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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촘스키는 하워드 진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아마 그의 언어학 이론은 영문학과나 언어학과 학부나 대학원 과정에서나 다루어질 것이니, 일반 독자가 노엄 촘스키의 학문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정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책을 읽게 된 외부의 계기가 있었으나, 나 또한 노엄 촘스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이 대단한 언어학자라고 추켜 세웠지만, 정작 그들도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왜 추켜세우는 것인가! MIT 종신교수라서?) 


막상 이 책을 읽으며 촘스키의 언어학에 대해 알아보니, 그의 언어학 이론은 한 번도 주류 학문이 되지 않았고 무수한 반대학자들과 비판가들만 있을 뿐이었다. 특히 현대의 학문 방향과도 동떨어져서 <<데카르트언어학>>이라는 저서를 통해 반-데카르트주의가 휩쓰는 20세기에 데카르트를 불러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엄 촘스키에 대한 국내 명성은 너무 높아서 함부로 까면 안 되는 사람이 된 듯 싶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노엄 촘스키를 한 번 심하게 깠다가 인신공격까지 나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을 보게 된 것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가지는 기본 가정이 반-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기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마치 데카르트가 '송과선'이라는 단어로 육체와 영혼이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촘스키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언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언어생득설'을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과 인간 언어에 대한 촘스키의 입장 뿐 아니라 정치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의 지적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초기 저서들과 데카르트에 관한 역사적 연구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촘스키는 데카르트적 관점의 연원을 계몽운동과 낭만주의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가면서, 창조성에 관한 담론을 파악하는 수단으로서 그 가치를 강조한다. 

촘스키는 궁극적으로 훔볼트의 학문에 도달한다. 훔볼트는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구성에 관한 가정들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맥락으로 작용한다. 훔볼드는 인간 언어의 창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인간의 언어를 단지 기능적인 의사 소통의 한 형태가 아니라 생각의 표명이자 자기 표현의 방식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데카르트적 관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173쪽 ~ 174쪽 



이런 학문적 견지에서 촘스키의 언어학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학자들은 아직도 그의 이론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다면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여기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말만 하는 입 진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보수적인 미국 환경 속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우리도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루 다루며, 노엄 촘스키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만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읽기 쉽고 언어학에 대한 연구활동, 언어학 이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은 절반은 읽히고 절반은 버려질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입장에서 씌여졌기 때문에 대부분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되고 있으나, 노골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만하다.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지, 언어철학자가 아니다. 더구나 노엄 촘스키는 반-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서 있는 언어학자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언어학은 많은 이들에 의해 언급되지만, 언급되는 이유는 그의 언어학이 왜 틀렸는가에 집중될 뿐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블로그'에 올라온 스티븐 핑커의 언급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비판이 지난 50년 간 있었지요. 우선 촘스키의 이론이 언어학계에서 정론이며 다수의 동의를 얻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이라는 식의 표현은 시작부터 맞지 않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은 언어과학 분야에서 한 번도 정론이 된 적이 없습니다. 매 시대 복수의 언어학자들이 촘스키의 이론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이론에 반대되는 이론들, 예를 들어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인지문법(Cognitive Grammar), 관계문법(Relational Grammar), 어휘기능문법(Lexical Functional Grammar), 일반화구구조문법(Generalized Phrase Structure Grammar) 등의 대립 이론들이 있었으며, 특히 다수의 언어학자들이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보지 않았던 점도 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촘스키의 이론을 지지하는 이가 대다수가 된 적은 없습니다. 다른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를 지지한 반면, 그를 공격하는 이들은 더 많았습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퍼트냄, 굿맨, 설, 데닛 등의 철학자들이 그랬고, 70년대 제롬 브루너와 피아제 학파의 발달 심리학자들이 그랬습니다. 70년대 인공지능 중흥기의 테리 위노그라드, 로저 섕크, 마빈 민스키도 촘스키를 공격했습니다. 1980년대 연결주의 심리학자와 신경망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있고, 린다 스미스와 같은 “동적 시스템 이론가”도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시기의 아동 언어 습득 연구자들은 촘스키에 반대했습니다.


