 향해 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표현했다. 


- Why You Should Read W. G. Sebald BY MARK O’CONNELL 

THE NEW YORKER, DECEMBER 14, 2011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why-you-should-read-w-g-sebald  


Christopher Bigsby(1941~): 소설가, 비평가, 제발트가 있었던 University of East Anglia의 Colleague. 



'Elliptical'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어를 좀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예전에도 한 번 언급했듯이 현대 소설, 아니 현대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대한 작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해롤드 블룸은 이를 '시적 영향에의 불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시대는 새로운 방식, 일종의 혁신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W.G.제발트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기에 성공하고 있다.  


-- 



(1) 제발트가 스스로 '다큐멘터리 픽션'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2015년 실제로 다큐멘터리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논픽션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제발트의 문학과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은 확연히 다르지만, 제발트를 읽으면서 알렉시예비치를 떠올렸다. 번역된 제발트의 책들을 몇 권 더 챙겨 읽고 자세한 리뷰를 적어볼 생각이다.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다.알렉시예비치도 읽을 예정이니, 서로 비교해볼까 한다. 



W.G.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1944 -2001 






* 현대 예술가라면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의 예술론을 책으로 내기도 한다. 이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칸딘스키가 그랬고 미셸 빅토르, 로브-그리예, 오에 겐자부로, 심지어 이우환도 자신만의 예술론을 모아 책을 냈다. 아래 책은 미셸 뷔토르의 소설론이다. 소설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2014/02/10 - [책들의 우주/이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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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지음), 송은주(옮김), 민음사 




결국은 울고 말았다. 소설 끄트머리에 가서, 오스카와 엄마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TV 방송 뉴스 채널로 가보라. 모든 뉴스들이 현대판 비극들로 도배되어 있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인양, 무미건조한 어조와 '이건 진짜야'라는 눈빛으로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오스카는 아빠를 찾아나선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아빠를. 



첫 번째 메시지. 화요일 오전 8시 52분. 누구 있니? 여보세요? 아빠다. 있으면 받으렴. 방금 사무실에도 전화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는구나. 잘 듣거라, 일이 좀 생겼어. 난 괜찮다. 꼼짝 말고 소방수가 올 때까지 기다리래. 아무 일 없을 거다. 상황을 좀 더 알게 되면 다시 전화하마. 그냥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화했어. 곧 다시 걸게. 


아빠로부터 네 개의 메시지가 더 와 있었다. 9시 12분, 9시 31분, 9시 46분, 10시 4분에. 나는 그것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엇을 해야할 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할지 미처 알 겨를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22분 27초였다. 

발신자 번호를 봤다. 아빠였다. 

- 35쪽 ~ 36쪽



소설은 어수선하고 수다스럽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홉살 꼬마 오스카에겐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진들이 나오고 문장들마저 조각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설 작법으로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빙빙 둘러가는 과정을 반영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빙빙 둘러, 오스카를 따라가며 9월 11일을 아주 천천히 떠올리며, 그 사건 한 복판에 있었던 어느 가족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 결말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주한다. 


소설에 대한 형식적 파괴, 또는 실험적인 변화가 작품 속 깊숙히 들어가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스토리와 형식은 하나의 형태를 지니며,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원하지 않던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가족의 노력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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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럴 겁니다! 백작은 이른 아침, 정확히 8시 반에 일어났다. ... ... 백작 부인은 목 둘레에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라일락 꽃무늬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 ... 테레지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 ... 루크레지아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 ... 오, 세상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습니까? 우리는 한줄기 태양광선을 채찍 삼아 쉼 없이 회전하는 보이지 않는 팽이 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연유도 모른 채, 결코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하면서, 우리에게 때로는 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선사하고, 혹은 쉰 번쯤 혹은 예순 번쯤 회전한 후에는 죽음을 - 대개는 어리석은 짓만 범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 선사하기 위해 그저 그렇게 돌고 도는 데에 재미 붙인 양 미친 듯이 회전하는 모래 알갱이 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 아닐까요? 신부님, 코페르니쿠스가, 바로 코페르니스쿠스가 휴머니티를 더는 회복할 수 없을 만치 파괴시켰습니다. 우리가 이룬 그 모든 잘난 발명과 발견들로 인해, 어느덧 우리 자신이 무한히 작은 존재라는 새로운 개념에 서서히 젖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스스로를 우주 속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자각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들 개개인의 불행뿐 아니라 인류의 총체적인 불행에까지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한낱 버러지들의 이야기에 불과해요. 앤틸리스 제도의 작은 재난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그 폴란드 참사회원의 주장대로, 아무런 목적 없이, 돌고 도는 데 진력이 난 가엾은 지구가 다소 인내심을 잃고 급기야 제 몸의 무수한 출구 중 한 곳에서 불꽃을 좀 뿜어내고 말았지요. 대체 무엇이 그토록 지구를 분노케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지금보다 더 한심한 적이 없었던 인간들의 우매함일지도 모릅니다. 그만두죠. 햇볕에 그을린 무수한 버러지들. 그래도 우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 루이지 피란델로, <나는 故 마티아 파스칼이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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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강의를 위해 손수 적으신 노트를 보내주셨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한글번역본을 주문하고 영어 번역을 구했다.


학부 시절, 강의 시간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에 들은 바 없다는 건 죄악이다. 아무리 문학 전공이라고 해도. 학생들에게 미래가 없는 건 그 학생들의 선생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지적(知的) 자극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은 종종 내가 대학 잘못 선택해 갔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긴 다른 대학엘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듯).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읽으면, 꽤 우울해지겠구나. 하지만 우울(melancholy)이란, 천재들의 기질임을!!


