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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은주

유현경, oil on canvas

180*140cm, 2017 

출처: http://www.mu-um.com/?mid=02&act=dtl&idx=2370



화가와 모델은 마주 보는 거울처럼 각자 서로의 모습을 비추거나 튕겨내면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장면들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두 시선이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힘이 균형점에 도달할 무렵, 작품의 의미가 완성된다.

'은주'라는 작품도 그런 과정을 통해 구성해낸 결과물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작가는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모델은 아무 것도 후련하게 내보이지 않았고, 화가는 뭘 포착해야 할 지 몰라 미로 속을 헤맸다. 

- 이주은, <모델, 화가 그리고 예술권력>, 중앙일보 2018년 3월 3일 



이주은의 글을 보고 작품이 무척 궁금했다. 일요일 오전 메모해둔 노트를 우연히 발견하고 작품을 찾아보았다. 작가의 말대로 작품은 어딘가 막막하고 답답해 보였지만, 그건 작가가 아니라 모델이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 모델을 잘 옮긴 셈이다. 


우리는 자주(너무 자주)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해결하거나 명확해져야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이 문명이 만들어졌고 철학에서 말하는 바 '이성'이란 것도 그렇다. 이성이란 기본적으로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의 노예다. 결과가 있으면 무조건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면 그건 이성이 탐구해야 될 영역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연코 도덕이란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진짜 그런 걸까. 


현대의 반-이성주의는 여기에 기초해 있다. 즉 이 세상은 너무 자주 우리를 막막하고 답답하게 만들고 그렇게 버려두고 저 멀리 우리를 원인도 모를 어딘가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절망에 휩싸이는 것도 이 때문이고 현대의 예술가들이 끝없는 실험의 방황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바야흐로 현대란 이 문명의 기조를 정한 어떤 것, 기하학적이며 인과율적인 것들에 대해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냥 막막하고 답답한 게 원래 이 세상이라 여기고 그대로 옮길 순 없는 걸까. 그리고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그것을 그대로 옮기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어떤 이론에 따르면, 그 막막하고 답답한 풍경을 마주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건 작가가 아니라 관람객이다. 현대 예술의 장점은 어쩌면 이런 무책임함(?)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사라지고 익명의 관람객들만 남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관람객들이 캔버스에 담기게 될 것이다. 


전시 보러가지 않은 지 참 오래되었다. 나도 조금은 무책임해진 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장소들과 존재들에 대해서. 그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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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 a walk 

      이인선 개인전

      정동경향갤러리(경향신문사 별관 1층), 2005년 8월 23일 - 29일

 

 

#1. 상실의 시대


언제부터 가슴 한 켠에선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스치는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의 잿빛 거리에서, 익숙한 간판의 낡은 커피향이 풍기는 찻집에서, 자욱한 담배 연기로 가득한 호프집에서, 누군가를 만나 원색 계열의 즐겁고 화려한 수다를 떨고 있는 동안마저도 거친 세파에 네모진 가슴의 어느 모퉁이에선 무관심에 방치되어 사라져가다가 결국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겨우 그 어떤 것이 있던 자국만 남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쓸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왜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이 느낌은 나만 가지고 있는 느낌일까. 가끔 거리 한 복판에서, 그 공간 속에서 나의 이름을 아는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끔찍한 공포를 느낀 적이 있었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이 ‘모더니티’라고 열광했던 그 기분을 느낄 때마다 등에 땀방울 맺히고 시선은 좌우로 흔들리며 파란 하늘은 우주 끝으로까지 밀려나는 듯하고 회색빛 벽에 잠시 몸을 기대고 이마의 땀을 손바닥을 닦아낼 때,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반문해보곤 한다.


왜 지금/여기 지금 여기에 있는가하고 묻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질문이 얼마나 허황된 질문을 깨닫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그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저 우연적인 현상일 뿐. 나의 삶이 이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2. 현대의 산책자


산책자란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도는 방랑자다. 자신의 익명성을 즐기며 타인의 익명성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는 18세기 이후에야 시작되고 19세기에서야 본격화된 낯설고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19세기의 예술가들을 사로잡았던 그 경험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산책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안절부절 못하다가 극도의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이 낯설어졌을 때, 예술가들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양식에 몰두하게 되지만, 모더니즘의 이러한 양식은 결국엔 낯설어진 세계 앞에서 극단적으로 개인화되고 주관화된 양식으로 변모해갔다.


19세기의 산책자와 21세기의 산책자는 똑같이 낯선, 익명의 공간 속에 놓여진다. 하지만 19세기의 산책자는 그 곳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해 내지만, 21세기의 산책자는 그 곳에서 뒷걸음질치다가 결국에는 그 낯선 공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개인화되고 주관화된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주관화된 공간 속에서 떨쳐내지 못한 막연한 상실의 느낌과 싸우기 시작한다. 똑같은 산책이지만, 결국엔 19세기의 산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산책으로 변해간 것이다.


