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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어빙 펜(Irving Penn)의 사진을 자주 보았지만(그만큼 유명한 탓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형적이라고 여기게 된 것은 어빙 펜 이후의 많은 패션 사진 작가나 사진기자들이 어빙 펜의의 사진을 따라하였기 때문임을. 최봉림의 글을 읽으면서 어빙 펜과 함께, 어빙 펜이 찍은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새롭게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아마 관심에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해서. 회화에 잭슨 폴록이 있다면 조각에는 데이비드 스미스가 있다고 해야 하나. 


 
Portrait of Smith by an unknown photographer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는 피카소, 홀리오 곤잘레스(Julio Gonzalez)에 뒤이어 직접 금속 조각(direct-metal sculpture), 즉 금속을 직접 절단, 용접하여 형상을 제작하는 조각에 30년대말부터 몰두하여, 현대 조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예술가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미국에서 최초로 금속으로 공간을 소묘하는 예술을 도입했고, 최초로 용접기와 철, 합금속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피카소, 곤잘레스에게서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일종의 콜라주 조각, 즉 기계 부품을 있는 그대로 취하거나 혹은 새롭게 배치하는 조각을 최초로 시도했다. (... ...) 우리가 찬탄하는 것은 그가 이룩한 작업 방식의 혁신이 아니라, 스미스 예술의 개성과 독창성이다." (205쪽) 


Dan Budnik, David Smith Welding “Primo Piano II” in His Bolton Landing Workshop, 1962, (c)Dan Budnik



"무수한 담론으로도 채울 수 없는" 스미스의 전체성에서, 초상이 '선택하고,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도 쇠와 불을 다루는 장인으로서의 스미스다. 그의 허름한 복장, 험한 작업으로 망가진 엄지손톱, 담배파이프를 움켜진, 불에 단련된 손, 초점을 잃은 시선, 육감적인 혹은 야수적인 입술과 코 등 화면의 어떠한 요소도 지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담고 있지 않다. 지성과 창조적 상상력의 조각가라기보다는 오히려 금속 용접에 생계를 기댄 단순노동자의 외모다. 어빙 펜은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를 쇠를 두드리고, 자르고, 용접하는 대장장이로 '조직한다'(205쪽) 



David Smith, Cubi I, 1963, Detroit Institute of Arts, Founders Society Purchase, Special Purchase Fund, (c) The Estate of David Smith/VAGA, New York, photo (c) Detroit Art Institute of Arts/licensed by The Bridgeman Art Library



"예술은 자신의 물리학, 광물학을 건설한다. 예술은 손을 사물의 뱃속에 집어 넣어 사물에 자기 마음에 드는 형상을 준다. 예술은 우선은 장인이며 연금술사다. 예술은 육중하고, 불타는 것과 겨룬 나머지, 시커멓고 찢어진 손바닥을 갖는다. 이 거센 손의 격렬함과 정신의 술수 덕분에 인간이 있다." 

- 앙리 포시옹 



David Smith - Cubi XXIII, 1964  Image via huma3.com



"얼굴은 살아있는 형태로 개인의 미세한, 그러나 절대적 차이를 묘하게 번역한다. (...) 얼굴은 인간의 실존이 의미를 갖는 원초적 장소다. 얼굴을 통해 각자는 자신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명명되며, 남성 혹은 여성임을 표한다.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얼굴의 미세한 차이는 각자에게 자기 존중의 감정,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는 감정을 각 행위자에게 추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작용이다. 단 하나만 존재하는 각 인간의 얼굴은 각자의 유일무이한 인생 역정에 부응한다."

- David Le Breton, Des Visages, Paris, Me'tailie', 1992 


어빙 펜의 데이비드 스미스는 예술가라기 보다는 용접공이 어울려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마천루의 미국에서, 용접기와 철로 작품을 만든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에게 작품의 도구와 소재는 공장에서 사용되던 것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형적인 미국적 모더니티를 창조해낸다. '정말 미국적이다'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싶어질 정도로.  아래는 어빙 펜의 데이비드 스미스 사진들이다. 


데이비드 스미스에 대해서 길게 적긴 했지만, 실은 어빙 펜의 사진에 더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위의 사진들과 아래 사진들을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실은 데이비드 스미스 사진이 잘 검색되지 않아, 비교할 만한 사진들이 많진 않지만. 어빙 펜의 사진 스타일은 이제 전형적인 어떤 것이 되었지만, 어빙 펜이 바라보고 해석하는 대상으로서의 인물(혹은 얼굴)은 아직도 그 생생함을 잃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David Smith, New York, 1964 Gelatin silver print. Photo Irving Penn.


Irving Penn (American, 1917 - 2009)
David Smith (B), Lake George, Bolton Landing, New York, October 1964, printed June 2002
Copyright The Irving Penn Foundation



* 위 글의 인용문들은 모두 아래의 글에서 인용됨. 

최봉림, <사진 초상에 있어서 은유와 환유>, <<한국 사진이론의 지형>>(홍디자인출판부, 200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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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퀴드 러브 Liquid Love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권태우, 조형준(옮김), 새물결 




예전같지 않다(그런데 이 문장은 식상하면서도 낯설다. 여기서 '예전'이란 언제를 뜻하는 것인가, 정작 나 자신도 그 때를 지정할 수 없는). 나도, 이 세계도. 