아래에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독일어 원문 - 영어 번역(the Ogden (or Ogden/Ramsey) translation) - 영어 번역(the Pears/McGuinness translation) 형태로 된 PDF 파일을 구할 수 있다.


http://people.umass.edu/klement/t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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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생 때 사실 겉멋으로 시작했는데 .... 어째 대학가서 고등학생때보다 이해를 더 못하던 책이었네요. ㅎㅎㅎ

    확실히 천재의 책이라 그런지 직관과 객기가 뭔가 작가의 의도와 부합하는 읽기활동이 된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 어쩌면 모든 철학책들이 다 그런 것같아요. 차라리 겉멋으로 읽을 때가 좋았습니다. 그 땐 몰라도 아는 척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아, 모르겠다라는 절망감이 더 크게 다가오니깐. ㅜㅜ 아. 이것도 읽다 말았네요. 다시 읽어야 겠어요.


그저 좋은 사람 (원제: Unaccustomed Earth 길들여지지 않는 땅)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www.telegraph.co.uk/culture/books/10304137/The-Lowland-by-Jhumpa-Lahiri-review.html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였으니, 이 시기는 고향을 떠나 바다 건너 도시로, 전 세계가 고향이 되거나 고향이 사라진 때였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이율배반적 싯구가 역사 최초 등장한 시기였으며, 전쟁으로, 혹은 폭정으로 몰락하는 도시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던 시기였다. 젊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사랑은 없고 사랑하는 나만 있었던 시대였다.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말고 사랑하냐고 좋아하냐고 묻지 말고 그저 하룻밤을 보내던 연인들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니, 바로 20세기 후반 이후의 우리 시대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익히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그녀는 미국인인가, 영국인인가, 인도인인가? 아니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건가? 깨진 도자기 파편이든지 집터의 흔적이든, 역사적 기록이 가능한 이래, 한 번도 코스모폴리탄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 사람들은, 한국 독자들은 줌파 라히리가 던지는 메시지를 알기나 할까? 


나는 이 소설집을 아주 길게, 혹은 띄엄띄엄, 이미 지쳐버린 사무실의 텅빈 점심 시간에, 하루에 꼭 두 번씩 정지했으면 하고 바라는 지하철 안에서, 외로워 마시는 술 한 잔이 목을, 위를, 온 몸을 적실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술자리에서, 나와 피부색이 다른, 아빠나 엄마 한 쪽이 동남아나 아프리카계인 소년, 혹은 소녀가 소설가가 되어 문단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은 언제쯤 올 것인가.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며 따르는 시대는 올 것인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은 참 절망적인 곳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위대한 소설이 다 그러할 것이다. 읽으면 아프지만, 다 읽고 나면 '그래, 우리 삶이, 내 삶이 이렇지', 되뇌이게 된다. 


이 단편집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이민(immigration)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빠진다면, 평범한 미국인들의 가정 이야기다. 그렇다.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건 똑같다. 줌파 라히리는 이렇게 보편성을 끄집어 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랑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헤어짐은 있으나,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이별이거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아낀다. 각자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다르다는 건 축복이다. 갈등이 있고 오해가 있고 사건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나가는 바람일 뿐, 서로 마주 잡은 손을 놓치지는 법은 없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같은 땅 위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을 그런 땅 위를 말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을 읽었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계속 노력했다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래,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이나 네 인생이나 똑같아라는 말을 하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줌파 라히리의 인터뷰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해준다. 




출처: http://blog.naver.com/lesliepak/220067661295 (번역해주신 에게해님께 감사하며)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저 | 박상미역 | 마음산책 | 2009.09.0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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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베이에서 파는 75센트하는 중고책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요..첫번째 이야기부터 예사롭지 않네요. 첫소설로 퓰리처상 받았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 아, 이베이! 이베이에서도 중고책을 파는군요(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어로 읽으면 더 좋을 것같아요. 뭐랄까 편한 영어를 사용할 것같아요. 이창래의 소설을 영어로 읽으려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저로선. ㅜㅜ;;;
      줌파 라히리의 다른 소설도 읽을 계획인데, 밀린 책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내년 여름은 되어야 할 것같아요. ㅡ_ㅡ;;




7월 5일 토요일, 난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인천 송도에서 열린 더 브릴리언트 모터 페스티벌(The Brilliant Motor Festival) -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발(KSF, Korea Speed Festival)에. 설마 무한도전 때문에? 설마? 아니면 그날 밤에 있었던 공연 때문에. 나도 일찍 간다고 갔는데, 이미 몇 천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ㅡ_ㅡ;;). 이렇게 스피드광이 많았단 말인가! 


보통의 레이싱 경기장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해 있는 것과 달리 송도 스트릿 서킷은 도심에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탁월하다. TV에서 가끔 보던 카레이싱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경기장 바로 옆에 고층 빌딩에서도 구경할 수 있고 ... 





이렇게 바로 옆에 앉아 볼 수도 있다. (송도 사는 후배가 있는데, 여길 알려나 몰라) 그리고 무엇보다 송도는 살기 좋다. (인천 송도로 회사도 옮기고 이사도 가면... ??) 


 


얼마 전 tvN에서 방영한 <갑동이>의 주 촬영 장소도 인천 송도였으니... 아마 가장 최근 만들어진 신도시인지라, 주변 경관이나 도시 시설은 국내 최고 수준일 것이다. 



이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가 현대자동차에서 오래 동안 후원하고 있는 KSF,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 행사장에는 다채로운 부대 행사로 가득했다. 특히 내 눈을 끌어당겼던 것은 두 가지. 하나가 바로 참 많은 자동차들. 






추억의 노란색 포니!  


그리고 피트워크 프로그램에서는 짜릿한 레이싱 경기가 주는 흥미로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사람들은 레이싱걸을 떠올리겠지만. .. (좋긴 하지.. ㅡ_ㅡ;; 근데 왜 이리 어두운 거야. 이번에 단렌즈를 사야지.) 








레이싱 경기가 가지는 참 재미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찌그러진 자동차. 하지만 안전하게 보호된 레이서. 




만일의 사태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119 아저씨들과 장비.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부서진 레이싱카를 수리하고 점검하는 이들. 



그리고 이런 재미도 있었다. 