낯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익명의 공간 속에서, 버려진 듯한 느낌으로 길을 걷다가도 익숙한 어떤 이의 이름을 듣거나 익숙한 물건이나 음악을 듣게 될 때,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막연한 상실감에서 잠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이인선은 똑같은 산책자이면서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거리를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낯선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익은 듯한 풍경을 찾아내고 그 풍경을 자신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변용시킨다.


#3. 익숙한 산책


이인선의 <1367-1 번지>는 거대한 익명의 도시 모퉁이에 흔히 볼 수 있는 낡고 오래된 건물을 캔버스에 옮긴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드러나 있는 건물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좀 더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풍기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인선의 작품들이 가지는 특징은 여기에 있다. 일련의 <1367-1 번지> 작품들은 거대한 도시 문명 속에서 늘 익명성의 타자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느낀 고립감, 쓸쓸함, 막연한 상실감 등을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으로 변화시킨다. 그래서 쓸쓸한 도시의 변두리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어떤 건물을 옮겨와서는 비현실적인 어떤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그 건물 속에서 견고하고 따뜻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어떤 건물 하나가 화가의 작업을 통해 거칠고 차가워 보이는 형태감이나 색채를 잃어버리고 아주 오래전에 우리 옆에 있었을 법한 어떤 풍경 속으로 자리 잡게 된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어느 순간 잊고 지내온, 그래서 외부와는 아무런 소통도 없이 따로 떨어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어떤 풍경을 이인선은 외부 세계의 어떤 풍경 속에서 끄집어내고 그것을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다.


이제 낯설음으로 열광하던 산책자에서 낯설음을 익숙함으로 변화시키는 산책자로 자리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글쓴이. 김용섭)






* 2005년에 쓴 글이다. 자료 관리를 위해 블로그에 업로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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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simmon Tree(감나무)

Sakai Hoitsu 

(Japanese, 1761-1828)

Period: Edo period (1615-1868)

Date: 1816

Culture: Japan

Medium: Two-panel folding screen; ink and color on paper

Dimensions: Image: 56 9/16 x 56 5/8 in. (143.7 x 143.8 cm) Overall: 65 1/4 x 64 in. (165.7 x 162.6 cm)

(c)Rogers Fund, 1957. Metropolitan Museum. 




사카이 호이츠(Sakai Hoitsu)의 작품이다. 타라시코미(Tarashikomi)기법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일본적이나, 서구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19세기 초, 일본에는 이미 서구의 문물이 많이 유입된 상태인 듯 싶다. 사카이 호이츠는 유복한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나중에 출가하여 스님이 된다. 타라시코미 기법이 어떤 것인가 검색해 보았더니, 한글로는 푸하, 네일아트가 뜬다. 이는 구글도 마찬가지여서, 타라시코미 기법을 알기 위해선 영어로 검색해야 된다. 한글로 온라인 상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종종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타라시코미는 일본 회화의 기법 중 하나로, 첫 채색이 마른 후에 두 번째 채색을 하는 기법이다. 두 번째 채색을 할 때 잔 물결이나 꽃잎 등을 흠뻑 젖게(dripping)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위 작품에선 감잎이나 감에서 이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페이스북에 올라온 작품인데, 내 마음에 들었다. 한 쪽을 여백으로 처리하고, 감나무 하나, 그런데 이 감나무도 나무만 남게 될 암시가 가득한 이 작품은 마치 서양의 바니타스(Vanitas)화처럼, 쓸쓸하게 지쳐갈, 외롭게 죽어갈, 그러나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오게 될 봄을 기다리는 느낌이랄까. 벤야민의 페허 같았다. 


우리는 종종 끝없는 절망이나 견딜 수 없는 우울,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빠지지만, 결국 살게 되고 살게 되는 원천이 이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심연 속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언젠간 봄이 올 것이고 그 때를 위해 고통스럽더라도 현재에 충실하고 오게 될 미래에 대해 생각하자. 어차피 인생은 힘들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니 말이다. 





참고. 

1) 타라시코미 : http://en.wikipedia.org/wiki/Tarashikomi 

2) 일본 에도 시대의 painting 작품들만 모아 한국에서 전시하면 어떨까? 꽤 흥미로울 것같다. 혹시 진행하게 된다면 내가 가서 자원봉사하겠다. 전시설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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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ockney 

