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14

저 사람은 알렉스, 욘 포세

저 사람은 알렉스 Det er Ales 욘 포세Jon Fosse(지음) 정민영(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시간은 겹쳐지고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대화를 하며 사라진다. 어슬레의 실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하여 그 공간 속으로 어슬레의 고조할머니가 등장하면서 약간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욘 포세 만의 흥미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마치 한 무대의 한 쪽 편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다가 그 무대의 불이 서서히 꺼지면서 다른 편 무대에 불이 환히 들어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되듯 소설의 문장도 그렇게 이어진다. 지극히 연극적이거나 영화적인 수법이다. 이렇듯 현대의 장르는 서로 다른 장르들에게 영향을 주며 각 장르들의 표현 방식을 풍성하..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지음), 신유진(옮김), 1984북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듬어 보니 그녀의 소설은 딱 한 권 읽었다. 더 있을 듯한데, 기록된 것은 뿐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평가도 평범해서 금세 잊혀진 소설이었다. 그 당시 읽었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투르니에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린 작품이었음을 이 인터뷰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

자비 A Mercy, 토니 모리슨

자비 A Mercy 토니 모리슨(지음), 송은주(옮김), 문학동네, 2014년 토니 모리슨의 2008년도 소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는 건 수십년만이다. 고등학교 때 읽은 (Beloved)는 흐릿하기만 하다. 방황하던 십대 시절, 사랑을 알고 싶어 읽었지만, 그 때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힘겹게 끝까지 읽었고 슬프고 아련한 기분에 빠졌다, 아니면 그 시절 전체가 슬프고 아련했을 련지도. 왜 그녀는 이 소설에 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성당 미사 때 읖조리던 '자비'라는 단어와 겹치는 건 플로렌스에게 글을 가르쳐준 신부님 때문일까. 하지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위선적인 카톨릭 신자로 인해, 그리고 그 이후의 침례교도들을 보면 이 소설이 딱히 교회에 우..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Dance of the happy shades앨리스 먼로 Alice Munro (지음), 곽명단 (옮김), 문학에디션 뿔, 2010 두 번째로 읽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1968년에 출간된 그녀의 첫 단편집. '옮긴이의 말'에서 옮기자면, '여러 해 동안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소설집.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책이다.젊었던 그녀가 쓴 단편들이 모인 책이다. 로이스는 치맛자락을 떨어뜨리고 손바닥으로 내 따귀를 후려쳤다. 나를, 아니 우리 둘을 건져준 따귀였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한바탕하고야 말겠다고 내내 벼르고 별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156쪽 이 짧은 문장만으로 이 소설집, 혹은 이 단편, 를 전달하긴 어렵겠지만, 보이지 않는 내일보다 지금..

충분하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지음), 최성은(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 왜 내가 새삼스럽게 외국 번역 시집을 읽으며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된 시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아마 언어 너머로도 전해지는 시적 감수성, 또는 해석의 가능성, 그리고 지역과 언어를 관통하며 흐르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태도 같은 것에 감동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쉼보르스카의 시들은 한글로 옮겨지더라도 그 시적 매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는 역자의 노고일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 자체가 가진 힘을 그만큼 대단한 것일 게다. 내가 잠든 사이에 뭔가를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어딘가에 숨겨 놓았거나 잃어버린 뭔가를..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르시아 마르케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1.이름 없는 사람들의 독자성으로 포장된, 도시인의 무관심으로 가득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맞은 편 사람에게 떠들고 있을 뿐인, 소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도심의 커피숍에는 무의미한 젊음을 소비하기 위한 21세기의 이십대만 가득했다. 희망을 잃어가는 중년은 없었고, 이승만, 새마을운동, 유신 시대를 겪었던 과거의 기억을 마치 찬란했던 영화처럼 여기는 노년도 없었다. 그저 방향을 잃어버렸고 애초에 방향 따윈 없었던 이십대만 있었던 어느 커피숍에서 나는 ..

저지대, 헤르타 뮐러

저지대 -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문학동네 저지대 헤르타 뮐러(지음), 김인순(옮김), 문학동네 참 오래 이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오래 읽은 만큼 여운이 남을 진 모르겠다. 번역 탓으로 보기엔 뮐러는 너무 멀리 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녀의 양식이 낯설다. 자주 만나게 되는 탁월한 묘사와 은유는, 도리어 그녀의 처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그녀는 의미의 망 - 단어들을 중첩시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건 속에 밀어넣어 사건을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 마저도 꿈과 현실 사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그녀의 작법은 시적이며 함축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답답하고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얼굴의 모든 낱말은악순환..

'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아르세니예프의 생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지음), 이희원(옮김), 작가정신, 2006년 아르세니예프의 생 -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지음, 이희원 옮김/작가정신 1. ‘그래, 그랬지. 나는 지금 이 순간 늙어가고 있고, 지나간 일 따윈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밀려드는 슬픔은 왜일까’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이 소설을 6개월 동안 가슴 조이며 읽었다. 6년에 걸쳐 번역한 소설을 나는 6개월에 걸쳐 읽으며, 한 장 한 장마다 러시아의 차가운 서정(敍情)을 느꼈고 거친 대지의 순수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한 영혼이 어떻게 서글픔에 잠긴 채 과거를 되새길 수 있는가를 보았다. 나는 목격자이며, 방관자였고, 공범이 되었다. 지금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지나쳐 버린 세월에 대해, 무채색으로 흐려져만 ..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 지음, 김충식 옮김, 예지각, 1989년 초판.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만 유독 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그런 경험이 계속 쌓여져갈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쌓여져갈 때, 그것을 ‘운명’ 탓으로,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이제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면 그 뿐이다. 헛된 희망을 꾸지 말고 그저 원래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으며 되는 일이란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면 그 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운명’와 ‘팔자’를 다스리고 있다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경배를 시작하면 된다. 점쟁이 집에 자주 가고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안..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지음), 정영목(지음), 해냄 소설을 읽다 끔찍한 기분이 들어, 읽기를 멈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그 끔찍한 기분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 놀라운 소설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위대한 서사가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과 영혼, 그 밑바닥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존엄성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내가 그 동안 읽었던 그 어느 소설보다 위대했고, 고통스러웠으며, 인간이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이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들 중의 하나다.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네오북) * 아래는 주제 사라마구의 단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