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64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을 막는 제방 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마르그리트 뒤라스(지음), 윤진(옮김), 민음사 이십 대 때 자주 읽었던 소설가들, 파드릭 모디아노, 마르그리트 뒤라스, 르 클레지오, ... 압도적으로 프랑스 문학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많이 읽었던 건 아니고 한 권만 읽어도 그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허우적 되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냉정을 유지해야 하지만, 독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때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읽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고, 읽었던 소설마저 이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읽었던 소설까지 다시 읽어야할 시기인가. 이 소설이 프랑스 문단에 준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프랑스(제국)의 식민지에 건너간 프랑스인 가족의 밑바닥 삶을 적나라하게 보..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에두아르트 뫼리케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에두아르트 뫼리케(지음), 윤도중(옮김), 문학과지성사 두 편의 짧은 소설이 담긴 이 책은, 순전히 모차르트가 들어간 제목 때문이었다.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일까. 놀랍도록 감동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는 예술가 소설의 전형과도 같다고 할까. 이 소설은 추천한 만하다. 찬사를 받을 만하다. 여기에 반해 는 동화 이야기에 가깝고(역자는 '동화'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다채로움이나 전개방식도 흥미롭지만, 나에겐 가 더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 모차르트의 형상화 때문일 게다. 천재 예술가 모차르트를 어떻게 표현해내는가라는 측면에서 뫼리케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오래된 소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좋을 듯 싶..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지음), 원용호(옮김), 민음사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은 바 있지만,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즉물적이고 무미건조하며 딱딱하고 폐쇄적이었다. 실은 한트케의 소설이 가진 작품성이 바로 이러한 즉물성이 될 것이다. 골키퍼는 수동적이며 반사적이다. 골키퍼는 먼저 움직이기 어렵다. 날아오는 공에 대해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매사에 반사적으로 움직인다면, ... 주인공 블로흐는 이런 인물이다. 그는 대화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만, 교감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수렁에 밀어 넣는다. 딱히 이유도 없다. 이러한 고립감, 단절감, 폐쇄적으로 향해 가는 자신 주변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없다. 그냥 보..

죽음의 병, 마르그리트 뒤라스

죽음의 병 La Maladie de la Mort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지음), 조재룡(옮김), 난다 당신이 말한다: 사랑하기 (7쪽) 당신은 여자에게 낱말들을 반복해보라고 부탁한다. 여자는 그렇게 한다, 낱말들을 반복한다: 죽음의 병 (27쪽)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음의 병에 걸려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병 앞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오늘 밤에서 내일 밤으로 그 병을 유예시키고 있다. 이 짧고 강렬한 소설은 예상 밖으로 깊은 여운을 남기며 무수한 생각과 질문을 던진다. 만남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의 몸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만나고 헤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날 밤까지 당신은 두 눈에 보는 것에, 두 손이 만지는 것..

아무도 아닌, 황정은

아무도 아닌 황정은, 문학동네, 2016년 읽으면서 참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 세상은 소설가 황정은이 그리는 세상보다 더 끔찍하지 않은가. 언젠가 김서령의 소설집을 이야기하면서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다 죽는다며 불평을 했다. 황정은의 이 소설집이 그런 식은 아니지만, 김서령의 소설들보다 더 끔찍하고 어둡다는 기분이 드는 건 황정은 특유의 문장 때문이리라(아니면 저 변하지 않는 세상 때문일지도). 무미건조하고 애정이 없는 문체(문장), 툭툭 던지듯이 서술되지만, 그 밑으로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숨어 흘러간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오래된 지하수처럼 무겁고 차가우며 얼음장 같은 냉기와 함께 순간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그 안타까운 간절함마저 이야기 속에서 얼어 독자의 발 앞에 떨어진..

타타르인의 사막,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 Il deserti dei Tartari 디노 부차티Dino Buzzati(지음), 한리나(옮김), 문학동네 "저야 알 도리가 없지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으리란 건 다들 압니다. 하지만 사령관이신 대령님이 배운 카드점에 따르면, 아직까지 타타르인들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옛 부대에서 잔류한 타타르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고 말이지요." (69쪽) 사막 너머 타타르인들이 살고 있으며, 언젠가 우리를 침략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고 지키고 있는 이 요새는 그 예정된 전쟁을 막기 위한 최전선이다. 그 곳에 새로 부임한 신참 장교 조반니 드로고도 결국 그 전쟁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 요새를 지키다가 떠나간 많은 군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날..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한유주(지음), 워크룸프레스 언제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아직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재형은 집에 들어가기 전 - 몸을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 춥다고 생각할 것이고, 느낄 것이고, 심연을 자유자재로 건너뛰는 고양이들의 식사를 챙겨줄 더 좋은 방법을 떠올릴 것이다. 눈이 내리기 때문인지, 혹은 용감하게 페이지를 벗어나고, 또 다시 들어오는 존재들 때문인지, 경비원은, 혹은 경비워들은, 가스 점검원은, 택배기사는, 행인들은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안다. 3층의 그는 불투명을 되찾은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쓸어내린다.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해, 지킬 수 없더라도 지켜야 한다. (79쪽) 이 짧은 소설은 스틸 사진, 혹은 ..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유제프 차프스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지음), 류재화(옮김), 밤의책 프루스트에 관한 이 에세이는 1940~1941년 겨울 그랴조베츠 포로수용소에서, 우리가 식당으로 쓰던 어느 수도원의 차가운 방에서 구술된 것이다. (9쪽) 프루스트를 읽다만 사람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동경이자, 길 떠나기 전의 휴식이다. 이 달콤한 휴식으로 나는 먼 길의 여정에 쉽게 오를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는 너무 긴 분량 탓에 손을 대지 못했고, 손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것같아 주저거렸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불과 십여년 전부터이지, 그 전, 지금보다 한창 젊을 때는, 제대로 된 번역서도 없었고 그 번역서를 막상 꺼내 읽어보면 재미도 없었다. 실은 번역이 제대로..

자비 A Mercy, 토니 모리슨

자비 A Mercy 토니 모리슨(지음), 송은주(옮김), 문학동네, 2014년 토니 모리슨의 2008년도 소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는 건 수십년만이다. 고등학교 때 읽은 (Beloved)는 흐릿하기만 하다. 방황하던 십대 시절, 사랑을 알고 싶어 읽었지만, 그 때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몰라도 힘겹게 끝까지 읽었고 슬프고 아련한 기분에 빠졌다, 아니면 그 시절 전체가 슬프고 아련했을 련지도. 왜 그녀는 이 소설에 라는 제목을 붙였을까. 성당 미사 때 읖조리던 '자비'라는 단어와 겹치는 건 플로렌스에게 글을 가르쳐준 신부님 때문일까. 하지만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위선적인 카톨릭 신자로 인해, 그리고 그 이후의 침례교도들을 보면 이 소설이 딱히 교회에 우..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지음), 강방화(옮김), 소미미디어, 2021 이불에서 팔만 꺼내 시계를 얼굴 가까이 대어 보니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환갑 기념으로 아내 세쓰코와 딸 요코가 센다이에서 사다 준 세이코 손목시계였다. (154쪽) 최근 소설가 유미리의 근작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마치 사라진 듯, 한국의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헌책으론 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타까웠다. 재일한국인 여류 소설가. 아쿠타가와상 수상 때부터 갖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가. 재일한국인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중간자적 존재를 무기 삼아 싸우던 소설가. 그녀의 소설들은 어느 순간 번역되지 않았고 그녀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