저녁에 있을 K-pop 공연을 보기 위해 오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소녀팬들, 그리고 간간히 섞여 있는 그녀의 남자친구들... ㅡ_ㅡ;; 


알아보니, 별도의 레이싱 프로그램을 통해 아마추어들도 쉽게 레이싱에 대한 입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운전을 좋아하진 않는 터라,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역시 사람은 직접 보고 느껴야 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번 행사를 공식 후원한 현대자동차 블로그를 보니, '국내 공식 경기장에는 모터스포츠에 대중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경기장 별 라이센스 이론/실기 교육, 매달 스포츠 주행 운영 등으로 체계적인 교육 및 입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고 한다. 한 번 알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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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10점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오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성취의 이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탐구의 탐구이며, 설명의 설명이다. 독특하고 때때로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낯선 현대 예술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포괄적으로 설명된다. 궁극적인 도전에 의해서만 현대예술과 그 예술가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20세기의 새로운 언어학이나 분석철학이 현대를 설명하기보다는 현대가 오히려 새로운 학문들을 해명한다. 현대의 저변을 형성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고찰만이 언어학이나 기호학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현대예술은 언어학이나 기호학과 병존한다. 모두가 현대의 형이상학 위에 기초한다. 모든 것은 물결 위의 포말이다. 하상엔 굴곡진 형이상학이 있다. 

현대에 시도된 다채로운 예술적 성취들은 당혹과 분노, 경멸과 외면의 대상이기도 했다. 현대예술은 감상자들을 소외시키며 발생했다. 사람들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이익에보다는 손해와 결여와 책임에 훨씬 민감하다. 과거는 금의 시대이고 현대는 타락한 시대이다. 현대는 그러나 모든 시대가 그렇듯이 가치중립적이다. 다른 어떤 시대, 다른 어떤 생활 양식이 현대에 비해 더 많은 가치와 미덕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현대에 이르러 더 많은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요구가 증가한 만큼 증가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공평한 인식이 현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다. 혐오는 때때로 몰이해와 무지가 동기이다. 파라켈수스가 말한 바 "지식이 사랑을 부른다"

현대예술은 야유와 냉소를 동반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상적 위안을 거부한다. 깊이와 진실은 언제나 자기 부정을 전제하듯이 현대의 유의미한 성취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에서 출발한다. 전현대성에 젖은 시대착오적 센티멘탈리스트들이 현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은 그러므로 이들의 자기부정의 부정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기만족과 자기위안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다. (8쪽 - 10쪽) 



아마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경험하게 되는 바, 어렵고 난해하게 여겨지는 문장들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될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대예술을 알게 되고, 철학 전반에 대해서,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이있는 공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독서의 놀라움을 전해준다. 고작 책 한 권인데... 하지만 어떤 책 한 권은 어떤 이에게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기도 한다. 바로 이 책,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처럼. 


그리고 이 책은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실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 특히 서사문학에서의 사례들 - 리처드 브라우티건, 움베르토 에코, 존 파울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도널드 바셀미, 저지 코진스키, 마르케스 등에 이르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한국어로 씌여진 바 최고의 책이다.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 일독을 권한다. 아마 책을 펼치는 순간, 덮지 못할 것이며, 자연스럽게 두 세 번 읽게 되겠지만. 



책의 속 표지에 적힌 문구. '불안 속의 영혼들에게'. ... 어쩌면 이 책만큼 절망에 빠진 현대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만한 책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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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10점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사계절출판사



살아야 하는 이유, 강상중(지음), 송태욱(옮김), 사계절




결국 우리는 각자 자신이 꿈속에서 제조한 폭탄을 껴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껴안고 있는지 다른 사람도 모르고 나도 모르기 때문에 행복할 것이다. 

나는 내 병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럽의 전쟁도 아마 어떤 시대부터 계속된 것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우여곡절을 겪어 나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계속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 나쓰메 소세키, <<유리문 안에서>> (산문집) 중에서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이 번역되어 나온지도 몇 년이 지났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서 깨달았다. 그 사이 일본의 지진이 있었고 절망적인 원전 사태가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와 적대적일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의 전작 <<고민하는 힘>>과 함께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그는 이번에도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 특히 나쓰메 소세키에 의존하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설명은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강상중 교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를 인용하면서, '거듭나기twice born'에 기대어 고통스러운 번민과 나락으로의 절망이 새로운 앎을 열게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전작 <<고민하는 힘>>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윌리엄 제임스)는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 121쪽 


책은 짧고 단단하다. '사랑은 상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181쪽)처럼 자신을 포함한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주문한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는 19세기 말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은 틀림없이 종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장에서는 "'자연의 법칙'이 '숭배되어야 할'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과학이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 112쪽 


이는 계량적 세계의 질서처럼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적인 질문, 형이상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강상중은 신을, 종교를 부정하는 도킨스, 히친스 대신 <<신을 옹호하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의 테리 이글턴의 편에 선다. 결국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를 구하는 현대인에게 과학은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덧없이 죽을 운명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디까지나 겸허히 인간적인 것을 긍정한다."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중에서


이번 겨울, 이 책은 흔들리는 현대인을 위한 작은 조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로 이어지는 작은 독서 여행의 시작이 되기를! 


강상중 교수 (출처: 강상중 교수 홈페이지) 



<<고민하는 힘>>에 대한 서평

2011/12/26 - [책들의 우주/문학] - 고민하는 힘, 강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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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Quiet - 8점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콰이어트Quiet, 수전 케인(지음), 김우열(옮김), RHK 



책을 읽은 지 벌써 2달이 지났고, 내 바쁜 일상은 이 책의 리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몇 장에 걸쳐 책의 내용을 메모해놓았으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면 이 책은 세계적인 명성에 비하면 다소 식상하고 너무 미국적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외향성이 강요되고 내향성은 회피된다. 미국의 교육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이는 고쳐야만 한다. 그리고 책은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들과 저서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이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은 그만큼 외향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외향성이 다소 강요되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향성이 무시당하진 않는다. 적어도 내 경험 상에선. 