촘스키의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는 오해가 생긴 이유는,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제각기 다른 접근을 취하면서, 그의 이론에 대항하는 하나의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유명세와 인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사람들은 촘스키만을 알았을 뿐, 그의 이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알지 못했지요. 즉, 명성과 학문적 위치를 혼동한 것입니다.


‘촘스키의 이론을 뒤집었다’는 주장이 가진 또다른 문제점은 ‘촘스키의 언어 이론’이 사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문(syntax)에 대한 몇 가지 기술적인 이론을 발표했고, 동시에 언어가 본능이라는 내용의, 논문의 형태가 아닌 비공식적인 주장을 수십 년 동안 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확증하거나 반증할 수 있는 엄밀한 형태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보편 문법(Universal Grammar)”, 또는 본능적인 “언어 구조(language faculty)”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특정 언어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예를 들어 일본어나 영어를 우리가 실제로 학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지요. 즉 50년 동안 언어의 특정한 측면이 학습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모든 이들이 (실제로 매우 많았지요) 자신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보물단지 역할을 촘스키가 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과학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나는 우리가 보다 정밀한 언어 습득 과정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델은, 여러 문장들을 입력하면, 문법 구조가 출력되는 그런 모델 입니다. 그리고 이 모델이 실제 아이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문장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모델이 어떤 모양이건,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 본능을 설명하는 이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나는 1984년 나의 첫 저서인 “언어 학습과 언어 발달(Language Learnability and Language Development)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시도 없이, 아이들이 언어를 배울 때 어떤 본능적 구조나 가정,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 언어를 신경망으로 구현하려 했던 이들이 썼던 트릭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보다, 그저 본능적인 구조를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델에도 그런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스티븐 핑커

인용: http://newspeppermint.com/2016/12/08/m-chomsky/




노엄 촘스키의 정치적 활동이나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들에 대해서는 한국의 무수한 진보 지식인들이 인용하여, 다소 식상하기까지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노엄 촘스키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저서들은 제대로 읽히지도, 소개되지도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진 않는 것일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이 왜 잘 알려지지 않는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현대 철학의 지평 위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의 반-데카르트주의 환경 속에서 노엄 촘스키는 분명한 어조로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이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활동에까지 연결될 수 있겠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 8점
로버트 바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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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 Jacques Derrida zur Einführung

H. 키멜레(Heinz Kimmerle) 지음, 박상선 옮김, 서광사, 1996 



  




데리다에 대해선 대학 시절부터 많은 논문과 책을 읽었지만, 늘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지만, 결론은 같다. 그의 방법론 - 미국에선 흔히 '해체'라고 부르는 - 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늘 남는다. 


물론 "차연의 철학"이라는 명칭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명칭은 - 아도르노에 의해 발전된 동일화하는 사유(identifizierendes Denken)에 대한 비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차연[다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일화시키지 않음, 즉 다른 것 혹은 구별되는 것을 같은 것이나 동일한 것으로 여기지 않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연적 사유는 통일적이고 그 자체로서 증명할 수 있는 철학적 흐름으로 특징짓는 일은 사실 그 의미에 거슬리는 일이다. 차연적 사유는 그 자체 다른 것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속에 있는 것이지 항상 같은 것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데리다의 차연의 철학이라고 말 때 그것은 동일한 것이거나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는 철학이다. - 15쪽 


끊임없이 바뀌는 게 철학이라니! 


차연은 "흔적의 유희"로 완성되고 있으며, 의미도 없고, (눈 앞에 있는 물건처럼)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유희에서 스스로-자기와-구별됨(Sich-von-Sich-Unterscheiden)은 하나의 흔적으로서 이 흔적은 또다시 지워지는 흔적이다. - 93쪽 


데리다는 자주, 나에게 문학 비평처럼 읽힌다. 그는 텍스트 안으로 텍스트 행간 사이에 숨은 의미, 혹은 의미의 부재를 흔들며 해체한다. 그에게는 글쓰기가 첨예한 문제로 떠오른다. 하긴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만큼 '개념'과 '개념의 해체'에 매달린 적도 없으리라.  