세상이 바우만이 바라보는 바대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변한 세상을 정확하게 바우만은 읽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토록 절망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리라곤 생각치 않았다. 적당하게 우울할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우리 시대에 아이는 무엇보다 정서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부모가 되는 기쁨은 자기 희생의 슬픔 그리고 예견할 수 없는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과의 일괄 거래 속에서 온다.  - 113쪽 



그는 모든 것을 소비 사회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하고 재배열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그렇게 해석하고 이제 관계가 아닌, 언제나 연결/단절을 선택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에 사람들이 놓인다고 진단한다. 더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그것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소비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Louise Franc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외로운 사람들에게 디스코텍이나 싱글 바는 아득한 추억"이라고 그녀는 결론 짓는다. 그들은 그러한 곳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 필요한 친교술을 충분히 배우지 않았다(그렇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않는다).  - 161쪽 


사람들, 아니 우리들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유대를 맺었던 예전 관계가 무너지고 파편화되었는가를 담담하게 말한다. 마치 마트에서 소비 생활을 하듯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맺고 성도 사랑도 그렇게 소비된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적 친밀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가상적 인접성의 테두리 안에서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방으로 들어가 혼자 지낸다.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 


소비 생활은 가벼움과 속도를 좋아한다. 또한 그것들이 조장하고 촉진키켜 줄 새로움과 다양성을, 소비하는 인간의 삶에서 성공의 척도는 구매량이 아니라 구매 빈도이다. - 131쪽 


소비사회와 도시는 함께 성장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즐거운 소비 생활로 위로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공동체(커뮤니티)는 가상의 의미로, 상상된 채로 머물고, 어쩌면 현대인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현대국가는 '무국적자들 stateless persons', 불법체류자들 sans papiers 그리고 살 가치가 없는 삶unwert Laben이라는 이념과 동시에 등장했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homo sacre' 즉,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한계 밖으로 내던져진 인간은 누구든 면제시키고 배제할 수 있으며, 어떤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의미도 없기 때문에 목숨을 빼앗아온 어떤 벌도 받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주권자의 권리를 궁극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자들이다. 바로 이들이 후대에 환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8쪽 


현대 소비 사회의 사랑, 성, 가족, 사회와 도시를 절망적으로 진단하고 있지만, 그 지점에서 딱 멈춘다.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뿐, 그저 절망할 뿐이다. 책 후반 칸트를 언급하지만, 칸트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가 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터뷰 기사를 여러 번 읽었으나, 그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초반 잘 읽히지 않았으나, 중반이 지나자 술술 읽혔다. 대체로 어딘가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현대 사회를 진단하는 어조가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리처드 세넷의 초기 저작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반부에서 칸트를 인용하는 건, 다소 의외였다. 하버마스에 대해선 이상주의적이라 여기는 듯하다.


책을 읽고 난 다음 바우만의 주저인 <<액체근대>>를 구하긴 했으나, 글쎄다. 도리어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와 세넷의 <<공적 인간의 몰락>>을 다시 읽을까 생각했다. '러브'라는 단어로 인해 사랑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분석이라고 오해하지 말자. 책은 읽을 만 한데, 이 책보다는 바우만의 다른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바우만을 아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 드는 기분은 꽤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리퀴드 러브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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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둘만한 보들레르의 작은 산문들을 모았다. 각각의 산문들은 19세기적인 묘한 매력과 허를 찌르는 감각으로 채워진다. <<현대적 삶의 화가>>는 너무 유명한 산문이라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문학청년들에게 주는 충고 


지금 나이로 보자면, 문학청년 시기쯤으로 분류될 이십대 중반에 쓴 산문이다. 그 스스로도 이렇게 살지 못했을 텐데, 이런 충고를 썼다는 건 그만큼 문학 활동에 자신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런 이율배반은 그의 생애 전반에 나타나는 바이기도 하다) 


시란 가장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는 예술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20쪽 


이런 놀라운 사실이! 실제 그랬는지, 아니면 그의 바람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이 산문은 보들레르스럽지 않은 단정함으로 채워져 있다. 




사랑에 대해 위안을 주는 경구들 



위안을 주진 않는다. 사랑에 대해 쓴, 읽을만한 산문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산문은 꽤 솔직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위대한 시인이기를 원하는 젊은 당신은 사랑에 있어 모순을 경계하라. 처음 파이프를 피우고 취한 학생들이 풍만한 여인을 목청껏 찬미하도록 내버려두어라. 이런 거짓말은 유사 낭만파의 풋내기 신도들에게나 줘버려라. 만약 뚱뚱한 여인이 때로 매력적인 난봉의 대상이 라면, 마른 여인이란 어두운 관능의 깊은 우물인 것이다! 

- 28쪽 



그나저나,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보들레르는 평생을 잔 뒤발Jeanne Duval과의 동거와 결별을 반복한다. 보들레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최근에서야 보들레르 연구에 그녀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잔 뒤발(1820 ~ 1862/1870, 아이티 태생의 혼혈)



마네가 그린 잔 뒤발(1862년 작)



보들레르가 그린 잔 뒤발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1855년) 속에서 잔 뒤발이 나온다.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던 보들레르가 쿠르베에게 잔 뒤발을 그림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했고 쿠르베는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편에서 오른쪽 책을 읽는 보들레르 옆 흔적으로만 잔 뒤발은 남아 있을 뿐이다. 아래는 확대한 이미지다. 



  




장난감의 모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산문이다. 장난감, 어린 아이, 자신의 추억이 뒤범벅이 되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나, 주위를 빙빙 맴돌 뿐이다. 



현대적 삶의 화가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서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산문이다. 그래서 이 산문을 읽지 않은 이라도, 아래 문장은 기억할 것이다. 



현대성은 예술의 절반을 구성하는 일시적이며 스쳐가는 우연적인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 53쪽 



하지만 이 산문의 두 번째 챕터인 '댄디'가 더 흥미진진하다. 댄디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댄디의 시대를 그리워해야할 필요는 언제나 있다. 지금/여기에서도. 



댄디즘은 지는 태양이다. 저무는 별처럼 수려하고, 열기도 없으며 우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어쩌랴! 민주주의라는 밀물이 모든 것을 휩쓸어 평준화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 자존심의 이 마지막 대표자들을 삼쳐버리며, 비범한 난장이들의 흔적들 위로 망각의 물결을 쏟아붓는다. 