하지만 앞으로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육의 핵심은 지도자들이 자신감 있게 행동해야 하고 불완전한 정보를 토대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82쪽)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듯이 한국 사회도 외향성으로 물결치는 사회는 아닐까? 불완전한 정보를 토대로 큰 목소리로 상대방을 몰아 부치면서 결정 내리는 사람들이 득세하게 되는 건 아닐까? 



영향력 있는 문화역사가 워런 서스먼Warren Susman에 따르면 미국은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전환했고, 결코 회복하지 못할 개인적 불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인격의 문화에서 이상적인 자아는 진지하고 자제력 있고 명예로운 사람이었다. 중요한 것은 대중에게 어떤 인상을 주느냐가 아니라 홀로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 하지만 ‘성격의 문화’를 수용한 뒤로, 미국인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46쪽)



‘성격의 문화’에 대해선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이학사)에서 접해 본 바 있었다. 지극히 미국적인 단어인데, 흥미롭게도 전 세계적인 추세가 된 듯 싶다. 외향성이란 결국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이며,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나를 변화시키려는 (불행한) 시도들의 집합일까? 


최근 갑자기 늘어난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이제 외향성의 가면 속에 숨는 것이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에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알게 되면서, 한국 사회도 점점 불행해질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건 내 삐딱한 시선 탓이라고 여기고 싶다. 


이 책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한국 사회가 마주하게 될 흥미로운 사태에 대한 맛보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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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책 리뷰를 최근 며칠사이에 두번을 보네요. 어서 주문해서 읽어봐야겠습니다.

    한국은 제 생각에는 이미 성격의 문화에 들어섰다 생각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급증한 것은 팽배해있던 문화에 대한 반영이라 여겨지구요. 인구대비 1위라는 성형수술도 성격의 문화의 한 예일테구요.

    • 무척 시사적인 책이었습니다. ~ 재미있긴 했지만, 명성에 비해 과대 포장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현실주의자의 심리학 산책 - 10점
요헨 마이 외 지음, 오공훈 옮김/지식갤러리




현실주의자의 심리학 산책
요헨 마이, 다니엘 레티히(지음), 오공훈(옮김), 지식갤러리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사람들은 행동에는 논리적인 배경이나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다고 여기게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불가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은 그러한 무수한 (심리학적인) 연구들과 그 결과에 대한, 일종의 요약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모차르트 효과, 깨진 유리창 이론, 마시멜로 효과, 머피의 법칙 등을 포함해, 전공자가 아니라면 생소하지만, 아하~ 하고 공감하게 되는 123가지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일부를 인용해보기로 하자. 



1960년대말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과 레노어 제이콥슨Lenore Jacobson은 미국 학교를 대상으로 몇 가지 실험을 실시했다. 그들은 상상이든지, 보다 호의적으로 표현하면 기대가 학습 능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밝혀내려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몇몇 교사에게 새 학기가 되면 학교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학생들이 포함된 학급을 맡아달라고 통보했다. 학기가 시작되자 실제로 다른 학생들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아이들이 학급에 편성되었다. 그들은 성적은 물론 지능지수도 학교 평균보다 20점이나 더 높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있었다. 사실 이들 두 학자는 거짓말을 했다. 학급을 구성한 우등생들은 사실 최상위권 영재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냥 임의로 뽑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 본인도 엘리트에 속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학습 능력과 성적 곡선이 동시에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같은 실험을 학계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 또는 ‘로젠탈 효과’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효과로부터 2가지 사안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성공이란 훌륭한 수행 능력의 결과다. 아울러 성공이란 대부분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는 데에서 나오는 결과이기도 하다. 
- 444쪽 ~ 445쪽. 


저자들은 실제 실험 과정과 그 결과를 요약해 인용하면서, 그 내용을 3-4페이지로 재구성하여 흥미진진하게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기대 이상으로) 상세하면서도 동시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그 결과들이 독자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목차도 아래와 같이 나눈다. 


1장 나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말려 들어가고 있는가
2장 마음은 내게 어떤 거짓말을 하는가
3장 그대와 나 사이의 거짓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4장 소비문화는 나를 어떻게 현혹하는가
5장 내 머릿속 회로는 어떻게 굴러가고 있을까
6장 내 결정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7장 나의 학습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8장 나의 직장생활은 과연 합리적일까
9장 나의 인간관계에서 문제점은 무엇일까
10장 나는 과연 얼마큼 성장할 수 있을까
11장 정보화시대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는 수십 권에 이를 심리학 책들을 이 책 한 권으로 끝낼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덧붙여 이 책에 대한 정성스러운 독서는 우리 일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선행을 베풀면 삶이 더욱 숭고하고 고결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좋은 인간성을 자발적으로 갖추어나가는 현상은 마치 진화를 방불케 하는 생화학적 과정을 거친다. 어쨌든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일주일에 2시간씩 헌신적인 자세로 자원봉사활동에 몰두하면 장기적으로 건강 개선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며 정신질환 발병 위험까지 낮아진다. 
- 71쪽 



책은 두껍고 독서 시간은 꽤 길 것이다. 아마 많은 밑줄과 메모를 하면서 읽게 될 터인데, 그만큼 알찬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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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은 냉정하게 분석되며, 민감한 영혼은 자리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희망으로 대변되는 미래를 이야기하기엔 이 책은 철저하게 자기 분석적이다. 


나는 20대 후반 이 책을 두 세번 읽었다. 그 이후 나는 학문의 세계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고 사랑과 술에 대한 개인적 역사를 만들며 사십대가 되었다. 그 사이 루이 알튀세르의 자리엔 다른 학자들이 자리잡았고, 알튀세르는 한참 유행에 뒤진 학자가 되었지만, ... 그의 자서전은 현대적 자서전- 지극히 비극적이고 철저하게 외로웠던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 속에서 - 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독서란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 읽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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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데이비드 호크니는 조수를 써서 작업을 하는 데미안 허스트를 비난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며칠 뒤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런 일은 없었다며, 부정하는 기사가 다시 나오긴 했지만, 작업을 예술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는 마치 영화 제작 현장의 감독 역할을 하고 많은 기술자들이 예술가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는 설치 미술이 주류가 된 현대 미술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작품의 스케일이나 제작 방식이 달라지다 보니, 예술가 혼자 작업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며칠 전 그의 생일이었고 영국의 사치 갤러리 페이스북 페이지에 아래의 사진이 올라왔다. 