책의 폐쇄성(Geschlossenheit [끝맺혀짐, 닫혀짐])을 두 배로 늘림으로써 사람들은 그 폐쇄성을 부수고, ... 그 순간부터 ... 책 속의 책을, 원천 속의 원천을, 중심 속의 중심을 읽을 수 있으므로 그 때부터 심연(Alggrund [바닥이 없음])이, 무한히 다양화되는 끝없음(Un-grund)이 시작된다. 다른 것이 같은 것에 있다[있게 된다]. 

- 데리다, <<글쓰기와 차이>> 중에서 (65쪽에서 재인용) 



데리다 철학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은 값진 선물이 될 수 있겠지만, 데리다는 철학자다. 아니, '철학서에 대한 해체 비평가'라는 표현이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철학이라고 할 때, 그건 건축적(구축적)임을 뜻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반-건축적이거나 탈-구축적이다. 그는 그것을 지향했고 철학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몇 개의 단어로 모이긴 하지만, 체계적이지 않고 도리어 병렬적이고 동어반복적이다. 데리다의 다양한 전략과 실천들을 간략하게 보여주면서 데리다가 일관되게 이야기한 '차연'의 의미를 되새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할 당시(1998년 경으로 기억된다), 데리다 철학에 대한 소개 서적도 얼마 없었지만, 그나마 이 책이 제일 나았다. 지금은 어떤 지 모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책이 어려운 철학책임에 분명할 테니, 일반 독자에게 권할 책은 아니다.  아마 지금도 데리다 철학 소개서로 손색이 없을 테지만, 굳이 지금 데리다를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는 인문학 전공자에게도 마찬가지일테다. 차라리 그 시간에 서양철학사를 읽거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추천한다. 아니면 아도르노의 다른 책을. 이 책을 옮긴 박상선의 말대로 데리다는 아도르노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아도르노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



데리다에 대한 소개는 아래 글이 좋을 듯 싶어, 옮긴다.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형이상학의 폐쇄적 원리 해체 -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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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산만한게 꼭 저같아서 좋네요.

    마침 아도르노의 「사회학 강의」를 혼자서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게 ㅋㅋㅋ 막 읽고있는데 개중 반가운 글입니다. ㅎㅎㅎ

    소개 너무 감사드립니다. 지하련님은 추천하지않으셨지만 저는 꼭 읽고싶네요. 참 저같은 사람이라 ㅋㅋㅋ

    • 데리다보다 아도르노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네요. ^^;;; 인문학도 워낙 유행을 타는지라.. ㅎㅎ


선생님께서 강의를 위해 손수 적으신 노트를 보내주셨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한글번역본을 주문하고 영어 번역을 구했다.


학부 시절, 강의 시간에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에 들은 바 없다는 건 죄악이다. 아무리 문학 전공이라고 해도. 학생들에게 미래가 없는 건 그 학생들의 선생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지적(知的) 자극을 제대로 받지 못했음은 종종 내가 대학 잘못 선택해 갔나 하는 생각이 든다(하긴 다른 대학엘 갔어도 마찬가지였을 듯).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을 읽으면, 꽤 우울해지겠구나. 하지만 우울(melancholy)이란, 천재들의 기질임을!!


아래에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를 독일어 원문 - 영어 번역(the Ogden (or Ogden/Ramsey) translation) - 영어 번역(the Pears/McGuinness translation) 형태로 된 PDF 파일을 구할 수 있다.


http://people.umass.edu/klement/t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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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생 때 사실 겉멋으로 시작했는데 .... 어째 대학가서 고등학생때보다 이해를 더 못하던 책이었네요. ㅎㅎㅎ

    확실히 천재의 책이라 그런지 직관과 객기가 뭔가 작가의 의도와 부합하는 읽기활동이 된 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 어쩌면 모든 철학책들이 다 그런 것같아요. 차라리 겉멋으로 읽을 때가 좋았습니다. 그 땐 몰라도 아는 척 할 수 있었는데, 이젠 아, 모르겠다라는 절망감이 더 크게 다가오니깐. ㅜㅜ 아. 이것도 읽다 말았네요. 다시 읽어야 겠어요.