- 63쪽 




보들레르의 백일몽이었던 연극


그는 연극(희곡)을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다. 이 편지는 배우에게 연극을 쓰겠다며 20프랑을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천재의 잡기장, 보들레르의 수첩 


글을 쓰겠다는 계획, 여기저기 빌리거나 줘야할 돈들의 목록이 있다. 보들레르는 젊은 시절(한국 나이로 스물두세살 때) 10만 프랑이라는 막대한 유산을 받았으나, 불과 2년만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돈을 쓴다. 그리고 이 때 잔 뒤발을 만난다. 그녀와 함께 엄청 돈 쓰고 다닌 셈이다. 1842년에 10만 프랑의 절반 정도를 사용했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가족에 의해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그 이후 보들레르는 공증인에 의해 매달 약 200프랑 정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이 금액도 그 당시엔 꽤 될 것같은데), 무절제한 소비로 부채를 달고 다녔다. 





Portrait de Charles Baudelaire en 1844 par Emile Deroy (1820-1846)



짧은 산문집의 리뷰가 잔 뒤발의 이미지 목록 비슷하게 되었다. '검은 비너스'라고 불린 잔 뒤발과 보들레르와 관계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나, 아이티 태생의 흑백혼혈이라, 프랑스 내 보들레르 연구자들에게 금기시되던 존재였다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쿠르베나 마네의 작품에도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파리 예술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을 텐데. 



책은 짧지만, 기억해둘만한 내용들이 많다. 다만 인문학 연구자들이나 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 * 


흥미로운 구절이 있어 메모해둔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잠자고, 먹고 마시며, 적대적인 환경에 대항하여 이럭저럭 자신을 지켜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포를 죽여서 먹고, 감금하고 고문하도록 부추기는 것 역시 자연이다. 우리는 사치와 쾌락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와 욕구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자연이 권할 수 있는 것은 죄악뿐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소위 무오류의 자연이 부모 살해와 식인 풍습, 그리고 우리가 수치심과 품위 때문에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는 다른 수많은 가증스러운 것들을 만들어냈다. 곤궁하고 몸이 불편한 부모들을 부양하라고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은 종교이고, 좋은 의미의 철학이다.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일 뿐인 자연은 부모들을 타살하라고 우리에게 명한다. 자연적이고 꾸밈없는 인간의 모든 행동과 욕망을 전부 훑어보고 분석하고 나면 무서운 것만 발견하게 되리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은 모두 계산과 이성의 결과물이다. 

- '현대적 삶의 화가' 중에서 65쪽 - 66쪽 





 



보들레르의 수첩 - 10점
샤를 보들레르 지음, 이건수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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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지음), 고원(옮김), 당대 








다소 급하게 읽은 것일까. 투렌이 이야기하는 ‘2와 2분의 1 정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미심쩍긴 하다. 실은 이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내일은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며, 나를 기다리는 몇 개의 회의가 있고, 내가 채워야 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도 월급쟁이인 형편에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상한 위치에 서 있으며, 똑똑하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를 매우 싫어하는 전형적인 관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처럼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고객에게 욕을 들어가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리더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쓴다.  


이런 내가 알랭 투렌의 10년도 더 지난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거나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여유가 생기게 되진 않을 테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이 책을 왜 읽은 것일까(솔직히 읽지 않은 책이 서가에 꽂혀 있으니 읽은 것일테지만).


알랭 투렌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팸플릿이 아니다’라고 적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중립적이라고 강변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시각이다. 비판적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기만 한 것에서 하나의 계획을 찾아내도록 자극하는 [행위자들과의] 교감에 의해 주어져야 하며, 동시에 사건 속에서 뒤섞여 있는 의미들을 구분해내기 위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즉각적인 동의를 얻거나 인기를 모으기는 힘들다. 

- 225쪽 



책은 지극히 1999년의 프랑스적 상황 아래에서 쓰였고 그렇게 읽힌다. 공공부문 파업이 극에 달했고 좌파, 우파 정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1999년의 프랑스 파리. 하지만 199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이 2014년 한국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파업이나 정치적 시위 등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으며, 연이은 보수 정권에 의해 공중파를 비롯한 주류 미디어까지 편향된 보도 행태를 보이는 지금, 우리가 이 책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신의 이념과 갈등, 희망들을 가로지르면서 그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 21쪽 



나는 다음 세 가지 이념을 옹호할 것이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가 우리의 정치적 행동능력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절대적 소외계층들은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권리의 요구 - 특히 문화적 권리의 요구 - 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혁신적인 개념화를 통해 행동한다.

셋째, 제도적 질서가 평등과 연대에 대한 요구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이기까지 하다.

- 23쪽 



그는 전 지구화(Globalization)은 이데올로기적 공갈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극좌파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공갈을 더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극좌파는 현실적인 대안 없이 공격적인 문제 제기와 투쟁을 위해 전 지구화 담론과 대항해 자신들을 위치지운다고 본다. 


그리고 알렝 투렌은 전 지구화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파편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이 책에서 ‘파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언급은 없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으나, 투렌의 책은 딱 2권만 번역되었고 그 마저도 절판이었다.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건가.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인데)





이 책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세 번째 비판 방식은 긍정적인 행동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든 표상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권리와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새로운 행위자들의 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본다. 저항과 반대 세력들은 이미 낡아버린 경제적 모델 - 오래 전부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지 않은 결과들이 그 자체의 성장을 막아버린 모델 - 의 옹호에 몰두하기 때문에, 20여 년 전부터 약화되어 온 행동능력을 재건하는 것은 오직 이 같은 문화적 권리를 요구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들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분석하고 존재 가능한 행위자들을 정의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 정책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 28쪽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행위자들에 의한 권리와 정체성,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지구화는 지배세력의 보다 고효율의 의사소통 체계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모든 주체성과 사회적 보호와 집단 기억과 사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로부터의 구원은 지배당하는 이들과 그들의 지지 속에서 나와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오직 노예 그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은 헤겔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바로 이들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평등과 노동 권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 80쪽 



결국 투쟁은 단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으로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이름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사회와 진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반대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식민지배에 투쟁했다.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행방과 신체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운동은 사회전체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 110쪽 



알랭 투렌. 1925년생인 그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책은 짧지만, 나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이런 책들도 계속 읽어야 쉽게 읽을 수 있는 듯), 결국 이론을 지나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기에 나로선 더 힘들었다. 최근 들어 나의 변화 -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고려에 하염없이 끌려 다니며,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식적인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현 경제 상황이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지나가는 생각에 머물 뿐이었으며, 누군가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적조차 없다. 이런 변화가 솔직히 나로선 황당하지만(나는 이런 시절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한국의 40대 대부분이 이런 상황일 것이다. 


