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17

어떤 아침 풍경

봄 바람이 차가웠다. 대기는 맑았다. 하늘은 높았다. 하얀 구름을 시샘하듯 파란 배경 위로 햇살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내 마음은 알몸인 듯 추웠고 쓸쓸했으며, 비에 젖은 스폰지마냥 몸은 무겁고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출근길은 길고 지루했으며 해야할 일들의 목록을 사랑의 주문을 외듯 되새기며 걸었다. 걷다가 살짝 삐져나온 보도블럭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그렇게 넘어져 다쳐 응급실에 실려가는 걸 잠시 상상하다가, 말았다. 불길한 상상은 현실이 되고 행복한 상상은 언제나 상상으로만 머물었다. 그랬다. 마치 우리 젊은 날들을 슬프게 수놓았던 사랑의 흔적들처럼. 마치 공부하는 학생처럼 두꺼운 책 한 두권을 들고 다닌다. 오늘 들고 나온 책에 인용되었던 문장은 아래와 같았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산기슭 카페의 봄, 바람

바람은 산기슭 카페를 지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기어이 봄날을 불러들이고 부드러운 햇살 아래로 길고양이가 구석진 곳에서 나와 양지 바른 곳에 앉는다. 그러나 이 풍경은 우리 인간사와는 너무 무관해서 나는 심하게 부끄럽고 우울하고 슬프다. 어제가 영화로웠고 오늘은 수치스러운 분노로 내일은 어둡기만 하다. 이 봄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중산책

종일 비가 왔다. 예전 남부 독일에서 맞았던 그 비를 닮은, 차갑고 무겁고 바람 섞인 겨울비가 내렸다. 펼친 우산이 바람에 흔들렸고 머리카락 끝과 안경과 옷소매, 그리고 바지와 신발이 젖었다. 그 비 위로 음악이 이어졌다, 끊겼다. 바다는 높았고 북에서 남으로 쉼없이 흘렀다. 저 흐름은 어쩌면 달의 부름에 바다가 응한 것일까. 나도 한 때, 누군가의 부름을 한없이 기다리곤 했는데, 딱 오늘 같은 날이었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

가을을 준비하는 어느 일요일, 그리고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은 높고 파랗다. 이번 여름은 사무실과 집만 오갔다. 그 사이 한일갈등은 극에 다달았고, 언젠가는 이런 국면이 펼쳐지리라 예상되었으니, 우리의 일상은 평온하면서 현대적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로 지쳐만 갔다. 그 스트레스 속으로 한일갈등은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기대하는 기능의 절반 이하로 언론의 참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일갈등도 그러한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서는 채 20%도 되지 않을 듯 싶다. 저 정도의 호들갑이라니. 박근혜 정권 때 저렇게 해주었으면 나라가 지금보단 훨씬 더 나아져 있었을 것이다. 이번 사태의 시작은 지난 정권에서의 잘못된 외교 관계와 여러 협약 때문이다. 아베 정권의 극우적 태도는 이미 다 ..

어느 일요일

봄, 바람은 사무실 안으로도, 내 마음으로도, 그대 가슴으로도 밀려들지 않는다. 늘, 그렇듯, 우리에게 싱그러운 바람은 비켜나간다. 그렇게 청춘은 지나갔고 노년은 음울한 기운을 풍기며 낮게 깔려 들어와 자리잡는다.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무심결에 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젊은 시절 상상했지만, 마치 SF 영화와 같다는 걸 나이 들어서야 안다. 이런 비-일치는 우리 생애 전반을 물들이고도 모자라, 이 도시를, 이 나라를, 이 지구를 물들인다. 그래서 엘레야의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고 말한 것일까. 그 때 그녀의 손가락 끝을 잘 살펴볼 걸,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일요일 오후, 몇 시간 일을 하고 난 다음, 남은 일을 체크하..

로르까와 함께 5월 어느 오후

조심스럽게, 상냥한 오월의 바람이 녹색 이파리 끝에 닿자, 이미 무성해진 아카시아 잎들이 놀라며, 스치는 바람에게 지금 칠월이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반팔 차림의 행인은 영 어색하고 고민스러운 땀을 연신 손등으로 닦아내며, 건조한 거리를 배회하고, 길가의 주점은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며, 다가올 어지러운 마음의 밤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이야기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5월 어느 날, 그 누구도 듣지 않고 말만 했다. 말하는 위안이 지구를 뒤덮었다. 아스팔트 아래 아카시아 나무 뿌리가 바람에 이야기를 건네었지만, 땅 위와 아래는 서로 교통이 금지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을 모더니티로 담론화시켰다. (이제서야 로르카의 시가 읽히다니... 1996년도에 산 시집인데..) 연 가 내 입맞..

봄 하늘 아래 워크샵

일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일까? 지난 주 주간 업무를 리뷰하면서, 팀 업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였다. 즉 일이 많다는 건 좋지 않다. 그만큼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할 수 있다는 의욕이나 열정과, 실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거리는 상당하기 때문이다.그리고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내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회사는 그 사이 직원 수가 늘어 이제 관광버스를 타고 움직일 수준이 되었다. 회사의 이런 성장 앞에서 내 모습은 그대로이니,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봄 하늘은 너무 좋았다. 그 하늘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에 간 곳은 문경 자연휴양림이었다. 꽤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진 찍기가 겁난다. 이제 내 나이도 제법 되었으니, 저 귀에 낀 이어폰..

벨라 바르톡의 일요일 아침

지난 일요일 오전에 적다가 ... 이런저런 일상들로 인해 이제서야 정리해 올리는 글. 어제(토요일) 읽다가 펼쳐놓은 책, 정확하게 378페이지를 가리키고 있다. 그 페이지의 한 구절은 이렇다. '여러 의사결정에 집단의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것에도 집단적인 거리낌이 있다. 조직들은 지난 일에 대한 평가와 반성을 회피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제프리 페퍼Jeffrery Pfeffer의 1992년도 저서, Managing with Power: Politics and Influence in Organizations를 번역한 이 책의 제목은 '권력의 경영', 내가 이번 주 내내 들고 있는 책이다. 어제 내려 놓은 이디오피아 모카하라 드립커피는 식은 채 책상 한 모서리에 위치..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