구토 - 10점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문예출판사


구토 La Nause'e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이휘영(옮김), 삼성출판사, 1982년(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로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이 좋을 듯싶다.) 




그냥 우연히 책을 집어 들었다. 이휘영 교수의 번역으로 수십 년 전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이다. 헌책방에서 외국 문학들만 집중적으로 수집했던 적이 있었고, 그 때 사두었던 낡은 책이다. 요즘에도 좋은 소설들이 번역되지만, 과거에도 그랬다. 단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없을 뿐. 그래서 과거에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소설들도 꽤 존재한다.

장 폴 사르트르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실은 앙리 베르그송이 아니었다면, 그는 최고가 되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소설가적 문장 구사와 궁지에 몰린 철학의 돌파구로서의 새로운 단어 만들기에 여념 없었던 사상가들의 책보다는 도리어 우리 존재와 일상의 무의미함, 고독,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자유를 이야기한 사르트르가, 어쩌면 우리 미래를 꾸리는 데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구분되는 이 작품 ‘구토’는, 글쎄 읽기를 권하기 망설여지는 작품이긴 하다.

나는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현재 뿐이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현재 속에 들어박힌 가볍고 단단한 가구며, 탁자며, 침대며, 거울이 달린 양복장 - 그리고 나 자신.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존재하는 것 그것이 현재였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빠져나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중략) 사물이란 순전히 보이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 그 <뒤>에는 ... ... 아무 것도 없다.
- 128쪽



실은 자신을 ‘여분의 존재’라고 여기는 주인공 로깡땡을 소개시켜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데카르트를 거부하고 존재를 부정한다. 더 정확히 말해 ‘존재의 의미 자체’를 부정한다. 그건 그냥 ‘없는 것’다. 아니면 ‘없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함으로 인해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구토>를 느낀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왜 나는 생각하는가?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존재한다. 생각한다. 나는 ... ... 왜냐하면 ... ... 으윽! 나는 도망친다.
- 133쪽



 

존재는 물렁물렁하다. (중략) 존재는 떨어진 전락이다. (중략) 존재는 불완전한 것이다.
- 134쪽



 

존재는 기억이 없는 것들, 사라져 버린 것들이며, 존재는 아무 것도 - 추억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 172쪽



이 작품은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주인공의 관찰과 사색이 대부분이고, 사건도 거의 없다. 몇 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인공의 생각이나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 과거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안니의 역할도 제한적이다(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소설의 중요한 구성도 아닌 셈이다).

결국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실존적 철학을 향한 일종의 관문이라고 할까. 그 정도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싶지만, 이 작품을 소설로 인정하는 순간,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 속에서 관찰과 사색을 통해 끊임없는 형이상학적 탐구를 계속하는 실험적 작품이 된다. 소설적 구성이 복잡하거나 난해한 것도 아니고, 일기를 통한 서술과 관찰과 사색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적 내용 또한 잘 어울리지만, 이런 류의 소설은 꽤 드물다. 더구나 존재와 자유에 대한 탐구라니.


나는 자유롭다.나는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내가 애써 찾아낸 모든 이유들은 사라지고 다른 이유는 이미 생각할 수가 없다. (중략) 나는 마당과 마당 사이의 길 속에서 고독하다. 고독과 자유,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딘지 죽음과 비슷하다.
- 200쪽



사르트르는 문학에서 시작해 철학과 실천으로 향했지만, 그의 프랑스 철학계 후배들은 실천적 철학에서 시작해 문학적 글쓰기와 예술적 가상(또는 개념)에 빠져들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20세기 전반부와 후반부는 이렇게 나누어지는데, 이는 철학 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흥미로운 독서의 경험을 선물할 테지만, 일반 독자에게 추천하기에는 이 소설은 꽤나 지루하거나 너무 심각할테니, 고전이라고 무작정 추천하기 망설여진다.