현실 정치의 문제는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나,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개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 투자와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첨예화된 기업 활동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강요함으로서 바람직인 정치의 부재를 통한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알랭 투렌은 이 책에서 ‘비판적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결국 지배당하는 이들에 의해서 이 세계는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은 빼앗겼으며, 우리 스스로 행위자임을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도 투렌이 거부하는 비관주의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부언하자면, 책의 주요 논지는 기존 좌파적 활동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우파나 전 지구화와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우리는 투자를 해야 한다.) 


‘힐링’ 따위로 청년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창업’ 열풍으로 우리의 물질적 빈곤이나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는 불순한 이데올로기 이며, 하나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면서 정부와 유관 기관들의 지원 정책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알랭 투렌의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어떤 실천의 어렴풋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프란츠 파농이 생각했던 것처럼,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주역 역시 식민지지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인들, 다른 문화에 이미 확고하게 적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82쪽 





어떻게자유주의에서벗어날것인가

알랭투렌저 | 고원역 | 당대 | 2000.11.06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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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n 1호 - 10점
Noon 편집부 엮음/GB(월간지)



2009년에 창간호가 나온 후 소식이 없는 잡지 ‘noon -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and visual culutre’를 읽었다. 주제는 violence of the spectacle이다. 아마 몇 명은 바로 예상하겠지만, 이 주제는 기 드보르Guy Debord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언급된 그 스펙타클에 대한 것이다. 기 드보르는 이 놀라운 저작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타클을 새롭게 정의 내린다.


“스펙타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들로 구성되는 스펙타클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들의 구성체로서의 스펙타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스펙타클 환경(상황)에 주목하고 과감하게 이것을 스펙타클이라고 정의내린다. 이런 측면에서 히사시 무로이의 아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오늘날 인간은 각종 매체를 통해 조성된 ‘현실의 연장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의 연장세계란 인간이 ‘현실’이라고 믿는 매체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호와 정보로 구성된 세계를 의미한다.”



기 드보르의 책을 번역본으로 두 번 정도 읽었지만, 그 땐 - 벌써 십수년 전의 학부시절 -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 잡지에서 스펙터클에 대해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는 실베르 로트랑제와 배영달은 기 드보르 -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 르페브르Henri Lefebvre -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를 연결 지으며 스펙타클 사회의 비극을 학구적 언어로, 아주 건조하고 논리적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보드리야르 사상이 가지는 비극성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이론이 현실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참혹함과 그 이론의 무책임함에 주목하지 않은 채 열광하는 철부지 인문학 수입상들을 경멸해왔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실은 보드리야르의 문제가 아니라 보드리야르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이들 탓이겠지만.


“사람들은 유희 속으로 들어가는 한, 스펙터클 속에서 가짜인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 보드리야르



그리고 21세기 초 가짜와 진짜가 뒤섞여 분간하지 못하는 뉴미디어 시대가 펼쳐졌다. 이는 미디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들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감각을 기만하고 기만당한 감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감각이란 없다. 대신 비판적 이성이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 이성은 탐욕적 금융 자본주의 아래에서 돈 만드는(making money) 도구적 이성이 된 지 오래다(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21세기 초를 경험했다면 어떠했을까?).

이런 올드-뉴미디어들의 총체적 문제가 바로 21세기적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그리하여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이 ‘재현’으로 물러난다. 삶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어떤 것 속에 우리들의 삶이, 일상이 퍼즐처럼 끼어 맞춰지는 형국이다. 실베르 로트랑제는 폴 비릴리오을 이렇게 인용한다.


사회적-정치적 공간의 동질화 - 원격 현전(telepresense), 편재성 환영(illusion of ubiquity) - 는 속도로 생산된다. 속도가 폭력의 형식인 것이다. 즉석 응답은 공간을 폐기하며, 즉석의 시간성은 실재의 일반화된 탈실재화를 유발하면서 기억과 역사를 말소한다. (The homogeneisation of the socio-political space - telepresence, the illusion of ubiquity - was produced by speed, and speed is a form of violence. lnstant response abolishes space, instantaneity cancels memory and history, provoking a generalized derealization of reality.)


다시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제 공간의 거리는 무의미하다.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미디어 채널을 통해 공간은 동질화된다. 이 동질화란 하나로 만들어진 스펙터클이 거의 동시에 전 세계를 휘감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9.11 사태가 터졌을 때 모든 미디어가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SNS는 내 물리적 존재가 가지는 공간성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편재하는 가상의 실재가 되며, 인터넷 상의 프로파일과 히스토리로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것들은 바로바로 수정, 삭제가 가능해진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구글Google 서버에 저장된 기록이 전부일 것이다. 동질화된 공간의 무자비한 속도는 축적되는 기억과 지나간 역사를 지우며, 브레이크가 상실된 가속패달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진짜와 가짜가 사라진 액체 형태의 스펙터클 시공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기술로 더욱 강력하게 무장하고 확장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 미술 잡지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다만 잡지 서두에 실린 니콜라 부리요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인용해볼까 한다.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 형식은 단연 얼터모던의 중심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상호연결된 단수성을 정의한다. 오늘날의 모더니티는 독립된 소군도적일 수 밖에 없다. 이론을 통합한다기보다는 아이디어와 형식, 인물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로이며, 표준화되거나 동질화된 영역이라기 보다는 섬처럼 고립된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경험으로서 제시되는 스펙터클 앞에서 예술은, 니콜라 부리요의 언급처럼 상호연결된 단수성으로 저항하고 있지 않을까. 스펙터클의 분석과 해체야 말로 21세기 예술가들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 부리요의 저 언급은 짧지만, 무자비한 스펙터클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예술 실천의 단초로 해석될 수 있다. 



* 아래는 위 본문에서 언급한 책들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이라면 읽어볼 만한 리스트다. 읽기 쉬운 책들은 아니지만.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옮김) 현실문화연구(* 현재 절판)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대표적인 저서. 그러나 현재 절판이고 번역에 대해서도 다소 말이 있었던 책. 아래는 영역본이다.