 


 그는 숲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이런 식으로 그린 작품은 아래 작품이다. 




몇 해 전 파리 피악(Fiac)에서 본 최고의 작품이었다. 더 이상 근사한 풍경화가 그려지지 않는 시대에, 데이비드 호크니는 근사하고 현대적이며 새로운 미학으로 무장한 풍경화를 우리에게 선보였으며, 나는 이 작은 작품이 가진 에너지 앞에 어쩔 줄 몰랐다. 


우리에게 데이비드 호크니 같은 작가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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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세 권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한글로 된 책도 밀려 쌓여있는데, 영어로 된 책을 세 권이나 주문했으니. 당분간 책을 사지 않고 쌓인 책들만 읽고 밀린 리뷰를 올려야 겠다. 


오늘 온 세 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루이 뒤프레(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Andy Warhol

도널드 바셀미(Donald Barthelme), Sixty Stories 


집에 와, 루이 뒤프레의 책을 잠시 읽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 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책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었던 학자였다. '모더니티의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이 책은 모더니티를 지성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책 뒤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Did modernity begin with the Renaissance and end with post-modernity? In this book a distinguished scholar challenges both these assumptions, discussing the roots, development, and impact of modern thought, tracing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modernity to the late fourteenth century, and affirming that modernity is still an influential force in contemporary culture. 



14세기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더니티의 흐름(passage)를 고찰하면서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모더니티를 되새기고 있다. 무척 흥미롭다. 루이 뒤프레 스스로 서문에서 다소 거칠게 씌여졌다고 인정할 정도로 기존의 모더니티 연구서와는 다른 면모를 가진 책이다. 그런데 언제 다 읽어?


아서 C. 단토의 'Andy Warhol'은 열받아 구입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선 몇 주 전에 한 번 포스팅한 적이 있고, 또 다시 포스팅할 예정이다. (관련 포스팅: 2012/04/01 - [책들의 우주/예술] - 아서 단토의 앤디 워홀?? ) 이 책은 이미 번역되어 있는데, 그 번역서의 실체가 너무 황당해서 실제 단토의 책을 확인하고자 책을 구입한 것이다. 순수 미술책이 아무리 안 팔린다고, 미술 전문가가 굳이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는 책을 낼 수 있는 그 대담한 용기를 다시 확인하고자 실제 책을 구입했다. 


도널드 바셀미를 알게 된 것은 이미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 사이 번역된 것은 몇 편의 단편 소설 뿐이었고, 원서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어려웠던 터라, 번역된 몇 편의 단편에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바셀미를 다시 읽기로 했다. 나도 좀 자유로운 처지라면, 하루키 처럼 소설을 번역하면서 내 소설 구상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럴 형편은 안 되고, 열심히 읽기라도 할 생각이다. 소설 앞에 David Gates의 소개가 있는데, 이는 한 번 번역해서 포스팅을 해봐야겠다. 


벌써 11시 40분이다.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주일이,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쳐간다. 어찌된 영문인지, 여유 부릴 틈도 없다. 주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술 한 잔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말이다. 봄이 가기 전엔 한 번 만날 순 있겠지, ... 그렇게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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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건축 - 상 - 10점
나카무라 요시후미 지음, 정영희 옮김/다빈치

 

 

 

 정통 현대건축의 금욕적인 표현에 건축가들이 이제 더는 주눅들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수한 것'보다는 이것저것 뒤섞인 혼성품이, '정확하고 깔끔한' 것보다는 적절히 타협한 것이, '쉽고 단순한' 것보다는 한 번 비튼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 것보다는 애매한 것이, (... ...)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보다는 관습적인 평범한 것이, 배제하는 것보다는 수용하는 것이, 혁신적이면서도 남겨진 흔적을 지닌 것이, 직접적이고 명쾌한 것보다는 모순에 가득 차 있으며 불분명한 것이 좋다. 나는 명확한 통일감보다는 너저분해도 생동감 있는 것을 중시한다. 나는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이중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나는 의미가 명료한 것보다는 의미가 풍부한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기능만큼이나 내부에 감춰진 기능이 좋다. 그리고 둘 중 어느 하나를 고르기보다는 둘 모두를, 즉 흑이냐 백이냐 선택하기보다는 흑과 백 모두, 때로는 회색을 택한다.

- 로버트 벤투리, "건축의 다양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1966) 중에서 (<<내 마음의 건축>>, 상권 67쪽에서 재인용)

 

 

 

출처: http://www.paperny.com/venturi.html

 

 

1월에 읽은 책을 이제서야 블로그에 옮긴다. 하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 상하권으로 나누어진 나카무라 요시후미의 '내 마음의 건축'은 잔잔하고 서정적이면서도 현대 건축이 우리에게, 혹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느 새 우리 주변에는 딱딱하고 건조하기만 한 건물들로 빼곡하게 둘러쳐져 있다. 획일화된 아파트들, 사무용 빌딩들, 도시는 딱딱해져가고 사람들은 대화보다 침묵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다. 풍경의 일부로서의 건축이 아니라 풍경과 건축은 별도의 영역을 가지며, 즉물적인 풍경마저도 도시 안에선 무의미하게 방치되었다.

 

이런 세태에, 요시후미의 이 책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우리가 살아가는 곳의, 우리가 생활하는 - 잠 자고 먹고 마시며, 책을 읽기도 하고 잠시 앉아서 쉬기도 하는 공간으로서의 건축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해준다. 

 

특히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의 '어머니의 집Mother's House'는 현대 건축, 혹은 기하학적인 공간이 어떻게 우리 일상과 만나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요시후미는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을 소개하며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공간에 대해 사색하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향수'에 등장한 폐허가 된 성당 - 산 갈가노 성당 Abbazia di San Galgano 을 찾아가기도 하고, 안동 하회 마을에서 지내면서, 정작 우리는 잊고 지내던 옛 조선 건축에 대해 칭찬하기도 한다.

