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68

이런 봄날이었을까

이런 봄날이었을까, 가벼운 흰 빛으로 둘러싸인 꽃가루가 거리마다 마을마다 흩날리던. 내가 앙드레 드 리쇼의 을 읽고 아파했던 날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지금도 있으려나, 그래서 봄이면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금기). 그리고 그 환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으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까막눈이었다(지금도 그런 듯). 그 때 그 시절, 나는 을 읽었다. 기묘하고 아름답고 슬펐다. 알베르 까뮈가 격찬했고 조용히 번역 출판되었다가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 소설이었다. 몇 해 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기억을 더듬을 ..

블랙홀

'어쩌면 내일이 지구의 종말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저 끝없는 우주에 어떤 생명체가 있을 지 모르고, 늘 세상은, 이 우주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곳이니, 생명체, 아니 외계인이 있고, 그 외계인이 내일 별안간 침공할 수도 있을 테니.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며, 꽤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한 번 현대물리학에 대해 공부했지만, 이 지구에서 시간과 공간이 하나라고 느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어제 블랙홀 사진을 공개되었다. 20세기 초 그 존재조차 의심스러웠는데, 어제 실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래 동영상은 블랙홀에 대한 것이다. 지구 정도의 행성이 블랙홀이 된다면 1cm 정도의 크기가 된다고 한다. 1cm 정도의 크기인데, 중력은 ..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

혼술과 커피에 대한 실존적 고찰

매일 아침 저녁, 또는 시간 날 때마다 일기를 쓴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냥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라는 말과 종교적 기원을 적는다. 오늘 하루가 어떤 일들로 구성되었는지 적지 않는다. 그걸 적으려고 보니, 너무 길어질 것같기도 하고 그럴 정신적 에너지도 남지 않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은 나이다. 앞으로 그 비율은 더 심해질 것이다. 딱히 지혜나 통찰을 가지지도 못했고, 그나마 있던 지식이나 상식도 얇게 스쳐가는 바람에 휘익 쓸려 날아가고 있는 늦겨울, 혹은 초봄이다. 낯선 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젊은 이들과 술을 마시거나 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감수성이 무뎌지거나 슬픔이 덜 하거나 쓸쓸함이나 고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외면할 뿐. 다시..

텅빈 주말의 사소한 희망

설 연휴가 지난 어느 토요일, 종일 집에 틀어박혀 두 권의 책을 다시 펼쳤다(리뷰를 쓰지 못했기에). 젤딘의 과 바라트 아난드의 . 그리고 한 권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를, 억지로 다 읽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과 를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오랜만에 트래백(trackback)을 해볼까 했더니, 네이버 블로그엔 그런 기능이 아예 없었다. 아난드는 콘텐츠의 미래는 '연결관계connection'에 있다고 했는데... 아이와 함께 노량진수산시장에 가서 전복과 산낙지를 샀다. 며칠 전부터 전복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서 주말에 간 것인데, 살아있는 낙지를 보더니, 그것도 먹고 싶다고. 결국 전복과 산낙지를 사와 집에서 산낙지부터 회로 준비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자르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거의 ..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라로슈푸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라로슈푸코(지음), 강주헌(옮김), 나무생각 원제는 『잠언과 성찰』(Reflexions ou sentences et maximes morales, 1665)이다. 니체가 매우 존경하였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라로슈푸코(Francois de La Rochefoucauld, 1613 ~ 1680)의 잠언집을 읽었다. 17세기 작가의 문장들은 쉽게 읽힌다. 몇 개의 문장들은 흥미로웠다. 적당히 염세적이고 시니컬했다. 생각하는 것보다 팬이 많아서 어느 일본인 작가는 평전을 쓰기도 했다.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기도 했다. 몇 개의 문장들을 옮긴다. - 우리의 미덕은 대개의 경우 위장된 악덕에 불과하다. - 철학은 과거의 불행과 미래의 불행을 그럴듯한 이유로 극복하라고 설..

비 내리는 날의 녹턴

이렇게 비 올 땐 쇼팽이구나. 쇼팽의 녹턴만 들으면 왜 고등학교 때 가끔 주말마다 가던 창원 도립 도서관 생각이 나는지 몰라. 노오란 색인표를 뒤져가며 책을 찾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혼자 온 나를 사이에 두고 앞서 책을 빌리던 아저씨는 무슨 책을 빌렸나 뒤에 빌린 그 소녀는 무슨 책을 빌렸나 궁금해 했지. 아무 말 없이 서서 물끄러미 창 밖을 보며 아주 잠시 내 미래를 생각했어. 그 옆을 지키던 네모난 색인표를 넣어두던 서랍장과 책들 사이로 지나는 서늘하고 무거운 공기들 사이로 계단이 이어지고 해가 살짝 기울어, 도서관 앞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할 때쯤 나들이 나선 여학생들의 깔깔거리던 소리들과 ...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도립도서관은 그대로 있을려나. 내가 타고 다니던 그 시내버스도 그대로..

리퀴드 러브,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Liquid Love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권태우, 조형준(옮김), 새물결 예전같지 않다(그런데 이 문장은 식상하면서도 낯설다. 여기서 '예전'이란 언제를 뜻하는 것인가, 정작 나 자신도 그 때를 지정할 수 없는). 나도, 이 세계도. 세상이 바우만이 바라보는 바대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변한 세상을 정확하게 바우만은 읽어내는 것일까. 이 책을 읽기 전에 이토록 절망적인 해석을 담고 있으리라곤 생각치 않았다. 적당하게 우울할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곤. 우리 시대에 아이는 무엇보다 정서적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부모가 되는 기쁨은 자기 희생의 슬픔 그리고 예견할 수 없는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과의 일괄 거래 속에서 온다. - 113쪽 그는 모든 것을 소비 사회라는 필터를 통해 ..

카프카의 드로잉. 그리고

카프카의 드로잉을 한참 찾았다. 뒤늦게 발견한 카프카의 그림. 하지만 제대로 나온 곳은 없었다. 잊고 지내던 이름, 카프카. 마음이 어수선한 봄날, 술 마실 시간도, 체력도, 여유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 한 때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사랑하던 존재들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어떤 물음표들이 나를 스치듯, 혹은 멀리 비켜 제 갈 길을 가는, 스산한 풍경이 슬라이드처럼 탁, 탁, 지나쳤다, 지나친다, 지나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오늘을, 십년 전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똑같이 내 십 년 후의 오늘을 지금 나는 상상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나를 향한 물음표가 뭉게뭉게, 저 뿌연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새벽,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 그건 변하지 않았구..

요즘, 자주, 스타벅스엘

요즘, 자주, 스타벅스엘 간다. 오늘의 커피를 시킨다. 기다린다. 5분. 3분. 2분. 1분. 커피를 받아들고 걷거나 앉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낯설다. 익숙한 풍경 속의 낯선 나. 시간이 갈수록 내가 낯설어진다. 익숙한 나는 저 멀리 있고 낯선 내가 나를 드리운 지도 몇 년이 흐른 걸까. 나는 익숙한 나를 숨기고 낯선 나로 포장한 지도, 무심히 보내는 오월 봄날처럼 둔해진 건가. 요즘, 자주, 읽지 못할 책을 펼친다. 롤랑 바르트. 그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언제였을까. 오직 바르트만이 줄 수 있는 위안. 그건 언제였던가. 누군가를 만나 바르트 이야기를 하고 바르트 이야기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바르트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신 적은 언제였던가. 바르트가 이야기한 사랑과 문학과 사진과 그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