프랑스 갈리마르사에서 나온 사르트르의 '구토' 표지. 사르트르는 1936년 32세의 나이로 '구토' 원고를 갈리마르사로 보내 출판을 의뢰하지만, 거절당한다. 그 다음해 갈리마르사가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1938년에 출판되어, 무명의 사르트르는 일약 프랑스 문단의 신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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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집중해 읽을 시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줄어들기만 한다. 이제서야 책 읽는 재미, 문맥 속에서 세상의 비밀을 엿보는 기쁨을 알게 되는 듯 한데 ...

얼마 전 펼친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Wirklichkeiten in denen wir leben, 양태종 옮김, 고려대출판부)의 한 구절은 올해 읽었던 어느 문장들 보다 마음에 와 닿았다.

"우리가 하나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철학을 자극하는 발견들을 위한 정식이다. 그것은 우리와 맞닥뜨리는 횟수가 늘어나는 발견들을 위한 정식이다." - 한스 블루멘베르크

 
하나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20세기의 생각들은 시작되었을 지 모르겠다. 블루멘베르크의 표현대로... 하지만 몇 세기 전 17세기의 존 단(John Donne)은 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And now good morrow to our waking souls,
Which watch not one another out of fear;
For love all love of other sights controls,
And makes one little room an everywhere,
Let sea-discoverers to new worlds have gone,
let maps to others, worlds on worlds have shown:
Let us possess one world; each hath one, and is one.
(
그리고 지금 우리 깨어나는 영혼들에게 아침 인사를,
두려움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던 건 아니라네.
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랑을 막아주고, 
그리고 이 작은 공간이 전체의 세계가 되네,
바다 위의 발견자들은 새로운 세계로 가도록 놔두고,
지도를 다른 이들에게, 세계들에 대한  세계들을 보여주며,
우리 하나의 세계를, 각자 하나의 세계를, 그리고 하나가 될 세계를 가지네.)

- 'The Good-Morrow'의 2번째 연.
(번역은 방송통신대학 교재 - 영국 문학의 이해 - 주석을 참조하여 직접 함)


존 단의 근대성(Modernity)는 지도 위의 어떤 세계들이 실제로 구현되는 하나의 세계, 서로 공유하게 될 어떤 세계. 즉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을 꿈꾸는 것이다. 이론이 현실이 되어 퍼져나가는 것.

그런데 20세기 이후의 문학과 철학 속에서는 실제 현실이 이론화되고 예술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담론만 넘쳐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잠자리에 들기 전 너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대부분은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 이제 내 나이도 마흔이 된다. 어렸을 때, 마흔 이상 되는 이들은 이 세상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강력하게 동의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 그런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흔들거리는 어느 일요일 밤,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책은 잠시나마 나의 위안이 되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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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10점
한나 아렌트 지음/한길사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지음), 한길사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잡지의 칼럼이나 신문 기사에서 종종 접하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책은?

솔직히 말해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아주 느리게, 아주 천천히 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나 아렌트. 젊은 시절 하이데거의 연인이었으며, 미국으로 넘어간 유태인, 여성 철학자,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면서 학문적 주목보다는 센세이션과 거부감을 더 불러일으킨 학자.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학문적, 지적 명성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들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근대적 인간의 오래된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전체주의'가 가지는 비극성, 그것이 어떻게 근대와 현대의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철학적인 견지에서 탐구하고 분석해 낸다. 특히 고대 철학과 정치적 환경에 대한 분석에서부터 시작된 그녀의 논의는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일관성과 통찰력은 종종 놀라움을 선사할 정도이다.


*    * 

한 달에 한 권을 선정해 읽는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읽을 생각이다. 오랜만에 너무 빡빡한 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철학책을 1~2년 만에 읽는 듯한 생각이 든다.

