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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면도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Antonis Samarakis (지음), 최자영(옮김), 신서원, 1997 




전후 그리스 소설이 번역된 것이 드물었던 탓에 1997년에는 꽤 주목받았던 듯싶은데, 지금은 거의 읽히지 않는 듯 싶다. 번역자 또한 소설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이라가 아닌 탓에,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라키스를 한국에 소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찬사를 받아야 할 것이고 사라마키스의 소설은 다소 거친 번역 속에서도 유쾌하고 감동적이며 왜 뒤늦게 이 소설을 읽었을까 하는 후화까지 하게 만든다. 


전후 그리스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 그러나 그리스는 고대의 그리스가 아니다. 마치 이집트처럼. 서구 문명의 시작이었으나, 20세기 그리스는 격랑의 현대사 중심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채 침몰과 구조를 번갈아 가며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다. 그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고 이를 소설로 쓴 안토니스 사라마키스. 그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비극적으로 물들인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호하며 문학의 가치와 자유의 중요함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 <<면도>>의 초반 몇 편의 단편들보다 후반 단편들 - 정치적 메시지가 분명하고 노골적인 - 이 훨씬 감동적이다. 아마 그의 생애 전반이 전체주의와 독재 정권과의 갈등과 싸움의 연속이어서 그럴 지도 모르리라. 


디미트리스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묻힌다. 모두들 달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그를 가슴으로 껴안는다. 먼저 그의 어머니 엘레니. 너무 꼭 껴앉은 탓에 저고리 단추 하나가 수갑에 끼어 떨어져 나갔다. 그 다음 모두들, 모두 같이, 어떤 이는 안고, 어떤 이는 입맞춤하고, 어떤 이는 말을 건넨다. 

"우리 디미트리스!"

기쁨이 가득한 이런 장면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환희에 찬 인생.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춤을 춘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오늘 저녁 여기 모였는지를 잊어버렸다.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잊어버렸다. 내 마지막 장례를 위해 이리로 왔다는 것을. 내 아들 디미트리스가 내 것을 훔쳐가 버렸다. 그런데 나도 나 자신을 잊어버린다. 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모두가 나누는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본다. 육칠 미터 저만치 떨어진 곳. 저 쪽에 서서 그를 쓰다듬고, 웃고, 눈짓으로 가슴으로 말을 건넨다. ... 잘하는 일이다! 나는 괜찮다. 나 에브리피디스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주검일 뿐. 그러나 저기 저 디미트리스. 내 아들 디미트리스는 삶. 바로 그것이다. 삶의 아름다움이요, 희망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이 더 나은 것으로 탈바꿈하고 조금이라도 덜 비인간적이 될 것이라는 희망. 

- 137쪽 ~ 138쪽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잡혀들어간 아들. 그 아들이 수갑을 찬 채 뒤늦게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다. 아버지의 관 뚜껑은 닫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기다리던 그 젊은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픔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이 싹튼다. 다시 구치소로 가게 될 터이지만, 디미트리스는 괜찮다. 이미 죽은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며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기뻐한다. 그가 삶이며 희망이라며. 짧은 단편의 한 부분이나, 사마라키스의 소설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쩌면 안토니스 사라마키스의 삶도, 문학도 그랬는지도 모른다. 전후 그리스 소설가들 중에서 가장 널리 해외에 알려진 작가이기도 한 그는 현대 유럽의 참여 문학이 어떤 것이 알려준다. 실존주의 소설가들이 개인의 고독과 사색에 파묻혀 결국엔 누보로망으로 이어졌으나, 안토니스 사라마키스는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름없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드러낸다. 


그래서 그는 삶의 가치와 죽음에의 거부를 주장한다. 


"아무 가진 것이 없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당신은 존재할 가치가 있으며, 아무도 아무것도 누구도 당신을 부정하지 못한다!"

"당신은 스스로 죽을 권리가 없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게 해주고,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당신을 삶으로 끌어낸다. 삶과 동시에 타인과 관계를 맺게 한다.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는 당신이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의지할 곳이다. 이 단 한 사람이야 말로 당신에게 살 가치를 부여하는 탯줄이다. 고통과 진부함, 걱정과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지금 이 곳의 일상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죽음을 택할 수가 없다! 죽음을 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두 사람만 있으면 삶은 의미를 갖는다. 두 사람만 있으면 [죽음을] '거부'할 가치가 있다."

-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거부>> 중에서 


그리고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전진해야 하고 문학은 가치있다고 주장한다. 어쩌면 문학의 내부로 침잠해 들어간 현대 문학의 주된 경향에 반발하고 전통적인 견지에서의 문학의 가치를 말한 보기 드문 소설가였던 셈이다. 그는 정치적 투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삶을, 고통을, 미래를,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집의 어느 단편에서는 자살을 결심한 어떤 이가 끝내 자살하지 못하는 에피소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건물 바로 밑 거리를 가득 메운 반 정부 시위대 때문이기도 하고 그 아파트의 이웃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은 한 개인의 운명이 그 한 사람의 몫이 아닌 여러 사람들과 연결된 어떤 것임을 사라마키스는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문학은 지고의 위안이다. 인간의 광기와 생존 경쟁의 거칠고 암담한 지평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진부한 일상과 사회생활의 혼선과 갈등 속에서 문학은 오로지 위안을 가져오고 신비로운 환희로 우리에게 용기를 심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사이에 깊디깊은 이해의 다리를 잇는 것이다. 독자듥돠 말이다. 문학은 대화의 시작이다.

