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8

추억은 술을 마시고

입구는 좁았다. 대형병원 한 쪽 귀퉁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전부였다. 몇 명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하얀 담배 연기는 지하와 지상 사이를 빙글빙글 오가기만 할 뿐, 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리곤 금세 희미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앞에 현금인출기 한 대가 외롭게 서있었다. 죽음이 왔다가 가는 공간 앞의 외로운 ATM. 그 앞에서 사람들은, 나는 현금을 뽑기 위해 서있었다. 작년치 성당 교무금이 두 달 밀려 있어서 그 돈까지 같이 뽑았다. 이젠 현금이 드물어진 시대다. 천천히 걸어나와 복도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조의금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꺼내 차가운 현금인출기 속에 있던 만원 짜리 다섯 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조의금 봉투를 전달하며, 조의를 표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 전에 ..

생각의 한계, 로버트 버튼

생각의 한계 On Being Certain 로버트 버튼(지음), 김미선(옮김), 더좋은책 사고는 항상 더 어둡고, 더 공허하고, 더 단순한 우리 감각의 그림자이다. - 니체 책을 읽으면서 노트를 하고 노트된 것을 한 번 되집은 후 책 리뷰를 쓰면 좋은데, 이 책 는 완독한 지 몇 달이 지났고 노트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은 탓에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종교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땐 꽤 흥분하면서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로버트 버튼도 우리의 기억이 변화하고 조작된다는 사실을 이 책 초반에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가 안다라고 할 때, 그것은 감각적인, 일종의 느낌일 뿐이지, 흔히 말하는 바 논리적인 것이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스테이지 나인

퇴근길, 우연히 마주친, 새로 생긴 동네 더치 커피 전문점, 스테이지 나인. 그리고 잠깐 동안의 커피 여행. 짧고 굵은 목넘김, 낮고 은은한 향기, 초봄 햇살이 빌딩 사이로 사라지고 그 틈새를 물들이는 어둠. 출렁이는 어두움이 입술에 닿을 때,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 나는 역시 예가체프구나. 우아하고 깊은 시원함. 시큼함. 쓸쓸함. 허전함. 지난 청춘 깊이 숨겨져 있던, 늙어가는 피부 아래 잠겨있던, 그 기억이 무심한 거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함께 다가오는 공포여. 내 삶, 미래의 두려움이여. 쫓기듯 뭉게, 뭉게, 뭉게위로, 위로, 올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이여,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들뜬 모험이여, 얼마 남지 않은 내 영혼의 불꽃을 앗아갔던 사랑이여.

대구에서의 오후

8월 태양은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았다. 투명한 대기는 흐릿한 내 미래와 대비해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동대구역은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대구역은 공사 중이었다. 대학 시절 몇 번 대구엘 갔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내 소심함 탓이었다. 나는 배려한다는 핑계로 내 소심함을 감추었다. 그래서 나 말고 당신이 적극적이길 바랬다. 어긋나는 건 예정되어있었고 나는 일반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다. 일 때문에 내려갔다. 일이라는 것도 임시적인 것이라, 적극성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거나 세월 속에 자신의 습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는 건 나를 오래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만 사는 환경이 달라졌을 뿐. 그래서 내가 적극성을 띄자 당신..

현기증.감정들, W.G.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Schwindel. GefühleW.G.제발트(Sebald) 지음, 배수아 옮김, 문학동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95쪽)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외국에서', 'K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귀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일까, 아니면 장편소설일까. 아니면 이 구분이 그냥 무의미한 걸까. 장편소설이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고 하기엔 4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의식을 공유하는데, 그건 여행(에의 기록/기억)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도시로의, 서로 다른 시기 속에서의, 하지만 ..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W.G.제발트Sebald

아우스터리츠 Austerlitz W.G.제발트(지음), 안미현(옮김), 을유문화사 병상에 누워, 안경을 쓰지도 못한 채, 제발트의 를 읽었다. 병상에서의 소설 읽기란, 묘한 느낌을 준다. 일상을 벗어난 공간 속에서, 현실은 적당한 거리를 둔 채 떨어져있고, 허구와 사실은 서로 혼재되어 혼란스럽게 한다. 시간마저 겹쳐 흐르며 외부는 모호해진다. 어쩌면 현대 소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처럼. 제발트는 소설 중간중간 사진들이 인용하는데, 마치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허구와 사실 사이를 오가며, 소설은 대화의 인용으로 이루어진다. 문장의 호흡은 길고 묘사는 서정적이면서 치밀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슬프기만 하다. 과거는 추억이 되지..

현실과 꿈

블로그에 작은 글 하나 써서 올릴 틈도 없는, 하루하루가 지난다. 낮엔 잠시 비가 왔고 우산을 챙겨나온 걸 다행스러워 했으며, 저녁엔 비가 그쳤고 손에 든 우산이 거추장스러웠다. 내 과거는 다행스러웠고 내 현재는 거추장스럽다. 집에 와서 페이스북에 한 줄 메모를 남겼다. * *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을 현실로 만든다는 건 ... ... 반대로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다. 현실을 꿈으로 만들겠다. ... ... 거참, 힘든 일이다. * * 십수 년전부터 선배들을 따라 간 호텔 바를 얼마 전에도 갔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와인을 마셨다. 한창 와인 마실 때가 그립다. 그 땐 미래가 있다고 여겼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세상이 엉망이 되었다. 이젠 술을 마시기도 힘든 시절이 되었다...

세월호와 댓글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난 다음,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사실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우리에겐 구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끔 할 수 있었다.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잘못 엮어져,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그리고 승객들은 전화통화를 하다가, 구조를 기다리다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 이 나라는 한 걸음도 앞으로 가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일이 왜 일어났고, 왜 구조 작업은 그 따위로 진행되었으며, 구조 과정 속에서 일어난 어수선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들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까?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벽 -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

누런 먼지 같은 중년

어떤 기억은 신선한 사과에 묻은 누런 빛깔 먼지 같았다. 그래서 그 사과가 누런 흙 알갱이로 가득했던 맑은 하늘 아래의, 어느 과수원에서 익숙한 손길의, 적당히 성의 없이 포장되어 배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스테인리스 특유의 무심한 빛깔을 뽐내는 주방 앞의 아내 손길에 그 먼지는 씻겨져 흘러 내려갔다. 그렇게 어떤 기억들은 사라졌다. 문득 내가 나이 들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15세기 중세 서유럽이었으면, 이미 죽었을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 편으론 감사하고 한 편으론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만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어떤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그저 시간의 틈에 끼어 오래되어 지쳐 잠들 뿐이다.그 잠든 모습을 스스로는 돌이켜보지 못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