회사 일이 바빠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읽은 책도 제대로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읽었으나 서평을 쓰지 못한 책이 벌써 열 여권에 이른다. 이를 어쩌면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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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 아렌트의 파워에 대한 그녀에 생각에 관심이 있었는데, 한 번 읽어 봐야 겠네요^^

    •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읽고 난 다음, 생각했던 것보다 대단했습니다.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읽었다는 점이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천천히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실은 제가 쓴 리뷰도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쓸 시간이 없어 '무책임하게' 올려버렸네요.)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현실에 관한 사유의 전환: 철학적 헤르메틱)

H. 롬바흐 지음, 동진 옮김, 서광사

 

 

 

이미 품절된 책, 그리고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울 책이 된 롬바흐의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는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아폴론 디오니소스) 아래에서 아폴론과 헤르메스를 대비시키며 현대적 신화학, 혹은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을 시도한다. 하지만 많은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철학은 이미 미학화되었고 이 책도 그 지평을 따라 서사(신화)와 미적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양의 지적이며 미적이고 신화적인 세계들의 여러 사례들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사유를 설명해 가는 롬바흐의 서술은 이 책을 읽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하며, 하나하나 밑줄 긋게 만든다.

 

 

이 책은 헤르메스적 사유와 해석학적 사유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출발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해석학적 사유만이 인식론적으로 상세히 다루어졌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상당한 자의식을 전개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헤르메스적 사유는 이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은폐된 것을 사유하는 헤르메스적 사유는 스스로 은폐되어 있으며 유럽에서는 단지 부수적이고 미흡하게 파악되어 왔을 뿐이다.

- 한국어판을 위한 서문

 

 

서양 사상(철학), 또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아폴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헤르메스, 헤르메스적 사상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 

먼저 아폴론과 헤르메스에 대한 옮긴이의 설명을 옮긴다.

 

 

태양의 신, 빛의 신, 그래서 활쏘기의 신이기도 한 아폴론은 서양문화의 주류를 대변하는 신이다. 세계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용 퓌톤을 퇴치하고 델포이 신전을 맡은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쏘아 맞추며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병든 것을 치료하는 태양처럼 모든 것을 순화하고 정화한다. 즉 어둡고 나쁜 것에 대한 승리자인 아폴론은 중앙으로부터 모든 것을 가르고 각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지정해주며, 작고 악한 것을 구석으로 몰아붙인다. 이렇게 중앙에서 정해져 만물 위로 던져지는 질서는 반대 가능성들이 나타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질서는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아폴론이 태어난 섬은 델로스”(명백하게 드러난 곳)라고 불린다. 반면 헤르메스는 어두운 동굴에서 태어난다. 뱀 두 마리가 서로를 휘감고 있는 마법 지팡이와 날개 달린 신발, 그리고 여행모자 등을 신표로 하고 있는 헤르메스는 신들의 사자(使者)”이고 죽은 사람이 지하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돕는 영혼의 안내자이며, 전령과 통역자의 보호자이다. 즉 세계들을 넘나드는 그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들의 신이다. 이 신의 인도 하에 우리가 도달하는 세계들은 드러나 있는 일상성의 세계에 대해서는 불가해한 것, 그런 의미에서 닫혀 있는 어두운 세계들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들은 한없이 풍요로운 참된 자유의 세계들로 경험된다.

- 옮긴이 서문 


 

 이와 같이 아폴론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디오니소스와도 사못 다른 헤르메스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의미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저자는 신화, 신화와 관련된 서사 속에서 헤르메스의 의미를 찾아내며, 헤르메스가 가지는 현대적 의미에 주시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신화는 학문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훨씬 뛰어넘는 진리의 핵을 가지고 있다. 신화는 특히 인간과 인간의 공생 및 인간과 자연의 공생에 관한 생략되거나 망각되어서는 안 될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살아 남는 것은 학문적 진리보다 신화적 진리에 훨씬 더 많이 달려 있다. 신화는 학문보다 깊이 현실을 포착하고, 학문보다 총체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신화에 관한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고유한 학문헤르메틱이다. 헤르메틱이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 비록 평범한 오성에게는 파악될 수 없는것이지만, 살아 있는 이성에게는 분명한 것이고, 열린 감성에게는 확실한 것이다.