가치있는 문학은 독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독자와의 연결고리다. 문학은 친구가 내미는 손이다. 따라서 응답 없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과 예술의 마력은 타신의 손, 독자의 손이 당신 손에 뜨거운 우애로 와닿을 때 나타난다. 문학은 밤의 메이라이며 암속 속에 외침이다. 메이라가 없으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며 미완성일 뿐이다. 

- 234쪽 


책 말미에 실린 사라마키스의 자서전은 현대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문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우리 삶은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한 번 돌이켜보게 만드는 글이 될 것이다. 헌책으로는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구해서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새로 출간된 신간으로도 구할 수 있다. 나 또한 사라마키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을 생각이니까. 




안토니스 사라마키스 기념 우표. (현대 그리스 문학에서의 사라마키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아래 책은 역사 관련 학술서적을 전문적으로 내는 신서원에서 1997년에 전집 형태로 번역 출판된 이후 절판되었다. 그리고 2006년에 다시 <<손톱자국>>이라는 제목으로 그림글자라는 출판사를 통해 두 권으로 다시 출간되었고 지금도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다.  

면도 - 8점
안토니스 사마라키스 지음, 최자영 옮김/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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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된 카오스 - 6점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3년 4월 21일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강연 중에서), 279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필자가 함)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라는 부제가 붙은, 노르베르트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는 현대 사회 위로 물결치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환경 속에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문화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자의 기대(1)대로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현대 문명의 여러 변화를 ‘카오스’로 받아들이며 이 카오스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휴머니즘적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으로부터 작별하고 뉴미디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표현대로 1923년의 카오스와 1990년대 후반의 카오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볼츠는 ‘정신은 단지 관계들-상호작용들-상황들 그리고 콘텍스트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책들 중의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잡다하게 나열된 사례들과 인용문들은 어떤 구심점을 갖고 기술되었다기 보다는 수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볼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문명은 계속 카오스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도 코스모스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가 급변하여 갑자기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의 전환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또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속에 볼츠의 책처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자 한 저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되기에 볼츠의 이 책은 저자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오해될 여러 인용과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도리어 이런 데이터들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을 보다 뚜렷하게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츠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재 우리 일상의 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이나 세계관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삶은 총체적 예술이 된다’(35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이란 뉴미디어의 예술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1) 이 책은 비전문적인 일반 독자를 겨냥해 복잡한 문화 현상들을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들어 마치 백과사전처럼 서술하고 있어 사전 이해가 충분치 못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역자 머리말 중에서,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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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10점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아롬미디어



에라스무스 -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승리와 비극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하나의 세계관이 여기 있다. 하지만 이 세계관은 사람을 유혹하지도 선동하지도 그렇다고 뜨거운 열정을 내뿜지도 않는다. 언제나 차갑고 건조하다. 늘 조용하고 방관자의 시선을 가진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문제를 지적해내어 보는 이를 찬탄케 만들지만 곧바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는 그런 세계관이다. 그래서인지 이 세계관은 다른 편에 서서 보면 늘 우유부단하며 지나치게 신중하고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더구나 언제나 교육의 중요함을 설파하며 교양을 강조하고 문명화된 인간을 요구한다.

“현재의 제 모습, 저를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은 오로지 당신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Salve itaque etiam atque etiam, pater amantissime, pater decusque patreiae, litterarum assertor, veritatis propugnator invictissime.(안부 올립니다, 다시 한번 안부 올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조국의 명예, 예술의 수호신이여.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진실의 투사시여.)”

젊은 프랑수아 라블레는 늙어가고 지쳐가는 에라스무스를 향해 이렇게 고백한다. ‘교육과 웅변(eruditio et eloquentia)의 시대가 지나’가고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고 그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언어인 시대, 이제 사고한다는 것은 패거리들의 망상이 돼버렸고 루터식 아니면 교황식으로 획일화되고 학자들도 품위 있는 편지나 소책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시장 바닥 아낙네들이 하는 식으로 거칠고 저급한 욕지거리를 서로 퍼부어대는 시대’에 젊은 라블레는 고백을 한다.

흔히 인문주의로 번역하는 Humanism의 역사는 서구 근대의 역사이지만, 늘 미완의 역사로만 그친다. 하지만 ‘실현되는 않는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고 츠바이크가 서술하고 있듯이 무릇 진지하고 성실한 학자와 지식인들에게 인문주의의 이상은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막 시작하는 히틀러의 독일 속에서 에라스무스의 삶을 뒤새기면서 광신을 멀리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문주의의 이상과 염원을 갈구하고 있다.

“언제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스스로 지쳐버리는 것이 모든 광신의 운명임을. 영원한 것, 조용히 인내하는 것, 즉 이성은 기다릴 줄 알며 견뎌낼 줄 안다. 다른 것들이 흥분해 소란을 피울 때, 이성은 침묵해야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열정과 광신의 시대 속에서 츠바이크는 사람들에게 에라스무스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터,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 ‘에라스무스,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 브로노프스키, 매즐리슈,(<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윌리엄 L. 랭어 엮음, 푸른 역사, 388쪽)에서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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