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5

음반들, 그리고 우리들의 기다림

몇 번의 이사,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생의 변화 앞에서 음반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한 때 자신들의 소리를 보여줄 도구들마저 없었을 때, 아마 그들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주중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전, 음반들 한 무더기를 꺼내 한 번 정렬해 보았다. 다들 오래된 음반들이다. 심지어 존 케이지(John Cage)를 연주한 음반도 눈에 보이지만, 몇 번 들었던가, 언제 마지막 들었던가, 그런 기억마저도 없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아줄 이를 만났을 때에만 그 빛을 발한다. 그건 그녀도, 그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대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알리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구차하고 쓸쓸한 일인가를, 한 번이라도 ..

기다림

기다림은 시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는, 느린 걸음이다. 동시에 마음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심적 동요이기도 하다. 그것은 너무 미세해서 알아차리기 힘든 진동이자 떨림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예측가능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희망이라든가 바람만 있을 뿐. 몇 분, 혹은 몇 시간 후, 또는 더 먼 미래의 어떤 결론을 알지 못하기에 기다림은 모험이며 방황이며 결국 우리의 영혼에게 해악을 끼칠 위험한 존재다. 그러면서 기다림은 누구, 언제, 어떤 일로, 어떻게에 따라 그 무늬와 색채가 달라지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기다림은 다채로운 변화이며 파도이고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빛나는 물결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별의 운동처럼 한참을 들여다 보아야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모리스 블랑쇼 -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것, 즉 기다림을 하나의 중성적 행위로 만드는 것에 주의하는 것, 자기에게 감겨서, 가장 내부의 것과 가장 외부의 것이 일치하는 그러한 원들 사이에 끼여서,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시 향하는, 기다림 속에서의 부주의한 주의, 어떠한 것도 기다리기를 거부하는 기다림, 발걸음마다 펼쳐지는 고요의 자리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중에서

기다림, 망각, 속에서 기다린다는 것.

기다리는 것, 즉 기다림을 하나의 중성적 행위로 만드는 것에 주의하는 것, 자기에게 감겨서, 가장 내부의 것과 가장 외부의 것이 일치하는 그러한 원들 사이에 끼여서,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시 향하는, 기다림 속에서의 부주의한 주의, 어떠한 것도 기다리기를 거부하는 기다림, 발걸음마다 펼쳐지는 고요의 자리-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중에서

속도의 배신, 프랭크 파트노이

속도의 배신 - 프랭크 파트노이 지음, 강수희 옮김/추수밭(청림출판) 속도의 배신프랭크 파트노이(지음), 강수희(옮김), 추수밭 상당히 좋은 책이다. 특히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정권이 바뀌거나, 혹은 총리나 장관이 바뀌면 (타당성 검토나 배경에 대한 설명 없이) 장기 정책의 방향도 바뀌고, 5년 후나 10년 후의 미래에 대해선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고작 1~2년의 미래 정도에만 관심이 있고, 심지어 그것마저도 무시한 채 당장 내일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 단기 기억 상실에 걸려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까지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나라. 어쩌면 이 사회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선 무관심한채) 무조건 앞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