- 233



흥미로운 것은 이 책 내내 무수한 도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미술사적인 접근이 아닌 신화적, 철학적 접근이 매우 재미있었으며, 이런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에 신선했다. 

 

Italy - Emilia-Romagna - Parma. Cathedral. Dome. Correggio (original name Antonio Allegri, 1494-1534). Detail with putti. Fresco

 

 

푸토(Putto)는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그들에게 혼을 불어넣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내적 정신이다. 모든 것에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고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한 사태의 푸토를 해방시킬 줄 아는 자가 헤르메스적 인간이다.

- 139 

 

 

 

안토니오 코레조, ‘가뉘메데스유화, 1527~28년경, 빈 예술사 박물관


가뉘메데스는 헤르메스적 정신의 한 형상이다. 그는 비상(飛翔)의 정신으로서, 비상하는 생기사건 속으로 붙들려 들어가는 자는 신적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231

 

 

서양 신화나 철학적 신화학에 관심있다면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선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거창한 것을 기대하진 말기를.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 8점
H.롬바흐 지음, 전동진 옮김/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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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 8점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지음), 박진우(옮김), 새물결

 

이 책 전체의 핵심 주제는 바로 정치의 근본 범주를 ‘주권/벌거벗은 생명’의 관계로 새롭게 파악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를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이 과연 어떤 존재론적 층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근대 정치의 핵심 범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해명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근본 주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23쪽, 옮긴이 서문



옮긴이의 서문을 옮기지만, 이 책은 초심자가 읽기에는 매우 어려운 책이다. 현대적 지평 속에서 ‘주권’을 새롭게 해석하고 재창조하고 있는 이 책의 주제는 일반적인 독자가 소화시키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이 책에서의 아감벤의 의도는 ‘주권’이라는 것이 과연 실체화할 수 있는 것인지, 법에서 정의하는 ‘주권’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또한 국가의 국민에게 주어져 있는 ‘주권’이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지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파고 들어가 허울 뿐인 주권에 새로운 정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 즉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는 바칠 수는 없는 생명vita uccidibile e insacrificabile 즉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생명으로서, 우리는 그것이 현대 정치에서 어떻게 본질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인간의 생명이 오직 자신을 배제하는 형태로만 그러니까 면책 살인의 가능성을 통해서만 법질서ordnung 속에 포함될 수 있었던 고대 로마법의 모호한 형상은, 주권에 관한 신성한 텍스트들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정치권력의 약호들 자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 45쪽~46쪽



하지만 일반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모한 도전일 가능성이 높다. 꼼꼼한 독서와 노트가 요구되는 책이며, (정치)철학, 또는 정치학 전공자에게 매력적일 수 있으나, 그 외 분야의 독자에게는 추천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비난을 각오해야 할 종류의 일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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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의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 - 10점
앙리 베르그송 지음, 송영진 옮겨엮음/서광사




이 책은 질 들뢰즈(Giles Deleuze)가 "베르그송주의"(PUF,1968년)을 내고 8년이 지난 후에, 베르그송의 저작들 중에서 선별한 원문들로 구성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한 권으로 베르그송의 사상 전반에 대해서 일괄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다. 이미 국내에는 베르그송의 저작들이 많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특히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 진화"도 번역되어 있으니, 베르그송에 대한 척박한 환경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베르그송의 여러 저작들을 읽기 전에, 혹은 읽은 후에, 이 책은 요긴한 선집이 될 수 있겠다. 그만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베르그송의 철학 세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한 풍부하고 사려깊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에서 그친다. 나 같은 이가 베르그송의 철학이 어떠하네라고 떠드는 것은 주제 넘은 짓이다. 이 책은 몇 번 더 읽을 생각이고(좋은 책은 반복해서 읽어야 된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베르그송 저작들을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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