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64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단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 수레바퀴 이후 단요(지음), 사계절, 2023년 솔직히 중간 정도까지 읽다가 그만 두었다.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에세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했다. 전체적으로 애매하고 모호했다. 대단하게 복잡한 서사나 은유가 사용된 것도 아니다. 심각하게 불길한 느낌도 아니고 일종의 문제 제기로 읽히긴 하나, 그래서, 뭘, 어떻게 라고 묻기 시작하면 애매해지는 글들이었다. 도리어 이 소설을 두고 찬사를 늘어놓는 평자나 독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토마스 만이나 로베르토 무질을 떠올렸지만, 이들의 소설은 그야말로 정말 사변적이다. 이토록 허술하지 않다. 그냥 읽었으니, 리뷰를 올린다. 또한 누군가는 이 소설 - 이걸 소설이라고 한다면 - 을 정말 재미없게 읽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어야 겠다..

계속되는 이야기, 세스 노터봄

계속되는 이야기 Het Volgende Verhaal 세스 노터봄 Cees Nooteboom (지음), 김영중(옮김), 문학동네 이것이, 내가 믿는 그것이다. 육체적 죽음의 거친 고통이 아니라, 존재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는 데 필요한 신비로운 정신적 행위에 비할 데 없는 고통이다. 그 고통은 쉽게 찾아온단다. 알겠니, 아들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공허함, 그것은 어지러워하는 개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공허함이다. 내가 그 낯선 침대에서 느꼈던 것도 공허함이다. (13쪽) 사랑이야기지만, 사랑에 대해선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단어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히 사랑이야기다. 동시에 불륜이야기다. 동료 교사 유부녀와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한참 어린 제자에 대한 사랑이야기다..

저 사람은 알렉스, 욘 포세

저 사람은 알렉스 Det er Ales 욘 포세Jon Fosse(지음) 정민영(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시간은 겹쳐지고 각기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대화를 하며 사라진다. 어슬레의 실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하여 그 공간 속으로 어슬레의 고조할머니가 등장하면서 약간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욘 포세 만의 흥미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마치 한 무대의 한 쪽 편에서 현재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다가 그 무대의 불이 서서히 꺼지면서 다른 편 무대에 불이 환히 들어오면서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되듯 소설의 문장도 그렇게 이어진다. 지극히 연극적이거나 영화적인 수법이다. 이렇듯 현대의 장르는 서로 다른 장르들에게 영향을 주며 각 장르들의 표현 방식을 풍성하..

그 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그 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지음), 이재룡(옮김), 열린책들 세상에 참 많은 작가들이 있다. 무수한 작품들이 있고 그 작품 하나하나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놀랍고 안타깝기만 하다. 나이가 들어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글로 번역된 걸 읽다가 영어 원문으로 읽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란 신비롭고 예술의 끝은 없다. 일년에 읽고 볼 수 있는 작품의 개수는 한정적이다. 소설가 장강명이 어느 글에선가 1년에 백사십여권을 읽었다고 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권씩 읽은 것인데, 대단하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 정도의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소설가나 시인은 책을 잘 읽지 않거나 문학 작품에만 편중된 독서를 하기 일쑤다. 실은 작품 ..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단수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홍은주(옮김), 문학동네 다 읽고 보니,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건 무려 이십년만이다. 가 나온 지도 벌써 이십년이 지났다. 일 년에도 여러 차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을 읽거나 보게 되지만, 정작 그의 소설을 읽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년에 읽는 소설은 채 열 권도 되지 않고 심지어 서재에는 읽으려고 사둔 소설만 수십권이 될 터니. 우연히 도서관 서가를 지나치다 이 소설 를 보게 되어 빌려 읽었다. 예상한 대로의 하루키 소설이었다. 늘 기대하는 모습 그대로 이 소설집에서도 하루키는 가볍고 경쾌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는 너무 진지했다고 할까. 하루키가 어딘가 진지해지면, 그 순간 모든 그의 매력은 반감되고 깔끔하던 그의 작법은 도리어 어설퍼진다. 그 이..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클라라와 태양 Klara and The Sun 가즈오 이시구로(지음), 홍한별(옮김), 민음사 클라라는 조시를 위해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 돕는다. 클라라에게 햇빛이 자양분이듯, 햇빛을 향해 조시를 낫게 해달라고 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노력한다. 실은 이것도 일종의 프로그래밍일 텐데, 이것을 풀어내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관찰과 학습을 통해 클라라는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며 자신만의 성찰로 조시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봐, 네가 아주 똑똑한 에이에프일지 몰라도 네가 모르는 게 많아. 너는 조시 쪽 이야기만 들으니 전체 그림을 못 본다고. 조시는 엄마만 가지고 그러는 것도 아냐. 항상 날 함정에 빠뜨리려고 해." (212쪽) 하지만 한계는..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미셸 포르트(지음), 신유진(옮김), 1984북스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더듬어 보니 그녀의 소설은 딱 한 권 읽었다. 더 있을 듯한데, 기록된 것은 뿐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내 평가도 평범해서 금세 잊혀진 소설이었다. 그 당시 읽었던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나 미셸 투르니에와 비교한다면 정말 재미없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소설은 아니 에르노에게 있어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린 작품이었음을 이 인터뷰집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에요. 글은 하나의 장소이죠. 비물질적인 장소. 제가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방식이에요. 다른 곳에 ..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지음), 송은경(옮김), 민음사 '위대한 집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숙고해 보지 못한 어떤 총체적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145쪽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왜 스티븐스의 집사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연신 재미있어하며 읽고 있었다. 실은 대부분 의미 없는 에피소드들이다. 스티븐스이 캔턴 양을 찾으러 가는 동안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스티븐스과 캔턴 양과의 관계로 집중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에 익숙한 독자는 이 관계에 호기심을 가지며 읽지만, 켄턴 양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지음), 김용재(옮김), 봄날의책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몇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신한테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동물원에 가보면 짐승들은 더욱 짐승다웠어, 긴 몸통을 지닌 기린의 고독은 슬픈 걸리버의 고독과 유사했고, 동물 묘지의 묘석에서는 푸들 강아지가 괴로워서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어. 콜리제우 극장의 야외 통로 냄새가 나는 동물원은 노처녀 체육 선생 같은 타조와, 엄지발가락 건막류로 절뚝거리는 펭귄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코카투 같은 이상한 새들로 가득 찬 새장 같았지. 게으르고 비대한 하마가 수조에서 느릿느릿 움직였고, 코브라는 부드러운 나선형 똥 무더기처..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 오에 겐자부로(지음), 송태욱(옮김), 뮤진트리 어쩌다 보니 언제나 옆에 두고 읽는 작가들은 정해져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다. 십수년 전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을 때부터 읽기 시작해, 지금도 오에의 소설이나 수필집을 읽는다. 일본의 사소설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되, 일본의 민담이나 전설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면서 나아가 세계적인 소재나 주제까지도 이야기하며 소설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일본 내에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실은 오에 겐자부로가 왜 정치적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정부 인사처럼 보일 듯 싶다. 가끔 일본 지식인 사회가 일본 정치나 경제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