 

책은 도판을 위해 크고 양장으로 제작되었으나, 글은 짧고 여유로우며 진솔하다. 도판은 풍부해서 저자가 소개하는 물의 다양한 면면을 확인할 수 있어 좋다. 기회가 닿는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하권에 대한 리뷰

2012/03/11 - [책들의 우주/예술] - 내 마음의 건축 - 하, 나카무라 요시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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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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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부두 Quai Quest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지음), 유효숙(옮김), 연극과 인간


서쪽 부두 - 10점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지음, 유효숙 옮김/연극과인간




 

이 희곡은 공연을 위해서도 씌여졌지만 동시에 읽히기 위해서도 씌여졌다.
- 163쪽



 

이 연극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감정적으로 연기하는 것이며, 이는 좋지 않은 선택이다. 이 연극의 어떤 장면도 사랑의 장면처럼 해석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장면에서도 사랑의 장면이라는 가정 하에 쓰여진 장면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장면들은 거래, 교환, 암거래를 나타내는 장면들이며, 이런 장면들로 공연되어야 한다. 거래를 할 때 부드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169쪽


 
 
1989년 에이즈로, 40대 초반의 나이로 사망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마리 콜테스(Bernard-Marie Koltes)의 희곡이다. 사무엘 베케트 이후 최대의 불어권 희곡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콜테스는, 대부분의 낭만적 천재 작가들처럼 살아있을 때보다 죽고 난 후 생전에 누려보지 못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할까. 하지만 작품은 어둡고 절망적이며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린 벽으로 가로 막혔어요, 선생님. 더 이상 갈 수 없어요. 이제 뭘 해야 할 지 말씀해 보세요. 우리가 어느 구멍으로 떨어지기를 원하시는 말씀해 보시라구요.' - 모니카, 11쪽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었고 알 수 없는 무대를 상상했고 무겁게 단어들을 입에 올리며 어색하고 낯선 몸짓의 배우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무대 였을까.

이 희곡은 1985년도 작품으로 국내에는 2004년에 번역 출판되었다. 작품은 뉴욕의 어느 버려진 부두가를 배경으로 가난한 이민자 가족, 세실, 샤를르, 클레르 등의 인물들과 종교 단체의 자금을 관리하다 돈을 다 탕진하고 자살을 위해 온 콕과 그를 따라온 모니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극을 목적으로 씌어진 이 작품은 동시에 읽히기 위한 작품이기도 하며, 막과 장의 구분이 없으며, 몇몇 배우들에겐 곤혹스러울 정도로 대사가 장황하게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부두임으로 종종 배 소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가 들릴 것이고 멀리 뉴욕의 번잡스러운 불빛도 비칠 것이다. 그래서 무대는 극단적 대비와 황폐한 분위기를 자아낼 것이고 길게 이어지는 대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지루한 절망감을 안겨줄 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은 그 곳에서 저지른 범죄의 냄새로 오욕과 침묵과 너희들이 숨기는 그 모든 것들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거야. 아버지도 없고, 엄마도 없고, 근본도 없고, 언어도 없고, 이름도, 종교도, 비자도 없는 너희들이 이 곳에 온 후 모두에게 불행이 닥쳤어. 너희들 때문에 우리도 불행해졌다구. 불행이 슬그머니 계단을 올라와 우리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서 빛과 태양이 필요할 때, 비참, 돈 한 푼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지.' - 세실,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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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과격한 방식의 프랑스 소설가. 20세기 후반 문학 비평의 일대 혁신을 몰고 온 <<텔켈>>지를 주도했던 인물. <<여자들>>이라는 소설로 여자를 긴 시간에 걸쳐 까발리기도 한 그는 정신분석학자이자 기호학자이며 <<무사들>>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은 국내에 여러 권 소개되었으나, 워낙 대중적이지 않고 식견있는 문학 애호가들에게조차 인기를 끌지 못한 채 곧바로 사장되었다. 그의 데뷔작은 80년대 초반에 나온 범한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실려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제 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내가 1997년에 그러했듯이 이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헌책방에서 쥐를 잡듯이 뒤져야 한다. 그냥 쥐가 아닌 황금으로 도배했다는 소문의 쥐를.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또는 운좋게 구한 젊은 솔레르스의 문장은 우울하고 기운 빠진 20대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입안 가득 거친 독기를 품게 되며 세상에 대해 증오 선 칼날을 갈 수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나의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끝내 '이 세상 드디어 나 혼자다'라는 극도의 희열과 끝없는 두려움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것을 바란다는 그 청춘기의 병(病), 그 병이 솔직이 말해서 나의 내부에서는 거의 미친 듯한 비율로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을 피로하게 하고, 벌써 적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그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일찌기 없었던 나는 자신이 저주받고 있다고 믿었으며, 어쩌면 시인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불행이 나를 계속 엄습했다 ? 그것은 더우기 눈에 보이지 않아 그만큼 쓰라린 시련이었다. 나는 사랑과 침착성을 잃었다.”
- <<도전>>에서



르 끌레지오Le Cle’zio. 문학애호가인 여성들 틈에서 보기 드문 키와 외모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소설가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 실제로도 무명에 가까운 그가 테오프라스트 르노도상을 받고 일간지에 사진이 실렸을 때, 매혹적인 금발과 깊은 눈길에서 누가 반하지 않았겠는가. 개인적으로 지금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르 끌레지오의 후기작들은 별로 재미없다. 꼭 왕가위의 초기 영화가 거칠긴 하지만 청춘의 끝없는 터널 같은 절망과 사랑을 보여주기에 적당했듯이 르 끌레지오의 초기 작품들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초기작들도 구할 수 없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홍수>>는 아주 오래 전에 동문선에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구할 수 없고 최근 새로 번역되어 나왔으나, 아직 나머지 한 권은 미처 번역을 끝내지 못한 듯 보인다. <<침묵>>은 세계사에서 고대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출판되어 나왔으나, 지금은 도서관에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김화영 교수의 번역도 좋지만, 고(故) 김 현의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상하듯이 이 번역도 구할 수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세계문학전집에서 복사한 것이 있었는데,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실패, 몇 번의 도망, 몇 번의 사고 끝에 잃어버렸다. 그리고 겨우겨우 계간 <<작가세계>>에 실린 김화영 교수의 번역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 여기저기 먼지 묻은 <<작가세계>>는 찾아내지 못한다.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채 서재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장소로 달아나버린 르 끌레지오. '내가 죽으면,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저 사물들은 더 이상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난 후, 저 사물들을 내가 증오하기 시작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르 끌레지오는 갑자기 남미로 날아가 이국적 글쓰기를 감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증오하지 않기 위해.

