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14

산기슭 카페의 봄, 바람

바람은 산기슭 카페를 지나며 자신을 기억해 달라며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기어이 봄날을 불러들이고 부드러운 햇살 아래로 길고양이가 구석진 곳에서 나와 양지 바른 곳에 앉는다. 그러나 이 풍경은 우리 인간사와는 너무 무관해서 나는 심하게 부끄럽고 우울하고 슬프다. 어제가 영화로웠고 오늘은 수치스러운 분노로 내일은 어둡기만 하다. 이 봄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봄 날을 가로지르는 어떤 기적을 기다리며

시간이 흐른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나이가 들고 상처 입고 죽는다. 이유없음은 저 실존주의자들의 가장 강력한 테마였지만, 그 무목적성 앞에서 그들도 무릎 꿇었다. 내던져진 존재.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치열하게 부딪히며. 봄이 왔지만, 내 마음 속으로 봄은 깃들지 못한다. 봄꽃 날리는 거리를 걸었으나, 그 때의 봄이 아니다. 하긴 나에게 봄이 있었던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하지만 우리 삶은 기계론적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다. 이 생은 저 감당하기 힘든 우연성으로 포장된 어떤 것이니, 내가 기댈 곳은 어떤 기적 뿐. 그 기적 아래에서 싹트는 고백과 반성

이런 봄날이었을까

이런 봄날이었을까, 가벼운 흰 빛으로 둘러싸인 꽃가루가 거리마다 마을마다 흩날리던. 내가 앙드레 드 리쇼의 을 읽고 아파했던 날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지금도 있으려나, 그래서 봄이면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금기). 그리고 그 환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으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까막눈이었다(지금도 그런 듯). 그 때 그 시절, 나는 을 읽었다. 기묘하고 아름답고 슬펐다. 알베르 까뮈가 격찬했고 조용히 번역 출판되었다가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 소설이었다. 몇 해 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기억을 더듬을 ..

텅 비어가는 중

5월 7일. 텅 빈 대체 공휴일. 아무도 없는 사무실. 인적이 드문 골목. 몇 시간의 집중과 약간의, 불편한 스트레스. 태양은 빠르게 서쪽을 향하고 바람은 머물지 않고 그대는 소식이 없었다. 봄날은 하염없이 흐르고 내 마음은 길을 잃고 내 발길은 정처없이 집과 사무실을 오간다. 운 좋게 예상보다 많은 일을 했고 그만큼 지쳤고 어느 정도 늙었다. 몇 만 개, 혹은 몇 백만개의 세포가 소리없이 죽었고 텔로미어도 짧아졌을 것이다. 책 몇 권을 계속 들고 다녔지만, 5월 내내 읽지 못했다. 밀린 일도 많고 읽을 책도 많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대체공휴일, 조금의 일을 했고 나를 위해 와인 한 병을 샀다. 그리고 마셨다. 최근 콜드플레이를 우연히 듣고 난 다음, 아, 내가..

어느 일요일

봄, 바람은 사무실 안으로도, 내 마음으로도, 그대 가슴으로도 밀려들지 않는다. 늘, 그렇듯, 우리에게 싱그러운 바람은 비켜나간다. 그렇게 청춘은 지나갔고 노년은 음울한 기운을 풍기며 낮게 깔려 들어와 자리잡는다. 노안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무심결에 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자랑은 아니지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젊은 시절 상상했지만, 마치 SF 영화와 같다는 걸 나이 들어서야 안다. 이런 비-일치는 우리 생애 전반을 물들이고도 모자라, 이 도시를, 이 나라를, 이 지구를 물들인다. 그래서 엘레야의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정지해있다'고 말한 것일까. 그 때 그녀의 손가락 끝을 잘 살펴볼 걸, 지금에서야 후회한다. 일요일 오후, 몇 시간 일을 하고 난 다음, 남은 일을 체크하..

봄날, 그 하늘거렸던 사랑은,

날 죽이지 말아요. 난 지금 사랑에 빠졌거든요.Don't Kill Me, I'm In Love 그러게, 사랑에 빠진 이를 죽이는 건 아닌 것같다. 하지만 그것이 불륜이라면. 레이몽 라디게의 소설 가 끊임없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위험한 사랑만큼 진실해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위험한 사랑을 했듯, 젊은 날 우리는 모두 금기된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이 지나고 벚꽃이 피고 가늘기만 한, 얇은 봄바람에도 그녀의 손톱 만한 분홍 꽃이파리가 나부끼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나는 애상에 잠기지 않, 아닌 못한다. 생계의 위협이란 이런 것이다. 새장 속의 새를 아들은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새 한 마리 사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

5월 어느 오후 서울 거리

5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삼각지로 걸어가다 문득 마주친 대도시의 오후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조르주 베르나노스). 느리게 숨죽여 있던 무채색 건물이 숨을 쉬고 우리들의 숨겨진 영혼이 노래하는 순간이다. 태양이 사라지더라도 태양을 기다리지 않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꿈 속 노을가 근처에서 막걸리 중이다. 그의 삼각지에서.

흩날리는 봄날의 문장.들.

아직도 오열을 터뜨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가 아니라 오로지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퇴폐 뿐이다. ... ... 따라서 모든 강박 관념과 상반된다 할지라도 이같은 가증스러운 추함이 없이 지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조르주 바타이유 과연 그럴까? 하긴 아름다움은 오열을 터뜨리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퇴폐로 인한 상처는 오열을 불러올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니 바타이유의 말이 맞는 걸까. 그렇게 동의하는 나는 그러한 퇴폐를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일까. ... 아련한 봄날, 외부 미팅을 끝내고 잠시 걸었다. 부서지듯 반짝이는 봄 햇살 사이로 지나가는 도심 속 화물열차. 바쁜 사람들 사이로 새로운 계절이 오는 속도처럼 느리게 지나쳤다. 그 사이로 사람들과 자동..

다시 봄이 왔다

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