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39

O Do Not Love Too Long 오 너무 오래 사랑하지 마라, W.B. 예이츠

태풍이 지나가자 더위가 이어졌다. 화요일, 공휴일, 광복절, 출근을 했다. 후문이 잠겨 있었다, 정문이 잠겨 있었다, 쉬는 날엔 지하 주차장만 열린다는 걸 잊었다. 출근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업무로 신경이 곧두선 상태라 집에서 일을 하기 참, 어려웠다. 사무실 노트북 전원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소셜 미디어를 둘러보다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를 우연히 본다, 읽는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한 언어는 다른 지역의 언어와 겹치면서 퍼져나간다. 각 나라말은 절대 일대일로 옮겨지는 법이 없다. 하나의 시가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질 땐 여러 개의 시들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영어로 된 시를 읽을 땐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 꾸러미로 연결된다.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

환희의 인간,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L’homme joie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지음), 이주현(옮김), 1984북스 (…)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168쪽)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어쩌면 이 문장만으로 몇몇은 이 책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도록 시적이며 감미롭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어지는 이 책은 잃어버린 자연과 신비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노래한다.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테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처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

시를 쓴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

시를 쓴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지음), 조영렬(옮김), 고유서가 아주 오래 전에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집을 읽었다.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첫 번째 시집에서 우주와 나를 노래하는 시를 읽으며, 이 정도가 되려면 타고 나야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집을 읽으며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인이 된 건 우연에 가까웠다. 하지만 시인이 아닌 그를 상상하기 어렵기도 하다. 짧은 인터뷰집이지만, 유쾌하고 시와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한때 내 꿈도 시인이었으니. 서가 어딘가에 습작하던 시절의 시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오래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살게 되리라고 젊은 시절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저도 뭔가를 쓰려고 할 때는 가능한 한 제 자신을 텅 비우려고 합니다. 텅 비우..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영주,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32 낭만적인 자리 그는 소파에 앉아 있다. 길고 아름다운 다리를 접고 있다. 나는 가만히 본다. 나는 서 있고. 이곳은 지하인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그는 지하가 되었다. 어두우면 따뜻하게 느껴진다. 어둠이 동그란 형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것을 깨려면 서야 한다. 나는 귀퉁이에 서 있다. 형태를 만져 볼 수 있을까. 나는 공기 중에 서 있다. 동그란 귓속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나는 어지럽게 서 있다. 지하를 지탱하는 힘.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다리를 자꾸만 부순다. 앉아서, 일어날 수가 없잖아. 다리에서 돌이 빠져나온다. 우리는 10년 만에 만났지. 그는 걷다가 돌아왔다. 걸어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이 곳은 ..

나의 사유 재산, 메리 루플

나의 사유 재산 My Private Property 메리 루플Mary Ruefle(지음), 박현주(옮김), 카라칼 그래서 경찰들이 내게 달리 할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러다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들은 그 말에 만족한 듯 보였다. 경찰들도 참, 그들은 모두 젊다. (15쪽) 결국 나(자아)를 알거나 너(타자, 외부, 세계)를 알게 될 뿐, 나와 너를 동시에 알고 받아들이진 못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도서관 2층 카페 의자에 앉아 살짝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찰들이 모두 젊어서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더 들었다면 만족하지 못했을 ..

밤엔 더 용감하지,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Braver at night 앤 섹스턴Anne Sexton(지음), 정은귀(옮김), 민음사 앤 섹스턴 시집을 읽었다.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버티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미워하지만 사랑했고 죽고 싶었지만 동시에 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기 내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1960년대 미국 여류 시인이 무엇과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할까. 더블 이미지 Double Image (...) 너를 기쁨이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가 너를 조이스라 이름 지은 걸 나는 기억해 강보에 푹 싸인 채 축축하고 이상하게, 너는 내 무거운 가슴에 어색한 손님처럼 왔어. 나는 네가 필요했어. 나는 남자애를 원하지 않았어. 여자아이만을, 이미 사랑받고 있는, ..

내가 사랑한 것들은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김경민(지음), 포르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을 그만 두고 아이를 키우며 글을 쓰는 이의 시선집이다. 아마 자신에게 인상깊었던, 그래서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시들을 모아, 시마다 짧은 에세이를 붙여 만든 책이다. 시를 읽고 싶은 이들에게, 그러나 시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이 책은 참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 된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으면 두 세 번 읽어도 된다. 이런 책은 참 부담없다. 아무렇게 읽어도 된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더 좋다. 나는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술 한 잔을 마시고 난 다음 이 책을 꺼내 읽었다. 좋았다. 요즘 시인이 누가 있는지, 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해 이 책을 읽었는데,..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윌리스 파울리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Rimbaud and Jim Morrison: The Rebel as Poet 월리스 파울리 Wallace Fowlie(지음), 이양준(옮김), 민미디어, 2001년 듀크대학의 불문학 교수인 윌리스 파울리는 랭보를 사랑했던 짐 모리슨을 기억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 락스타라는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파리에서 시인을 꿈꾸었던 짐 모리슨을, 자신이 평생을 읽고 연구했던 프랑스의 시인 랭보와 비교하면서. 그래서 이 책은 랭보 소개서라기 보다는 짐 모리슨에 더 시선이 가지만, 나에게 더 재미있었던 부분은 파울리 교수가 랭보의 시편에 대해 설명하던 챕터였다. 솔직히 그 동안 랭보에 대한 많은 글들-한글로 된-을 읽었으나, 윌리스 파울리 교수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랭보가 가장 흥미진진했다..

여행, 페터 오토 코체비츠

오래된 노트를 뒤적이다가 메모해둔 시가 있어 옮겨 놓는다. 어디에서 옮겨 적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노트에는 시만 옮겨져 있다. 여행 코체비츠 나는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 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향해 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여행하였다.나는 그 기차를 타고 울므로 향해 여행하였다. 이제 나는 울므에 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리고 코체비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았다. 한국어로 된 자료도 영어로 된 자료도 없었다. 페터 오토 코체비트(Peter O. Chotjewitz,1934 ~ 2010). 독일의 작가이자 변호사..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사 놓은 지 한참 만에 이 책을 읽는다.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뭐랄까. 자신의 삶에, 일상에, 지금/여기에 대한 만족과 찬사, 행복과 신비에 대한 온화하고 밝고 서정적인 서술들과 표현들로 가득한 이 책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이런 책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결국 읽기는 했으나,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깊이 이 책에 빨려들지 못했다. 매혹당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달리, 나에겐 그저 좋은 산문집이었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산문집은 기싱의 이나 보르헤르트의 같은, 세계와 자..