르 끌레지오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우기고 있을 때, 혹은 날 이해해주길 바라는 오직 한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갈 때, 그래서 오직 한 가지 길,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내가 죽으면 되는 어떤 길만 있을 때, 그 속에 웅크려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럴 때 읽으면 펑펑 울고 마는 단편이다. 1997년과 98년의 내 어두운 이십대 후반의 겨울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소설.


1984년에 나온 범한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


필립 솔레르스와 르 끌레지오가 같이 묶여 있다. 이런 신기하고 매혹적인 조합이 또 어디에 있을까.




<침묵>을 원어로 읽고 싶은 마음에 산 <<물질적 황홀>>. 교보문고 외서부에 주문해 한 달만에 구했을 때의 그 기쁨이란.


선명하게 보이는 글자. 침묵.


침묵의 첫 부분.



지금을 구할 수 조차 없는 故 김휘영 교수의 번역본. 초기작들 중에서 문학성으로만 따지자면 최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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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된 카오스 - 6점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3년 4월 21일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강연 중에서), 279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필자가 함)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라는 부제가 붙은, 노르베르트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는 현대 사회 위로 물결치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환경 속에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문화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자의 기대(1)대로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현대 문명의 여러 변화를 ‘카오스’로 받아들이며 이 카오스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휴머니즘적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으로부터 작별하고 뉴미디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표현대로 1923년의 카오스와 1990년대 후반의 카오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볼츠는 ‘정신은 단지 관계들-상호작용들-상황들 그리고 콘텍스트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책들 중의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잡다하게 나열된 사례들과 인용문들은 어떤 구심점을 갖고 기술되었다기 보다는 수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볼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문명은 계속 카오스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도 코스모스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가 급변하여 갑자기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의 전환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또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속에 볼츠의 책처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자 한 저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되기에 볼츠의 이 책은 저자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오해될 여러 인용과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도리어 이런 데이터들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을 보다 뚜렷하게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츠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재 우리 일상의 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이나 세계관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삶은 총체적 예술이 된다’(35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이란 뉴미디어의 예술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1) 이 책은 비전문적인 일반 독자를 겨냥해 복잡한 문화 현상들을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들어 마치 백과사전처럼 서술하고 있어 사전 이해가 충분치 못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역자 머리말 중에서,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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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다. 겨우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드립용으로 잘게 부서진 브라질 산토스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린다. 물 끓는 소리, 위로 향하는 수증기, 떨리는 손, 돌보는 이 없는 듯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엉켜 어느 일요일 아침을 구성하였다.

요즘 힘겹게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의 박탈, 삶 그 자체보다 더 영속적인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 사적 생활의 이러한 박탈성은 타인의 부재에 기인한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한 사적 인간은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마치 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된다. 사적인 인간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타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중요성도 없으며,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11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논의는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들 중 하나다. 그리고 여느 문명의 말기마다 그랬듯이 사적 영역의 강화가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사적 인간의 출현은 그 동안 이루어진 공적 영역의 강화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무너지는 공적 영역 앞에서 현대 학자들의 담론은 무력하기만 하게 보인다.

세상을 길게 보면, 어느 것이 문제인지 알게 되지만, 그 해결책은 터무니 없게 거대하거나, 실현불가능하고, 또는 우리들에게 참혹스런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탁상공론으로 끝나거나 어느 책 말미에 잠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몇 세기 후에 재발견되어 빛나는 유행이 될 것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무겁고 딱딱한 커피 향 속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오가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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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10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지음), 이창신(옮김), 김영사


이 기묘하고 낯선 책은 무엇인가? 21세기형 출판 마케팅의 승리인가? 아니면 정의(justice)에 굶주린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우연한 유행인가?

이 황당한 베스트셀러는 너무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일반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머리 아파할 벤담, 칸트, 롤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우스운 것은 그것에 대한 불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 한국에 이토록 많은 고급 독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아니면 나는 그동안 이렇게 많았던 고급 독자들을 무시해왔던 것인가!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은 실제의 다양한 사례(지극히 미국적인)들을 끄집어 내어 다양한 관점에서, 심지어 서로 반대되는 시각에서 접근하여, 누구나 봐도 거의 옳은 논리로 서로의 주장을 반복하는 경우를 이야기한다. 실은 이 책이 호소력을 가지는 부분은 바로 여기다. 모든 논리가 절대적으로 틀리지 않듯이, 절대적으로 옳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

하지만 이 부분 때문에 책은 다소 맥이 빠지고 자주 공허해진다. 마치 죄렌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말하며 '실존적 결단'을 요청했듯이, 마이클 샌델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화두를 던져놓고 뒤로 빠져버리고 '결정 내리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책의 끄트머리에선 흐릿하게 결론을 이야기하지만, 포스트 모던 시대의 결론이란 너무나도 모호해서 안개라는 실체마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다 읽고 난 다음, 일반 독자가 가지는 감동이란,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될 것이고 나같은 이에겐 이래나 저래나 결론 나지 않는 현대의 (정치)이론들에 대한 재확인이 되었다는 것. 결국엔 더 시니컬해지고 더 의심많아지는 일만 남은 것일까.

생각하지 않는 시대에, 마이클 샌델은 '다양한 관점에서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가며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고 강조하지만,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도리어 아무런 생각없이 고르는 독자들의 위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고 씁쓸해진다. 