Society of the Spectacle (영역본)


Comments on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그리고 '스펙터클의 사회'에 대한 기 드보르의 Comments!


토탈 스크린
장 보드리야르 저/배영달

장 보드리야르의 토탈 스크린! 보드리야르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고 싶은 이들에겐 읽어봐도 좋으리라.

현대세계의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저/박정자

앙리 르페브르의 이 책을 번역해 소개했다는 것에 감사해야겠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실은 그만큼 번역이 어려운 책이었던 셈이지만, 박정자 교수의 노고가 안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Classics in Communication and Mass Culture)
Everyday Life in the Modern World  (영역본)


관계의 미학
니꼴라 부리요 저/현지연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 미학' 번역본이다. 번역된다는 소문만 전해들었고, 실제 번역본이 나왔다는 사실은 오늘 검색해보고 알게 되었다. 니콜라 부리요는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한 이론가이며, 그의 관계 미학은 한 때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학문의 세계 종사자들과의 인연이 사라진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독서가 전부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저/이재원 역

폴 비릴리오. 아직 읽지 않은 비릴리오. 한 번 읽어봐야 겠다.


noon은 창간호를 내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낸 책인데, 반응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론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미술 전문 잡지의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사례를 다시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아르코에서 나왔던 '볼'은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고(황당한 사건들 중의 하나), ... ...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듯 싶지만, 그건 호사가들의 수다에 지나지 않고 진지한 관심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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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제(均齊) - 김수영 展
원앤제이갤러리(www.oneandj.com)
2011.9.1 - 10.2




사각의 캔버스 속, 빼곡하게 들어찬 창들을 가진 건물의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다. 그건 마치 동물의 피부와도 같다. 마치 거대한 식물의 이파리같다. 현대의 건물들, 정확히 말하면 모던 건축물의 외벽을 옮기는 그의 페인팅(회화)는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섬세하고 참을성이 있다.

실은 그의 작품 속에 건물들은 어제 밤에 토라진 애인같다. 그의 작품이 차갑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창이 닫혀 있고 벽만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건 거대한 도시에서 마주하게 되는 차가운 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온 살아있는 건물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우리가 늘 눈으로 마주하는 존재,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비친 이미지들. 




그는 지금 건물의 마음을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건 미술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저 눈에 비치는 불가해한 건조함으로 서 있는 현대식 건물에 다가가기 위한 심리적 접근이다. 결국 이 차가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 가회동에 위치한 원앤제이갤러리는 인상깊은 페인팅 작품들을 선보이는 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이는 제 취향과도 맞아 그럴 것입니다. 전시를 지난 달에 보았으나, 이제서야 리뷰를 올리네요. 작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돈 받고 하는 짓이 아니라고 함부로 쓸 수도 없고, 또 돈 받고 글을 쓰기도 하니, 다소 어쩡정한 글쓰기 모드가 몇 해째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진은 직접 갤러리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 주말미술여행 어플 관리가 요즘 뜸했습니다. 성실히 할 것입니다. ^^


올댓 주말미술여행 출시
미술 전시 정보/리뷰, 미술 서적 및 미술 관련 칼럼 등으로 이루어진 '올댓 주말미술여행'이라는 어플을 출시하였습니다. 이 어플은 SKT의 지원을 받아 TNM에서 제작한 콘텐츠 어플입니다. 매주 업데이트를 할 예정으로 있으며, 금요일이나 토요일, 이 어플로 주말에 가볼 만한 전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많은 이용 바라며, 주위에도 많이 추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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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 10점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문학과지성사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Uno, nessuno e centomila>>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926.(김효정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살아가는 게 버겁다. 소박하고 순수하던 고대의 풍습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고 훗날 그 먼지들을 모아 새로운 성(城)을 쌓지만 그 성은 우리가 지어, 들어가지 못한 채 버림당하는 곳으로 남겨진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선량한 우리, 아벨에게서 왔지만 그가 가졌던 양들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그 몇 천년 동안 푸른 언덕이며 깊은 호수며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새와 물고기들은 몇 미터의 높이로 쌓인 먼지들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모스카르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그 거울 속에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아닌, 낯선 이방인. '나를 보여지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어떤 이방인.

그 순간 책을 읽던 나도 책을 덮고 거울 앞으로 간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그런데 과연 거울 속의 나는 나일까. 나란 도대체 무얼까? 나, I, Je, 我, ... ...

진지한 학문과 예술은 참된 어떤 것을 찾아가면서 거짓되고 허상인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다가, 아뿔싸! 거짓과 허상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현대인에게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없다. 나란 없는 자(nobody).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계기.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이고 ... ... 이런 자질구레하고 매우 일상적이지만, 때때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있어 극히 치명적인 질문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주제인 '주체의 분열'이란 실제로는 모더니즘의 것이다. 그건 현대(Modern)의 학문과 예술이 19세기말부터 의문시해온 어떤 근본적인 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스카르다의 정신 나간 듯한 말투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치명적인 자화상과 마주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 방황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고립당하는 우리 자신들과.

'주체의 분열'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더니즘적 방식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분열 이후'다.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무수한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묘비명, 즉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 편리한 것이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은 이름을 모른다. 이 나무는 새로 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호흡한다. 나는 나무다. 나무이자 구름이다. 내일은 책이나 바람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읽는 책. 내가 마시는 바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이 외부에서 방랑한다."(240쪽)

덧붙임 : 자신의 삶을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지하기 말기를 바란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들은 실패한 자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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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1.12 23:59 신고

    혹시 책 가지고 계신가요?

    • 가지고 있습니다. 피란델로는 최고의 작가입니다. 국내 독자에겐 희곡 작가로 더 알려져있지만요.

