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8

주부 모드, 그리고 짧은 생각,들.

매주 제안서에, 제안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수면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졌고 매주 긴장의 연속이다. 피곤한 몸을 끌고 집으로 오는 길. 동네 야채가게에서 부추, 상추, 대파를 사서 왔다. 주부 모드다. 하긴 요즘 집 식사 준비는 거의 내가 하고 있으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통영에서 올라온 멍게가 와 있었다. 아이에게 멍게 비빔밥을 해주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 보이는 아이에게 일찍 자라고 하곤, 혼자 멍게를 회로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밤 늦게 들어온 아내에게도 멍게를 꺼내 회로 만들어 주었다. 다들 잠이 들고 난 뒤, 나는 계속 혼자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재에 잠시 누었는데, 전등을 켠 채로 잠이 들었다. 자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나도 모르게 잠에 든 경우가 좋다. 요즘은 자려고 노력해서 ..

금요일 오후의 캠핑

한 일이 년 열심히 캠핑을 다니다가 요즘 뜸해졌다. 그 사이 우리 가족 모두가 바빠졌다. 더구나 올해는 아이가 성당 첫 영성체 반에 들어가면서. 나 또한 아이와 함께 일요일 오전 시간을 비워야만 한다. 일요일을 끼고 갈 수 없어 결국 금요일 오후 캠핑을 가기로 했다. 아내는 직장과 학업으로 모든 것에 열외된 상태라, 나와 아이 단 둘이 가는 캠핑이었다. 아빠와 아들, 하긴 단 둘이 여행을 자주 다녔던 터라 별 이상할 것도 없다. 오후 일찍 출발한다는 것이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늦게 출발하여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식사를 먹으려고 보니, 밤이다. 피곤했던 탓인지, 집에서 먹다 남긴 와인 반 병과 맥주 몇 캔을 마시고 보니, 취했다. 실은 내가 취한 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 자..

대학로 그림Grim에서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매서운 바람이 어두워진 거리를 배회하던 금요일 밤, 그림Grim에 가 앉았다. 그날 나는 여러 차례 글을 쓰지 않냐는 질문을 받았다. 가끔 내가 글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대답할 수 없다. 적어도 그것이 해피엔딩은 아닐 것임을 나는, 어렴풋하게 안다. 마치 그 때의 사랑처럼. 창백하게 지쳐가는 왼쪽 귀를 기울여 맥주병에서 투명한 유리잔으로, 그 유리잔이 맥주잔으로 변해가는 풍경을 듣는다. 맥주와 함께 주문한 음악은 오래되고 낡은 까페 안 장식물에 가 닿아 부서지고, 추억은 언어가 되어 내 앞에 앉아, "그녀들은 무엇을 하나요?"라고 묻는다. 그러게. 그녀들은 무엇을 할까.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할까. 콜드플레이가 왔다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

금요일의 의미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블로그에서 진행하는 서평 이벤트 2개에 참여했다. 그리고 2개 다 당첨되었고 1주일 동안 2권을 책을 읽고 서평을 올려야만 했다. 허걱. 1주가 지난 건지, 2주가 지난 건지 가물가물하다. 한 권의 책을 빠르게 읽고 서평을 올렸다. 서평의 첫 문장이 이렇다. '이 책, 천천히 읽어야 한다' ㅡ_ㅡ;; 나머지 책은 이제 서문을 읽었다. ㅜ_ㅜ (아, **출판사님 미안) 읽고 있던 손재권 기자의 책, 알렝 투렌과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책은 멈춰진 상태다. 제안서 하나를 써서 수주했고 여러 번의 미팅 끝에 또 하나 계약을 할 예정이다. 조직 개편이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도 뽑아야 한다. 아는 분의 소개로 '머리에 쥐 나는' 원고 작업을 하나 하고 있고 그리고 오늘은 금요일이다.그렇다. 금요일이..

금요일의 출근

김포공항 옆에서 2호선 선릉역까지 오는 건, 꽤 고역이다. 지하철 안에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었다. 대학은 오직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뿐이며, 교수들은 오늘날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가 말해질 수 있는 것과 보여질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아는 것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다고 나는 느꼈다. (13쪽) ... 때때로 우리는 석공이 되고 싶은 때가 있다. 돌을 깨는 데는 의심이 깃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페이지마다 의심과 두려움 - 캄캄한 공포가 있다. - 조셉 콘라드 (3쪽) 그 사이 많은 책들을 읽었다. 허균의 누이였으며, 조선 시대 가장 뛰어난 여류 시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에 대한 책을 읽었고, 조르주 아감벤의 '호모 사..

금요일이 가지는 어떤 공포

금요일, 5시에 일어났다. 아직 어두울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도시는 환해 있었다. 2주 정도 청소를 하지 못한 탓에, 한 명, 옐로우빛깔 사내가 푸른 곰팡이처럼 서식하는 작은 빌라에는, 온통, 낡은 먼지들과, 이리저리 나뒹구는 시디들과, 이미 그 존재의 위력을 잃어버린 LP들, 읽다만 하이데거, 여러 권의 미술 잡지와 도록들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형이상학적 대기의 밀림 같이 느껴졌다. 지난 계절 벽에 걸어놓은, 철 지난 겨울 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사각형으로 구획지어진 밀림 속에서, 한 달, 두 달 밀린 여러 고지서들을 한 쪽에다 밀어제치곤, 브람스와 슈베르트를 들었다. 이른 아침, 낮게 깔리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향이 진한 커피를 마셨다. 육체는 그간 쌓인 피로를 못 견뎌했으며, 정신은 얇게 흐..

금요일 오전

창을 연다. 방충망이 없는 쪽으로 여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바람이 밀려온다. 금세 비는 그치고 얇은 구름 뒤 태양의 흔적이 책상 위로 와 닿는다. 여름 감기에 걸렸는데, 그간 피곤했었나 보다. 거의 12시간을 잤다. 오디오에 시디 한 장을 집어넣고 금요일 오전의 고요를 즐기려고 하지만, 내 일상은 그리 즐겁지 못하다. 소주를 마시곤 휴대폰을 잃어버린 탓에 연락처를 다 상실했으니, 연락할 곳도 그리 많지 않다. 자주 배는 아프고 술만 마시면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순수한 언어는 내 영혼을 빗겨 저 흐린 하늘 위로 달아나버린다. 암울하다면 암울하다고나 할까. 슬프다면 슬프다고나 할까. 아무렇지 않다면 아무렇지 않다고나 할까.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런데 ..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금요일 저녁 약속이 세 개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밤 10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벤처를 하다 망해먹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 술을 마셨고, 그 중 운 좋게 H그룹 홍보실에 들어간 모 대리가 술을 쏜다고 했다. 맥주를 서른 병 정도, 그 사이 J&B 리저브와 몬테스 알파 까르비네 쇼비뇽을 마셨다. 그리고 그 대리의 집에서 죽엽청주와 들쭉술(* 캡틴큐와 나폴레옹을 섞어놓은 듯한 북한 술)을 마셨다. 결국 뻗었다. 일어난 것이 토요일 오후 3시였으니, 그냥 술에 토요일을 그냥 날려먹었고 일요일도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겨우 밤에 힘들게 자전거를 끌고 나와 한강변을 달렸다. 몸을 적시는 서른넷의 땀방울들. 어느새 육체를 움직여야만 정신을 차리는 둔한 사람이 되어버린 건가. 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 200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