하지만 아마 이 책을 읽고 벤담, 칸트, 롤즈,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소수의 독자들이 있을 것이고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뜻 깊은 독서를 마련해주었을 것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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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요즘 베스트셀러 길래 저도 눈여겨 보던 책입니다만, 별점은 다섯개이신데 리뷰내용은 그리 탐탁치 않으셨나 봅니다. 살짝 헷갈리네요. 인용하신 철학자들 덕에 읽을지 말지 고민이 되네요. ^^

    • 좋은 책입니다. ^^.. 그래서 별 5개죠. 다만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책인가에 대해선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네요. ㅎ

  • 지난주 2010.10.19 16:38 신고

    무슨 교육을 갔다가 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산 사람 중에 실제로 읽은 사람은 1/10 정도 라네요.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의에 관심은 있어도 책을 읽을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 저 '대단한' 베스트셀러의 이름 앞에 아직 안 읽어본 저는 뭔가 '지적 패배감' 또는 '부끄러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거나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닌데도 말이죠. 음... 이게 바로 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만....역시 읽어보고 나서 평가해야겠죠? ^^

    • 책은 제법 재미있고 좋아요. 놀라운 것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는 소재와 내용인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거죠. 이런 책들이 자주 나와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 ^^

  • 이 책이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저도 궁금했었습니다. 사실 저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나, 답이 아니면 저자의 견해라도 듣고 싶었는데 제가 부족한 탓인지 책에서 발견할 순 없더라구요.

    • 저도 그래서 '공동체주의'에 대한 책을 읽을 생각이예요. 마이클 샌델을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의 이론을 해설한 책이 있더라고요~. 여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참 흥미로우면서 맥 빠지는 책이었습니다.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 10점
조중걸 지음/베아르피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지음), 베아르피, 2009.


'마술과 의미를 동시에 잃어'버린 세계,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 '우리는 거울만을 보도록 운명 지어져 있고, 우리의 운명은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오랜 역사는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에서 머물러 있고, 그는 거짓된 말보다 진실된 침묵을 택한다. 이 얼마나 아찔한 귀결인가. 

책은 짧고 문장은 단순하다. '철학은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양 끝으로는 하는 스펙트럼'이고, 우리 '인간은 관념론자가 되거나 유물론자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아니 이는 배운 사람들(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관념론자인지, 유물론자인지 잘 알지 못한다. 실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대학 시절 교양 필수 과목으로 듣는 '철학의 이해'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플라톤의 '이데아'. 하지만 이를 가르치는 교수도, 이를 듣는 학생도, 현대적 삶 속에서 '이데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자신의 인생에 있어 과연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삶의 문제에서 시작된 철학은 삶과 무관한 언어의 나열로 배열되기 시작했으며, 삶과 닿지 못하는 어떤 체계로 이해되고 있었다.


어떤 시대의 철학은 동시대의 세계관의 형이상학적 표현일 뿐이다. 하나의 철학은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철학은 그러므로 우리 삶 위에 착륙한다. 우리 삶의 해명자로서의 철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9쪽)


하지만 그 누가 우리 삶을 해명하기 위해 철학을 이야기하는가.

의심 많은 현대인들은 '믿지 못해'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믿을 건 아무 것도 없어'라고 하든, '역시 믿을 건 돈 밖에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사랑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길 요구하는 현대의 연인들이 왜 태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고대와 중세의 철학이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탐구'에서 근세와 현대철학이 다분히 '우리의 인식 능력과 그 한계에 대한 탐구'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12세기의 일군의 철학자였듯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심병은 실은 데이비드 흄을 위시한 영국 경험론 철학자들과 그 후예들과 동일한 지평에 있음에 관심 기울이는 이는 몇 명쯤 될까.

아프가니스탄이나 이슬람의 여러 나라로 자신들의 신도를 보내는 교회 목사들에게 윌리엄 오캄과 조지 버클리를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편개념을 부정하고 오직 감각인식으로만 들어는 개별자만 긍정함으로, 신을 인간의 세계와 떨어뜨리면서, 신을 구원하고 자신들도 구원받길 원하는 이들의 태도를 그 목사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동시에 들뢰즈와 지젝에 흥분하는 이들 앞에서 이데아를 향해 서 있는 플라톤이 후세 (철)학자들에게 끝없는 영감과 반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흄의 철학 앞에서 우리의 세계는 그 어떤 확실하고 명증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얼마나 큰 절망을 가지고 오는지,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그 철학 앞에 서서 우리 세계의 통합을 시도할 때의 모습이 얼마나 눈물 겨운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까.

파산과 통합, 그리도 곧 이은 해체은 마치 패턴처럼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작고 사소한 삶을 이룬다. 감각적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보편개념에 대해선 침묵하고, 말해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aid)과 보여져야만 되는 것(What must be shown)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말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관념적 독단인 '플라톤'에서 시작해 비트겐슈타인에서 끝나는 이 책의 여정은 우리에게 끝없는 절망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세계를 다시 한 번 통합을 시도했을 때, 그 시도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아찔한 현대이지만, 그것이 철학 역사상 가장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곧게 서 있기 위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계는 그대로 있고 우리는 서 있기 위해 세계를 요청하는 것이다. 세계는 예술을 닮고 언어를 닮는다.

책은 짧고 문장은 단순하지만, 이 책과 함께하는 여러 번의 반복된 독서는, 아찔하지만 그런 대로 견딜만한 현대적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줄 것이다. 교만하지 않으면서 (조금 고통스러울 지 몰라도) 진실한 어떤 삶의 태도를 보여줄 것이다. 아마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그것조차도 원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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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준세기 2009.12.24 13:29 신고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이라고 하시니.ㅎㅎㅎ
    조중걸 선생님 강의를 들을까 하는데....고민이군요.

    • 강의 추천합니다. ^^ ㅎㅎ 워낙 리플이 안 달리는 블로그라서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을 한 번 달아보았습니다. ㅋㅋ 그러나 여전히 리플이 띄엄띄엄 생기는 블로그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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