Bigger Trees Near Warter

2013. 9. 3 - 2014. 2. 28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 




(각 나라의 국립미술관끼리는 소장 작품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협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료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작품을 전시하는 비용보다 작품 운송/전시 과정에 들어가는 보험료가 더 비싸 한국의 국립 미술관들은 이런 협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전시를 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보험료를 내기 위해 국립 미술관의 예산을 늘여야 된다고 이야기하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문화예술 관련 예산은 턱없이 모자라기만 하고, 결국 공공을 위해 존재하는 국공립 예술 기관들이 수익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익 목적의 과도한 수익 사업은 그 기관의 공익성을 해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고. 하긴 예술 기관들의 재정적 위축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닐 것이다. 다만 국공립 예술 기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여하튼 그래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는 2008년 파리 피악Fiac에 최초로 봤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이니, 당연 놀라운 감동적인 작품들로만 가득찼을 그 곳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몇 개 되지 않는 작품들 중 최고가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어떤 풍경화였다. 피악에 나오는 갤러리나 그 갤러리가 가지고 나오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한국의 여느 갤러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독보성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풍경화들 중의 한 작품이, 그것도 50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품이 한국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아, 아래 이미지로는 이 작품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아주 작은 일부도 느낄 수 없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부디 부탁하건대,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 가서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나고 오길 바란다. 그가 왜 현존하는 작가들 중 최고인지 느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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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근작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높이가 4.5m, 길이가 약 12m에 달하는 이 작품은 총 50개의 캔버스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호크니가 자신의 고향 요크셔로 돌아왔을 때 크게 감동을 받은 풍경으로 브리들링턴 서쪽, 와터 근처의 봄이 오기 직전, 나무에 새순이 솟아나는 그 때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전경에는 키가 큰 나무들과 만개한 수선화들이 피어 있는 모습이 자리하고 있고 화면 구성 상 중심에는 가지를 뻗은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있다. 전경의 잡목림 뒤쪽으로는 분홍빛이 도는 또 다른 작은 관목숲이 배경으로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곡선을 그리며 멀어져가는 열린 길이 있고 오른 쪽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듯한 집 두 채가 있다. 그림의 상단부는 나무의 크고 작은수많은 가지들이 얽히고 설킨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 규모로 인해 앞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마치 실제 나무 숲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보는 이들은 이제 호크니가 말하는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 그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 전시 설명 중에서 



호크니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 




데이비드 호크니와 관련된 이전 포스팅. 


2012/07/10 - [예술의 우주/예술가] -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

2008/10/30 - [예술의 우주/예술마케팅] - 파리의 미술축제, FIAC에 가다.

2006/06/02 - [예술의 우주/예술가] - 'Peter Getting Out of Nick's Pool' by David Hockney 데이빗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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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 상에는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들이 있을까? …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찔해진다. 내가 읽었고 보았던 작품은 극히 일부였고, 그 일부만으로도 내 삶은 변화되었고 내 마음은 감동받았으니, 나는 내가 변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니 말이다.

서가에 쌓여있던 종이 뭉치들을 정리하다가 2008년에 있었던 쥴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아시아 순회전 전시 소개 프린트물을 발견했다. 바스키아의 친구로 더 유명한 슈나벨은 1980년대 미국 New Painting의 대표 작가였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역시 영화는 대중적인 매체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감독 슈나벨로 나오는 것이 더 많구나)

갤러리 현대에서 작성한 전시 소개 글을 옮기면서, 줄리앙 슈나벨의 작품들에 대해 되새겨 본다.

1980년대 미국 뉴 페인팅(New Painting)의 대표주자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의 최초의 아시아 순회 회고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9월 베이징(Beijing World Art Museum, 9월 12일 ~ 10월 19일)을 시작으로 홍콩(10 Chancery Lane Gallery, 11월 6일 ~ 11월 27일), 상하이(Shanghai Zendai Museum of Modern Art, 2008년 1월 19일 ~ 2월 18일)를 거쳐 3월 서울(Gallery HYUNDAI, 3월 19일 ~ 4월 6일)에서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전세계인의 이목을 주목시켰던 접시 회화(Plate Painting), 블랙페인팅(Black Painting)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대표작 30여 점이 소개된다.

슈나벨은 현재 55세로, 1980년대 미국 뉴 페인팅을 선도하였다. 그는 캔버스 대신 도자기가 붙어 있는 표면, 동물가죽, 벨벳, 타르를 칠한 천 등의 특별한 질감을 가진 바탕에 화려한 색채의 공격적이고 과감한 스타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형 사이즈의 작품과 매체에 대한 주목이 그를 동시대 미술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하였다. 1979년 뉴욕 최고의 화랑 메리 분 갤러리(Mary Boone Gallery)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 미술계에 발을 내딛은 슈나벨의 작품은 전세계 미술관과 주요 컬렉터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슈나벨은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동료 작가 바스키아의 인생을 그린 <바스키아Basquiat>를 연출해 주목을 받았으며, 최근 2007 칸느 영화제에서 <잠수 종과 나비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번 아시아 순회전은 서울의 갤러리 현대와 뉴욕의 아트 컨설팅업체인 포춘 쿠기 프로젝트(Fortune Cookie Project)가 공동 기획했으며 슈나벨 작가 스튜디오의 협조로 모든 전시되는 작품은 작가 컬렉션이다.


슈나벨의 작품은 아래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 갤러리 현대의 쥴리앙 슈나벨 전시 관련 웹페이지
http://www.galleryhyundai.com/kor/exhibitions/introduction.asp?SiteNum=1&ArtistsPK=&ExhibitionsPK=21&iExhibitKind=P 

- 쥴리앙 슈나벨 웹사이트 내 Painting 작품 페이지
http://www.julianschnabel.com/category/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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