      이 소설의 영어번역본은 ebook 파일로 인터넷으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국역본은 도서관에서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음모이론 넘어서기
- 서사구조와 그 한계



1.
몇 년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말로 듣는 사람을 갑자기 소름 돋게 만든 이야기가 있었다. 승강기 안에서 들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엄마로 변신한 귀신의 아찔한 대화.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저 그런 공포담으로 받아넘기기엔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머니마저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순간 우리들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대신 귀신을 등장시키는 이 공포이야기는 '가정'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믿음이나 가치가 상실되었고, '부모들'에 대한 아이들의 숨겨진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안쓰러운 이야기 속에서 요즘의 우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음을,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따지고 보자면 이것은 근대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잘못된 귀결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또는 자유를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그것들에 대해서, 혹은 이 세상에 대해서 소홀해지고 그 틈 속에서 개개인들은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해'라고 중얼거리며 '고독감'에 휩싸인 채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음모이론'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대중문화의 서사구조의 한 양식에 불과하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지 못하고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그렇지만 합리적인 연구나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그것을 향해 가는 서사구조.


하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말한다면, 혹은 90년대 후반 하나의 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치부한다면 이 음모이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하다. 실제 이러한 '음모이론'은 그렇게 낯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예로부터 있어왔고, 특히 근대(Modern)라는 이 시대는 그러한 이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음모이론'이 세간에 등장한 것일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속에서도 '음모'는 있었을 것이고 중세의 상업도시와 카톨릭교회 사이에서도 있었을, 계속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음모이론'이 나올 만한 시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았건만, 특히 한국이라면 7-80년대가 그 시기로 적당함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지금 '뜬금없이' 등장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2.
데카르트는 우리가 이 세상을 인식할 때 '절대적인 확실성' 위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법적 회의'로 자신의 사유를 전개시킨다. 모든 인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유명한 말로 '의심하는 나의 확실성'을 말한다. 이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확실한(명석 판명한) 인식'을 위해 자신의 감각과 그 감각으로 인식하는 외부세계를 먼저 부정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여기에서 '확실하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의 동어반복이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먼저 외부세계를 부정하고 난 다음 자기자신마저 부정하려고 했지만 '의심하는 나'의 존재는 부정하지 못했고 이 지점에 서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이후 전개되는 모든 '근대적 사유'의 기본을 형성하게 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근법(perspective)'이란 데카르트적 사유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현양식의 하나이다. 하나의 소실점은 '의심하는 나'의 시선을 보여주며 주위의 배경은 그 '나'가 세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표시해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사물을 배열할 때 '원근법'적으로 위치시키며 또한 그것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여긴다.

실제로 이것은 데카르트 이전 르네상스 고전주의-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에서 시작되었지만, 철학사에서는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하게 된다. 문학에서는 라신느, 꼬르네이유의 고전주의 연극에서, 그리고 이후 근대 소설에서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주인공, 제1배우)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제2배우)의 대립과 반목, 갈등에서 하나의 중심-프로타고니스트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의, 의심하고 생각하는 나-로 향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데카르트주의도 20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반데카르트주의의 현대적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원근법적 구축물들을 거부하면서 우리들의 인생이란 기하학적이지도, 인과율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고 오직 '우연'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유양식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설의 정의인 '필연적 허구'는 현대 소설에 와서는 '전적인 공상'이거나 '우연적 허구', 혹은 '서사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알랭 로브-그리예나 미셸 뷔토르의 '누보로망'이나 마르께스나 푸엔테스의 '마술적 리얼리즘',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속한다. 이제 데카르트의 믿음은 그간 우리를 속여왔고 진실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제아무리 우리들의 삶을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으로, 그래서 필연적 인생을 살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몸 속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근대적 서사양식은 무너지고 포스트모던 서사양식이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연' 속에 위치하게 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조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의 대중 문화적 반영이 '음모이론'이다. 그렇다면 실제 음모이론은 대중문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3.
토니 스콧 감독의 블럭버스터 『Enemy of the State』의 시작은 지극히 사소하고 지극히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된다. 통신감청법안을 반대하는 한 국회의원이 보안국 요원에 의해 암살 당하는 장면이 철새를 연구하는 대니얼의 카메라 속에 녹화가 되고 그 사실을 보안국에서 알게 된다는 상황설정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변호사 딘은 단지 속옷 가게에서 친구 대니얼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영문 없이 쫓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누구에게 쫓기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쫓는 방법이 예사롭지 않고 얼마 뒤 자신의 몸은 온통 도청장치 투성이였고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노출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신용카드마저 사용정지를 되고 심지어 그가 최근 누구와 친하게 지내며 과거에는 무엇을 했는가하는 행적까지도 알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비밀이란 없고 순식간에 그는 '국가의 적'이 되어 쫓기기 시작한다. 이렇듯 현대의 국가 안에서 한 사람의 비밀이나 행동의 자유란 누군가의 감시 아래서만 허용되는 셈이다. 국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과거 경력뿐만 아니라 현재의 여자친구, 신용카드의 비밀번호, 자주 가는 술집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대중매체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정보화시대'의 실체인 셈이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에도 '비밀번호'나 '신상정보' 누출에 주의해야하고 집의 전화로는 중요한 대화를 함부로 할 수 없다. 올 국회에서 '도청', '감청'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습에서 『Enemy of the State』가 영화 속 허구로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의 국회의원이 네다섯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실에서 평범한 우리들에게는 권력 앞에서 우리들의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음모 이론'의 서사구조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가를 대강 알 수 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개인이 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곤경'에 빠지게 된다. 쫓기기도 하고 신용카드가 정지 당하며 하던 일이 계속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거대권력기관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구조는 매우 상투적인 것이다. 가령 질 미무니 감독의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L'Appartement』은 이러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가 애정 영화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막스와 리자 사이에 끼여든 외로운 사랑의 소유자 알리스는 이 삼각관계에서 '음모'를 꾸미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막스에게 접근하고 그의 사랑을 유도해내지만, 무모한 사랑의 집착은 이 영화의 결말을 비극으로 이끈다. 리자는 죽고 알리스는 사랑에 실패하게 되며 막스는 자신의 사랑을 고작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리자는 앞에서 언급한 서사구조에서의 곤경에 빠지기만 하는 한 개인의 역할을 수행하며 알리스는 한 개인을 계속 곤경에 빠뜨리는 거대권력기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4.
하지만 이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거대권력기관의 유/무이고 또한 음모이론의 서사구조가 다른 서사구조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차이점 또한 바로 이것이다. 모든 서사들은 실제 현실의 반영임으로 해서 그 서사의 무게 또한 실제 현실의 무게와 비례한다. 그러므로 다른 서사구조들 보다 '거대권력'이 들어가는 음모이론의 서사구조에 힘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Enemy of the State』에서 보여지는 힘없는 한 개인과 거대권력기관, 혹은 약자와 강자와 같은 이런 서사 구조는 실제 역사를 통해 부단히 반복되어온 테마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박해했을 때, 그것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음모'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 기존 체제가 잘못된 체제였을까?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로마의 현명한 왕들이 초기 기독교 박해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서기 161년에 로마 황제가 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명상록』을 남겼고 이성을 숭상했으며 학식과 교양이 풍부한, 로마의 현명한 황제들 중의 한 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기독교학자였던 저스트 마틴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죽었다. 그렇다면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떤 이유를 이들을 죽였던 것일까? 지나친 판단일지도 모르나 전체적인 역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가 어떤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이미 파악했다고 보는 편이 정당할 것이다. 즉 중세 천 년 동안을, 그리고 근대에까지 종교재판으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종교의 힘이 로마를 집어삼킬 것임을 로마의 몇몇 황제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이야 '유일신신앙'만을 주장했을 뿐이지만, 그 주장은 주술적이고 혼성문화적인 로마의 헬레니즘과는 반대되는 것이었고 기존의 문화 체제를 거부하는 반체제 행위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현재 특별한 주술적 의미도 없는 '단군상'을 몇몇 철없는 기독교인들이 훼손하는 것에서 고대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얼마 정도의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지금의 단군상을 고대 로마로 비유하자면 '만신전'에 모셔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였을 테니깐. 이러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그 당시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러한 박해는 요즘의 우리들이 말하는 '음모이론'이였을 테지만 지극히 평범한 로마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정반대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에서 고대 로마의 체제와 기독교도들과 관계에서 설정되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과는 상황이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기독교도들이 원하는 것이 종교적 자유였지만 그들이 종교적 자유를 얻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이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박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은 그들의 '유일신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이며 천 년 넘게 유럽인들은 그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았다.


5.
이미 결론이 나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음모이론'의 유무를 따진다는 것은 매우 가치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 즉 역사는 언제나 동일한 테마를 반복해왔고 기존의 체제를 새로운 체제를 거부하며 시기하고 어떻게든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가령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확히 말해서 그 사실은 부분적으로는 거짓말이다. 왜냐면 이미 그 종교재판에 임했던 카톨릭 주교들도 지동설이 사실임을 깨닫고 있었거나 전적으로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동설이 사실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천동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싸워야만 했다. 그렇다면 왜 코페르니쿠스로부터 70년이 지난 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아야만 했을까?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문제는 '우주라는 이 거대한 책은 ‥‥‥ 수학의 언어로 저술되었고 그 알파벳은 삼각형, 원, 여타의 기하학적 수식으로서, 그것들 없이는 우주의 단 하나의 단어도 인간에게 이해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한 채 어두운 미로를 배회하고 있다'(『The Assayer』, 1623)라고 말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흔히 말하는 '근대적 방식'으로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인물들 중의 한 명이었고 그 방식은 종교가 중심에 있던 시대의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상업 시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카톨릭교회는 그를 종교재판에 세웠고 지동설이 진실임이 명확한 상황 속에서 교황과 주교들은 갈릴레이에게 거짓을 강요했던 것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서 우리들의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구도는 명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거대권력기관인 '종교집단'과 한 개인인 '갈릴레이'의 갈등. 하지만 우리가 현재 대중매체에서 볼 수 있는 음모이론과 달리 여기에서는 역사가 갈릴레이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후세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명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실은 음모이론이 아닌 분명한 역사적 사실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을 '음모이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음모이론은 너무 많아 일일이 따질 수 조차 없어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7-80년대에 한국에서 사회운동을 하다 투옥된 사람들 전부가 이러한 음모이론의 구도 속에 위치하며 잘못된 판결이나 오해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사람들도 모두 이러한 음모이론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음모이론이란 하나의 이론이라기 보다는 그저 하나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진실의 편에 속해있지만, 외면 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무마하기 위한. 혹은 진실을 숨기기 위한 거대 권력의 간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이론'이 지금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는 세계는 너무 거대화되었고 이 세계 속에서 한 개인은 고작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절망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보면 과연 이렇게 많은 이들이 어디에서 걸어나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들 나름의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하지만 그 순간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우리들은 눈 앞에 닥친 일상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이 몇 명쯤 될까?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대부분 그 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고 다시 스쳐지나가더라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그런 사람들이다. 이 익명성 속에 우리들 자신도 포함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타병'에 걸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떻게든 자신을 널리 알려 익명성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무의식적 갈구. 하지만 그것은 가능할까? 현대인들은 천천히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죽더라도 내 죽음에 신경을 써주는 이들이라곤 '가족'이거나 심지어 '가족'마저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그 공포이야기는 여기에 해당된다. 이렇듯 한 개인의 죽음은 너무나 사소해서 전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셈이다. 커다란 회사에서 몇 명이 정리해고를 당한다고 해서 그 회사가 망하지 않듯이 몇 명의 개인이 사고로 죽거나 자살을 하더라도 이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이거나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 사회는 끊임없이 한 개인에게 강요하지만 사회는 그 개인의 인생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한때 데카르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성의 기초로 삼은 '생각하는 나'는 이제 회사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으며 이 세상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이런 경우를 당하기 싫으면 이 세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전 '나는 은행만을 위해서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라는 짤막한 유언을 남기고 자살한 30대 가장(家長)의 모습에서 우리들과 관계없는 한 타인의 모습 대신 우리들의 쓸쓸한 자화상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때 음모이론은 90년대 후반의 자연스러운 대중문화의 한 양식으로 우리들 옆에 자리잡게 된다.


7.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음모이론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 그 속에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그 곳에서 정지한다. 이 거대한 세상 속의 한 평범한 개인이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자기가 왜 이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서조차 모를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진실이란 없고 이 거대한 세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껍데기로서만 살아가는 자신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고 음모이론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이 세계의 희생양으로 설정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음모라면 최소한 '어쩔 수 없다'라는 포기라도 할 수 있으리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가 아예 '외계인의 음모'라면 상황은 매우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는 그러한 음모이론을 다룬 영화를 보며 한 사소한 개인의 영웅적 행위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의 본질을 이룬다. 즉 그것의 시작은 현실 속의 한 우연적 사건이지만 그것을 메워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하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서사의 한 양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음모이론이란 거대권력기관의 음모로 희생당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것들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그것이 '음모'였다는 것이 결론 날 뿐 지금의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의 음모이론은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그것의 뒤에는 끔찍하고 가공할 만한 음모가 들어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이거나 검증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현대인들의 고독하고 처량하며 껍데기 인생을 위한 위안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우리들 침실을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막겠는가? 법이 한 개인의 완벽한 방패막이 되어 주리라고 믿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음모'이며 음모 한 가운데 우리들은 서있다 하더라도 음모이론은 우리들의 곤궁한 삶의 변명을 제공해주며 한순간의 위안이 될 뿐, 그것의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모든 포스트모던 서사 양식이 비난받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가상의 경계를 흐려놓고서 현실의 문제를 가상의 범위(상상의 공간) 안으로 들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 문화의 대표적인 서사양식인 영화는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친절한 이웃이 악당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곤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확인할 뿐이다. '음모이론'은 늘 충격적이고 돌발적인 서사를 동반한다. 의외의 곳에서 어떤 사건의 진실이 숨어있다는 식의 설정은 믿을 곳이 사라져가는 현대인들이 어떤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가를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원하는 것이라곤 오직 돈을 보기 위해서 더욱 잔인하고 충격적인 영상이나 서사를 만들어낼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천박한 상업주의와 대중문화들은 우리들에게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오직 한 순간의 재미와 쾌락, 달콤한 위안만을 선사할 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들은 우리들의 처지가 더욱 힘들어져 병적으로 그것에 빠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왜냐면 우리들이 용기 없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그 속에서 잠시라도 잊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대중문화를 향유하면서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의 인생이 우리가 진정 원하던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고 있다는 사실, 심지어 사랑마저도 믿지 못하는 상황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음모이론의 서사 구조 속에서 '자기 반성'이란 등장하기 않고 오직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그 누군가를 향해 있는 것이다.

8.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과연 미술이란 있는 것인가?'라고 한 번쯤 대중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서 기존의 통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원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그 작품으로 인해 일약 미술계의 스타가 되었다. 음모이론이 한 번쯤 눈 여겨 볼 가치가 있다면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세상의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이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듯이 우리는 왜 우리들이 음모이론들 속에 파묻혀 있는지를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뒤샹이 '변기'를 보여주면서 그 당시의 대중에게 원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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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의 경험 - 10점
마샬 버먼 지음, 윤호병 옮김/현대미학사




<<현대성의 경험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마샬 버먼 (윤호병, 이만식 옮김).   현대미학사. 1994.



01. 

"현대적으로 된다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소용돌이로서 경험하는 것이고, 영원한 해체와 재생, 고난과 고통, 애매성과 모순 대립 속에서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며,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리는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모더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든간에 자기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고, 현실, 아름다움, 자유, 정의 등 소용돌이의  도도하고 위험스러운 흐름이 허용하는 것들의 형태를 찾아서 그 흐름  속에 합류하는 것이다." ( 425쪽 )  

          

02.

마샬 버먼은 강력한 모더니즘 옹호자이다. 그것은 그가 이  책을 기획했을 1970년대 초반엔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지만, 이 책이 출판된 1980년대엔 그가  모더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꼭 다른 혹성이나 다른 은하에서 온  것처럼 되어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모더니즘 옹호자가 되어버렸다.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들이 모더니스트임을 알지 못한 채  마샬 버먼을 낯선 시선으로 쳐다보는 아이러니한 풍경을 자아낸 것이다. 

          

버먼이 강력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발전과 파괴'라는 모더니즘의 강력한 특징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공산당 선언>>, 보들레르, 페테스부르그, 뉴욕을 질주한다. 그리고, 어떻게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모든 것이 저속한 것이 되며, 인간은 마침내 제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의 조건 및 자기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도록  강요받는"가를 보여준다.( * ""는 <<공산당선언>> 속에서 인용된 것임) 

          

03.

발전한다는 것은, 진보한다는 것은 두메산골에서 나와  도시로 나와되는 것이며, 한 나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며,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현대 경제의 본질적인 역동성 및 이러한 경제에서 비롯되는 문화의 역동성은, 좀더 많은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세계를 새롭게  끊임없이 계속해서 창조하기 위해서 그것이 창조하는 모든 것 -  물리적인 환경, 사회제도, 형이상학적인 아이디어, 예술적인 비전, 윤리적인 가치 - 을 전멸시키는 것이다."( 349쪽 )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고향에 도달하는 것을 꿈꾼다. 

          

04. 

이 책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며, 무수한 책들이 펼쳐지고, 연극, 영화, 그림, 무용까지 '현대성'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경험되었는가를 증명해 주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따라 현대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전혀 다르게 평가되었고, 멀리 떨어진 위치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똑같이 '현대적'인가를 알기도 한다. 

          

05. 

불행하게도 마샬 버먼의 뛰어난 지식을 따라가기에 우리의 번역자들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그러는  동안  장-룩   고다르(Jean-Luc Godard)는   『호흡정지』(Breathless),『멋대로 살아라』(Vivre sa Vie) 및『여성은 여성이다』(Une Femme Est Une Femme)에서 파리의 거리를..." ( 391쪽 ) 

          

라고 옮기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위해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Comment +2

  • 정윤 2012.09.12 17:18 신고

    책 읽다가 몇번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번역...아 이 망할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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